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 장 숙명여자대학교 6·3운동
1. 정치적 상황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한국정치는 다소 안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기만적 ‘민정 이양으로 집권한 박정희군사정권은 정치, 경제 등의 측면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키고자 일련의 회담을 전개하였는데, 이 당시 정부의 자세가 너무나도 굴욕적이어서 국내 정치인뿐만 아니라 양식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우려와 비탄을 금치 못하였다.
대학생들도 정부의 저자세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명하기 시작하였다. 1964년초부터 소규모로 학생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같은해 3월 한국학생총연합회가 결성되면서 한·일굴욕외교 반대시위가 거국적이며 조직적으로 전개되었고 3·24데모와 6·3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정부는 학생들의 데모를 진정시키는 정책으로 계엄령을 내렸으며 학내에 형사를 투입하여 감시와 회유를 일삼았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정책이 학생들의 반발을 사기에 이르렀다.
1964년 1학기는 6월 3일 내려진 계엄령으로 조기여름방학을 맞아 학생들의 데모는 다소 누그러진 듯이 보였다. 그러나 가을학기부터 다음해인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국회비준반대데모에 이력까지 대학생들의 시위는 격렬했고 이에 대응하는 정부의 태도도 강경해 부상자가 속출하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하였다.
6·3 학생운동은 4,19혁명 이후 학생들이 정부의 대일정책 수행에 있어서 국가이익을 우선시하고 대일외교자세를 당당히 하도록 거국적으로 의사표명을 한데 그 역사적 의의가 크며, 이 시기에 숙명여자대학교의 학생운동은 여자대학으로서는 최초이며 최대의 규모로 전개되었다.
2. 숙명여대의 학생운동 태동
1963년 9월 13 일 대강당에서 새로운 총학생위원회 선거를 치러 총위원장으로 이경숙(정외3)이 선출되었고 부위원장으로 배민자(가정3)가 당선되었다. 새로 선출된 14대 총학생위원회가 주축이 되어 숙대는 애국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1963년 11월 9일 정경대학 정치외교학과 주최로 ‘제 1 회 전국 남녀대학생 정치외교 학술토론대회’가 전국 25개 대학에서 46명의 발표자와 질의자가 참석하고 수 많은 방청객이 본교 대강당을 메운 가운데 개최되었다. 이 토론대회의 의제는 ‘중소분쟁이 아시아에 미치는 영향, ‘한국 민주주의의 진로’, ‘한국에 있어서의 비례대표제의 제 문제’, ‘미국의 아시아정책에 대한 문제점’ 등이었는데 발표자 모두가 진지하게 각자의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질의자의 예리한 질문에 막힘 없이
응답하여 대학생들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 토론대회의 의제는 당시의 당면 문제들로서 방청객들도 끝까지 방청하였고 대학생들의 한국정치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해가 바뀌면서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일련의 회담이 답보적인 상태에서 돌연 타결국면으로 돌아섰는데 이 당시의 정부의 자세는 국민이 납득하기 어렵고 석연치 않아서 많은 반발을 사기에 이르렀다. 이에 야당과 재야인사 그리고 학생까지 정부의 저자세에 대하여 강력한 비판을 하였으며 소규모적이고 질서정연한 학생시위가 수차례 거듭되었다.
소규모적이고 산발적이던 학생운동이 거국적인 성격을 갖기 시작한 것은 한국대학총연합회가 결성된 후부터였고 이때부터 한·일굴욕외교 반대데모가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회장은 이건환이었고, 부회장은 이경숙이었다.
3. 3·24 한·일회담 반대데모 참여
1964년 3월 24일 전국적인 한·일회담 반대데모가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났다. 이는 정부가 일본과의 회담에서 보인 태도가 제 2의 을사보호조약을 연상하게 하여 마침내 학원으로부터 가두로 쏟아져 나와 분노의 행진을 하게 하였던 것이다. 회담에 임하는 우리의 입장과 주장을 국민에게 충분히 설명하지 않고 정부가 일방적으로 숨기는 듯한 인상을 주면서 회담타결을 서둘렀던 데에 데모발생의 원인이 있었다.
한·일회담 반대데모에 나선 학생들은 한·일회담의 필요성 자체를 부인한 것이 아니라 이 회담의 진행방법과 내용에 있어서 첫째, 민족긍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할 것, 둘째, 36년 간에 걸쳐 수탈된 우리의 피해를 최대한 보상받을 것, 셋째, 우리의 풍요한 어장을 최대한 확보 보장할 것, 넷째, 차관이나 기타 형태에 있어서 일본독점자본의 차입을 봉쇄하고 우리의 민족자본 육성에 불리한 것은 일체 배격할 것 등을 주장하였다.
숙명여자대학교는 총학생위원장 이경숙을 중심드로 부위원장 겸 문리대 위원장 배민자, 정경대 위원장 조초강, 약학대 위원장 정형숙, 음악대 위원장 최현숙, 학예부장 김태자, 신보부장 서정자, 교양부장 한정신, 사회부장 장봉자, 총무
홍진희, 체육부장 이금주, 서기 김영순, 조정자, 섭외부장 한영복, 그외 이명자, 서혜숙 등 학생회가 주축이 되어서 숙대 내의 학생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들은 대학가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대강당에 학생들을 모아서 한국대학총연합회의 성격과 왜 우리들이 정부에 대하여 이렇게 반대하는 데모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가에 대해서 여러 차례 모임을 가져 학생들로 히여금 건강하게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게끔 하였다. 숙대의 학생운동은 순수한 애국적인 발상이었고, 그 결과 학생들의 대대적인 호응을 얻었으며 한마음이 되어 정부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명하는 데 학생들이 동참하게 되었다. 이 거국적인 데모에 대다수의 숙대생들이 침여함으후써 여대로서는 최초로 학생운동에 침여한 효시가되었다.
3월 25일자 『숙대신보』에 서민숙은 ‘한·일관계의 문제점’이란 글을 실어 학생들에게 한·일회담 반대데모의 의의를 설명하고 있다.
3월 31일 박대통령의 초청으로 각 대학 총위원장들과의 면담이 청와대에서 있었다. 이 자리에서는 숙대 김순식 총장과 이경숙 총학생위원장이 참석하였으며 한·일회담에 관련된 정부의 입장을 듣고 학생들의 애국적 발로에서 비롯된 데모의 참뜻을 전했다. 이와 동시에 한·일관계의 브리핑을 위한 학생대표와의 모임이 중앙청 제 1회의실에서 있었다. 여기에 숙대대표로 김태자(국문4), 최현숙(음악4), 서정자(국문4)가 참가하였으며 정부는 한·일관계에 관련된 제반 문제를 설명하였다.
이와 같은 정부의 태도변화는 학생들의 데모가 일반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고 있음을 알고 학생들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다.
4. 한·일 국교정상화 강연회 개최
학생회 주최로 정부실무자와 야당의원을 초청해 한·일 국교정상화에 관련한 강연회를 대강당에서 개최하였다. 이는 학생들이 어느 한편의 입장만을 고집하기보다 객관적으로 현 사태를 판단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며 학생들의 적극적인호응을 얻기 위한 행사의 일환이었다
4월 1일 제 1차 한·일 국교정상화 강연회가 대강당에서 열려 전교생이 운집하였으며, 연사는 전 한·일회담 대표단의 일원인 김용식 무임소장관이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역사적 행로 및 극동에 있어서의 위치와 역할을 서두로 현재 굴욕외교 반대데모로 학생들의 감정이 고조되어 있는 한·일회담 주요내용에 대한 설명을 하였다.
그 세부적 조항으로 재산청구권, 어업협정,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 선박반환, 평화선문제 등이 거론되었다. 김용식 씨는 국제적 관계에 있어서 최인접국으로 가장 원만해야 할 일본과의 감정이 서로 대립된 것은 유감이라고 말하였고, 앞으로 학생들은 올바른 권익을 위하여 정당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잘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데 협력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일주일 뒤인 4월 9일 제 2차 한·일 국교정상화 강연회가 대강당에서 개최되었고 이날도 역시 전교생이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연사로는 민정당 대변인인 김영삼 의원이었고, 그는 한·일회담에 대한 충분한 이해 및 확고한 자세의 필요성을 강조한 다음 현행 대일외교의 맹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였다. 특히, 일인 상사의 침투를 시급히 제지하지 않는 한 대일경제협상은 유명무실할 뿐이라고 역설하였다. 그의 강연에 대한 조행자, 이경숙의 질의에 김 의원이 답변한 후 국민의 긍지를 저버리지 않는 난국타개책을 강구할 것을 다짐하는 것으로 강연회의 막을 내렸다.
5. 임시휴교 및 4,19기념식
정부는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점차 열기를 더해가자 4월 18일부터 24일까지 일주일 간 임시휴교조치를 내렸다. 이는 반대데모에 대한 대비조치로 취해진 임시방편이었는데 오히려 이 진정책이 의외의 부작용을 초래하게 되었다.
임시휴교령이 내린 다음날인 19일 숙대 교정에서 총위원장 및 4개 단대 위원장을 비롯한 숙대생 600여 명이 침여한 가운데 4,19 네 돌 기념식을 가졌다. 이 기념식 후 본교생들은 전국 22개 대학 대표학생들과 수유리 4월혁명기념탑에 모여 4월 영령들의 추도식을 거행하였고 이 자리에서 숙대 총학생위원장이며 한총련 부회장인 이경숙이 추도사를 하였다.
임시휴교 중인 4월 22일 오후 3시 30분 김순직 총장은 학생간부와 약 30분 동안 면담을 하였다. 개교 26주년 청파축전을 성공리에 마친 것을 치하하였고, 지난 3월 24일 이후 거의 연일 학생데모가 일어나고 있음에 대때 학생들의 의사는 이미 충분히 반영된 것으로 믿어지므로 학생들의 우국심은 좋으나 지나친 행동은 삼가도록 거듭 당부하였다.
휴교 마지막날인 24일 오전 10시 30분 문리대 사학회가 주최한 ‘한·일관계 세미나’가 대강당에서 열렸다. 사학과 학생들의 연구 발표회로 고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한·일관계를 되새겨보며 현 시점에서 한·일관계를 재조명하여 우리의 자세를 확고히 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6. 제 2회 전국남녀대학생 정치외교 학술토론대회
개교 26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총학생위원회가 주최하고 정치외교학과가 주관한 제 2회 전국남녀대학생 정치외교 학술대회가 5월 7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 대강당에서 열렸다. 이날 대회에는 전국 10여 개 학교가 참가하고 20여 명의 학생이 출전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심사위원으로 위촉된 분들은 민병기 교수(고려대), 문창주 교수(성균관대), 박봉식 교수(서울대), 백도광 교수(연세대), 신기진 교수(동국대), 강병규 교수(중앙대), 이명식 교수(경희대), 이방
석 교수(건국대)와 숙대 정요섭 교수와 한상무 교수였다.
각계의 비상한 관심과 기대 속에 예상한 대로 이날 학술대회는 성황리에 치러졌다. 숙대 김 총장은 격려사를 통해 현재 국가적 위기와 난관에 즈음하여 이와 같은 시국적인 학술토론대회를 개최하고 한국의 정치 및 외교의 문제점을 제검토하게 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라고 하였다.
의제로 선택된 ‘한·일 국교정상화에 관한 제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한 설전이 전개되어 한·일국교의 맹점이 낱낱이 지적되고 국민의 자세 및 그 해결책을 제시되는 등 참신한 학구적 분위기로 예년에 볼 수 없었던 진지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이 대회에서 토론된 내용을 간추려보면 한 · 일간의 기본관계, 안전보장을 위한 군사협조, 청구권문제, 평화선문제, 교포의 법적 지위문제, 경제협력문제 그리고 독도문제 등이었다.
학술대회 등을 통한 토론의 장을 마련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어느 한쪽으로 편향되지 않고 스스로 폭넓게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학생회의 주도로 숙대 내의 분위기는 굴욕적인 한 · 일회담 반대를 내세우는 한총련과 유대하여 함께 시위를 하는 것에 적극적으로 찬성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정보계 형사가 캠퍼스 안에 무상출입하였고, “석사과정을 밟는다”는 비난을 받았을 만큼 거의 학교 내에 상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학내 형사들의 감시로 도저히 6·3시위에 관련한 성명서 작성을 할 수 없게 되자 학생회간부의 집을 근거지로 밤을 새워가며 성명서 작성과 시위에 관련된 세부지침을 마련하였다.
7. 5·25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 개최
· 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굴욕외교반대 학생데모가 일어나 전 국민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던 3·24 이래 계속되던 학생데모 가운데 일부는 자칫 사회의 공기를 무겁게 하고 학생들의 의로운 뜻에 오류를 범할 기세였으므로 한총련에서는 전국 총학생위원장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에서 이러한 데모를 완화하기 위한 행동을 하기로 하고 5월 25일 전국적으로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를 열도록결정하였다.
한편 5월 25일 오전 11시 숙대 대강당에서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를 열기로 하였는데 그날 오전 돌연 총학생위원장 이경숙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중앙학생위원회에서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였다. 이경숙이 경찰에 연행된 것이 알려지자 교내 공기는 한때 긴장하였다. 오후 이경숙 총학생위원장이 석방되자 5시부터 난국타개총학생궐기대회를 열었다.
전교생이 참석한 이 자리에서 이경숙 총학생위원장은 현 시점에서는 대학생의 자세가 이성적이며 보다 애국적이어야 한다고 이 대회의 취지를 말하였다. 총궐기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장내는 숙연하였으며 학생들의 얼굴은 긴장하고 있었다.. 현실을 직시하고 의로운 학생들의 동향에 직접 간접으로 성원을 아까지 않았던 숙대생들은 난국타개구국선언문, 결의문,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등을 열렬한 박수로써 채택하였다.
이날 궐기대회에서는 배민자 문리대 위원장의 ‘행동강령’ 낭독이 있었으며 정형숙 의꽤 위원장의 선언문 낭독에 이어 장봉자 사회부장의 대국민 호소문이 낭독되었다. 그리고 조초강 정경대 위원장의 구국 비상결의 선언의 낭독에 전교생 박수로써 찬성 을 표하였다.
궐기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캠퍼스는 조용하였으며 궐기대회는 국민의례 개회식 등으로 시작하여 질서 있게 진행되었다.
8. 6·3 한·일굴욕외교 반대데모
한국대학총연합회는 6월 3일 오전 각 대학별로 집회를 가진 다음, 그날 오후 광화문에서 서울지역 전체 대학들이 집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정사항에 따라 숙대에서는 6월 3일 대강당에서 대대적인 집회를 가졌으며 이 모임에서 총학생위원장인 이경숙이 그동안 밤을 새워 몰래 작성한 성명서를 낭독하고, 정외과 김말숙의 힘찬 구호선창으로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며 캠퍼스를 뛰쳐나와 집결장소인 광화문으로 향했으나 학교 교문 앞에서 완강한 경찰의 저지로 무산되었다.그리하여 각 과별 또는 개별적으로 집결장소인 광화문에서 모이기로 합의하고 해산하였다.
수만 명의 학생이 운집한 광화문에서 이경숙 총학생위원장의 주도로 숙대학생들도 구호를 외치며 적극 시위에 침여하였다. 집회하는 동안 형시들은 계속 사진을 찍고 경찰들은 학생들의 데모를 강경하게 저지하여 부상자가 생기기도 하였다.이 당시 경찰들이 학생들을 호냥}여 발포를 할 것이라는 루머가 돌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데모열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즈음 숙대 김순식 총장은 한용희 사무처장과 함께 지프를 타고 집결장소인 광회문으로 나와서 무고한 학생들이 시위 도중 부상을 당할까 염려되어 총학생위원장인 이경숙을 설득하여 숙대학생들을 해산시키고 이경숙을 강제로 차에 태워 학교로 향했다. 이 시위의 핵심인물인 이경숙 총학생회장이 사라지자 숙대생들은 구심점을 잃고 우왕좌왕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하였다.
이 와중에도 용산경찰서 소속인 모형사는 학생회 임원인 서정자와 김태자에게 사진이 찍혀 지명수배가 될 것이니 피신할 것을 알려주었다. 이 두 학생들은체포딩할까봐 시위를 중단하고 학교로 돌아와 대강당에 숨어서 하룻밤을 지새웠다. 그날 밤을 무사히 지낸 두 학생들은 형사들의 눈을 피해 집으로 돌아갔다. 다행히도 그 두 학생들은 지명수배가 되지 않아서 학생회 활동을 하는 데 크게 지장을 받지 않았다.
한편, 학교로 이끌려간 이경숙 총학생위원장은 총장의 배려로 형사대가 총장실을 덮쳤을 때 총장실 캐비닛에 숨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미 지명수배가 된 총학생위원장을 학교측은 교내 목공소 톱밥 속에 숨겨 하룻밤을 지내게 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 학교측은 옷과 선글라스를 가지고 변장을 하도록 도와 주었고, 감시의 눈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지명수배되어 서울에서 지낼 수 없었던 이경숙은 정국이 다소 조용해질 때까지 지방 친척집에서 머물렀다. 일주일이 넘어 사태가 수습된 듯싶어 서울로 돌아온 이경숙은 한총련의 집합장소였던 종로 여왕봉다방으로 나갔다가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경숙 총학생회장은 종로경찰서에서 3일 간의 구류를 지내면서 취조를 당하였다. 그동안 숙대 김순식 총장은 이경숙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찰서로 달려와 이경숙의 신분을 보증해줌으로써 이경숙이 석방되는데 일조를 하였다. 형사들의 취조는 3일 간 계속되었는데 이경숙 총학생위원장이 좌파의 이념적 단체에 속한 학생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져 석방되었다.
9. 한·일회담 학생데모에 관한 설문조사
『숙대신보』는 한·일회담 학생데모에 관한 설문조사를 하여 6월 4일자 특집으로 내놓았는데,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이며 진보적인 기획이었다. 그 당시 『숙대신보』는 3·24학생데모가 도화선으로 작용하여 지속적이고 조직적이며 전국적인데모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상기하여 3·24학생데모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고 판단, 여러 가지 면에서 분석 비판하려는 시도로 이러한 특집을 마련하였다. 또한 이후에 일어날지도 모를 여러 가지 학생데모의 성격을 규정하는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예견하였다. 『숙대신보』는 이 연구가 전체 대학생이 아니라 서울시내 10개 대학을 대상으로 한 일부의 의견이며, 질문의 내용이 보다 넓지 못했다는 점에 대한 자각도 잊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결과를 밝히는 것이 곧 사회의저변을 밝히고 앞으로의 방향제시를 하게 될 것으로 확신하였다.
조사내용은 (1) 3·24데모의 찬성 정도와 성공도, (2) 3·24데모의 원인 --- 한·일회담에 대한 정부시책의 찬부 및 그 이유, (3) 한·일회담에 관련된 정치적·경제적 문제의 분석, (4) 3·24데모의 연장 필요성의 유무와 4,19데모와의 관련, (5) 데모에 대한 경찰의 태도이며 다섯 가지 문제에 따라 19개의 문항을 설정하였다.
조사대상은 이번 데모의 주동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서울시내 10개 대학교 숙대, 서울문리대, 고대, 연대, 이대, 성대, 중대, 경희대, 외국어대, 명지대 학생 총 1,800명을 대상으로 실시했으나 실제로 표집된 것은 전체 86퍼센트인 1,548명이
었다. 조사실시기간은 1964년 4월 20일 ~ 5월 15일(25일 간)까지이며 수집된 자료 처리기간은 5월 16일 ~ 5월 30일(15일 간)까지였다.
위의 조사내용에 의한 19개 문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문 1) 이번 학생데모(3월 24~28 일)에 참가여부, (문 2) 3·24데모가 일어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문 3) 이번 데모가 민주적인 방법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문 4) 3·24데모에 찬성하는 정도, (문 5) 한·일회담에 대하여 알고 있는 정도, (문 6)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한·일회담의 찬성 여부, (문 7) 현 정부가 추진하는 한·일회담에 ‘아주 찬성한다’, ‘찬성하는 편이다’라고 표시하였다면 그 이유는, (문 8) 만일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편이다’, ‘아주 반대하는 편이다’라고 표시했다면 그 이유는, (문 9) 한·일회담에 미국이 개입해야 한다고 보는가, (문 10) 한·일회담에 대한 외교적 비밀을 공개해야 한다고 보는가, (문 11) 한·일회담에서 정부가 취하는 태도가 저자세라고 보는가, (문 12) 현재 밝혀진 일본에 대한 청구액은 무상 3억, 유상 2억, 민간차관 1억 모두 합해서 6억인데 그 액수를 어떻게 보십니까, (문 13) 3·24데모가 어느 특정 정당의 정책이나 주장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가, (문 14) 현재 한국에 주재하고 있는 일본의 각종 기업체는 철수해야 한다고 보는가, (문 15) 평화선문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문 16) 앞으로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데모가 계속될 필요가 있는가, (문 17) 과거 4,19데모와 3·24데모의 성격을 비교하면, (문 18) 이번 데모가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문 19) 데모가 일어났을 때 경찰이 취해야 할 태도는?
위 문항에 대한 연구결과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3·24데모의 찬성 정도와 그 성공도
굴욕외교 반대, 일인 상사의 철수를 요구하던 3·24데모는 대체로 민주적인 방법이었다고 생각하는 편이며 이 데모를 대단히 찬성하고 있다. 또한 이 데모의 결과에 대하여는 성공도 실패도 아니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성공적인 편이었다는 반응도 상당히 높은 비율을 보였다.,
(2) 3·24데모의 원인·
한·일회담에 대한 정부시책의 찬부 및 그 이유 : 한·일회담에 대하여 즉 회담의 진전 및 내용을 대체로 알고 있기는 하나 자세히는 알지 못하고 있으며 현재 정부가 추진하는 한 · 일회담을 반대하는 경향이 크다.
한·일회담에 대한 정부의 시책을 찬성하는 이유로는 “어차피 한·일간에 국교가 수립되어야 하므로”, “경제적 부흥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늦어질수록우리에게 불리하므로”의 순위로 나타나며, 반대히는 이유로는 “경제적 침략이 두려워서”, “외교가 너무 저자세이므로”, “평회선을 침범할 위험이 있으므로”의순으후 반응하였다. 즉, 3·24데모의 원인은 일본의 경제적·정치적 침략, 현 정부의 불신, 외교가 저자세 외교라는 이유를 나타내었다.
(3) 한·일회담에 관련된 정치적, 경제적 문제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정치적 문제 : 한 · 일회담에서 현 정부가 취하는 태도는 확실히 저자세라고 보고 있으며 회담에 관련된 외교적 비밀은 특별한 것을 제외하고는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 한·일회담에 대한 미국의 개입문제는 거의 대부분이 개입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평화선 문제는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는 강한반응을보이고 있다.
경제적 문제 : 대일 재산청구권 및 차관문제에 있어서 무상 3억, 정부차관 2억, 민간차관 1억 모두 합해서 6억。이라는 액수는 대단히 부족하다는 반응을 보이고있다.
(4) 3·24데모의 연장 필요성의 유무와 4,19데모와의 관련
대다수의 학생 3·24데모는 상황에 따라 계속될 필요가 있다고 하였으며 어느 특정 정당이나 정책에 영향받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다. 과거 4,19학생데모와 이번 3·24학생데모의 성격은 “다르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며 비슷하다는 반응도 적지 않은 비율을 보이고 있다.
(5) 데모에 대한 경찰의 태도
평화적인 데모가 되도록 호위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상 설문조사결과가 다소 거칠기는 하지만 데모의 주체자인 대학생의 관점과 태도를 보여주었다는 면에서 매우 주목할 만하며 역사적으로도 대단히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10. 정부의 사태수습
정부는 6월 3일 오후 9시 40분 대통령 공고 제 11호로 오후 8시를 기하여 서울시 전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포고 제 1호로 데모의 본거지인 대학과 각급학교에 무기휴교령을 내렸다.
계엄령 이튿날 아침 10시가 지나자 사복형시들이 학생과 직원을 앞세우고 이른 새벽부터 나와 도서관과 연구실에서 열심히 책을 보던 학생들을 무조건 붙잡아갔다. 교내에 있던 학생들의 검거소식이 전해지자 학교로 문의전화가 쇄도했고 학교에 등교하던 학생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또한 계엄령이 내려진 후 학생신문에 대한 검열은 전보다 더욱 심해졌고, 삭제당하는 기사가 많아져 다른 기사로 대체하거나 마감시간이 지난 경우에는 빈공란으로 신문을 발행하기도 하였다.
계엄령 이후 휴교된 학교는 자동적으로 하기방학으로 들어갔으며, 이에 따라 학생들의 시위는 점차적으로 힘을 앓었다. 문교부는 학생들의 집단적인 행동을 제재하기 위하여 8월 3 전국대학 총학장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 여러가지 대책을 강구하였고 학생지도에 필요한 사항을 세부지침으로 마련하여 각 대학에 하달하였다.
이 세부지침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학생의 대외교섭활동 억제
학생들의 의사는 직접 행정부나 사법부에게 전달하지 못하며 학교 당국의 조치를 거쳐 계통을 밟아 전달하게 하고 학교 딩국은 학생들이 개별적으로 또는 임의로 대외교섭활동을 하는 일이 없도록 엄격히 지도할 것.
(2) 학생단체(서클)활동의 지도
불건전한 단체의 가입을 억제하고 학술연구, 사회봉사 등을 목적으로 하는 건전한 학생단체는 적극 육성, 지원하며 등록된 단체 중에서도 조직목적과는 판이한 활동을 전개하는 불순한 단체는 해체하고 건전한 단체는 지도교수로 하여금
책임 있는 지도를 하게 할 것.
(3) 학생지도의 철저
사제지간의 인간적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교수 전원이 학생을 분담지도 또는 개별지도 할 것
(4) 애교정신의 함양
애향심, 애국심의 본바탕이 되는 애교심의 유발을 위해 학교 환경정리, 교실, 연구실, 실험실 등의 정리에 힘쓸 것.
(5) 학생자치 운영의 합리화
임원선거와 회비의 지출 등에 불미스러운 점을 없애기 위해 회장과 부회장은 간선제로 할 것과 회비지출사무의 철저한 감독 등을 시달했다.
이와 같은 문교부 시책에 대해서 『숙대신보』의 사설들은 연이어 학생들의 정치활동에 대한 범위와 당위성 그리고 학생들의 집단활동을 통한 민주적 사고와 능력 향상의 타당성을 논하기도 하였다. 특히 문교부가 지시한 학생지도내용은 너무 상세하고 철저하며 간섭의 성격을 띠어 학원이 자주성을 상실하게 될 수도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높았다.
11. 새로운 총학생위원회 탄생
휴교가 끝나고 새로 시작한 2학기에 새로운 총학생위원회가 탄생되었다. 9월 2일 대강당에서 전교생이 모여서 투표를 통하여 선출된 총학생위원장으로는 성영혜(사학3)가 선출되었고 부위원장 김경자(약대3), 정경대 위원장 박경자(상학
3), 음대 위원장 황성자(음악3)가 각각 선출되었다. 이들 중 정경대 위원장인 박경자는 1965년 전국 대학생들이 결성 한·일협정 비준반대 각 대학연합체에 숙대 대표로 침여함으로써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 숙대의 참여를 도모하였다.
12. 한·일학생 심포지엄
1965년 3월 10일부터 16일까지 7일 간에 걸쳐 한국아시아 친선회와 일본의 아시아문제협의회의 주최로 신문회관에서 열린 한·일 양국 학생대표들 심포지염이 개최되었다. 여기에 숙대대표로 정경대 위원장인 박경자가 침여하였다. 이 심포지엄에서 다루어진 의제는 ① 평화선과 어업협정, ② 교포 법적 지위, ③ 문화재 청구권문제, ④ 무역불균형문제, ⑤ 양국의 장래와 아시아문제 등이었다.
한·일 국교정상화 문제로 떠들썩한 때에 일본학생들과의 심포지엄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 심포지엄에 참석했던 박경자는 3월 25일자 『숙대선보』에서 일본 학생들이 한국을 후진성을 면치 못한 나라로 인식하고 있으며, 한·일 국교정상
화는 한국이 일본에게 경제적 도움을 얻기 위해서 구걸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의 성급한 태도는 오히려 일본국민들로 하여금 한국을 경제적으로 이용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또한 이 당시의 일본학생대표들의 구성이 모호하여 사회주의자도 있었고 모든 질문에 대하여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를 보인 학생 그리고 한국을 이해하거나 한국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지닌 일본학생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하는 등 한·일 양국간의 묵은 감정이 젊은이들에게도 남아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양국의 주역이 될 대학생들의 심포지엄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정치인들의 간섭없이 자유로이 의견교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능한 한 많이 갖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기고하였다.
13. 한·일협정 비준반대데모
1965년 1학기는 한국의 대학사상 유례없이 다난하고 기구했던 시기였다고 볼수 있다. 4월 19일이 다가오자 각 대학에서 일어난 한·일협정 반대데모는 최고조에 이르렀고 그 결과 대부분의 대학은 학업의 정상화가 어려워 대체로 일주일 가량 휴교를 하였다. 5월이 되어서 학원은 다시 정상궤도에 오르고 학생들은 수업에 열중하여 휴교의 상처를 아물게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6월이 되어 정부의 한·일협정 비준 강행태세에 따라 또다시 학원은 소용돌이치기 시작하였다.
성토대회와 데모가 잇달아 계속되었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각급 학교는 긴급대책으로 조기방헨속칭 정치방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던 중 6월 22일에는 한·일협정이 정부에 의하여 일본 동경에서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이에 학생들은 한·일회담 비준반대데모를 전국적으로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숙대는 6월 23일 오전 11시 전교생이 대강당에 모여 성토대회를 가졌으며, 6월 24일 오전 10시경 또다시 전교생 1천여 명이 ‘민주주권 짓밟은 조인비준반대’, ‘한·일회담을 백지화하라’ 등의 플래차드를 들고 교정에 모여 데모를 벌였다. 교정에 모인 학생들이 다시 대강당에 들어가 성토대회를 열 계획으로 데모에 돌입하자 교문을 봉쇄하고 학교 당국이 강력하게 만류하여 학생들은 교정에서 연좌데모를 벌였다. 연좌데모에 참여했던 일부 학생들이 후문으로 빠져나가 만리동 일가까지 진출하였으나 대기중인 경찰기동대의 저지로 가두에서 연좌데모를 벌이다가 교수들의 만류로 26 일의 단식투쟁을 결의하고 해산되었으나 곧바로 휴교조치가 내려져 학교 내로 학생들이 들어가지 못하여 단식투쟁은 좌절되고 말았다.
7월이 되어 정부가 조인한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국회에 상정되었으며 국회의 심의를 받게 되었다. 국회에 상정되자 국내의 정치정세는 긴빅해졌으며 여당의 강행통과와 야당의 지연작전이 맞섰던 것이다. 이러한 국내정세와 맞물려 학생들의 데모가 더욱 격렬해지며 교수들도 비준반대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7월 12일 오전 10시 서울대학교의 구내교수회관 마당에 모여 17개 대학의 교수 354명은 ‘한·일협정비준반대재경교수단’(가칭)을 조직하였고 “한·일협정의 내용을 분석 검토한 끝에 이 협정이 우리의 민족적 자주성과 국가이익에 막대한 손실을 가져올 뿐더러 장차 심히 우려할 사태가 전개될 것이 예견되어 그 비준을반대한다”는 선언서를 채택하였다. 고대 이항녕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의 모임은 임시의장단(대표 조윤제 교수)을 선출하고 교수들의 협정 비준반대운동이 비정치적이며 민족주의적인 문제라고 규정하고 앞으 이 운동을 영구적이고 전국적으로 벌이기로 합의하고 서명을 하였다. 여기에 서명한 숙대 교수로는 김삼수 교수와 이능우 교수를 비롯한 여러 명의 교수가 있었다.
휴교로 인하여 학생들이 학내에서 집회를 할 수 없게 되자 대학들간의 연합데모가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여기에 숙대 학생대표들도 침여를 하였다. 7월 15일 을지로 2가 대성빌딩에서 개최하기로 한 ‘한·일협정 비준반대 제 1차 대학생궐기대회’가 경찰의 저지로 약 한 시간 가량 늦어진 낮 12시 15분경에 열렸다. 대학생 약 1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학생대표들은 “제 2의 을사보호조약을 초래하지 않도록 국민여론에 귀를 기울여달라”는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과 국회의원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낭독했다. 또한 7월 21일 오전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을 벌여온 6개 대학 (숙대, 고대, 동대, 이대, 연대, 서울대) 학생회장단은 국회 여야의원 175명 개개인에게 비준저지를 촉구하는 서한 175통을 각각 전달했다. 학생대표들은 그 전날인 20일 밤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나선 교수단과 연합전선을 펴서 그 선봉에 서서 투쟁을 계속 하기로 결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적극적인 반대데모에도 불구하고 8월 10일에 한·일협정은 공화당 단독으로 국회에서 통과를 하였다. 그리고 윤 문교부장관은 8월 10일 오전 한·일협정 비준을 둘러싸고 대학생들의 데모사태가 계속된다면 각 대학의 방학을 연기하라고 권장할지도 모른다고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숙대, 서울대, 고대, 동대, 연대, 건대, 중앙대, 그리고 이대 등 각 대학학생대표 들이 ‘한 · 일협정 비준반대 각 대학연합체’를 구성하고 8월 10일 오전 9시 반 서울시내 동국대 교정에 모여 비준반대 성명서를 발표하고 조약폐기와 국회해산을 위해 오는 12 일 오후 2시 서울문리대 교정에서 ‘매국국회 해산촉구대회’를 강행하기로 하였다. 이날 학생대표들은 6개 항목으후 된 성명서를 통해 ① 매국협정을 페기하라", ② 현 국회를 즉시 해산하고 비준반대 국회를 성립시키라', ③ 야당은 의원직 사퇴·탈당·해산 등 모든 수단을 즉각 실천하고 일부 변절분자를 민족의 이름으로 매장하라고 주장했다. 이날 무장경찰관이 교문 밖에 대기했었으나 충돌 없이 해산했다.
8월 14일 ‘한·일협정 비준반대 각 대학연합체 ’는 ‘매국문서무효선언’을 발표하고 학생들은 한·일협정이 비준되더라도 이를 인정치 않고 그 폐기를 위해서 극한 투쟁을 전개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날 참가한 서울시내 대학 대표들은 서울대, 중대, 고대, 연대, 숙대, 동국대, 이대 그리고 건대였다. 이 연합체는 “일당 국회에 의한 한·일협정의 비준은 세계정치사에 일대 오점이며 조국멸망의 전주”라고 비난하였고 “매국문서의 무효화와 매국반역자들을 매장시키기 위해 끝까지 투쟁”하기로 결의하였다. 학생대표들은 경찰의 철저한 감시로 연합행동이 불가능하므로 개학이 되는 대로 각 대학교 별로 개별적인 투쟁을 전개하기로 합의하기도하였다.
한편 학원은 8월 20일을 전후등벼 l 학기말 시험을 보기 위뼈 다시 개학하게 되었다. 그러나, 조용한 가운데 학기말 시험을 치르지 못하고 한·일협정 국회통과의 불법 여부를 문제삼아서 다시 성토대회와 데모가 시작되었다. 점차로 격화되는 데모로 인하여 학생과 경찰의 충돌은 매일 계속되었고 급기야는 8월 25일 무장군인의 고대 침입사건이 일어나 각 대학은 최고의 흥분과 혼란 속에 빠졌으며 더욱이 위수령의 발동으로 군대가 데모진압에 나서는 사태를 야기시키고 말았다. 8월 27일 오전 11시 45분 고려대 대강당에서 서울시내 13개 대학(숙대, 서울대, 고대, 연대, 이대, 경희대, 중대, 동국대, 한양대, 건국대, 명지대, 외대) 대표들과 각 대학의 학생 약 1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학원방위대학생 총궐기대회를 가졌다. 이 대회에서 한·일협정 즉각 파기와 국회해산, 무장군인의 학원난입 등에 대한 공개사과를 요구하였으며 구속학생 석방 등을 요구하였다. 이날 학생들은 학원의 자유를 방위하기 위한 대학방위대 를 조직하였다.
학생들의 반대데모가 더욱 격렬해지자 정부는 데모주동학생과 배후조종자에 대한 일체 검거에 나서 28, 29일 양일 간 33명을 검거하였고 그중 19명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구속했다. 숙대 정외과 4학년 김선옥 양이 검거대상에 올랐다. 또한 문교부는 각 대학 총장에게 데모, 성토대회 등 주동학생을 엄중 처벌할 것을 지시하였고 이를 어기는 교수에 대해서도 조치를 취할 것을 강력하게 지시하였다. 각 대학에서 데모주동자로 구속된 학생들에 대한 징계가 늘어났다.
14. 6·3사태가 지니는 역사적 의의
1964년 초기부터 1965년 8월까지 계속된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데모와 한·일협정 비준반대데모는 4,19데모와 또 다른사적 의의가 있다. 6·3사태는 일본이라는 국가와의 국제적 관계에서 국가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것으로 민족 자존심의 표출이었다. 이 당시 데모에서 나타난 구호들은 한결같이 정부의 굴욕적인 태도에 대한 질타와 함께 자주적인 외교전개에 대한 바람이 포함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일굴욕외교 반대데모는 일제하의 반항적 민족주의를 계승한 바탕 위에서 우리의 외교를 격조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켜 세계속에서 고립되지 않는 자유, 복지, 번영의 민주적 민족국가를 반석 위에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6·3사태는 강대국 중심의 양극화시대에서 한국 민족주의가 나이기야 힐 방향을 제시힌 역사적 전횐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군사독재정권의 계속적인 정권유지 욕구에 의한 파행으로 한국 민족주의는 방향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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