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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제 14 장 연세대학교 6·3운동

제 14 장 연세대학교 6·3운동 1. 햇불을 올리다 1964년 3월 24일 오후 신촌골 독수리가 거센 날갯짓으로 대일굴욕외교 반대운동의 햇불을올렸다. 이날 연세대학교에서는 총학생회(회장. 안성혁 행정 4)가 주최하고 학내 서클인 한국문제연구회가 주관한 시국강연회가 오후 2시부터 대강당에서 열렸다. 당대 최고의 지사로 꼽히던 장준하 씨와 함석헌 옹이 초청돼 먼저 장준하 씨가 한·일회담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이어 함석헌 옹이 역사의식에서 본 한·일회담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펴 학생들의 열띤 호응을 얻고 있었다. 강연이 진행되고 있는데 갑자기 총학생회장 안성혁이 단상의 함 옹에게 양해를 얻고 마이크를 인계받았다. 안성혁은 지금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가 대일굴욕외교 반대시위를 벌이기로 했다면서 연세..

63학생운동사 2024.02.26

제3부, 제 13 장 숭실대학교 6·3운동

제 13 장 숭실대학교 6·3운동 1. 6·3 데모 이전의 운동 1964년 6월 3일, 전국의 대학생들은 “정부의 대일굴욕외교 반대”로 시작히여 “박정희군사독재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강력한 반정부데모를 벌여 이른바 6·3 계엄사태를 야기하였다. 6·3 학생운동의 시원은 3·24데모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4년 3월 24일, 서울문리대·고려대·연세대생 수천 명은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데모를 시작하였다. 다음날 3월 25일 숭실대학의 데모에 돌입했다. 이날 데모는 학생회장 강우석(철학과 4년), 학생회 부회장 현홍광(농촌사회학과 3년), 대의원회 부의장 유영렬(사학과 3년) 등 학생회와 대의원회간부들이 주도하였다. 강당에서 굴욕외교 성토대회를 마친 500여 명의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학교(상도..

63학생운동사 2024.02.26

제3부, 제 12 장 숙명여자대학교 6·3운동

제 12 장 숙명여자대학교 6·3운동 1. 정치적 상황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한국정치는 다소 안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기만적 ‘민정 이양으로 집권한 박정희군사정권은 정치, 경제 등의 측면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키고자 일련의 회담을 전개하였는데, 이 당시 정부의 자세가 너무나도 굴욕적이어서 국내 정치인뿐만 아니라 양식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우려와 비탄을 금치 못하였다. 대학생들도 정부의 저자세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명하기 시작하였다. 1964년초부터 소규모로 학생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같은해 3월 한국학생총연합회가 결성되면서 한·일굴욕외교 반대시위가 거국적이며 조직적으로 전개되었고 3·24데모와 6·3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정부는 ..

63학생운동사 2024.02.25

제3부, 제 11 장 성균관대학교 6·3운동

제 11 장 성균관대학교 6·3운동 1. 개 요 1964년 봄은 유난히도 길고 가슴 설레이며 분주했다. 신입생들의 싱싱하고 환한 웃음 속에서 진로를 고민하던 상급생들의 우수에 찬 가슴도 조금은 위안을 얻는 계절이다. 그것은 대학의 낭만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땅의 민주헌정은 중단을 거듭하면서 4,9혁명의 깃발이 채 나부끼기도 전에 5,16군사쿠데타에 의해 하강식도 없이 송두리째 뽑혀지고 말았다. 그들은 ‘원상복귀’라는 스스로 내세웠던 대국민 의k속을 팽개치고 군복을신사복으로 갈아입는 절차만으로 이승만에 이어 장기 군사독재집권의 대장정에 올랐다. 사실 6·3 운동은 이미 이때부터 출발하고 있었다. 성대는 1963년 5월 초부터 약 1개월 간 재단분규문제로 군사정권과 투쟁했던 실전경험이 축적되어 있었다 ..

63학생운동사 2024.02.25

제3부, 제 10 장 서울대학교 6·3운동

제 9 장 서울대학교 6·3운동 1. 1964년의 한·일굴욕회담 반대투쟁 1) 최초의 한·일회담 반대시위 : 3·24시위 1963년 말 출범한 제3 공화국은 대내적으로 권력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 한편 대외적으로 미국과의 공조하에 그동안 지체되어온 한·일회담을 조속히 타결할 것을 목표로 64년에 들어서면서 발빠르게 움직였다. 한편 군정이 끝난 후 상대적으로 느슨해진 상황에서 민족주의비교연구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 서울대 학생들은 박정희정권에 대한 항의와 반대를 은밀히 도모하였다. 1963년 겨울방학을 박정희정권 반대의지로 불태운 학생들은 1964년 들어 박정희정권이 굴욕적 한 · 일회담을 강행하려 하자 이에 정면으로 맞서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친 최초의 전면적 학생시위가 바로 3·24시위였다. 서울..

63학생운동사 2024.02.25

제3부, 제 9 장 서강대학교 6·3운동

제 9 장 서강대학교 6·3운동 서강대학은 1960년 4월 18일 4,19혁명이 일어나기 전날 개교하였다. 카톨릭 예수회의 교육봉사정신과 한국의 민주적 교육이념에 의거한 지도혐 양성할 목적으로 6개학과 160명을 선발하여 출범하였다. 개교 때부터 서강대학은 소수정예의 교육을 내세우고 학사행정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특히 출결석과 성적처리에 있어서는 그 엄격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학생들은 개교한 지 2개월이 지난 1960년 6월부터 학생회의 구성을 논의하였으나 1962년 5월에 이르러서야 제 1 회 학생회장 선거를 치를 수 있었다. 학생회 명칭도 ‘서강대학 재건학생회’였다. 당시 학생회의 활동은 체육대회, 신입생환영회 등의 교내 행사에 치중되었고 대외적인 교류는 많지 않았다. 이에 제 1..

63학생운동사 2024.02.21

제3부, 제 8 장 명지대학교 6·3운동

제 8 장 명지대학교 6·3운동 “한·일회담굴욕타결반대”를 부르짖는 전국 대학, 중고등학생들의 데모에 호응하여 1964년 3월 26일 본 대학 1천여 명의 학생들도 데모에 침여하였다. 이날 정오 별관 4층에서 ‘대일굴욕외교 반대 성토대회’를 벌인 학생들은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한 후 만세삼창으로 대회를 마치고 곧바로 태극기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데모에 들어갔다 “현 정부는 국민의 의사를 한·일회담에 반영하라”, “평화션을 사수하고 일본의 간계에 속지 마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거쳐 국회의사당 앞에 온 학생들은 먼저 애국가‘를 봉창하고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결의문 낭독과 만세삼창을 한 후 다시 광화문 거리를 지나서 중앙청 앞까지 밀고 갔으나, 경찰의 제지로 양정고등학생 등 약 5천 명의 학생과 같..

63학생운동사 2024.02.21

제3부, 제 6 장 동국대학교 6·3운동

제 6 장 동국대학교 6·3운동 1. 제대교우회와 동대 투쟁위원회 결성 4,19혁명에 이어 귀중한 학우의 목숨을 민족의 제단에 바친 동국대의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은 특유의 학교 기질과 전통, 그리고 막강한 조직력의 총화로 이루어진 동국사상 가장 격렬했던 학생운동이었다. 이승만독재에 항거, ‘피의 항쟁' 을 불사했던 동대정신이 굴욕적인 대일외교에도 분연히 궐기케 한 원동력이었고 그 결과 전 대학에서 유일하게 희생자를 내는 처절한 투쟁기록을 남겼다. 64년과 65년 동국대에 휘몰아친 학생운동은 ‘제대교우회’ 결성과 함께 본막이 올랐다. 한·일회담이 학생운동의 최대 정점으로 떠오르자 4,19의 유혈시위와 군복무 경험을 갖춘 복학생들이 적극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이들이 동국대학생운동의 대세를 장악해나갔기..

63학생운동사 2024.02.20

제3부, 제 5 장 단국대학교 6·3운동

제 5 장 단국대학교 6·3운동 이 땅에 민주주의를 꽃피우고자 불의와 독재에 항거하여 이룩한 4 ,19혁명이 혁명의 꽃을 채 피우기도 전에 이 땅의 못난 정치인과 무능한 위정자들의 실정으로 결국은 5,16군사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하여 역사의 수레바퀴를 한없이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였다. 그러나 4,19혁명 정신을 계승한 6·3 학생운동은 군사독재에 항거하여 꾸준히 투쟁하여온 학생들이 한·일외교에 있어서 굴욕적인 저자세를 보인 군사정권에 항거하여 다시는 외세로부터의 치욕적인 역사의 아폼을 맛보지 않기 위해 분연히일어선 투쟁이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최초로 설립된 사학인 단국대학은 당시 총학생회장 최윤관(상4)과 총학생회부회장 송준강(경제4)이 주축이 되어 서울대(송철원), 연세대(안성혁), 고려대(구자..

63학생운동사 2024.02.17

제3부, 제 4 장 국민대학교 6·3운동

제 4 장 국민대학교 6·3운동 1. 민주화 투쟁의 싹이 트다 국민대학교는 1946년 해공 신익희 선생의 ‘위교이가 사필귀정’(薦校以家 事必歸正)이라는 교훈 아래 종로구 창성동에 창학된 해방 후 최초의 사립대학이다. 1964년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 소리가 전국적으로 메아리치며 전국의 대학생들이 민주화 요구와 독재 타도를 요구하는 시점에서 국민대학은 청와대와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인하여 학생회 간부들과 주요 학생들이 미행 및 회유로 인하여 늘 감시를 딩하고 있었다. 특히 재단 이사장(김성곤)이 공화당 재정위원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많은 제재속에서 활동하기가 힘이 들었다 또한 국민대학 유아교육학과 부설유치원에서 박지만(박대통령의 아들)이 취학하고 있었으므로 경호실 경호원, 종로경찰서 경..

63학생운동사 2024.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