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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제 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2)

제 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 2. 김중배의 사망과 5월투쟁 : 한·일협정반대와 학원자유화투쟁 4월 12일 시위는 더욱 확산·격화되어, 경희대 300명과 연세대 2천 명, 동국대 2부학생 200여 명이 성토대회를 열었고. 초급대학연맹회도 한·일회담 반대 결의문을 발표하고 구속학생석방 등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12일 밤에는 고려대, 경희대, 숭실대, 중앙대, 동국대, 한양대 등 6개 대학 학생이 데모 모의를 하다 연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 일에는 범대학적으로 한·일회담 반대 성토대회가 열렸다. 13일 낮 고대생 1천여 명은 제 2을사보호조약 철회와 구속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며 성토대회를 벌였다. 총학생회장이 평화선 사수의 의지를 천명하는 선언문을 낭독한 후 시위에 돌입한 1천..

63학생운동사 2024.02.10

제2부, 제 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1)

제 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 1. 한·일협정 가조인과 한 · 일협정 반대투쟁 1965년 들어 박정희정권은 다시 한·일회담 강행의지를 내보였다. 1월 9일 박정희 대통령은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한· 일회담을 올해 안으로 가부간 매듭짓겠다고 언명하였고, 이에 따라 1월 18일 한·일 본회담이 속개되었다 . 일본측 수석대표 다카스키가 “20년 더 한국을 가지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전쟁으로 좌절되었다”라는 구보다 망언보다 더한 실언을 하였으나 회담타결에 급급한 한국정부는 문제삼지 않았다.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한·일기본조약 가조인을 위해 2월 17일 시이나 일본외상이 내한하는 것을 계기로 다시 한 번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2월 15일에는 6·3 동지회가 대일굴욕외교 반대를 위한 모임을 ..

63학생운동사 2024.02.08

제2부, 제 1 장 1964년 6 · 3데모의 전말(6)

제 1 장 1964년 6 · 3데모의 전말 6. 구속학생들의 수난과 구속학생 석방운동 7월 8일 육군 제 6관구 계엄보통군법회의는 6.3 데모로 인한 내란죄혐의로 구속된 연세대 서진철 등 3 명, 중앙대 서청원 등 대학생 20명과 민간인 5명에 대한 첫 공판을 열었다. 재판부는 변호인단이 제출한 ‘재판권관할에 관한 재정신청'을 받아들여 대법원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 공판을 무기연기했다. 또한 제6관구 사령부 계엄보통군법회의는 7월 24일 6 ·3 데모로 구속된 숭실대, 단국대, 홍익대, 서울농대생 10여 명에 대한 내란피고사건 첫 공판을 열었다. 이날 공판은 변호인즉의 공판연기신청으로 인정신문과 기소장 낭독을 마치고 폐정됐다. 이날 출두한 피고인은 단국대 최윤관·신응택·임병순·노수길, 숭실대 유영렬·김기완..

63학생운동사 2024.02.08

제2부, 제 1 장 1964년 6 · 3데모의 전말(5)

제 1 장 1964년 6 · 3데모의 전말 5. 6·3데모 이후의 사태 전개 계엄령으로 학교문이 굳게 닫힌 채 서울시내는 무거운 침묵에 빠져 있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정부는 강압적 자세로 일관했다 6월 5일 문교부는 서울시내대학 총장회의를 소집하여, ① 3·24 데모 이후 사직 당국이 기소한 데모주동학생은 전원 퇴학 처분하교 9 학생데모를 선동했거나 영향을 준 교수는 전원 징계위원회에 회부하여 파면 등으로 엄벌하라는 강력한 학원정화방침을 시달하고 기한부 결과 보고를 하도록 지시하였다. 6월 17일 민기식 계엄사령관의 발표에 의하면 계엄기간 중 구속된 학생, 언론인. 민간인 총수는 248명이었다. 한편 6일 새벽에는 제 1 공수특전단 소속 무장장교 8명이 동아일보사 편집국에 침입하여 숙직기자에게 40여 분..

63학생운동사 2024.02.08

제2부, 제 1 장 1964년 6 · 3데모의 전말(4)

제 1 장 1964년 6 · 3데모의 전말 4. 6 ·3 데모와 계엄령 선포 정부는 학생들의 계속적인 항의와 시위에 대해 무력탄압으로 일관하였고, 급기야는 “학생시위가 용공색채가 농후한 서울문리대의 민족주의비교연구회에 의해 조장되고 있다”는 ‘매차시즘적 탄압’까지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정부가 강경책으로 일관하는 사이에 6월이 다가왔다. 6월에 접어들면서 한국의 주요 사회·정치세력들은 한 · 일회담에 대한 찬반 여부에 따라 뚜렷이 두 개의 집단으로 갈라졌다. 학생, 지식인, 언론, 야당, 종교단체와 일반 국민은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강행하는 정부에 대항하여 투쟁전선에 결집했고, 박정권과 그 후원을 받는 기득권 집단은 그 맞은편에 섰다. 이제 어차피 한 번은 이 두 세력 사이에 전면적 투쟁이 전개될 ..

63학생운동사 2024.02.07

제2부, 제 1 장 1964년 6 · 3데모의 전말(3)

제 1 장 1964년 6 · 3데모의 전말 3. 5 ·20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과 5 ·25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 4월 말에 재개된 시위는 정부의 학원사찰과 강경책으로 5월 들어 좀 수그러들다가 5월 20일 ‘한·일굴욕외교 반대 대학생총연합회’가 주최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는 서울문리대 교정에서 서울대, 동국대, 성균관대, 건국대, 경희대가 주축이 된 한·일굴욕회담 반대 대학생총연합회의 주관 아래 학생 3천 명과 시민 1천 명이 모인 가운데 거행되었다. 다음은 대회의 선언문과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의 조사 요지이다. 선언문 민족시는 바야흐로 위대한 결단을 요구하는 전환기에 섰다. 이제 우리는 ‘빈곤과 부자유 그리고 외세..

63학생운동사 2024.02.06

제2부, 제 1 장 1964년 6 · 3데모의 전말(2)

제 1 장 1964년 6 · 3데모의 전말 2. 4월 학생시위의 재개와 정부의 강경대응 3 ·24시위 이후 연일 계속되었던 학생시위가 김종필의 소환 등 ‘약간의 정치적 전환’이 있은 후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중에 삼민회 소속 김준연 의원이 3월 26일 “대일청구액 1억 3천만 불을 미리 받았다”고 발설한 데 이어, 4월 2일에는 “박정희·김종필 라인이 일본으로부터 약 2천만 불의 선거자금을 받았다”는 새로운 사실을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4월 3일 투쟁위는 “매국적 대일굴욕외교를 감행하고 있는 박정권은 애국적인 데모와 전국민의 여론을 묵살하고 철면피하게도 가면전술과 현혹전술을 써가면서 한·일회담을 계속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앞으로 한층 더 단호한 행동으로 구국투쟁을 전개하겠다”라고 선언하였다. ..

63학생운동사 2024.02.06

제2부, 제 1 장 1964년 6 · 3데모의 전말(1)

제 1 장 1964년 6·3데모의 전말 1. 정부의 한 · 일회담 강행과 3 .24데모 1964년 1월 10,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강력한 경제외교를 적극 추진하여 보다 나은 조건하에서 보다 많은 외자를 확보”할 것이며, “미국과 우리와의 관계는 우방 중의 우방으로” “양국간의 연대강화와 일층의 우호증진에 최선을 다할 것”이며, “한·일관계에 있어서는 극동에 있어서의 자유진영 상호간의 결속의 강화로써 극동의 안전과 평화유지에 기여한다는 대국적 견지에 입각하고 동시에 양국간 선린관계의 수립이 상호간 번영의 터전을 마련”함을 감안하여 “한·일회담을 조속히 타결코자 초당적인 외교를 추진토록 할 것이다”라고 언명하였다. 연두교서는 1 장에서 언급했던 한·일회담의 군사·경제적 배경과 한·일협정의 체결의지..

63학생운동사 2024.02.05

제2부 6.3학생운동의 전개

굴욕적인 한·일회담은 식민지의 쓰라린 경험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던 한국국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연인원 350만 명이 직접 투쟁에 참가, 광범위한 저항운동으로 전개되었던 6.3 운동은 박정희군시독재정권이 발동한 계엄령과 위수령에 의해 좌절되기는 하였지만 이후의 한국정치에 커다란 파급효과를미쳤다. 6.3 운동은 직접적으로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운동이었지만 넓게 보면 당시의 정치·사회경제적 구조하에서 산적해 있던 다양한 국민적 요구가 분출된 공동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6·3 운동은 박정희정권의 폭정에 대한 항의로서, 직접적 생활문제로서, 그리고 한·일회담에 임하는 정부의 저자세와 일본의 팽창주의 및 미국의 부당한 개입에 반대하는 민족자존적 운동으로 전개됨으로써 전체적으로 민족주의적..

63학생운동사 2024.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