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학생운동사

제3부, 제 9 장 서강대학교 6·3운동

63동지회 2024. 2. 21. 19:00

제 9 장 서강대학교 6·3운동

      서강대학은 1960년 4월 18일  4,19혁명이 일어나기 전날 개교하였다. 카톨릭 예수회의 교육봉사정신과 한국의 민주적 교육이념에 의거한 지도혐 양성할  목적으로 6개학과 160명을 선발하여 출범하였다.
      개교 때부터 서강대학은 소수정예의 교육을 내세우고 학사행정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특히 출결석과 성적처리에 있어서는 그 엄격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학생들은 개교한 지  2개월이 지난 1960년 6월부터 학생회의 구성을 논의하였으나  1962년 5월에 이르러서야 제 1 회 학생회장 선거를 치를 수 있었다. 학생회 명칭도 ‘서강대학 재건학생회’였다.  당시 학생회의 활동은 체육대회,  신입생환영회 등의 교내 행사에 치중되었고 대외적인 교류는 많지 않았다.
      이에 제 1 대 학생회장 한광수(물리3)는 서강이 다른 대학과의 관계가 없이 고립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대외적인 활동을 할 것을 강조하였다.  1963년  5월에 들어서 박희윤{경제3)을 회장으로 한 제 2 대 학생회가 구성되자 이후 외부 학생회와연계한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1. 1964년 대얼굴욕외교 반대투쟁과 서강

      1964년에 들어 정부는 한·일회담을 강행하였고 이에 대일굴욕외교 반대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각 대학에서의 시위도 점차 확산되었다.  64년 당시 서강대학은 총 학생수가 650여 명에 불과하였다.  학교 딩국은 학생들의 정치적
활동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64년도 초반에는 서강대학 학생들의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은 활발하지 못하였다.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도 학생회 간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학생회는 1963년 12월에 각 대학간의 학생운동을 통일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결성된 ‘한국학생총연합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64년 당시 한국학생총연합회에는서울대 총학생회장 김대요 연세대 학생회장 안성혁,  이대 학생회장 김행자 등과 함께 서강대 학생회장 박희윤이 참여하였고,  이들은 종로 화신 앞 여왕봉 다방 등에서 자주 모임을 갖고 시국토론과 시국선언문을 작성하였다.  3월  25일에는 중앙청을 방문하여 정부측의 입장과 김·오히라 메모 내용의 공개를 요구하고 이후 문교부장관실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어 내무부장관 엄민영을 방문하여 학생들에 대해 과잉 진압하지 말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4월에 들어 학생운동은 더욱 치열해졌다.  서강도 예외는 아니었다.  4,19기념일이 닥치자 당시 학생운동진영은 기념식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었다.  정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는 데 참여하여 대일굴욕외교에 대한 반대입장을 밝힐 것인가, 아니면 독자적인 모임을 가져야 하는가로 의견이 갈렸다.  결국 각기 참여하는 쪽으로 진행되었다.  서강대학 학생회에서는 정부에서 추진하는 기념식에 침여하였고,  당시 시민회관에서 거행된 기념식에서 서강대학 학생회장 박희윤이 대표로 기념사를 하였다.  기념사는  4,19정신의 계승과 대일굴욕외교 반대입장을 표명하는것이었다.
      1964년  4,19기념일 이후 학생들의 시위는 크게 번져갔다. 서강대학 학생들도 거리로 나섰다. 4월 19일 당시 김호섭(수학2)이 주동이 되어서  300여 명의 학생들이 신촌로터리를 통해 시청을 향해 시위를 하며 나아갔다. 학교에 있었던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생회관에 모여 거리로 진출하며 굴욕적인 외교에 대한 반대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이들은 이화대학 입구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서강대 학생들이 최초로 거리로 나섰던 것이다.
      이러한 시위 이후에 학생회에서는 굴욕외교 반대투쟁의 의미를 되새기고 결의를 새롭게 하기 위해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였다.  4월  27일에는 『사상계 」의 사장 장준하 선생을 모시고 한·일회담의 진상과 대학생들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한 강연을 들었다.  학교측의 반대를 무릅쓰고 학생회에서 추진한 이 행사에는 서강대학생 거의 모두가 침여하여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  이후  5월에는 한·일회담의 진행과 군사독재를 반대하던 전 특검부장 예비역 준장 박창암씨를 초빙하여 시국강연회를 열었다.  5월  25일에는  1, 2학년생들이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김·오히라 각서에 항의하는 집회에 참석히여 다른 대학의 학생들과 연대히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64년 6·3학생운동 당시 “대일굴욕회담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멀이던 서강대 학생들이 기 동경잘에 의해 연행되고 있다.

 


      5월 말 각 대학 학생회장들이  6월  3일 각 대학별로 집회를 가진 후 광화문네거리에 집결할 것을 약속하자,  서강대학 학생회에서도 선언문,  플래카드 등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6월  2일 각 회장들에 대한 수배령이 떨어졌고,  그날 밤 학생처장(서정호 교수)의 권유에 따라 박희윤 학생회장은 대구의 친척집으로 피 신했다가  2주 후 목포의 친척집으로 가서 장기간 도피생활을 하게 되어 구심점을 잃은 서강대학에서는 대대적인 집회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어 휴교령이 내려졌고,  개학 이후에도 학교 당국의 정치적 집회 불용의 방침 아래 서강대학 학생들의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은 활발하지 못하였다.

1964년 6·3학생운동 당시 ‘대일굴욕희담반대’를 외치며 신존로터리에서 아현동 방면으로 가두시위를 멀이고 있는 서강대 학생들

 

 

 

      2. 1965년 한 · 일협정 반대투쟁과 서강

      1965년 들어 정부는 한·일회담을 강행하여  1월 18일 한·일 본회담이 속개되었다.  2월 17일에는 한·일기본조약 가조인을 위해 일본 외상이 방문하게 되자,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다시 고조되었다.  이때 ‘한국학생총연합회’는 일본 외상의 방문을 저지하기 위해 시청 앞에 모여 김포공항까지 시위를 하며 나아갔다.  서강대학에서는 당시 학생회장이던 김암(경제3) 등이 이 시위에 침여하였다.  이들은 김포공항으로 가기 전 지금의 인공폭포 부근에서 검거되었다.
      4월 들어 한·일협정 반대투쟁이 격화되고 휴교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학생들의 반대투쟁은 식을 줄을 몰랐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6월  22일에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맺어졌다.  이에 대항한 전국의 학생과 시민들은 연일 시위를 갖고 단식투쟁을 벌였다.  서강대학에서도  6월  22일 부터 성토대회를 갖고 학생회관에서 단식투쟁을 펼쳤다.  22일 시작된 단식투쟁은  23일에는 전교생이 가담하였다.  이후 조기방학에 들어가자 반대투쟁은 수그러졌고,  8월에 들어서 위수령이 발동됨에 따라 서강대학에서의 한·일회담 반대투쟁도 더이상 확대되지 못하였다.
      이처럼 서강대학의  6·3 운동은 적은 학생 수,  엄격한 학사운영 등으로 활발하지 못하였다.  그 활동도 학생회 대표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964년 몇 차례의 시국강연회와  1965년 단식투쟁 등에 전교생이 죠배한 경험은 이후 서강
대학의 학생운동이 뿌리내렬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