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학생운동사

제3부, 제 6 장 동국대학교 6·3운동

63동지회 2024. 2. 20. 18:08

제 6 장 동국대학교 6·3운동

      1. 제대교우회와 동대 투쟁위원회 결성

      4,19혁명에 이어 귀중한 학우의 목숨을 민족의 제단에 바친 동국대의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은 특유의 학교 기질과 전통,  그리고 막강한 조직력의 총화로 이루어진 동국사상 가장 격렬했던 학생운동이었다. 이승만독재에 항거,  ‘피의 항쟁' 을 불사했던 동대정신이 굴욕적인 대일외교에도 분연히 궐기케 한 원동력이었고 그 결과 전 대학에서 유일하게 희생자를 내는 처절한 투쟁기록을 남겼다.
      64년과  65년 동국대에 휘몰아친 학생운동은 ‘제대교우회’ 결성과 함께 본막이 올랐다.  한·일회담이 학생운동의 최대 정점으로 떠오르자  4,19의 유혈시위와 군복무 경험을 갖춘 복학생들이 적극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이들이 동국대학생운동의 대세를 장악해나갔기 때문이다.
      투철한 애국관과 남다른 의협심을 가진  1천여 복학생들의 친목단체로 출발한 제대교우회는 64년 새학기 들어 강력한 학내세력으로 떠올랐다.  리더인 장장순(법4)은 총학생회장에 입후보하려다 외부세력의 조직적 빙해로 대신에 김실(농경4)을 밀어 당선시킨 바 있는 총학생회의 실질적 맏형이기도 했다.  이런 배경 아래  64년  3월 초순경 장장순,  박동인(법4),  박희부{법4, 총학생회 변론부장),  정규완(경제4,  총학생회장 입후보),  정기용(정외4, 정치학회장),  김정회{경제4, 경제학연구실 회장),  탁연복{법 4),  김선홍{법4, 법대 학생회장),  오일님t법4),  김경남(정외 3,  65년 제대교우회장),  유창일(경영 3,  65년 체육부장) 등 제대복학생들이 묵정동 탁연복의 하숙집에 모여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면서
제대교우회 조직은 학생운동을 위한 투쟁체로 정비돼 나갔다.
      3월  20일 제대교우회는 도서관 건물  2층 구석방에서 현판식과 함께  ‘대일굴욕외교반대 학원자유수호 동국대학투쟁위원회’ 발족식을  가지고 장장순 제대교우회 회장을 총괄지휘자로 추대했다.  그리고 박동인은 서울대를 비롯한 각 대학
투쟁위원회와 연합을 담당했는데 박동인은 후에 한 · 일회담반대투쟁위원회 초대 위원장까지 맡게 된다.  제대교우회 부회장 정기용은 전국 총학생회장단으로 구성된 한학련과의 연계임무를 책임지기로 했다.  탁연복은 제 2투쟁위원장 내정자로서 경희대를 비롯한 타교와의 연락책을 맡았다.
      홍보물과 플래카드 등 시위용품 준비책임은 여운응(법4)이 맡았으며, 웅변실력이 탁월한 박희부는 모든 행사의 총괄과 총학생회의 조종기능을 맡았다.  김경남과 어성우(정외4)는 모든 행사 운영을, 오일남은 학내외 섭외를,  김성임t정외 4)은 홍보 책임을 각각 담당했다.  제대교우회와 투쟁위원회의 총무 겸 간사로서 안살림을 도맡아 담당한 사람은 김정화였고,  같은 경제과 4학년 백웅기·황만중·김대원,  후일 6·3 동지회장을 지낸 이원범(법 4),  최병환{국4) 등도 제대교우회 핵심 멤버였다.
      원래 동국대는 타교에 비해 학내에 드센 세력이 많은데다 체육부 등에서 투쟁을 반대하려는 움직임도 없지 않았다.  이를 방어하기 위한 경무담당은 강철석(경제4)이 맡았으며  유창일은 시위 지휘를 맡았다.  그리고 제대교우회 상임위원장 정규완은 성토 및 집회·시위에 소요되는 제반비용을 막후에서 조달하고 동지들에게 큰 힘을 북돋워주었다.
      한편 현실비판적인 행동파 재학생들 중에서는 법정대  2학년생 권석충(정외),  이석기,  서수일,  김선관(이상 법과),  최영봐경찰행정과) 등이 굴욕회담의 추이를 관망하며 당시의 사태에 대하여 불만과 울분의 감정을 수시로 토로하면서 잦은 회동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  3월  25일  오전 11시 3천여 명이 중강당에 모인 가운데 총학생회가 주최한 집회가 열렸다.  총학생회 총무부장 조재호(불4)의 사회로 진행된 이 집회는 김실의 선언문,  박희부의 결의문,  정기용의 대정부 호소문 낭독 순으로 진
행돼  12시경 마무리됐다.  이때부터 데모대열이 형성돼  “매국적 외교사절을 즉시 소환하라”,  “굴욕적 한·일회담을 결사 반대한다”라는 구호와 함께 가두데모가 이루어졌다.  데모대는 퇴계로를 지나 을지로 입구를 거쳐 남대문 시경까지 가는 동안 연도에 늘어선 수만의 시민들로부터 박수와 환호를 받았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타대생들과 합류, 오후  2시경 청와대 입구까지 진출했다.  이튿날인  3월  26일에는 제대교우회가 선봉에 나서 한·일회담 반대 성토대회를 개최했는데 전날의 대규모 시위로 대다수 학우들이 지쳐 있음을 김안,  가두시위는 자제하고  12시경 해산했다.
      양일간의 집회·시위에 참가한 재학생 행동파들은 4월 10일 가칭  ‘한·일굴욕 회담반대 동국대학교투쟁위원회’를 결성할 것을 결의하고 구체적인 행동의 표시로서  4월 18일에  ‘한·일굴욕외교 반대 성토대회’ 및 시위를 결행키로 다짐했다.
이들은 각자 책임을 분담하여 권석충·최영보는 당일 동원을, 서수일·김선관은 플래카드 등 시위 준비물을,  이석기는 격문 및 선언문 등을 담당하기로 했다.
      4월  18일  10시  30분 이들은 학교 게시판에 격문을 붙였다.  그러나 성토대회 돌입 직전에 학생과 직원 및 총학생회의 강경한 저지에 봉착,  격렬한 육탄전을 벌이던 중 제대교우회 박동인으로부터  “4월 21 일 함석헌 옹과 장준하 선생을 초청하여 시국강연을 들은 후 시위를 계획하고 있으니 투쟁위원회를 조직하여 같이 투쟁하자”는 권유를 받고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이하 투위) 결성에 합류,  1세대 투쟁위원회의 뒤를 이을 차세대 비선(秘爛 그룹으로 활동하게 된다.
      4월 19일 총학생회 주최로 4,19 영혼추도식이 조용하게 치러진 가운데  4월  21일이 다가왔다.  12시 10분경 장준하 선생과 함석헌 옹이 도착했다. 장장순·정규완·정기용·탁연복은 연사들을 총장실로 모시고 들어가 조명기 총장에게 중강당을사용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학교측이 이를 거절하자 제대교우회 집행부는 중강당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김경남의 사회로 강연을 시작하였다 . 중강당엔 학생들이 초만원을 이루었다.
      오후  3시 30분경 강연이 끝나자 장장순은 폐회사를 통하여  “우리는 오늘의 강연을 평온히 끝마치려 했으나 지금 교문 입구에 경찰들이 막아 서 있다.  경찰은 왜 학생을 불신하고 학원 내의 평화로운 질서를 위협하는가”라고 외쳤다.  이에 권석충,  최영보, , 이석기,  서수일,  이진탁(정1) 등은  ‘한·일회담 반대’라는 머리띠를 두르고 플래카드를 앞세웠고,  이석기가 단상에 뛰어올라가 데모돌입을 선언하자 최영보가  ‘위국쇄신’이라고 쓴 혈서를 펴들고 선두에 나섰다.
      장장순을 필두로 정규완,  박희부,  박동인,  탁연복,  김정화,  이원범,  김경남  유창일의 지휘하에 데모대가 스크럼을 짜고 을지로  4가 쪽으로 진출하려 하자 수 십 발의 최루탄이 터지고 무자비한 곤봉세례가 퍼부어졌다.  이때 데모현장에 달려온  조명기 총장과 학생처장은  “학생들은 이성을 회복하라.  여러분의 뜻은 반영됐다”고 말하고 학교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최루탄 속에 연행되는학우들을 본 학생들은 대열을 재정비하여 을지로  5가로 우회하여 종로  3가까지 진출했다. 허 퉁지퉁 달려온 경찰이 종로 3가 네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때마침 전차가 데모대열 중간에 있었고 장장순과 박동인,  김정화가 유창일에게 무언가 귓속말을 주자, 유창일은 비호같이 전차에 올라탔다.  전차의 시동이걸리자 데모대는 함성과 함께 전차를 밀며 돌진했다.  그때 ‘탕,  탕,  탕’ 하는 소리와 더불어 우박처럼 쏟아지는 최루탄을 피할 틈도 없이 학생들은 머리와 등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경찰들은 넘어진 학생들과 쫓기는 학생들을 곤봉으로 무차별 가격,  김선관 등 3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3·24데모 이후 최대의 유혈을 보게 된 이날 데모의 결과는 부상자 28명,  연행자  74명이었다.  이날 밤 연행자 중 장장순·최영보·김선홍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및 폭력행위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혐의로 경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기각당했다.


      2.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과 6.3데모

      동국대  4·21 데모 이후 각 대학 데모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제대교우회 회장 장장순은 무엇인가 돌파구를 찾아내어 일격에 공화당정부를 강타하고 전국적 투쟁을 불러일으켜야만 효과적으로 한·일회담을 저지할 수 있다고 고심하던 중  4월  28일 오전 투위를 소집했다.  이날 회의에서는 좀더 효과적인 투쟁성과를 위해서는 각 대학 연합전선을 형성해야 하며, 그  1 차 대상을 서울문리대로 결정하기로 했다.  그후 박동인은 서울문리대 민비연을 찾아 김중태·현승일·김도현을 만나 연합체구성에 합의하고 향후 투쟁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협의하였다.

1964 년 4월 21일 종로 5가에서 있었던 동국대 학생들의 데모

 


      5월 3일 서울문리대 김중태·박재일·최혜성·송철원이 동국대 제대교우회실을 방문했다.  회의는 오후  2시부터 시작됐다.  서울문리대측은 공동투쟁방안으로 사이비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5월 16일 동국대학교 교정에서 거행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동대측은 거사일이 축제기간과 중복되고 학교가 사립대인 점을 고려하여  5월 20일 서울문리대 교정에서 집행할 것을 주장,  동국대 안이 받아들여졌다.

1964년 5월 20일 한·일굴욕회담 반대 학생총연합회 주관하에 각 대학생들은 서울운리대에서 민족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을 거행하고, 민족적 민주주의의 관을 들고 장지인 망우리로 항해 행진하고 있다.

 

 

      또 기타 대학의 확대 침여를 위하여 경희대와 건국대는 동대가 맡고 성균관대는 서울문리대가 연결하기로 했다.  당일 사용할 유인물과 장례비품은 운반의 어려움이 있어 서울문리대측이 책임을 지고 당일 인력동원과 대회 주관은 동국대학측이 수행하기로 했다.
      5월  6일 오후 2시 제대교우회 사무실에는 동국대학교 투위 전원이 참석히는 확대회의가 개최됐다.  장장순이 서울문리대와 합의된 사항을 설명했고 이어서  5월  20일 거사의 구체적인 계획이 협의됐다.  서울문리대가 유인물을 압수당했을
경우를 대비하여 유인물까지도 따로 준비하기로 했다.  이날 조직된 거사팀은 대회장 장장순,  사회 김경남,  선언문 낭독 박동인,  제주 탁연복·이원범·권석충·이석기,  운영 오일남,  총무 김정화,  경무 강철석,  홍보 김성암,  자금 정규완,  유인물 여운응·이석기·서수일 등 이었다.

      대회일인  5월  20일 제대교우회 사무실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박동인·김경남·박희부는 모든 준비물과 진행계획을 일일이 점검했고,  여운응·서수일·이석기는 유인물 가방을 들고  11시경 서울문리대로 먼저 출발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12시경 대회장으로 향했다.
      12시  30분 서울문라대에 도착한 탁연복·권석충·이석기·이원범은 문리대생의 안내를 받아 민비연 사무실에서 검은 관과 두건,  죽장을 인계받고 대회장에  입장했다.  대회장에는  ‘축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는 만장이 높이 세워져 바람에 휘날리고 교정에는 1,500여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웅성거리던 대회장은 두건과 죽장을 하고 검은 관을 맨 상주들이 입장하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고,  사진기자들의 카메라 소리만 요란했다.
      1시  30분 김경남의 사회로 대회가 시작됐다.  대회장인 동대 장장순의 대회사가 울려퍼졌다.  곧이어 등단한 동대 박동인은  “민족사는 바야흐로 위대한 결단을 요구하는 전환기에 서 있다.  5월의 군부쿠데타는 4 월의 민족민주이념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며 노골적인 대중탄압의 시작이었다.  우리의 지성과 양심은 민족양심에 역행하는 어떠한 기만도 왜곡된 논리에도 증오와 거부를 계속할 것을 선언한다”라고 선언문을 낭독하자 군중은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건국대 민승의 결의문 낭독에 이어 서울문리대 송철원이 구슬픈 음성으로 조사를 낭독하자 분위기는 더욱 숙연해졌다.  그러나 송철원이 미처 단상을 내려오기도 전에 동국대 이진탁이 단상 위로 뛰어올라 피를 토하는 듯한 음성으로  “이 민족을 일본 왜구에게 팔아 넘기려는 공화당정부를 우리는 이렇게 지켜볼 수만은 없다.  우리의 이웃과 후손을 위하여 우리는 기꺼이 목숨을 바쳐 투쟁해야 한다”고 선동하자 장내의 분위기는 흥분하기 시작했고,  상주들은 “어이,  어이” 하고 곡을하였다.  탁연복·권석충·이원범·김영목은 교문 쪽으로 운구했으며,  이진탁으로부터 마이크를 이어받은 김경남은 준비한 구호문을 계속해 선창하였다.
      “현 정부는 실정을 자책하고 제 2의 이완용을 국외로 추방하라"
      “우리는 매국적 한·일회담을 결사 반대한다"
      김경남의 구호소리와 경희대 이재우의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아이고,  아이고” 하는 만가가 조화를 맞추어 울려퍼지며 국장을 방불케 하는 장례행렬이 교문을 빠져나갔다.  서울미대 입구 사거리엔  500여 명의 경찰기동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전부 마치겠습니다”라는 장장순의 폐회선언과 동시에  “와---’ 하 는 함성을 터뜨리며 관을 맨 권석충과 탁연복,  이원범은 단숨에 이화동 네거리로 돌격하여 경찰기동대와 정면 충돌했다.  순식간에 경찰기동대와 데모대는 한 덩어리가 되어 몸싸움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이원범이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한 채 연행됐고 권석충과 어성우도 즉석에서 무술경관에 체포됐다.
      장장순·박동인·김경남·김정화·탁연복·박희부 등은 서울문리대 담을 넘어 동국대로 되돌아갔다.  제대교우회 사무실에 도착하자 형사들이 학교에 들어왔다는 소문을 듣고 일단 해산하기로 했다.  박동인은 옥상으로 피신했다가 중부서 공작반장 박처원에게 체포당하고 장장순과 김정화는 마침 쓰레기차를 발견, 청소부의 옷을 빌려 입고 청소차를 타고 무사히 학교를 빠져나갔다.  김경남·박희부·탁연복은 남산으로 도주히여 잡히지 않았다.
      종로경찰서에 연행된 권석충과 어성우는 밤샘조사를 받았으나 영장이 떨어지지 않았고 중부서로 연행된 박동인과 이원범은 구속수감됐다.  경찰은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의 핵심 주동자인 동국대학 장장순,  서울문리대 김중태·김도현·현승일 등이 끝내 잡히지 않자  5월  23일  1만 원의 현상금을 걸고 전국에 지명 수배했다.
      한편  5월  20일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 각 대학 총학생회 간부가 아닌 투쟁위원들에 의하여 거사되자 전국  32개 대학 총학생회도 일제히 난국타개학생궐기대회를 각 대학별로 개최키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동국대에서도  5월  25 일 11시  40분경 중강당에서 총학생회가 주최하는 학생궐기대회가 열렸다.  정기용의 사회로 열린 궐기대회는 변론부장 박희부의 선언문 낭독과 김선홍의 결의문,  조재호의 호소문 낭독드로 마무리됐다.  이 대회 전날 저녁 각 대학 회장단이 쓴 선언문문 구절 중  “친진보 반보수" 부분이 국시에 위배되어 한때 총학생회장 김실과 정기용을 비롯한 각 대학 학생회장들이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끝내 상기 문구를 선언문에서 삭제하는 조건으로 풀려나기도 했다.
      5월이 지나면서 각 대학의 투쟁이 더욱 극렬해 졌다.  지방대학과 고등학교까지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뛰어나왔다.  한·일회담 반대구호도 나날이 달라져 정권타도로 방향을 바꾸었다.  초여름의 빗방울이 한여름 장마비처럼 주룩주룩 쏟아지는  6월  2일 동국대 캠퍼스의 스피커에서는  “한·일회담 반대”와 “박정희정권 하야”를 외치는 김경남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오고 도서관 처마 밑에서  800여 명의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권석충·이석기·서수일·김선관· 장정헌(경영 2), . 이진탁은  ‘한·일회담 반대’라고 쓴 머리띠를 두르고 석탑 앞에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진흙탕 땅바닥에 주저앉아 계속 구호를외쳤다.
      이것을 지켜보던 학생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하여  300여 명으로 불어나자 김경남의 사회로 성토대회는 시작됐다.  박희부는 선언문을 통해  “최루탄의 폭력 앞에 좌절된 오늘 우리는 단식투쟁에 돌입한다”라고 선언했교 이어서 김선홍은  “애국시위 구속학생을 즉시 석방하라”는 등의 결의문을 낭독했다.
      오후 4시경 교수들의 권유에 의하여 단식장을 도서관 처마 밑으로 옮겼는데 단식 인원은 오후  6시가 되자 무려  40여 명으로 불어났으며  “최루탄과 군횟발에 무참히 짓블운혀버린 민족의 자존심을 우리는 되찾아야 한다”는 우렁찬 구호소리가 남산 기늙으로 울려퍼졌다.
       6월  3일 아침이 되자 교수,  교직원,  여학생들까지 단식투위를 방문하여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총회장 김실도 단식투쟁을 총학생회 공식의사로 발표했다.  오전  10시경 함석헌 옹이 단식장을 방문하여 위로하며  “한 시대의 민족적 수난을 젊은 학도들이 씨워 극복하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11시  40분경 단식투위는 성토대회를 개최하고 박희부·김정화·김경남·김성암·강석철·백웅기·최병환 등이  3천여 명을 이끌고 데모에 돌입했다.  을지로  3가 로터리 부근에서 경찰의 저지를 받아 대치하다 골목으로 우회한 유창일이 이끌던 300여 명의 데모대가 함성을 지르며 경찰기동대 후미를 치자 경찰진영이 흔들렸으며 그 순간  2천여 명의 학생들이 경찰저지선을 뚫고 을지로 1가 쪽으로돌진했다.

      한때 을지로 1가 부근에서 산발적인 최루탄 저지가 있었으나  1천여 명의 데모대가 시청광장에 집결했다.  시청광장은 일대 혼란상태였다. 차량을 탈취한 시위대가 광화문 쪽으후 달렸고 곳곳에 불을 붙인 각목이 핑굴었다.
      한때 흥분한 데모대와 시민들이 경찰무기고를 습격하려 하자 동국대학 지휘부는 300여 명의 학생들로 하여금 무기고를 에워싸게 하여 접근지들을 제지했고 저녁이 되어 경찰들에게 인계했다.  이날 밤  9시 15분 박정희 대통령은 계엄선포를 발표했다.  그동안 데모와 단식을 지휘하던 투위들은 각자 외로운 도피행각을 시작했다
      6월 3일 이후 계엄 딩국은 전국적으로 시위주동자의 검거령을 내렸고 이 검거령에 의하여 검거된 투위위원은 박동인·이원범(이상 5월 20일 검거),  박희부·김선홍·김경남·탁연복·어성우·김실·장정헌·이진탁·유창일·정기용 등이었다.  이중 정기용은  7일 만에 풀려나고 나머지 전원은 서대문교도소에 구속  수감되었다.
      경찰은  5·20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주모자로 장장순을 현상수배했으나 잡히지 않자  6월  2일 단식투쟁에 개입한 장장순의 동생 장정헌을 구속하고 중부서 공작반장 박처원은 장장순의 숙부를 불러 동생과 형을 교환할 것을 제의했다.  이 제안이 인천에 숨어 있던 장장순에게 전달되어 장장순은  6월  20일경 중부경찰서에 자수하게 됐으며 그후 장정헌은 석방됐다.  장장순을 비롯한 투위들은 전원 내란선동죄로 구속됐다.
      9월 16일 오후  8시 기나긴 감방생활이 끝나고 교도소 문이 열렸다.  장장순을 선두로 박희부·어성우·김선홍·김경남 등이 검찰의 공소취하로 친지와 학우들의 환호성 속에 휩싸여 104 일의 옥고를 씻고 석방된 것이다.  이들은 교도소 문을 나오면서  “정의가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다” 라고 외쳤다.  애석하게도 총학생회장 김실은 재판이 계류중이라 석방에서 제외됐다.  박동인은  6월 하순,  이원범·유창일은  8월 초,  탁연복·이진탁은  8월  20일 경 먼저 출감했다.

1965 년 4월 16일 동국대생들은 4·13시위 도중 진압경잘의 곤봉에 맞아 사망한 김중배 ( 농학3 ) 의 위 령제를 마치고,  ‘김중배를 누가 죽였나? 라끄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데모에 돌입하기 위해 교정을 니 서고있다

 

      3. 김중배의 죽음이 부른 4 .13데모

      6·3사태를 한가운데서 겪은 동국대의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은 해가 바뀌면서 더욱 가열됐다.  65년 새 학기가 되자 제대파들이 대거 졸업하고 박동인과 김경남만이 남아 지휘권을 비제대파 투위에 넘겼다.  여기에 선봉장은 권석충·최영보·이석기·서수일·이진탁 등의 기존세력에 위종성(응생2) ,  이철홍{법 3) ,  유중현(정 2) ,  곽남용(법2) ,  김정신(정 3), . 정성채(법3)와 불교대회장 이한성(불4) 등의 신진세력이 가세하여 막강한 투위를 결성했다.   65년  2월 18일 각 대학 대표들과 함께 탑골공원의  ‘이등박문 망령 성토대회’를 주동한 제대파 투위의 박동인·김경남은 불구속입건된 후 교내에서는 배후세력으로 존재하면서 타대학과 의 연계관계를 모색했다.
      투위는 3월 첫번째 회합을 갖고 명칭을  ‘평화선사수 동국대학투쟁위원회’라  칭하고,  3월  26일 평화선 사수 성토대회를 열어 각 대학 투위들의 겨울잠을 깨우고,  박동인과 김경남은 각 대학의 연합전선을 결성하고,  이석기·권석충·최영보·서수일 책임하에 투위조직을 최대로 확대하여,  3월 말 내지 4월 초에 대대적 시위에 돌입할 것을 합의했다.
      3월  26일  12시  15분  ‘민족의 생명선 피로써 사수하자라는 플래카드가 캠퍼스 석탑 위에 내걸렸다.  평온한 캠퍼스는 갑자기 긴장감이 감돌았고 벤치와 잔디밭에 앉았던 학생들이 석탑 앞으로 수백여 명 몰려들었다.  학생처 직원들은 플래
차드를 빼앗으려고 했고,  투위들은 이를 가로막았다.
      서수일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성토대회는 권석충의 선언문,  이석기의 결의문, 정성채의 호소문 낭독으로 분위기가 고양되었다.  이어서 우렁찬 김정신의 구호소리에  1천여 명의 학생들이 복창하는 함성은 잠자는 서울의 대학가에 기상나팔처럼 울려퍼졌다.
      4월이 가까워지자 동국대학 캠퍼스는  65년도 총학생회장 선거와 한·일회담반대투쟁으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계속됐다.  투위에서도 권석충과 최영보가 각기 출마를 선언하고 나서 반분의 위기를 맞이하게 됐다.  즉시 이석기와 서수일이
중재에 나섰고 김경남·박동인은 쌍방을 설득하느라 분주했다.  이에 권석충과 최영보는 단독회담을 열고 파인 플레이할 것을 약속하는 한편 투쟁위원회는 이철홍·이석기·서수일·이진탁에게 선거기간 동안 선봉을 맡길 것을 합의했다.
      한편 박동인·김경남은 평화선 사수 각 대학 연합시위를 모의하다  4월  6일 오후 연세대 오건환,  중앙대 고창섭,  경희대 차재규,  건국대 이웅 등과 함께 경찰에 연행됐다.
      3월 26일 성토대회 이후 투위는 긴급대책회의를 열고 시급히 제2탄을 쏘아 각 대학에 자극을 주어야 한다는데 의견일치를 보고 즉시 데모준비에 들어갔다.  플래카드와 소품은 서수일이 맡고 유인물은 이석기가 준비했으며 당일 성토대회와 데모 지휘는 이진탁과 이철홍이 맡기로 했다.
      4월  9일 정오 갑자기 캠퍼스에 징과 팽과리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서  100여 명의 농어촌 연구부 부원들이  ‘굴욕적 한·일협정을 즉시 폐기하라’는 플래카드와  ‘日本九’이라고 쓴 모조 일본배 를 앞세우고 도서관 앞으로 집결했다.  마침 캠
퍼스에 는 점심시간이라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윤천영(농4)의 우렁찬 선언문 낭독이 시작됐다.  뒤이어 송영인(통계 3)의 결의문 낭독과 권오갑(농4)의 대국민 호소문 낭독이 이어졌고 전육주(식공3)의 구호 제창엔  3천여 학생들이 일제히함성을 질렀다.
      농어촌연구부원들은 일본 모조어선을 발로 짓밟고 하오리(일본옷)를 입은 학생의 옷을 찢었다.  징과 팽과리의 소리는 더욱 요란해졌고 플래카드는 교문 쪽으로 서서히 이동했다.  학교 당국은  65년도 최초 시위가 동대에서 시작됨을 부담스럽게 여겨 사력을 다하여 만류했다.  30여 분 간 총학생회 간부와 농어촌연구부장 간에 협상이 오가더니 윤천영 부장은 성토대회의 끝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 무렵 투위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박동인의 지휘하에 권석충은 선거 참모진에서 김의빈(철2), . 김상규(법1), . 이부구{경제2)를 투위에 급파했고,  최영보도 일부 참모진을 투위에 지원했다.  데모 거사일을  4월 13일로
잡은 투위는 플래카드 제작을 이철홍과 이진탁에게 맡겼다.  이철홍은 플래카드 제작을 완료하고 12일 밤 하숙집에서 경찰에 연행됐고 이진탁은 플래차드를 몸속에 감고 13 일 새벽 학교로 잠입했다.
      4월 13일 유인물 준비로 철야한 이석기와 서수일이 충혈된 눈으로 제대교우회 사무실에 들어섰다.  벌써 최영보·권석충·이진탁·유중현·곽남용·김의빈·위종성이 와 있었다.  즉시 작전회의는 시작되어 선언문은 이진탁,  결의문은 이석기, 호소문은 유중현이 읽기로 하고 시간은 오후 1시로 잡았다.  권석충과 최영보는 각자의 선거참모를 동원하여 데모대의 선봉과 후미를 맡아 경찰 충돌 후에도 재집결할 수 있는 축을 형성하기로 했다.
      정오가 되자  “제 2의 을사조약을 즉각 철회하라”, “상륙하는 게다소리 몽둥이로 때려잡자꾀는 구호가 물결치기 시작했다.
      “오늘 또다시 조국수호의 대오를 정비하여 민족의 염원과 역사적 사명에 부응한다”는 이진탁의 선언문 낭독은 삽시간에 1천여 명의 학생들을 모았고 곽남용의 호소문 낭독과 유중현의 “반민족적 가조인은 전면 무효임을 선언하고 가조인이폐기될 때까지 싸울 것을 결의한다”라는 결의문을 끝으로 데모는 시작됐다.
       데모대는 이석기·이진탁·서수일·권석충·최영보의 지휘하에 잠근 교문을 부수고 충무로  5가를 지나 을지로  5가 쪽으로 전진하다 우측인 통일공업사 옆 골목 근처에서 경찰과 대치했다.  그런데  10여 발의 최루탄이 터지면서 경찰의 공격이 시작되고 데모대는 순식간에 와해되어버렸다.  일부는 학교 쪽으로 후퇴하고 일부는 골목으로 분산하여 도피했다.  이때 쌍림동 부근 골목길에 숨어 있던 경찰이 기습작전으로 학생들을 구타하여 박종님(경4)을 비롯하여  20여 명이 땅바닥에 쓰러졌고 70여 명이 중부서로 연행당했다. 이날 무차별하게 휘두른 곤봉으로 학생데모의 양상이 새롭게 변했다.  이철홍·곽남용·유중현은 연행되어 서대문구치소에 구속수감되고 수배중인 김경남도 자수하여 구속됐다.
      한편 쌍림동 골목으로 도주하던 김중배(농3) 외  5명은 골목이 막혀 다시 허겁지겁 달아나다 쌍림동  35번지 앞에서 뒤쫓던 경찰곤봉에 김중배가 두부를 맞고 인근 정청정 씨 집으로 피신했다.  그중  2명은 경찰수색에 연행당하고  3명만 남아집주인 정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임정규(농2) 등 동료 학생들은 김군을 2층으로 옮겨 머큐로크롬과 안티프라민 연고로 응급치료를 한 후 약  30분 간 안정시켰다.  그러나 의식불명상태가 계속되자 이들은 김군을 숙소(누님집)인 신당동 236의 181호 김성중 씨 댁으로 부축하여갔다.  김군은 다시 가까운 을지로  6가 구세이비인후과병원에 입원,  심인순 여의사의 응급치료를 받고 시립병원과 수도의대병원 등을 전전하다  4월  14일  0시 15분 간신히 서울대학병원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김중배는 이튿날인  4월 15 일 오후 8 시 15 분에 절명했다.  당시 서울대병원 담당의사인 조영희 씨는 “김군이 오른쪽 귀가 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고 귓속의 출혈이 심해 수술할 수도 없었다”고 밝혔다.  김군은 타박상으로 두개골저골골절에 우측 두부피하의 과잉 출혈로 유명을 달리했다.  이후 정부는 김군 사후  3일 만에야 사인조사에 착수하여 경찰곤봉에 맞아 사망한 것으로 추측하는 선에서 수사를 종결지었다.
      김중배의 사망소식이  15일 저녁 농어촌연구부에 전달되자 윤천영 부장은 총학생회장 유영수(행정4),  농대회장 오홍명(농4)과 긴급회의를 열고 김중배 위령제를  16일 오전 집행하기로 결정했다/  모든 추도식 준비물은 농어촌연구부가 맡
고 진행은 총학생회가 주도하기로 했다.
      4월 16일 날이 밝자 캠퍼스 불상 앞에는 검은색 만장이 날렸다.  총학생회 간부와 농어촌연구부 간부들은 두건을 썼고 등교하는 학생들은 ‘弔 金仲培’(조 김중배)라고 쓴 검은 리본을 부착했다.
      11시가 되자 위령제는 시작됐고,  2천여 명의 학생들은 슬픔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우리의 곁을 떠난 동국의 학도는 항거의 거리를 헤매다······· .  여기 조국과 민족을 위해 피맺히는 젊음이 타오르는 6월의 태양처럼 떠오르고 ·······  "라는 농학과 대의원 유성용{농3)의 조사가 끝난 다음  ‘아!  슬프다.  그대여 누구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나?’,  ‘그대의 정신 길이 빛나라’,  ‘김중배를 누가 죽였나!’라고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12시 15분부터 시위에 돌입했다 . 선두에는 이종린·김희태·김인홍·정윤무·전창원 교수를 비롯한 10여 명의 교수들과 여학생들이 앞장을 서고 그 뒤를 농어촌연구부원들이 두건을 쓰고 뒤따랐다.  시위대는 퇴계로  4가를 지나 샘표간장 앞으로 행진하다  500여 명의 기동경찰과 대치했다.
      학생대표와 교수들은 경찰들에게 시위저지를 항의했고,  경찰 책임자는 데모대가 학교로 돌아갈 것을 경고하며 옥신각신하는 사이에 갑자기 육군 헌병대를 실은 군용트럭  30여 대가 데모대를 뚫고 나가려 했다 순식간에 퇴계로  4가 일대는 아수라장이 됐다.
      풍비박산이 된 데모대는 학교정문 앞에서 대열을 다시 정비했고,  여학생들은 눈물을 흘리며 돌을 날랐다.  일부 학생들은 교내 공사장에서 리어카를 빌려 수십 개의 돌무덤을 교문 앞에 만들었다.  12시  50분부터 시작된 투석전은 퇴계로  4가 동국대 입구 교회를 목표로 두고 수십 차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오후  5시까지 계속됐다.  마치 피의 능선 전투를 방불케 했다.
      이날 데모로 경찰에 연행된 학생은  93명이며 부상자도 국문과 4학년 한양수 외  30여 명이 넘었다.  연행자는 중부경찰서에 이부구{경제2),  이응식(정외 4) 외 46명,  종로경찰서에 곽노형(상학3) 외 9명,  남대문경찰서 35명이었다.  경찰은 이부구·이응식·곽노형을 구속하고  나머지 사람은 지안재판과 훈방으로 조치했다.

      4월 23일 김중배 열사의 넋을 위로하는 듯 봄비도 구슬피 내리는 가운데 고 김중배 군 장례식이 충북 충주군 엄정면 목계마을 자택에서 동국대학교 학생장으로 엄숙히 거행됐다.  교가제창으로 시작된 이날 영결식은 민정당대표 윤보선씨와 민주당 총재 박순천 여사의 조사가 있었으며,  농대학장 김희태 교수,  농대 학생대표 오홍명과 친구 대표 유성용 군의 조사가 있었다.  김 학장은 조사에서  “김군의 비참한 희생을 애절한 슬픔과 함께 스승으로서의 부덕한 책임을 뼈저리게 느낀다"고 했으며 친구대표 유성용은 “민족의 정당한 의사표시가 뭐가 죄이기에 죽어야 했더냐 ·······  세월이 흘러 한 해 두 해 형이 가신 연륜이 더해가도 형이 두고 가신 덕과 정신은 저희들 동국 5천 건아의 핏속에 힘차게 흐를 것”이라고 흐느껴 조객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영구는 향리에서  200미터 떨어진 부흥산 기늙 선영에 고이 안장됐다.  지금도 동국대 4,19탑에는 노희두 열사와 나란희 김중배 열사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4. 지용단회와 삼색기 데모

      김중배 장례식이 끝난 뒤 캠퍼스는 총학생회장 선거열기에 휩싸였다.  총학생회장 입후보자인 최영보가  4월 23일 느닷없이  ‘정치영장’을 받고 입대한 것과  5월 19일 총학생회 비주류인 농대회장 오홍명,  장학생회장 박창노l행4),  불교대회
장 이한성,  농어촌연구부 윤천영·권오갑 등이 학교 앞 할매집에서 데모 모의를 하다 중부경찰서에 연행당한 일 외에는 별로 시끄러운 사건이 없었던 평온한 기간이었다.
      그러나  6월 18일 선거가 끝나고 차점낙선한 권석충이 투위로 복귀하면서 캠퍼스는 다시 긴장되기 시작했다.  권석충은 이석기·서수일과 함께 투위조직 정비에 나서 선거전 라이벌이었던 김영환(정외3)을 설득, 투위에 가담시켰고 경상대 주축이었던 황영수(경제3)로부터도 투쟁에 적극 동참할 것을 약속받았다.  또  자신의 선거참모진을  ‘지용단회’(智勇團會)라는 서클로 재발족시키고 정용길(정외3),  박정영(정외 3),  김구남(임학3),  이건재(정외 3) , 조광호(사학2) , 이재형(불교2),  김의빈·위종성·최칠문(경행1)·김상규·김만석(화1) 등 지용단회 지휘부를 투위에 초배시켰다.  김영환도 지용댄단에 입회했다.
      한·일협정 정조인 날인  6월  22 일 오전  11시 석조관 계단 위에서는 ‘굴욕적인 한·일회담 정조인을 즉각 중지하라’는 플래차드를 걸고 성토대회가 시작됐다. 이석기의 사회로 시작된 성토대회는  “순국선열의 피 어린 절규와 전 민족의 분노하는 함성을 외면한 채 진행하는 매국협정을 즉시 중단하지 않으면 우리는 생명을 건 투쟁을 전개할 것을 선언한다”라는 권석충의 선언문 낭독에 이어 김영환의 결의문 낭독을 끝으로 기세 좋게 데모로 변했다.  그러나  1천여 명의 데모대는 퇴계로  4가에서 경찰 최루탄에 해산당하고,  12시 30분경  70여 명의 지용단회 회원들만 캠퍼스에 재집결하게 되었다.  권석충과 이건재는 지용단회원들과 함께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며 교정을 돌기 시작했다.  도서관과 캠퍼스에 서성이던 학생들이 합류히여 교정을 세 바퀴 돌 무렵  400여 명으로 불어났다.
      데모대는 다시 교문을 박차고 나가 퇴계로  5가와  4가 중간 지점에서 경찰기동대와 대치했다.  이때 갑자기 경찰 저지선에서 검정 지꽉 데모대로 돌진, 거기에 타고 있던 중부서 박처원 공작반장이 권석충을 연행해갔다.  이를 지켜보던 지용단회  60여 명은 일제히 스크럼을 짜고 권석충 석방을 요구하며 대한극장 앞까지 돌격했다.  경찰  1개 중대가 이들의 앞뒤를 포위하고 전원 연행했으나 이들은 보호실에서 밤을 새우며 권석충의 석방을 요구했고 구호와 노래로 중부경찰서를 뒤흔들었다.  이튿날 권석충과 지용단 회원은 최재구 학생과장에게 인계됐다.  이날 오후 경찰은 지용단회를 주목하기 시작, 후일 지용단회를 용공단체로 간주하고 권석충과 김영환을 반공법으로 구속하게 된다. 방학중에 이철흥·유중현·곽남용은 보석으로 출감됐다.
     방학 기간 중 ‘한·일회담비준반대각대학연합체’에 동국대 투쟁위원장으로 참여,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던 권석충은  8월  21일 개학하자 정용길과 함께 삼엄한 사복경찰들의 포위망을 뚫고 교정에 잠입했다.  8월  12일 서울문리대 매국국회해산 촉구대회에 지용단회원들을 이끌고 침여한 후 지명수배를 받고 있던 권석충은 그뒤 미아리 정용길 지취방에 숨어 개학 이후 사용할 유인물과 플래카드를 준비해왔던 것이다.

      9시  50분경 제대교우회 문을 열자 벌써 황영수·김영환·이한성 등이 와 있었다.  권석충은 김상규를 통해 홍원표(정외 2)를 불렀다.  11시가 되어 석조관 앞 계단에서 성토대회가 시작됐다.  이한성의 사회로 진행된 성토대회는 권석충의 선언문 낭독과 김영환의 결의문 낭독으로 간단히 끝나고  2천여 명이 ‘태우자 매국문서 세우자 민족정기’,  ‘매국국회 해산’이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데모에 돌입했다.  정용길은 김의빈·김상규·최칠문 등 후배 지용단 회원들로 하여금 만일에 대비하여 데모대 선두 그룹을 장악하게 했다.  홍원표도 맨 앞줄에 끼었다.  데모대는 1차 퇴계로에서 경찰저지를 받고 기수를 돌려 청계천으로 진출했다.  권석충은 대열을 지휘하다 대열 속에 중부서 형사들이 끼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권석충은 홍원표와 함께 청계천  3가에 도착할 무렵 데모대 반대편에서 몰려오는 합승택시에 탑승,  청파동 홍원표의 고모집에 은신했다.
      한편 데모대는 청계천  3가에 저지선을 치고 있던 경찰기동대와 충돌하여 산산조각이 났다.  이날 경찰은 좌경희(문리 3) , 조명강(행3) 등 20여 명을 연행했다. 경찰에서는  8월 21일 시위에서도 권석충 검거에 실패하자 권석충 집과 지용단
회원들의 집을 일일이 수색했고,  심야에 학교의 모든 서클실을 뒤졌다.
      8월 23일 권석충은 아침 일찍 홍원표를 데리고 장충동 쪽 하숙집 동네 담장을 넘어 학교로 잠입했다.  두 사람은 정치학회 연구실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오전 10시경 캠퍼스로 나왔다.  여기저기서 투위 후배들과 지용단 후배들이 몰려왔다.  권석충은 아무런 준비 없이 석조관 계단 위로 뛰어 올라가 육성으로 학생들을 선동했다.  1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어 스크럼을 짜고 “비준무효”,  “비준무효”를 연호하며 교문으로 향했다.  권석충은 대열 중간을 정비하는 척하며 홍원표를 데리고 아침에 잠입한 담장을 넘어 도주했다. 데모대는 정용길·이재형·박정영·위종성·정응택(정 2)·김상규 지휘하에 퇴계로  4가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이날 데모로 이종업(경영1) 외  71명이 연행되고 이종섭은 구속됐다.
      이 무렵 오홍명과 박창노는 데모일을  8월  26일로 예정하고 삼색기를 활용하여 경찰저지선 돌파를 착안했다.  적색기는 윤봉길,  황색기는 안중근,  백색기는 이준 열사를 상징한다고 생각했다.  8월  25일 오홍명과 박창노는 준비물을 기원
학사에서 농어촌연구부실로 옮겼다.

      경찰은 권석충과 투위 지도부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8월  26 일 아침  9시 권석충과 홍원표는 청파동에서 택시를 타고 퇴계로 4가에 도착했다.  홍원표는 검은색 색안경을 쓰고 권석충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기 시작했다.  흥원표가  ‘좌측’이라고 말하면 좌측얼굴을 닦고,  ‘우측’ 하면 우측을 닦았다.  학교 입구 주변에 형사 차림의 사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정문을 통과했다.  수위실엔 낯익은 형사들이 보였다.
      제대교우회에 도착한 권석충은 다급히 김상규와 최칠문에게 지용단을 석조관 앞으로 집합시킬 것을 지시하고,  홍원표에게는 농어촌연구부에 보관하고 있는 준비물을 석조관 앞으로 옮기게 했다.  권석충은 적색기를 들고 법정대 학생들을 집합시켰고,  황영수는 황색기로 경상대를,  김영환은 백색기로 문리대와 농대를 모았다.  대열은 정비되고 인원은 무려  3천여 명이나 됐다.  선언문은 권석충,  결의문은 김영환,  구호문은 오홍명이 제창했다.  권석충이 적기부대를 이끌고 퇴계로로,  김영환은 백색기 부대를 지휘하여 청계천으로 돌진했다.  정용길·박정영·위종성·조광호·이재형은 지용단 회원  30여 명으로 하여금 적기부대 선두를 장악하게 했다.  퇴계로의 황색기 부대는 대한극장 앞에서 경찰과 충돌하여 산산조각이 났다.  권석충은 일부 잔여 부대를 이끌고 청계천 백기부대와 합류했다.  다행히 청계천에는 저지병력이 없었다.
      데모대는 청계천 입구를 거쳐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했다. 데모대 속에 끼여있던 형시들은 지용단 회원들의 호위 때문에 권석충을 검거하지 못했고,  데모대가 무교동을 지날 무렵 권석충과 흥원표는 골목으로 잠적했다.
      정보기관과 경찰 당국은  6월부터 권석충이 주축이 된 지용단회 움직임을 주시하여 오던 중  8월  10일 권석충이 각 대학연합체 공개기자회견에서 발표한 결의문(권석충 작성)과 개학 후 사용한 구호문이 반국가적이고 친좌경적으로 판단되어 검거령을 내리고 있었다.  이들 기관에서는 특히  8월  26일 삼색기 데모를 러시아 혁명사에 나오는 삼색기와 연관시키며 권석충 검거에 총력을 기울였다.
      권석충은 흥원표의 고모집에 숨어 있다가 사태가 점점 심각함을 느끼고 평상시 절친한 권희철(영문3)의 후암동 집으로 피신처를 옮겼다.  그러나  8월  30일 오후 권석충의 형 권석종을 앞세운 중부경찰서 공작반장 박처원이 권희철의 집을 급습,  권석충에게 수갑을 채웠다.
      백기부대를 지휘한 김영환은 은선처를 찾아헤매다가 불교과 3년 이무웅 집(현재 대한불교 관음종)에 피신했다. 그러나 불안하여 정외과 동기생인 이광조의 아현동 하숙집으로 다시 옮겼다가 중부서 형사대에 의해 체포당했다. 황색기 부대를 이끌던 황영수는 도피중 군에 입대했다.
      권석충을 검거한 경찰은  8월  26일 삼색기 데모와 지하서클인 지용단회를 용공조직으로 보고 그 성격과 배후를 심하게 추궁했다.  장소를 옮겨가며 고문까지 했음에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삼색기를 제작한 윤천영과 오홍명을 수배하는
한편 지용단회 지휘부 정용길·박정영·김의빈·김구님(임학3)을 연행,  조사했다.  10월  4일 자수한 오홍명을 10여 일 동안 대공분실과 중부서 공작반에서 심문하고도 끝내 용공성을 찾지 못한 수사 딩국은 권석충과 김영환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하는 데 그쳤다.  학교 당국은 권석충을 제적하고 김영환·오홍명·이한성을 무기정학 처분했다.  권석충과 김영환은 78일의 감방생활을 마치고 11월 18일 출감했다.
      한·일국교 수립일인  12월 18 일  2년에 걸쳐 수없이 많은 학생들이 투옥당하고 제적으로 학교를 떠난 가운데 한·일 양국 원수들은 삼페인을 터뜨렸다.  동대 박동인·김경남은  6·3 동지회 이름으로 된 한·일협정 비준반대 대국민 호소문을 안고 오전  11시 종로 3가 버스 정류장에서 길가는 사람들에게 유인물을 배포하며 한·일 국교수립 반대를 외치다 박동인, 김경남은 종로경찰서에 연행됐다.  이것이 한·일회담 반대투쟁 학생의 마지막 연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