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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제3장 6·3세대의 시대적 사명

제3장 6·3세대의 시대적 사명 우리는 지금 역사적 전환기에 서 있다. 국제적으로는 냉전이 종식되고 새로운 세계질서가 모색되고 있으며, 국내적으로는 30여 년 간 지속되어온 군부독재 권위주의 지배가 종식되고 새로운 정치질서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전환기를 배경으로 하여 새로 출범한 정부는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청와대 개방과 안가의 폐쇄로 시작된 개혁은 고위공직자 재산공개와 비리 국회의원의 숙정사태로 이어지면서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획득하였다. 특히 정치적 차원의 개혁은 정치관계법이 통과됨으로써 일단 제도화의 문턱을 넘어섰다. 그러나 개혁에 대한 사전준비의 부족으로 인해 문민정부도 또 국민의 정부도 출범 직후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시행착오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개혁에 대한 국민적 요..

카테고리 없음 2024.02.29

제4부, 6·3학생운동의 의의와 6·3세대의 의무. 제1장 6·3학생운동의 성격과 의의

제1장 6·3학생운동의 성격과 의의 1964년 6·3 데모를 정점으로 하여 연인원 350만 명이 침여하여 1년 6개월여 이상 전개된 6·3 학생운동은 학생뿐만 아니라, 야당과 각계의 지식인, 그리고 일반 국민대중이 침여한 범국민적 항쟁이었지만 운동의 주체는 학생들이었다. 6·3 학생운동은 3명이 운동과정에서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하며 격렬하게 전개되었는데,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도 매우 강경하여 1차례의 계엄령과 1차례의 위수령이 발동되었고,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이 구속, 제적되었으며, 수십 명의 교수들이 강제 퇴직당하였다. 6·3 학생운동은 박정희 군부세력이 쿠데타로 집권하여 1963년 기만적인 ‘민정이양을 통해 제 3공화국을 출범시킨지 6개월이 채 되지 않은 1964년 3월에 시작되었다...

63학생운동사 2024.02.28

제3부, 제 2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 각 대학연합체운동

제 2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 각 대학연합체운동 1. ‘한·일협정 비준반대 각 대학연합체’(한비연) 결성경위 1965년 6월 22일 일본에서 한·일협정이 정조인되자 각 대학에 조기방학 조치가 취해졌고 고등학교마저 임시 휴교령이 내려졌다. 그동안 한·일협정 반대를 위해 단식투쟁을 해온 서울법대생들은 한·일협정이 조인되자 200시간 단식기록을 남기고 일단 해산했다. 연이어 한·일협정 정조인을 규탄하는 데모와 단식이 6월 23일 이화여대, 6월 24일 연세대를 필두로 하여 경희대, 성균관대, 서강대, 숙대, 수도사대, 경기대, 덕성여대로 이어지며 투쟁이 계속되었다. 한편 이화여대 지휘부 진민자(총회장), 신춘자(법대회장, 현재 이름 신인령), 차명희(법과학회장)는 단식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새로운 ..

63학생운동사 2024.02.27

제3부, 제 21 장 1964년 학생연합조직운동

제 21 장 1964년 학생연합조직운동 1. 한·얼굴욕회담반대학생총연합회 한·일굴욕회담반대학생총연합회는 각 대학의 한·일굴욕회담반대투쟁위원회의 위원장 및 투쟁위 소속 학생들이 연합한 조직이다. 이 조직은 5·20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철저히 사전준비로 치르고, 회장인 김중태 등 굴욕투위연합소속 주요 멤버들이 수배, 구속됨으로써 사실상 활동이 중지되었다. 5·20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 각 대학 연합으로 치러지게 된 것은 서울대의 대일굴욕회담반대투쟁위원회와 동국대의 투쟁위원회가 연석회의를 통한 논의에서 한·일회담 반대데모를 연합으로 할 것을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동국대의 제대교우회 사무실에서 2차례의 회합을 갖고 사전논의를 하였으나, 동국대가 사립대학이었기 때문에 박정권이 폐교조치 등의 강경책..

63학생운동사 2024.02.27

제3부, 제 20 장 한양대학교 6·3운동

제 20 장 한양대학교 6·3운동 1. 6·3 거사 이전의 데모 1964년 3월 24일 ~ 5월 31일까지 한·일회담을 추진하고 있는 정부의 평화선, 청구권, 어로협정 등의 만족스럽지 못한 외교자세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리고 한‘때는 매번 6천 명 이상의 학생이 10여 차례에 걸쳐 노천극장에 집결 총궐기하고 때론 가두로 나가 청와대까지 진출하여 박정권을 규탄해 왔다. 결의문 우리 한양대의 순수한 지성은 현시대 조국이 정치적 위기에 봉착하였음을 절감하고 조국의 젊은이로서 국민 앞에서 구국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의하여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한다. 우리는 한민족드로서의 민족적 의식에서, • 민족감정이 허용하지 않는 굴욕적인 한 · 일외교를 결사반대한다. • 평화선 양보는 매국적 행위라고 규정한다...

63학생운동사 2024.02.27

제3부, 제 19 장 한국외국대학교 6·3운동

제 19 장 한국외국대학교 6·3운동 1. 64년의 한·일회담 반대투쟁 서울 이문동에 위치한 한국외국어대학교는 외국어 교육을 위한 전문대학교로 출발하여 한국의 외교역량 강화에 막중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우리 사회 각 분야에 인재를 배출하여 국제화에 앞장서는 등 사회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외국어대학교는 중앙정보부와 인근해 있었던 관계로 정부의 직접적인 관찰대상이었으며 그로 인해 학생운동에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외국어대학교는 1964년에 접어들어 굴욕적인 한·일회담이 재개되자 개학과 동시에 곧바로 굴욕외교 저지를 위한 학생운동 조직을 결성하였다. 외국어대학교는 64년 3월 2일 굴욕한·일회담 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날 결성된 굴욕한·일회담 반대투쟁위원회의 위원장은 당시 학생..

63학생운동사 2024.02.27

제3부, 제 18 장 중앙대학교 6·3운동

제 18장 중앙대학교 6·3운동 1. 3·24데모 우여콕절 끝에 민정(民政)이양이 이루어져 박정희정부가 들어서자 현안 중인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이에 학생회는 대일국교 저자세 외교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일본정부는 36년 간 한국민족에게 끼친 죄과를 진심으로 사과하고 재일교포 북송과 정경분리정책을 시정하지 않는 한 국교를 정상화할 대상 국가가 되지 못하며, 따라서 정부는 망국적 졸속외교를 중단하여야 하고 특히 ‘평화선’은 한국의 국방과 수산업의 보호를 위해 사수하여야 한다" 1964년 3월 24 일, 중대생은 정오를 기해 전교생이 교정에 모였다. 학생회가 주관한 이 성토대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의문이 채택되었고, 평화적인 시위에 나..

63학생운동사 2024.02.27

제3부, 제 17 장 제주대학교 6·3운동

제 17 장 제주대학교 6·3운동 1965년 3월 당시 제주대학은 2개의 학부로 분리되어 법문학부는 제주시에, 이농학부는 서귀포에 있었다. 제주대 학생들을 다 합쳐봐야 600명 정도였고, 그것도 제주시와 서귀포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므로 제주시의 법문학부학생은 300명 정도였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법학과 4학년인 서경림에게 법학과 3학년 학생들이 찾아왔다. 저녁 9시경, 교정에서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데모를 할 예정인데, 서경림에게 사회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서경림의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계획에 침여할 수는 없었지만, 교정에서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의사표시를 한다는 것은 정당하게 보였고, 또 이러한 의로운 일을 하는 후배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서경림은 쾌히 승낙했다. 법학과 3학년 고태현..

63학생운동사 2024.02.27

제3부, 제 16 장 전남대학교 6·3운동

제 16 장 전남대학교 6·3운동 1. 1964년의 학생운동 ‘5,16군사쿠데타’로 움츠러들었던 학생운동이 다시금 기세를 되찾은 것은 한·일간의 민족적 감정을 자극한 한·일회담의 진전이었다. 한·일간의 국교재개를 위한 교업은 한국전쟁 기간 중이었던 1951년부터 시작하였다. 1951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여 미국의 점령지가 되었던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통해서 국권을 회복하면서이다. 일본은 다음 단계로 우리나라와의 과거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국가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대화를 제안하였고, 우리나라도 그에 응하여 한·일회담이 열리게 된 것이다. 양국간의 주된 의제는 ‘기본관계’문제,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 및 처우문제, 어업 및 선박문제, 문화재 반환문제 등이었다. 그러나 한·일회담은 ‘5..

63학생운동사 2024.02.27

제3부, 제 15 장 이화여자대학교 6·3운동

제 15 장 이화여자대학교 6·3운동 1. 분단 후 최초의 이대 학생운동 이화여대의 6·3 운동은 1965년 들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1965년은 이대 학생운동의 원년이 된다. 일제하의 이화는 민족해방투쟁에 앞장서기도 했으나, 분단 후의 이화는 4,19 등 한국 근현대사의 정치적 고비고비에서 거의 침묵해오다가 6·3 운동으로 비로소 그 모습을 눈부시게 일신하였다. 1964년 경비정 마련을 위한 모금운동으로 단결의 힘을 인식한 이대는 1965년 6월 전체 이화인이 참가한 대규모 집회를 가졌으며, 경찰과 대치하여 농성을 벌였고, 최초로 최루탄이 발사되고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학생회 임원을 중심으로 많은 학생이 참석한 단식투쟁을 벌였을 뿐 아니라 학생회 전부가 구속되거나 수배되었다. 1965년 ..

63학생운동사 2024.0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