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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제 4 장 국민대학교 6·3운동

제 4 장 국민대학교 6·3운동 1. 민주화 투쟁의 싹이 트다 국민대학교는 1946년 해공 신익희 선생의 ‘위교이가 사필귀정’(薦校以家 事必歸正)이라는 교훈 아래 종로구 창성동에 창학된 해방 후 최초의 사립대학이다. 1964년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 소리가 전국적으로 메아리치며 전국의 대학생들이 민주화 요구와 독재 타도를 요구하는 시점에서 국민대학은 청와대와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인하여 학생회 간부들과 주요 학생들이 미행 및 회유로 인하여 늘 감시를 딩하고 있었다. 특히 재단 이사장(김성곤)이 공화당 재정위원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많은 제재속에서 활동하기가 힘이 들었다 또한 국민대학 유아교육학과 부설유치원에서 박지만(박대통령의 아들)이 취학하고 있었으므로 경호실 경호원, 종로경찰서 경..

63학생운동사 2024.02.17

제3부, 제 3 장 고려대학교 6·3운동

·제 3 장 고려대학교 6·3운동 1. 서설 - 전통과 기질, 학풍과 정서 자유를 위하여 물결치는 가슴이여, 정의를 위하여 굳게 잡은 신념이여, 마음의 고향. 자유·정의 진리의 전당이 있다. 독립조국 새 고대의 새 교가는 안암동 고대인의 가슴에 갚이 스며 있다. 그러나 불의나 민족적 울분 앞에서는 구교가가 더 우렁차게 울려넘친다. “젊은 가슴 숨은 생명 힘 넘쳐 뛰노라, 이 힘이여 이 생명을 펼 곳이 어디냐, 눌린 자를 쳐들기에 굽은 것 펴기에 쓰리로다, 부리로다, 이 힘과 이 생명 ” 민족고대는 독립구국의 교육이념으로 이용익 선생이 학문을 여셨고 삼일독립 정신으로 손병희 선생이 이를 이었으며 왜정의 갖은 탄압 속에서 슬기롭게 민족교육을 지켜온 인촌 김성수 선생이 텃밭을 걸고 기름지게 가꿔왔다. 신입생은..

63학생운동사 2024.02.16

제3부, 제 2 장 경희대학교 6·3운동

제 2 장 경희대학교 6·3운동 사자의 기상으후 웅대한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씨여 있고 바위틈과 우거진 숲 사이로 샘물이 흐르고 철마다 찾아드는 산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뛰노는 다람쥐들이 어우러져 있는 고황산 기슭,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에 천혜의 명당, 학문 의 전당인 경희대학교는 위치하고 있다. 조영식 총장님을 비롯해 우병구, 심태식, 전원배, 김주수, 김찬규, 서정범, 조병화 교수님 등 훌륭한 교수들의 헌신적인 지도와 학교재단의 적극적인 교육열의로 면학분위기를 조성해온 경희대는 전국고교생을 대상으로 학력경시대회를 통하여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장학생으로 선발하여 인재 양성에 적극 노력해왔다 학생회의 활동이나 학회 및 서클활동도 각 서클별로 지도교수를 모시고 학생회관이나 일반교실 또는 노천극장, 잔디밭,..

63학생운동사 2024.02.13

제3부, 대학별 6 . 3학생운동의 설상, 제1장 건국대학교

제 1장 전국대학교 6.3운동 건국대학교는 장안동에 위치해 있으나{현 모진동) 낙원동 캠퍼스에서 많은 학생들이 학업은 물론 각종 세미나를 하고 있었다. 6 .25전쟁을 치르면서 때를 놓치거나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던 사회 각 분야에 종사하는 청 · 장년 또는 노년의 민초 4천여 명이 모여 만학의 꿈을 안고 공부를 하는 건국대학교 낙원동 캠퍼스는 만학당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일과 후 학교를 다녀야 하는 어려운 실정에 놓여 있는 바 시국에 대한 불평불만이 있어도 공식적으로 표현키 어려웠고 행동으로 표현할 수 조차 없었던 실정이었다. 1963년 6월 대구대학t현 영남대) 주최 세계모의평화회의(분단국가의 평화통일)에 참석하여 박원규가 특상을 탔지만(34개 대학 참석) 토론내용이 반공법에 저촉된..

63학생운동사 2024.02.12

제2부, 제 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7)

제 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 7. 위수령 발동 이후의 전개상황 1) 무장군인 학원난입과 학원방위단 결성 위수령 발동 전후 발생한 첫번째 사건은 연대와 고대의 무장군인 난입사건이었다. 26일 오후 2시 15분경 6대의 군 트럭과 스리쿼터에 분승한 200여 명의 무장군인들이 연대 정문에 몰려와 그중 50여 명이 학교 구내로 몰려들어가교 150di 명은 교문 근처에서 최루탄을 터뜨리며 구경하던 시민과 학생들을 연행했다. M1 소총에 대검을 꽂고 학교 구내에 들어간 50여 명의 무장군인들은 교실과 교정에 있던 학생들이 뒷산으로 달아나자 학교에서 물러났다. 연대에 이어 고대에도 무장군인이 난입했다. 고대생 1천여 명은 위수령 발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26일 2시 반쯤에 교문을 뛰쳐나와 안암동로터리..

63학생운동사 2024.02.12

제2부, 제 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6)

제 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 6. 사회 각계의 한 · 일협정 비준반대운동 64년부터 65년에 걸친 학생들의 끈질긴 회담 반대투쟁은 국회비준이라는 마지막 일정을 앞두고 지식인들의 직접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까지 발전했다. 6월 26일 이대 교수단은 23일 이대생 시위 때의 경찰의 과잉 진압행위를 정부에 엄중하게 항의했는데 25일 오후 1시에 중강당에서 300여 명의 교수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체 교수회의를 열고, 6월 23일 시위 당시 경찰의 행위를 ‘무자비하고 비인도적인 행위’로 규탄하는 대정부 항의문을 채택했다. 교수들은 이 항의문을 26일 오전 10시 정일권 국무총리 및 양찬우 내무장관에게 전달했다. 26일 오후에는 연대 교수단도 항의성명을 냈는데, 연대 교수단은 21, 22일 학생시위..

63학생운동사 2024.02.10

제2부, 제 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5)

제 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 5. 재개된 한·일협정 반대투쟁과 위수령 발동 정치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8월 17 일 서울법대 학생회가 한·일협정 비준무효화 선언식과 다음날 18일 한·일협정 비준무효화 결의대회를 가진 데 이어 정치방학이 끝나자 경희대를 필두로 경기대, 부산 동아대, 서울농대 등이 대대적인시위에 돌입했다. 경희대는 8월 20일 오전 10시 10분경 약 1천여 명의 학생들이 교시탑 앞에서 한·일협정 비준무효화 성토대회를 열었다. 11시 35분 경 2천여 명으로 늘어난 학생들은 ‘비준무효화 공식, 날치기+일당국회 =0’, ‘일당국회 즉시 해산하고 국민에게 신임을 물어라’ 등의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데모에 돌입하여 회기동 앞길에 이르러 100여 명의 기동경찰과 충돌했다. 경기대..

63학생운동사 2024.02.10

제2부, 제 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4)

제 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 4. 각 대학 휴교조치와 한·일협정 정조인 무효화투쟁 한·일협정 반대투쟁은 휴교조치가 취해지고 협정안이 정조인된 후에도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6월 23일 이대, 숙대 등 여자대학과 성균관대, 서강대, 서라벌예대, 가톨릭의대, 경북대생들이 한·일협정 조인무효화와 협정 비준을 반대하는 성토대회와 시위를 벌였다. 이날 숙대생들은 갈월동 굴다리 앞에서 경찰에 의해 저지되자 노상 연좌시위를 하였다. 이대생 1,500여 명은 학교 당국의 돌연한 1일 휴교조처에 반발하여 낮 12시 15분경 ‘국회는 한 · 일협정 비준을 거부하라' 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데모를 벌였다. 이날 경찰의 강력한 저지에 의해 50여 명이 부상당하고 10여 명이 최루탄에 숨이 막혀 졸도하는 사태까지..

63학생운동사 2024.02.10

제2부, 제 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3)

제 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 3. 6월 단식투쟁과 한·일협정 정조인 5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은 존슨 미대통령과 제2차 회담을 갖고 한·미 현안 문제에 대해 한·미 양국이 계속 긴밀히 협조하며, 미국은 가조인된 한·일협정을 환영, 찬성한다는 요지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한·일회담에 대한 미국의 노골적인 개입과 함께 불평등한 한·미행정협정 교섭의 진전은 당시 학생들이 시위에서 자주 반미 구호를 외치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6월 12일 서울법대생 200여 명은 5월의 학원 내 투쟁으로부터 방향을 전환하여 ‘투쟁목표는 대외적인 것임’을 재확인하고 이때까지의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 주장에 “한·미행협 체결에 있어서 호혜평등을 관철하라”는 주장을 보댔다. 그리고 학생들은 ‘분쇄하자 매춘외교 타도하..

63학생운동사 2024.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