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학생운동사

제3부, 제 13 장 숭실대학교 6·3운동

63동지회 2024. 2. 26. 17:57

 제 13 장 숭실대학교 6·3운동

      1.  6·3 데모 이전의 운동

      1964년  6월 3일,  전국의 대학생들은  “정부의 대일굴욕외교 반대”로 시작히여  “박정희군사독재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강력한 반정부데모를 벌여 이른바  6·3 계엄사태를 야기하였다.

      6·3 학생운동의 시원은 3·24데모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4년  3월 24일,  서울문리대·고려대·연세대생 수천 명은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데모를 시작하였다.  다음날  3월 25일 숭실대학의 데모에 돌입했다.  이날 데모는 학생회장 강우석(철학과 4년),  학생회 부회장 현홍광(농촌사회학과 3년),  대의원회 부의장 유영렬(사학과 3년) 등 학생회와 대의원회간부들이 주도하였다.  강당에서 굴욕외교 성토대회를 마친 500여 명의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학교(상도동)를 출발하여노량진까지 진출했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고 해산하였다.
      3월 30일 서울시내 대학생대표들의 대통령 면담을 계기로 학생들은 정부가 한·일회담에 당당하게 임해줄 것을 기대하면서 데모를 일시 중단하였다.  그러나 학생데모가 중단된 뒤 보름이 지나도록 정부의 굴욕적인 한·일회담의 자세는 변화의 조짐을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정보부의 끄나풀인 YTP(청사회)를 이용하여 학생들 사이를 이간시키고, 학원사찰을 강화하여 데모예방에만 부심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학생들은  4월 17일부터 다시 데모를 벌이게 되었다.
      4월 19일 숭실대학도 데모를 재개하였다.  학생회와 대의원회 간부들의 주도하에  4,19의거 희생자 추모와 함께  ‘대일굴욕외교 반대’,  ‘정보정치 반대’를 주장하는 성토대회를 열었다.  학생회장 강우석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의 집회에서, 현흥광은 성토문을 낭독했고,   숭실대학 4,19희생자 김창업의 사학과 후배인 유영렬은  4,19추도사를 낭독하였다.  성토대회를 마친  400여 명의 학생들은 체육부차장 최경심(농촌사회학과 3년)의 지휘 아래 노량진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5월 20일,  서울시내 9개 대학 2천여 명의 학생들이 서울문리대에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함으로써 학생데모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5월 22일에는 서울시내 30여 개 대학이  ‘한 · 일굴욕회담 반대 학생총연합회’를 결성하여학생운동의 조직적 체계를 갖추었으며,  5월  25일에는 전국 31개 대학이 연합하여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를 개최하고 「대국민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이날의 궐기대회에 숭실대학에서는 학생회 부회장 현흥광 등이 참가하였다.
      이날 숭실대학 교내에서는 학생회와 대의원회 간부들의 주관으로  ‘대일굴욕외교’ 성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무렵 학생회장 강우석이 갑자기 회장직을 사퇴하여, 데모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총무 김기완(영문과 4년)이 그 직무를 대행하게 되었고,  대의원회 의장 주정식(경영학과 4년)은 취업관계로 일체 데모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의장 유영렬이 사실상 대의원회를 이끌었다.  이날의 성토대회는 학생회의 약화와 무성의로 큰 결속력을 끌어내지 못하였다.
      이때 사학과 3, 4학년 학생들이 데모의 배후세력으로 나섰다.  사학과 3, 4학년들이 데모에 적극성을 보인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그들은 평양숭실이  1919년에 북한지역의 3·1 운동에 앞장섰고,  1938년에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폐교함으로써 민족의 자존과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지킨 숭실대학의 항일전통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로 그들은 평양 숭실 출신의 두 교수,  곧 항일투사였던 숭실대 김양선 교수(한국사)와 민주주의 운동가였던 고려대 김성식 교수(서양사,  당시 숭실대 대우전임)의 영향을 받아 강한 역사의식과 사회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1964년 6월 3일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한 숭실대 데모대 유영렬 (사학파 3)을 비롯한 학생 지도부의 모습이 보인다.


      김성식 교수는 강의시간에 “의(義)를 위한 일이라면 가슴에 총알이 박힌다 해도 거리로 나서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권영재의 회고).  그리고 당시 사학과 3, 4학년은 잦은 합반을 통하여 친숙해져서 데모문제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그룹화되었다.


      2.  6·3데모의 준비와 실제

      5월 26일,  숭실대학 사학과 3학년 유영렬·권영재·안재인·박황,  그리고 4학년 김보환·한치관·박영길·김영기 등  8인이 제 12강의실에 모여 데모문제를 논의하였다.  이들 사학과 3, 4학년 그룹은  “최근에 우리 대학의 집회와 데모가 너무 형식적이고 열기가 없었다”고 비판하교 “앞으로는 사학과에서 데모를 주도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그리고 그들은 학생회가  ‘한국학생총연합회’에 대표를 제대로 참석시키지 않으므로,  앞으로는 사학과에서  ‘한국학생총연합회’에  숭실대학 대표를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우선 이미 개인적으로 타대학과 연락하고 있던 김보환과 한치관을 ‘난국타개전국학생대책위원회'에 파견하기로 하였다.
      5월 27일,  2교시가 끝난 뒤 유영렬·한치관·박영길·권영재 등 사학과  3, 4학년 그룹은 김보환으로부터  ‘난국타개전국학생대책위원회’  참석 결과를 보고받고, 앞으로 예상되는 전국적인 데모에 적극 동참할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날 모임에서 김보환·한치관·박영길  3인은 대외연락 책임을 맡기로 하고,  다음날의  ‘난국타개대책위원회’에는 박영길이 참석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대의원회 부의장이며, 제대복학자로 교내에 지면이 넓은 유영렬은 교내의 동지규합과 데모조직을 맡고, 선언문과 구호 등을 미리 준비하기로 하였다.
      5월 28일,  유영렬·김보환·한치관·박영길· 영재 등 사학과  3, 4학년 그룹은 제 7강의실에 모여  ①  YTP 조사위원회를 구성할 것,  ② ‘난국타개전국학생대책위원회’와 공동보조를 취할 것,  ③ 학생회 임원과 협의하여 총무 김기완을 ‘난국타개전국학생대책위원회’에 보낼 것을 결정했다 이날 사학과  3, 4학년 그룹은 ‘난국타개전국학생대책위원회’에 참석한 박영길의 보고를 듣고 정구장 뒤 둑에서 유영렬·김보환·한치관·박영길·권영재·김영기 등 사학과  3, 4학년 그룹과 임경조 외  3명의 경제학과생들이 모여 정부의 부정·부패·무능·독재를 비판하고 데모를 강력히 추진하기로 합의했으며,  유사시 데모 동원책으로 체육부차장 최경삼을 내정하였다.
      5월 30일 10시에 제 12강의실에서 사학과 3, 4학년 그룹은 ‘한국학생총연합회’에 참석한 김보환의 보고를 듣고, 한국학생 총연합회의 결정에 따를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고 유사시에 학생회 임원을 앞세우고 사학과 3, 4학년 그룹은 가급적 배후에 있어 다음 데모를 도모키로 하였다.  이날 그들은 다음과 같은 데모 집회계획을 세웠다{유영렬 비망록)


      사회 : 한상순(경제 4)
      연락책 : 김보환(사학 4)·한치관(사학4, 대외) 유영 렬(사학3,  대내)

      선동연설 : 김 인호(농사3)·김 동필(농사3)
      플래카드 : 한치관(사학 4)·김보환(사학4)
      구호 : 유영렬(사학3)·서희철(농사3)
      호소문 : 서희철(농사3)
      선언문 : 유영렬(사학3)
      동원책 : 최경삼t농사3)


      6월 1일,  위와 같은 계획에 따라 교내에서 성토대회가 열렸다.  한상순의 사회, 김인호의 선동연설, 서희철의 호소문 낭독,  그리고 유영렬의 선언문 낭독이 있었다.  그 선언문은  “오늘의 궐기는 부정과 부패,  독선과 독재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민주주의의 새 역사를 창조한  4,19 정신을 계승하는 데 있다”고 천명하고,  “민족감정을 도외시한 정부의 저자세 구걸외교는 필경 우리를 일본의 신제국주의에 예속시킬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였다(유영렬 비망록).
      성토대회에 이어 학생들은 다음과 같은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1. 학원과 학우를 밀고하는 YTP를 해체하라.
      1.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군인깡패를 엄단하라.
      1. 반민족 반국가적인 정상배를 엄단하라.
      1. 불사르자 부정부패 강권통치.
      1. 국민의 주권선인 평화선 매도를 반대한다.


      권영재의 회고담에 의하면,  “이 무렵 유영렬과 함께 청계천 골목 어느 다방에 가서 고려대생으로부터 난국타개대책위원회의 선언문인가를 건네받았는데,  형사인 듯한 수상한 사람의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 남대문시장 골목을 두 바퀴나 돌고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6월 3일,  유영렬·한치관·박영길·권영재 등 사학과 3, 4학년 그룹은 이날 전국적으로 거사한다는 김보환의 연락을 받고 교내의 데모 조직에 착수하였다. 학생회가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대의원회 부의장 유영렬은 ‘비상대의원회’를 소집하여 전국적인 거사 사실을 설명하고,  20여 명의 참석 대의원들은 만장일치로 데모에 나설 것을 결의하였다.  이어서 각 학년 각과 대의원들과 사학과 3, 4학년 그룹이 학생들을 긴급 동원하여 간단하게 성토대회를 마쳤다. 성토대회 후 500여 명의 학생들은 4명씩 스크럼을 짜고 학교(상도동)를 출발하여 노량진·삼각지·서울역·남대문을 거쳐 오후 2시경에 광화문 네거리에 도착하였다.  이미 몇몇 고등학교 데모대가 와 있었으나 대학 중에서는 우리 학교가 가장 먼저 도착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각 대학교 데모대가 속속 도착하여 광회문 일대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안재인의 회고)

      광화문 네거리를 경계로 진압군인과 대치상태에서 투석과 최루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데모학생들의 구호는  “굴욕외교 반대”에서 “박정권 퇴진”으로 강경해져갔다.  오후 5, 6시경 숭실대 동원책인 최경삼이 철조망 바리케이드의 한쪽을 걷 어치워 숭실대 데모대가 가장 먼저  제 1 저지선을 뚫었다(한치관의 회고).
      철조망 바리케이드를 돌파하여 나가는데,  중앙청(지금의 국립박물관) 100미터 전방에 트럭을 연이어 판자로 막은 제 2저지선이 학생데모대의 앞을 가로막았다. 진압군인들이 최루가스를 터뜨리고 대형 풍차를 돌려 학생데모대 쪽으로 날려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학생데모대들은 트럭 바리케이드도 돌파하고 중앙청 좌측으로 돌아 청와대 쪽으료 방향을 잡아나갔다.  각 대학 데모대가 뒤섞인 가운데 숭실대학 데모대의 일부는 삼일딩t당시 진명여고 강당)과 청와대 근처까지 진출하였다{유영렬 비망록).  그러나 밤  8, 9시경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결국 학생데모대는 모두 해산되고 말았다.
      계엄사태하에서  6·3 데모의 주동자로 구속되어 내란죄로 형무소에 수감된 대학생은 60여 명을 헤아린다.  숭실대학에서는 학생회 총무 김기완과 대의원회 부의장 유영렬,  그리고 사학과 4년 김보환 등  3인이 제 6관구 계엄군재(재판장 김상갑 준장,  법무사 임광림 중위,  변호사 김익보 대학 선임)에 회부되어 내란죄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당시 숭실대학의 6·3 데모는 집행기관인 학생회가 미온적이어서 의결기관인 대의원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막후 조직은 사학과 3, 4학년 그룹이었고,  현장활동파는 농촌사회학과  3학년 그룹이었다.  사실상 숭실대학  6·3 데모를 모의한 주역은 사학과의 유영렬·김보환·한치관 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김기완은 학생회 총무로서 회장이 사퇴한 학생회를 대표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속되었고,  한치관은 이름이 노출되지 않아 구속을 면하였다.
      전국적인 거사가 이루어지면 데모 주모자들이 잡혀가리라는 것은 모의할 때 이미 예상되었다.  학내에서 유영렬이 주동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었고,  김보환도 드러내놓고 대외활동을 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구속은 피할 수 없다고 판단되었다.  그래서 한치관이 밖에서 사후 처리를 할 수 있도록 취조받을 때 그의 이름을 제외시키자고 약속하였다.  이러한  3 인의 밀약이 지켜져 한치관은 수감을 면하게 되었고 유영렬·김보환이 투옥되자 한치관은 옥바라지와 석방운동, 보석금 마련에 발벗고 나섰다.  그는 기독교어머니회에 교업하여 당시 집안이 어려웠던 유영렬·김보환의 보석금을 확보하였고,  유영렬이 선고유예후 김보환이 공소취하로 석방되어 보석금이 필요 없게 되자,  다시 교섭하여 보석금을 등록금으로 쓸 수 있도록 지원받았다.


      3.  6·3데모 이후의 운동

      1964년의 학생운동은 6·3 계엄사태로 그 막을 내렸다. 그러나 다음해에 학생데모는 재연되었다.  1965년  3월 6일 야당의  ‘한·일회담 중지결의안’이 국회에 제출된 것을 계기료 3월 하순부터 대학가에서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숭실대학도 총학생회와 의식분자들이 결합하여 비준반대운동을 벌였다.
       4월  초에 총학생회 회장 김동필(농사3), 부회장 김광영(농사3), 총무 김인호(농사3)  3인이 성토대회를 열기로 합의하였고,  이에 동조한 서희철(농시4),  손영보(영문4) 등과  6·3 데모로 옥고를 치른 유영렬(사학4)이 적극 합세하여 데모일정
및 세부계획을 마련하였대김광영의 회고).
      4월 13일,  대강당에  5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총학생회 부회장 김광영의 사회로 시작된 제 1 차 성토대회는 서희철의 선언문 낭독,  김동필과 유영렬의 규탄대회사,  김인호의 투쟁계획 설명, 손영보의 구호제창으로 진행되었다. 구호는  “매국외교 결사반대”,  “한·일협정 철회하라”,  “평화선을 시수하자” 등이었다.  성토대회는 곧바로 가두시위로 이어졌다.  학생들은 상도동에서 노량진을 거쳐 한강인도교까지 진출했으나,  경찰의 강력 저지로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날 시위 주동자들은 귀교하여  대학 기숙사에 모여 집회평가회를 겸한 차기 성토대회를 의논하고,  그 준비위원으로 총학생회 회장단인 김동필·김광영·김인호를 선임하였다{김광영의 회고).
      이들의 준비에 의하여  4월 17일에 뜨거운 열기 속에서 제3 차 성토대회를 마치었다.   4월 19일에는 4,19추모행사와 더불어 성토대회를 다시 열었다.  유영렬은 4,19영령에 대한 추도사에서,   “그대들의 붉은 피로 씻겨진 이 땅엔 다시 부정과 부패와 독재의 신악이 자리잡고,  그대들이 누비고 다녔던 거리와 피를 토하고 쓰러졌던 광장엔 또다시 그대들의 후배들이 쓰러지고 있음을 그대들은 아는가 모르는가?”라고 외쳤다(유영렬 비망록).
      5월에는 서울에 있는 많은 대학이 축제기간이어서 학생데모는 소강상태를 보였다.  숭실대학도 ‘관악축제’ 관계로 시위에는 소극적이 되었다. 이때 유영렬·서희철·박재홍·강대기·이준철·최경삼·노원길·박덕신 등은 타대학의 동정과 뉴스의 초점을 학우들에게 설명하고 향후 대책을 의논하기 위하여 총학생회와 기숙사에 지주 왕래하였다(김광영의 회고).  관악축제를 마친 두 총학생회는 6월 들어 한·일협정 조인 반대투쟁에 힘을 쏟았다.  한·일협정 조인을 하루 앞둔  6월 21일 숭실대학 총학생회와 시위지도부는 교내에서 성토대회를 주도하고, 학생들 각자가 버스를 이용하여 삼각지에 집결토록 하였다.  서울시내 각 대학의 광화문 연합시위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삼각지에 집결한 400여 명의 숭실대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서울역,  남대문을 거쳐 광화문에 진출하였다.  이때 시내 각 대학의 데모대들이 몰려와 광화문 일대는 데모대의 함성으로 메아리쳤다.  이날 데모에 앞장섰던 김인호와 서희철은 영등포서에 연행되었다가 풀려났다(김광영의 회고).  한·일협정이 정식 조인된  6월 22일에도 숭실대생들은 조인반대투쟁을 밤까지 지속하였다.  그러나 한·일협정이 조인되고 방학으로 접어들면서 학생데모는 잠잠해졌다.
      방학중인  8월 14일 한·일협정 비준안이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된 것을 계기로   8월 하순 2학기 개학과 더불어 전국 대학생들과 일부 고등학생들은 비준무효화투쟁을 벌였다.  8월 23일,  숭실대학도 총학생회 주도 아래 성토대회를 열고,  "한· 일협정 비준무효화하라”,  “일딩국회 해산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에 나서,  일부는 노량진까지,  일부는 광화문까지 진출하여 격렬하게 데모를 벌였다.  이날 데모를 주도한 총학생회 부회장 김광영은 영등포서에 연행되어 검찰로 넘겨져 불구속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숭실대학 고병간 학장의 보증으로 이틀 만에 풀려났다(김광영의 회고)
      8월 24일,  총학생회 간부들이 연행되거나 피신한 가운데,  유영렬·서희철·강대기·최경삼 등이 이끈  400여 명의 숭실대생들은 광화문 국회의사당 앞에 진출하여  ‘한·일협정 비준무효화’와 ‘일딩국회 해산’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날 광화문 일대는 각 대학 데모대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러나  8월 26일 정부는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발동하였고 곧 이어 각 대학에 휴교조치가 내려져서,  1965 년의 한·일회담 비준반대운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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