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학생운동사

제3부, 제 14 장 연세대학교 6·3운동

63동지회 2024. 2. 26. 19:51

제 14 장 연세대학교 6·3운동

      1. 햇불을 올리다

      1964년 3월 24일 오후 신촌골 독수리가 거센 날갯짓으로 대일굴욕외교 반대운동의 햇불을올렸다.

      이날 연세대학교에서는 총학생회(회장. 안성혁 행정 4)가 주최하고 학내 서클인 한국문제연구회가 주관한 시국강연회가 오후 2시부터 대강당에서 열렸다.  당대 최고의 지사로 꼽히던 장준하 씨와 함석헌 옹이 초청돼 먼저 장준하 씨가 한·일회담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이어 함석헌 옹이 역사의식에서 본 한·일회담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펴 학생들의 열띤 호응을 얻고 있었다.
      강연이 진행되고 있는데 갑자기 총학생회장 안성혁이 단상의 함 옹에게 양해를 얻고 마이크를 인계받았다.  안성혁은 지금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가 대일굴욕외교 반대시위를 벌이기로 했다면서 연세대학교도 대일굴욕외교에 대한 우리의 명백한 의사를 밝히자고 외치자 강연회에 참석했던 학생들이 일제히 강당을 박차고 나가 백양로를 거쳐 삽시간에 교문 앞 굴다리에 3 천여 명이 집결했다.
      이렇게 한순간에  3천여 명의 대규모 시위대가 형성된 것은 강연장의 학생  1, 500여 명이 캠퍼스를 한 바퀴 돌며 매국적인 한·일회담을 즉시 중단하라는 구호와 함께 연세대 학생의 일치된 의견을 보이자고 권유한 것이 주효했기 때문이었다.

전국 대학생의 울분이 터진 1964년 3월 24일 오후 연세대 학생 3천여 멍이 경잘기동대의 저지를 뚫고 서대 문 굴레방다리까지 진출했다가 수 많은 인근 주민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트럭에 실려 강제연행되고 있다.

 

      이와 함께 강연회를 주관한 한국문제연구회는 강연회 뒤에 틀림없이 시위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시위를 주도할 학생들을 선정해 시위대 중간 중간에서 구호를 선창하도록 하는 등 면밀한 준비를 했기 때문에  3·24 한·일회담 반대시위에 나선 대학교 가운데 가장 많은 학생의 침여가 있었다.
      허를 찔린 관할 서대문경찰서와 마포경찰서는 뒤늦게 신촌로터리에 150여 명의 경찰이  2중 3 중의 저지선을 펴고 시위대의 시내 진출을 막았다.  오후 4시 20분 평화적인 시위대를 경찰이 곤봉과 발길질로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이 과정에
서 선두의 20여 명이 머리가 터지는 등 피를 흘리게 됐다.  선두학생의 부상에흥분한 시위대는 이때부터 투석으로 맞서 30여 분 동안 격렬하게 무장경찰과 충돌했다.
      500여 명의 학생들은 골목길로 빠져 이대 입구로 나가려 했지만  300여 명의 무술경관과 맞부딪쳐 부상자가 속출하자  이대 입구에서 연좌데모에 들어갔다.
      5시 30분 시내 진출이 어렵다고 판단한 시위대는 충분한 의사표시를 했으니 해산하라는 서대문경찰서장의 종용에 학생회장 안성혁을 내세워 연행학생의 즉각적인 석방과 부상학생에 대한 치료를 요구했고 학생처장 김찬국 교수를 통해 당국이 이를 수락하자 애국가를 부른 뒤 학교로 되돌아가 해산했다.
     3월  24일의 데모로 최하용{도1), 이상갑t철4) 등  17명이 부상해 세브란스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고  78명이 경찰에 연행됐다.  이상열(정3) 등 64명이 서대문경찰서에,  김호근(국3) 등 14명이 마포경찰서에서 조시를 받은 뒤 각서를 쓰라는 경찰의 요구를 거부하고 버렸는데 안성혁이 연행학생을 대표해 데모를 했다는 확인서를 써주고 통금이 가까운 밤  11시 40분에 석방돼 대부분 학교에서 밤새 경찰의 시위진압 방식을 성토하고 굴욕외교에 대한 반대 투지를 불태웠다.
     3월  25일 전날의 함성과 열기에 들떠 있던 연세대 학생들은 노천강당에서 있었던 조의설 부총장의 채플이 끝나자마자 그 자리에서 정법대학의 정치외교학회,  법학회,  행정학회 등 3학회의 공동 주최로 대일굴욕외교 성토대회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선언문과 결의문,  대통령과 국회의장,  전국 대학생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하고 3천여 명이  7대의 분대로 나누어 신촌로터리와 노고산 버스 종점을 거쳐 북아현동,  서대문을 거쳐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했다.
      전날의 폭압적인 경찰 저지를 상기했던 학생들은 경찰의 적극적인 제지가 없자 태평로까지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고 국회 앞에서 연좌데모를 벌이며 학생대표와 정부 간의 회담을 기다렸으나 회담에서 별다른 결론을 얻지 못했다는 학생회의 보고를 받고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즉각 중단하라는 학생들의 요구에 대한 국회의장의 책임 있는 답변을 요구했다.
      연대생들은 오후 2시 40분에 이효상 국회의장과 양 부의장이 연세대학교 학생 데모대 앞에서 학생들의 요구를 정부에 그대로 건의하겠다는 말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이 의장의 만세 삼창을 따라 부른 뒤 종로 2가와 남대문로를 거쳐 원호처 앞에서 오늘의 평화적 거사는 큰 결실을 거둘 것이라는 김찬국 학생처장의 격려의 말을 듣고 만세 삼창과 구호를 부른 뒤 해산했다.

      선언문
      국가는 백년대계요 민족은 인격체이다. 민중은 역사의 바탕이요 대학은 민족양심의 최후 보루이다.  우리 연세대학교는 아래 사항이 관철될 때까지 서명운동과 더불어 범학생운동,  대대적 국민운동을 전개시킬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1. 민족긍지를 상실한 대일굴욕외교를 즉시 중단하라.
      1. 백만 어민의 생명선이요 국방의 절대선인 평화선을 그 알량한 청구권과 바꾸기 전에 한·일관계의 근본적인 해결책을 강구하여 국민 앞에 명시하라.
      1. 4,19이념과 민족자립경제의 반역적 %닥재벌을 처단하고 그 재산을 국가에 환수뼈 민족자본화 하라,

1964년 3월 24 일
연세대학교 총학생회

 

      결의문
      갈가리 찢겨 죽어만 기는 우리 동포에게 우리 학생들이 이제 또다시 한 번 줄 것은 오직 힘찬 결의와 과감한 행동이다.       우리에게는 3·1정신을 이어받은 4,19의 젊은 혼이 알알이 살아 있다. 총칼의 울타리 속에 동포를 몰아넣은 현 정부는 무엇이 부족하여 36년의 굴욕적인 소와 말의 생활에서 흘린 애국선열,  3천만의 선혈과 통곡이 채 가시기도 전에 만신창이 된 이 나라 이 민족을 이제 또 다시 누구에게 넘기려는가?  굴욕과 반예속의 역사를 또 한 번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우리 현 한일회담의 조기 타결이나 우리 자신의 힘을 보여주지 않는 매국적 회담을 결사 반대한다.  이에 우리 연세대학교  5천 건아는 감연히 학창을 뛰쳐나와 전 민족에게 우리의 힘찬 결의를 엄숙히 고한다.


      결의사항
      1. 국민 의사 무시한 매국적인 한·일회담이 중단될 때까지 우리는 투쟁을 계속한다.
      2. 3천만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일보도 양보할 수 없다.
      3. 악덕재벌을 타도하고 민족자본을 육성하라.

      4. 양식인의 의사를 비인도적인 무력으로 짓밟지 말라.
      5. 감금된 궐기 학생은 즉시 석방하라.
      6. 4,19정신에 위배되는 모든 정치적 망동을 삼가라.

연세대학교 학생 일동


      구호
      1. 매국적인 한·일회담을 즉시 중단하라.
      2. 3천만의 생명선인 평화션을 사수하라.
      3. 제 2의 이완용을 즉시 소환하라.
      4. 악덕재벌 타도하고 민족자본 이룩하자.
      5.  4,19는 주시한다 위정자여 각성하라.


      2.  3·24와 연세대학교

      3·24 한·일회담 반대데모는 이미 오래 전부터 총학생회를 이끌면서 한국문제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던 안성혁이 고려대학교와 서울대학교 학생회와 연대해서 준비해왔던 것이었고 연세대학교의 시국강연회도 이를 위한 준비운동으로 계획됐던 것이었다.
      이때까지 연세대학교는 부르주아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시국문제에 대해 소극적인 편이었다. 그러나 1962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처음드로 대학생들의 시위가 된  3·24대일굴욕외교 반대운동에서 연세대학교는 과거의 이러한 인식을 한꺼번에 씻어버렸고 이후의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의 뚜렷한 한 주류로 떠오르게 됐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연세대의 각 단과대 학생회가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하나가 돼 움직일 수 있도록 단결됐고,  3·24 이전인  1963년 10월에 조직된 한국문제연구회가 총학생회 산하 단체로 등록해 끊임없이 학내외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학생회의 진로를 우리 사회의 병든 곳과 우리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을 열도록 독려했기 때문이었다.
      연세대학교 한국문제연구회는 62년 가을 학기가 시작되면서 복학생인 김만규(정3),  김용서(정3),  어수영(정3) 등이 오건환(행1)과 오시회(五時會)란 스터디그룹을 만든 것이 모태가 돼 발전한 학내 서클이다.
      이들은 하루에 적어도 5번 이상 책을 입고 5시간 이상 공부를 하며 날마다 오후 5시까지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한다는 의미로 오시회를 만들어 도서관 구석에 고정석을 마련해놓고 책과 씨름하며 공부하고 읽은 책에 대해 토론하고 매주 금요일이면 문과대 지하실의 어두컴컴한 강의실에서 정기적인 세미나를 열거나 밤늦게까지 수경원(현 교육과학원 터) 잔디밭에서 시국문제에 대한 열띤 토론으로 민족과 그 시대 학생의 진로를 찾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또 도서관에 드나들 때도 그룹 멤버가 한꺼번에 움직여 다른 학생들에게 자극을 주고 적극 침여시키는 등 학내 기풍을 공부하는 연대로 빠규는 운동을 폈다.  여기에 적극적인 동조를 했던 학생 가운데는 역시 복학생인 진덕규(정3),  이인원(정3)과 전웅(정3) 등이 있었고 한능수(대학원생) 등 대학원생들도 열심히 죠k겨했다.  오시회의 뒤에서는 당시 정법대학 정외과 강사였던 한홍수 교수가 버티고 서서 정신적 지주로 이들을 지도했다.
      오시회는 63년 안성혁이 총학생회장이 되자 이해 10월 김찬국 학생처장과 문상희(신학과) 교수를 지도교수로 해서 한국문제연구회로 발전적 해체를 하면서 정식으로 학생회 산하 단체로 등록을 했고 영향력을 확대하고 클럽 초기 기반을 다지기 위해 총학생회장 안성혁을 초대 회장으로 앞세워 학생회의 실질적인 진로와 운동방향을 제시하는 이념 그룹으로서 64년  3·24데모부터 그 이후의 연세대 학생운동의 중심권이 됐다.
      창립총회에서 클럽의 활동범위를 순수한 학문 도야를 위한 것으로 제한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활발한 토론을 벌이기도 했으나 김용서,  어수영,  오건환 등이 행동 없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고 지금 시대는 학생들에게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고 강력히 주장해 한국문제연구회가 연세대 학생운동의 모체가 될 것을 스스로다짐했다.
      한국문제연구회는 총학생회 총무 이유경(행3),  섭외 이용(상3) 등 총단 멤버가  대거 참가했고 정법대 학생회장 김동렬(행3),  서시주(정3),  윤영오(행2),  박동혁(법3),  이영철(철3),  김영남(교육4) 등 행동력과 조직력을 두루 갖춰  3·24 예비지휘부를 형성했다.  이밖에도 이건춘(행2),  권문용(2),  김광수(행2),  정준성(대학원1)이 주요 멤버였다.
      연세대학교가 처음부터 강한 연대의식과 결속력을 가지고 한·회담 반대시위에 앞장설 수 있었던 것은 정법대부터 문과대,  이공대는 물론 가정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조직력을 갖춘 한국문제연구회가 총학생회를 강력히 지원해  안성혁이 운동을 주도할 수 있게 받쳐줬기 때문이었다.
      이후 한국문제연구회는 65년 한·일회담 비준반대운동은 물론 3선개헌 반대,  교련집체훈련 반대운동과 일련의 민주화운동의 본산이 됐고 고비마다 정부의 압력에 따라 해체됐다가 다시 발족해 지난 93년 창립 30주년 기념식에서 당시 송자 총장으로부터 저항시인 윤동주와  3·1 정신,  4,19를 계승히는 연세의 정신적 지주이자 문제 서클이라는 치하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연세대학교는 총학생회와 한국문제연구회 그리고 학생회 각 산하단체가 똘똘 뭉쳐 일사불란하게 대일굴욕외교 반대운동을 펼 수 있었으니 특이한 것은 ROTC가 단복을 입은 채 집단으로 시위에 참가하는 초유의 사태도 있었다.


      3.  6·3까지

      3·24 이후 연세대학교는 6 .3 에 이력까지 서명운동과 단식,  시위를 계속해 어느 대학보다도 강력한 투쟁을 계속했다.
      이는 총학생회장 안성혁이 주도적으로 각 대학의 학생회 지당}들과 연대투쟁을 모색했고,  2대 한국문제연구회 회장을 맡았던 오건환과  3대 회장 박영남,  4대 회장 이영철,  정준성이 고려대,  서울대의 각 서클과 강력한 연대를 펼치면서 연대 내 운동에 계속 불을 지폈기 때문이었다.
      3월 30일 학생대표로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한 안성혁은  4월  2일 그 결과보고를 하면서 총학생회 명의로 한·일회담 타결에 있어 국민의 의혹을 사고 있는 모든 사실을 국민 앞에 밝히라는 등  4개항의 결의를 담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와 별도로 민족정기 앙양운동과 왜색일소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1964년 6·3운동 당시 신촌역에서 경 잘파 일진일퇴의 공빙전을 벌이고 있는 연세대 데모 학샘들.


      4월 10일에는 한국문제연구회 주최로 박관숙 정법대학장과 한·일회담 타결에 가장 깊숙이 관여해온 김종필 공화당의장을 연사로 대강연회를 열어 3천여 명의 학생들은  3시간이 넘도록 김종필 의장을 상대로 진지하고 끈질긴 질문공세를 펴기도 했다.  이에 앞서 안성혁에게  8일 불온문서와 미화  100달러가 든 우편물이 배달돼 딩국에 신고한 바 이같은 우편물은 타대학 학생회장에게도 배달된 것으로 판명돼 학생들에게 많은 의혹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5월부터 연세대학교는 당시 윤인구 총장이 간여한 부정입학문제가 불거져 나와 총학생회는 총장퇴진운동에 몰입하게 되고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주로 정법대 저학년을 중심으로 한국문제연구회 회원들이 시위와 서명,  단식운동을 병행하면서 계속하게 되고 서서히   6월 3일의 결전을 향해 치닫게 된다.

      6월 3일 서울시내 각 대학의 공동투쟁에 적극적인 침여를 계획한 연세대학교는 오전부터 정법대 학생들이 어깨동무를하고 교내를 돌며 학생들의 시위 참여를 독려,  삽시간에 3 천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보슬비가 내리는 신촌로터리와 이화여대 정문 앞으후 나뉘어 경찰과 치열한 투석전을 벌였다.
      서울시내 전역의 시위사태로 병력이 모자란 경찰이 주춤하는 틈을 타 단숨에 아현동로터리까지 진출했으나 완강한 저지를 받아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홍익대생까지 가세한 시위대는 경찰의 최루탄이 고갈되는 바람에 오후 2시 반경에 충정로 파출소의 유리창을 모두 부쉬버리고 광화문을 거쳐 국회의사당과 중앙청방면으로 양분해 연좌데모와 박정희 대통령의 하야  한·일회담의 즉각 중단을 요구하는 시위를 계속했다.
      중앙청에서는 청와대로의 진출을 기도하다가 수경사 군인들의 최후 저지선 앞에서 더이상 어쩔 수 없어 되돌아섰으나 일부 연대생들은 계속 중앙청 담 위에서 군인들과 대치하기도 했다.
      이날 데모는 법학회 회장인 박동혁과 석진철(법 4),  오건환 한국문제연구회장등이 주도해 선언문과 결의문 낭독, 구호선창을 맡아 처음부터 중앙청 앞까지 선도하는 등 현장을 지켰다.
      연세대 시위대는 밤늦게 계엄선포가 있을 것이란 정보와 즉시 귀가하라는 당국의 가두방송을 듣고서야 완전 해산한 뒤 이날 선포된 계엄과 당국의 시위 주동학생 수배로 일제히 피신을 했는데  63년 학생회장 선거에서 안성혁에게  3표차로 탈락한 바 있는 석진철은 1년여 동안 법학과 도서실을 굳게 지켜오다가  6월 3일 끓어오르는 분노의 대열에 앞장서게 됐고 이로써 안성혁,  박동혁과 함께 검거돼 내란죄 혐의로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연세대학교는 3·24부터  6·3까지 전국 대학의 한일회담 반대운동 과정에서 가장 강력한 투쟁을 벌였던 것에 비해  6·3 계엄 이후 당국에 구속된 사람은 비교적 적었던 편으로 위  3명 이외에 더 이상의 구속지는 없었다.
      계엄 해제 이후 석진철이  9월 7일,  안성혁이 12일,  그리고 박동혁이  2주일 후에 각각 보석으로 석방돼 모두 졸업을 할 수 있었다.


      4. 1965년 ‘한 · 일 협정 가조인’ 반대 4월항쟁 운동

      1965년 4월 12일 낮 12시 연세대생  2천여 명이 교내 대강당에 모여 한·일협정 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민족주체성을 망각하고  1백만 어민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포기한 정부의 태도를 규탄하고 한·일협정 가조인의 무효를 주장하고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1. 내 영토,  내 주권인 평화선을 사수하라.
      2. 대학 내의 건전한 학풍을 저해하고 상호 불선을 조장하는 학원사찰을 즉각 중단하라.
      3. 60만 재일동포를 대한민국의 주권국민으로 처우하라.
      4. 당리당략에 따라 국민을 기만,  선동하는 여야 정치인들은 각성하라.
      5. 매판자본으로 성장한 악덕재벌들은 사이비 문화사업으로 국민을 기만하지 말라.
      6. 시내 각 대학 대표가 모여 결성한 평화선사수 학생투쟁위원회에 연대 대표로 참석한 오건환(정법대 4년) 등을 즉각 석방하고 그동안 한·일회담 반대데모에 연루되어 자퇴당한 학생 전원을 복교시켜라.


      4월 13일  12시 30분경에 다시 대강당 앞에 모인 1,200여 명의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데모에 나서 낮  1시 20분경 이대 입구까지 진출했으나 최루탄과 곤봉 등으로 무장한  500여 명의 경찰 기동타격대와 충돌하여 경찰의 무차별 구타를 받았다.  이훈(법2) 등 2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고 데모를 만류하던 김대준 학생처장도 경찰곤봉에 맞고 발길질에 상처를 입고 데모 중 경찰과 충돌하여 중상을 입은 학생 3명과 함께 세브란스병원으로 후송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한편 거리에서 데모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경찰의 무차별 데모 학생구타현장을 보고 경찰에 야유를 보내고 데모학생들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내기도 하였다.
      4월 15일에는 구속학생 석방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구속학생 석방과 제적학생 복교추진 서명운동을 벌여 1,500여 명의 서명을 받아 학교 및 정부 당국에 제출하였다.

1965년 6월 14일 연대 학생들이 한·일회담 반대를 위해 정치가여 1 모름지기 역사의 증언을 들어라!"라는 구호를 붙인 채 단식투쟁을 빌이고 있다.


      학생 데모 저지에 강경 방침으로 선회한 박정권은 대부분의 대학과 일부 고교까지 휴교 조치를 내린 가운데 연세대,  서울대,  이화여대,  숙명여대,  한양대, 건국대 등 6개 대학은 휴교조치 기간을 다른 대학보다  1주일 이상 연장조치한 가운데 학생들의 학교 교문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였으나 연일 학생들이 산발적으로 교내에 모여 성토대회를 개최하였다.

 

      5. 한·일협정 비준반대 6월투쟁 운동

      1964년도 선출된 총학생회장단은 1965년  1학기말까지가 임기이나  65년 4월의  한·일협정 가조인 반대운동을 주도했던 주동학생들의 구속과 수배 등으로 학생회 활동이 마비되어(의과대학 제외)  1965년도 2학기에 실시할 예정이던 총학생회장단 선거를  6월 8일 조기 실시해 새로운 총학생회장단 조직의 진용을 갖추고 보다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65년도 총학생회 상임위원 및 집행부 명단
      상임위원
      총학생회장 및 공과대학 학생회장 권상운{건축공학과 3년)
      의과대학 학생회장 김영수(본과 3년)
      총학생부회장 및 상과대학 학생회장 정의웅(경영학과 3년)
      문과대학 학생회장 홍현삼링(국문학과 3년)
      정법대학 학생회장 유기인(법학과 3 년)
      이과대학 학생회장 박완식(화학과 3 년)
      신과대학 학생회장 김상도(신학과 3 년)
      음악대학 학생회장 조인원(성악과 3 년)
      가정대학 학생회장 김연희(식생활과 2년)
      칩행위원
      총무부장 박영기(건축 3년)
      기획부장 현해인(건축 3년)
      섭외부장 김용섭(상학 3년)
      학예부장 김 철(국문 3년)
      생활부장 황성노(상학 3년)
      공보부장 정 소(건축 3년)
      체육부장 김명수(상학 3 년)
      서 기 박승규(국문 3년)

 

      이렇게 하여 새로 구성된 총학생회가 주최한 (한·일협정 비준 반대) 성토대회가  6월 21일 12시 50분경 대강당에서 교양학부 학생과 의대생까지 침여하여 그 동안 집회 중 최대규모인  3 천여 명의 학생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되어  ‘누구를 위
한 조인이냐.  3 천만은 통곡한다’,  ‘한·일회담 분쇄하여 팔려가는 조국 찾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출발하여 이대 입구까지 데모대가 진출했으나  600여 명의 경찰기동대가 발사한 최루탄과 무차별 곤봉세례에 학생들은 투석전으로 맞서 저
녁  7시까지 게릴라식 투쟁이 계속되었고 이 바람에 김두환(경제과 2년) 등 2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100여 명의 학생이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되었다.
      14년 간 끌어온 한·일협정 정식 조인식이  6월 22일 오후  6시 일본 수상 관저에서 거행키로 확정된 이날 국내에서는 학생들의 데모를 막기 위해 무장군인이 출동하고 15,000여 명의 무장 경찰기동대가 대기하고 있는 상태였다.  한편 연세대에는  4월 휴교조치에 이어 두번째 휴교조치가 내려진 상황 속에서도 1,500여 명의 학생이  11시에 대강당 앞에 모여 어제에 이어 성토대회를 다시 열고 데모대를 몇 개 그룹으로 분산시켜 일부는 이대 입구를 거쳐 아현동로터리까지 진출시키고 일부는 뒷골목으로 통하여 산발적으로 아현동로터리에 모이게 하였다.
      성토대회에 참석한 전원이 아현동로터리까지 진출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목표지점인 시청 앞 국회의사당까지는 진출하지 못하였다.  아현동로터리에서 밀린 경찰기동타격대가  1천여 명의 경찰 병력지원을 받아 흩어지는 학생들까지 무차별 곤봉 난타 및 폭력행사로 학생  35명이 머리가 깨지는 등 중상을 입었고 105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날 경찰의 가혹행위를 목격한 시민과 폭력행사 장면을 취재하던 기자들도 크게 분노하여 모든 신문이 이날의 연대 데모 현장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한편 이날 저녁 정법대 117호 강의실에서는 한·일회담 반대 단식투쟁위원회가 조직되어 “굴욕적인 한·일협정 조인을 즉각 중단하라”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한 바  6월 26일까지의 단식투쟁 학생 중  38명이 졸도하여 세브란스병원에 후송되었고 강제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6월 26일 박대선 총장 주재로 교무위원회를 열고 정부 당국 일방적으로 두 번씩이나 휴교조치를 내리고 조기방학을 명령하는 것은 대학교육 행정의 자율성을 저해하는 처사라는 결론을 내리고  6월 28일부터 정상수업을 재개하기로 결의하였다.  또한 단식 7일째에 접어들었던 단식학생들도 오후  2시 박대통령에게 보내는 호소문과 성명서를 발표하고 단식을 끝마쳤다.
      한편 정상수업 첫날 연세대 교수단은 모든 교수들의 공동서명을 받아  6·21 및 6·22 학생들의 애국적이고 평화적인 시위에 대히여 경찰들의 폭력행사 진압을  “무자비하고 비인도적인 행위”로 규정하고 이를 규탄하는 대정부 항의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가정대학에서는 전 여학생과 최이순 가정대학장이 참석한 가운데 위정자들의 민족주체성 확립을 촉구하는 구국일념기도회를 개최하였다.
      6월 29일 오후 6시에는 의대생 300여 명이 강당에 모여  “정부 당국의 굴욕적자세로 인하여 숙적 일본에 앞으로 문화적,  경제적 침략의 기회를 제공하게 될 정부의 졸속처사를 규탄한다”는 선언문을 발표하고 일본의 경제적 침략을 분쇄하기 위하여 범국민적인 일제상품 불매운동을 결의한 후 그 결의를 모든 국민에게 호소하여 더욱 굳게 다지기 위하여 의대생 200여 명이 흰 가운을 입고  201호 실험실에서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하였고,  그 이후 100여 명의 학생이 가슴에 검정 리본을 달고 단식에 합세하여 단식투쟁에 침여한 학생수는 300명으로 증가되었다.  이들은 단식투쟁이 끝나는 대로 전국 대학생들과 연대히여 제  1단계로 일제상품 불매운동을 벌였다.  그 다음 단계로 일반 시민들을 계몽하여 가두에서 서명운동을 전개하여 범국민적인 운동으로 확산시켜 나가기로 결의하였다.
      6월 30일 오전  8시에는 재야 종교지도자 함석헌 옹이 단식투쟁장인 의과대학  201 호실을 방문하여  “혼의 힘으로 하는 비폭력적인 단식투쟁은 이기게 마련이다.  때가 되면 나도 단식투쟁에 동참하겠다”는 격려 연설을  30분 간 한 후 돌아
갔다.
      한편 이날 데모주동자로 경찰의 수배를 받아오던  1964년도 총학생회장 대행 채희달(화공과 4년)이 경찰에 구속되었다.
      7월  1일 낮 12시 30분 의과대학이 주도한 단식투쟁에 참가한  230명의 학생들은 의대부속병원 외래진료소 앞뜰에서 일본의 경제침략을 분쇄히는 뜻으로 일장기와 일본상품의 소각식을 가졌다.  이날 소각식에는 230여 명의 단식학생들과 교수들이 모두  ‘일제상품 사지 말자’는 표찰을 가슴에 달고 참석하였으며,  교수들과 학생들로부터 수집한 일제 의류와 화장품 및 책 등  200여 점과  ‘메이드 인 재팬’이라고 쓴 나무 허수아비를 함께 불태웠다.
      이날 오전에는 박대선 총장과 다섯 명의 교수들이 단식투쟁 현장을 방문하여 단식학생들을 격려 위로하고 일제상품 보이콧 서명록에 서명했다.  단식투쟁에 참여했던 단식학생들은 이날 낮 12시에 일단 단식을 끝마치고 의과대생들은 일제상품 불매운동 서명을 받기로 결의하고  7월 5일부터 거리에 나가서 100만 명 서명을 받기 시작하였다.  단식학생 중 정법대생 14명은 단식 장소를 정법대 117호 강의실로 옮겨 단식투쟁을 계속하다가  7월 5일 끝마치고 교내 본관 앞에서 일장기 화형식을 가졌다.
      여름방학을 맞아 의과대학 학생회(회장 김영수)가 주창한 한·일협정 비준반대 각 대학연합체(한비연)의 결성에 새로 선출된 연대  65년도 총학생회장단이 주도적 역할을 하기로 내부적으로 의견을 모으고 권상운 총학생회장의 ROTC 하기훈련  참가로 총학생회 부회장인 정의웅(상대 학생회장)과 홍현삼랑(문과대 학생회장),  현해인(기획부장)이 의대 학생회장과 함께 각 대학연합체 모임을  7월 13일 연세대 문과대학장실에서 개최하여 한 · 일협정 비준반대  5대학 연합체를 결성하게 되었다.
      7월 13일 이후 각 대학연합체 모임이 각각 대성빌딩 내 흥사단 강당,  연세대 의대 생화학실,  연세대 건공관 뒷산과 설계실 및 덕수궁 근정전 앞 등에서 수차례 열렸고  5개대 연합체 모임을  10개 대학연합체로 확대하기로 결의하고  8월 10일에는 동국대 교정,  8월 12일에는 서울문리대 교정에서 매국국회 해산촉구대회를 개최한 바 이 대회에 참가한 정의웅, 홍 현삼랑, 현해인 등이 이화여대 총학생회 대표들과 함께 동대문경찰서에 연행된 후 집시법 위반으로 즉결 심판에 회부되었다.
      8월 24일 오전 10시 40분 2,500여 명의 학생들이 교정에서 한·일협정 비준무효화,  한국정치인·경제인의 각성촉구와 일본 국민의 반성을 촉구하는 성토대회를 개최한 뒤  ‘한·일협정 비준을 무효화하라’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나서(아현동로터리)까지 진출하였으나 최루탄과 곤봉으로 지지하는 경찰에 투석전으로 맞서다가 중과부적으로 낮  12시 10분경 일단 해산하였다.  이로 인해 34명의 학생과 3명의 민간인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이날(데모)로 학생과 경찰 쌍방간에 수명의 부상지를 냈으며,  더욱이 낮 12시 15분경 방독면을 쓰고 카빈총으로 무장한 군인  700여 명이 20여 대의 지프와 트럭에 분승하고서 서대문로터리와 신촌로터리 일대에서 연막탄과 최루탄을 쏘면서 위협 시위를 벌이다가 시위를 해산하고 학교 교내로 들어가는 학생들을 붙잡기 위하여 교내에 진입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1965년 8월 23일 한·일협정비준무효를 외치며 아현동 고개를 넘고 있는 연대생들


      8월 25 일 낮 12시경 1천여 명의 학생들은 교정에 모여 한·일협정 비준무효화와 무장군인 학원난입사건을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개최하였다.
      한편 학교 당국은  8월 23일과 24일에 학기말 시험을 안 치른 학생들에게  30일과 31일 양일간에 시험을 치르도록 다시 한 번 연장조치하였다.

1965년 8월 24일 연세대 학생들이 한·일협정 비준무효화 성토대회 를 마치고 서대문로터리까지 돌진 했다가 무장군인들이 20여 대의 트럭파 지프에 나누어 타고 후퇴하는 학생들을 아현동 인덕길까지 쫓 아와 최 루탄과 연막탄을 발사하고 있다.

 

      위수령 발동에 따라 학생데모 사태에 대비하여 야전군 예하 제6사단 일부 병력이 서울에 투입되고,  병력이 증강되고 있는 준계엄상태 속에서도 8월 26일 오전 1시경 2천여 명의 학생들은 교정에 모여 한·일협정 비준무효화와 무장군인 학원난입사건을 재규탄하는 성토대회를 개최하였다.  “무장군인의 깡패적 소행을 규탄,  그 원흉을 엄중 처단하라”는 등 9개 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서 낮 1시,  1천여 명의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데모에 돌입 구호를 외치며 신촌로터리까지 나갔으나  제 2한강교 쪽에서  2대의 트럭에 나눠 타고 온 공수단 복장 차림의 무장군인들에 의해 저지당하여  1시 25분쯤 일단 학교로 물러났다.  그러나 300여 명의 학생들은 다시 동교동 철로변을 사이에 두고 100여 명의 무장군인들과 충돌,  최루탄과 투석전으로 공방전을 벌이다가 오후 2시경 학교 교정으로 물러났다.  이때  2시 15분경  6대의 군 트럭과 스리쿼터에 분승한 무장군인들이 학교정문으로 몰려와 그중 20여 명은 학교 구내를 침입하여 들어오고,  나머지 150여 명은 교문 근처에서 최루탄을 터뜨리며 구경하던 시민과 학생들을 마구 연행해 갔다.  M1 소총에 대검을 꽂고 학교 구내를 침입히여 들어간 50여 명의 무장군인들은 교실과 교정에 있던 학생들이 학교 뒷산으로 달아나자 캠퍼스 밖으로 물러나왔다.
      이날 무장군인들의 학교난입과 데모저지 광경을 취재 촬영하던 『경향신문』 이창환 기자와 『조선일보』 민영식 기자는 무징군인들에게 몰매를 맞아 카메라가 부서지고 필름을 빼앗겼으며,  일본 NHK 한국인 기자도 촬영한 필름을 강제로 빼앗겼다.
      또한 정오경에 학교 뒷산에서 학생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서울시경 경비통신반 소속 김충원 경사를 100여 명의 학생들이 붙들어,  휴대한 무전기를 빼앗고 교내로 데리고 왔다.
      8월 28일에는 검찰이 데모주동자와 배후주동자로 전국대학에서  92명의 명단을 작성, 주동자 모두 긴급체포령이 내려진 가운데 지난  25일부터 서울시경 특별수사반 소속 형사들이 홍현삼랑의 부모를 서울역 맞은편 모처에서 홍군의 행방을 대라고 불법 연행하여 연금시켰다.  그 결과 홍현삼랑은 경기도 오산읍에 소재한 이모집에서  28일 오전 6시경에 서울시경 특별수사반 소속 형사들에게 연행되어 서울로 이송되어 반공법 및 내란선동죄로 입건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집시법 등 위반으로만 구속기소되었고 박완식(이과대학 학생회장)도 홍현삼랑이 검거된 후 며칠 후 검거되었다.
      군동원 등 정부의 강경책으로 학생데모가 한풀 꺾이자 지명수배령이 내려진 데모 주동학생 철저 검거에 나서는 한편 데모를 선동 책동했다고 인지되는 배후자(교수들 포함)를 색출 조처키로 하는 등 강경수단을 모두 동원힘에 따라 한·일협정 비준무효화 항쟁 학생운동은 잠시 주춤해지게 되었다.
      더욱이  65년  9월 4일 데모 요인이 제거될 때까지 연세대와 고려대는 한국 대학사상 최초로 무기한 휴교령이 내려져 마침내 한국 양대 사학은 사상 최악의 위기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정부의 갑작스런 휴업령이 내려진  4일 오전 연세대 캠퍼스는 무거운 침묵과 분노가 뒤얽힌 착잡한 표정이었다.  등록마감날인 이날 무심코 등교했던 학생들은 충격적인 뉴스를 전해듣자 믿어지지 않는 듯 어리퉁절해하며  “그게 정말이냐!"고 몇 번이고 다그쳐 물었다.  교수실에 왔다가 방송을 듣고 슬리퍼 차림으로 뛰어나온 오기형(문과대학 교육학과 과장) 교수는  “국력을 기르는 것은 바로 학생을 기르는 것인데 배움의 길을 막고 어쩔 셈인가” 하고 분통을 터뜨리면서  “나 개인으로는 배우고자 판 학생이 있으면 어느 때 어느 곳에서라도 지도하고 싶다”고 말하고 정부의 학원탄압 강경정책을 비난하였다.
      한편 문교부는  “학생데모의 뿌리를 뽑겠다”는 강경책의 일환으로 데모주동학생은 물론 이른바 정치교수 징계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신학의 쌍벽인 연세대와 고려대에  4일부터 학사감사를 착수하며 검찰과 장학관 등을 양 대학에 파견하였다.
      데모주동자 전국수배령이 내려진 이후 주동자로 지목된 92명의 대학생 대부분이 검거되었으나  10여 일이 지나도록 행방을 모르는 정의웅(경영학과 3년)을 검거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던 서대문경찰서 박모 형사주임 등 4명의 형사들은 9월 5일 밤 10시경 정군의 집을 급습하였다.  정군의 모친과 여동생,  형수 및 조카(2세) 등 4명을 동 경찰서  2층 숙직실로 영장도 없이 불법 연행하여 정군의 행방을 대라고 철야 심문하다가 다음날 아침 불법 연금사실이 모든 신문에 크게 보도되어 물의를 빚은데다,  정군이 가족에게 가혹행위를 하지 않으면 자수하겠다는 전화를 받자 가족들을 돌려보냈다.  정군이 약속대로  9월 6일 밤 12시경에 지수하자 수감시키고 내란선동죄로 기소하였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불구속 기소처분되어 석방되었다.
      한편  9월 6일 밤 시내 모처에서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동국대,  건국대,  국민대 등 서울 시내  6개 대학 학생대표 9명은 모임을 갖고  “정부가 탄압정책만을 고집할 때에는 학생들도 이에 맞서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선언하였다.  학생들은
이날 채택된 비상시국선언을 통해 “정부는 학생들의 정당한 의사발표를 총칼로 억압함으로써 지유대한을 군국대한으로 타락시켰으며 일부 정치인들은 학생과 국민들의 순수한 애국운동을 당리정략에만 이용하는 데 급급했다”고 여야 정치인들은 다 같이 비난하면서 다음 5개 항목의 요구조건을 내세웠다.
      ①  대통령에게 학원탄압의 기수가 되도록 강요하는 청와대 비서진의 책임자와   정일권 내각의 총퇴진을 요구한다.
      ②  순수한 학생들의 외침을 외면하고 경륜 없는 수구정치를 획책하는 봉건잔재와 박정권에 기생하여 매국적 치부를 추구하는 기회주의 집단을 축출하자.
      ③  한·일협정을 계기로 예상되는 일본 신제국주의의 경제,  문화적 침략을 봉쇄하기 위해 학원을 총궐기하자.
      ④ 위압적인 위수령과 행정의 테러적 발악행위인 무기 휴업령은 망국의 첩경이며 내란의 촉구제가 될 것이므로 즉각 철폐하라
      ⑤  구속,  수배,  징계된 학생,  교수,  시민 등을 즉시 석방하라.
      한편 데모주동학생과 정치교수 처벌에 관한 문교부 기한부 지시 마감날인 7일 오전 10시 연세대는 동교 연합 신학대학원 휴게실에서 교육위원회를 열었으나 합동학사감사 때문에 11 시경 아무런 결론 없이 휴회하고 감사가 끝나는 이날 오후 3시부터 다시 교육위원회를 열었으나 다음날 오후 6시까지 문교부에 처벌결과를 보고하기로 연기조치하였다.
      9월 8일 오후 1시 총장실에서  3시간에 걸친 교육위원회를 마친 끝에 문교부에서 지시한 학생 및 교수들의 징계문제에 대해  ‘선학원 정상화 후처벌’이라는 종래의 방침에 대해 “학원 조기정상화에 도움이 된다면 이같은 원칙은 사태에 따라서 유동적이 될 수도 있다”고 신축적인 결론을 내리고 문교부에 통보하였다.
      서울지검 공안부는  9월  9일 오전 서울대 총학생회 운영위원장 이용항(약대 4년)과 연세대 문과대학 학생처장 홍현삼랑(국문과 3 년)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정식 구속기소하였다.  이군은 지난 8월 24일 한·일협정 비준무효화 데모를,  홍군은  8월 22일  “나라를 팔고 축배 드는 매국정권 물러가라”는 등 구호를 내걸고 각각 불법 시위를 벌인 혐의이다.
      휴업령이 해제된  9월 20일 오전,  학생들은 등교하여 만  16일 동안 악몽과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던 교정의 나무 그늘에 모여 앉아 그동안 밀렸던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날 학생들은 정작 휴업령이 풀려 반갑기는 하나  “석연찮은 기분” 이라면서 문교부의 강경한 학원정상화 방안이 화제의 초점이었는데 한결같이 비판적인 태도였고 특히 20퍼센트 낙제 규정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들이었다.  한편 연세대는 20, 21일 이틀 동안 미등록자를 위해 2차 등록을 받고 22일부터 정상수업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한편 정치교수로 리스트에 오른 서석순,  이극찬 등 두 교수가  “나 때문에  6천 학생이 공부를 못하고 있다면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사퇴할 수밖에 없다”고  ‘살신성인’의 자세로 자진 사표를 낸 일과 구속된 홍현삼랑이 “ 나 하나 처벌문제로 학교 교문이 닫혀 있어서는 결코 안된다”고 자퇴원서를 서울 서대문교도소에서 작성하여 학교 당국에 제출한 일 등은 학원의 조기정상화에 도움은 주었으나 스승, 제자 할 것 없이 가슴만을 아프게 했을 뿐  “한·일협정의 본질적 무효화”를 외치던 학생들의 본질적 요구사항은 관철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 가을이 깊어가는 캠퍼스에서 데모 열풍과 정부 당국의 강압정책에 휩째 지친 심선을 가누는 학생들의 가슴속에는 1년 중 거의 절반을 대학문을 닫아야 했던 비정상사태는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말아야겠디는 바람과 그리고 안정되고 평화스런 캠퍼스에서 진리와 자유를 탐구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면서 상처를 어루만지다가 오랜 휴업령 이후 처음으로 정상수업에 들어가 강의가 실시되었으며  ROTC 훈련도 한창이었다.  2학기 추가등록 마감일인  21일까지 전교생의 70퍼센트가 등록을 마쳤는데 학교측은 오는 10월  3, 4일 양일간 다시 추가등록을 접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지난  8월 26일 데모 때 시경 정보과  ‘김 경사 감금사건’과 관련하여 김대준 학생처장을 불기소 처분하였고,  10월 14일에는 한·일협정 비준에 반대한 연세대 교수 박수연(해부학),  이상요(내과),  지헌택(치과),  최홍재(내과) 등 네 교수의 박사학위 승인을  ‘교직자 본분이탈’ 이유로 거부하고  23 명에겐 해외여행을 금지시켰다.
      연세대 총학생회는 지난 휴업령 해제 이후 사학의 요람인 양교에게 가해진 휴업령이란 철퇴를 맞은 상처를 치유하고 자유와 진리의 새로운 학풍 조성과 젊음의 활력을 불어넣어줄 방안을 찾던 중 지난 5년 간 중단되었던 스포츠의 제전인 정기 연고전이 학생들의 사를 북돋아줄 것으로 믿고 연고전을 추진하였다.
      드디어 양교 학교 당국의 승인을 얻어 마침내  10월 22일 저녁 7시 농구,  아이스하키 두 종목으로 일단 불붙기 시작한 전야제를 치른 후  23일 축구,  야구,  럭비대결로 절정을 이루게 되었고 양 대학 학생들은 총학생회 주관하에 연고전이 끝난 후 평화적 가두행진을 하였다.
      11월 18일 주사위는 던져졌다.  학생들의 피맺힌 절규도 숱한 희생도  ‘계란으로 바위 깨기’가 되어 끝내 메아리 없는 외침이었다.  한·일 두 나라 국회는 방법조차 너무나도 똑같은 날치기로 비준안을 통과시켜,  해방 이후 20년 동안 정치·사회적 쟁점이 되어왔던 한·일협정은 사실상 일단락 되어버렸다.
      한·일협정 발표 이후 각 대학의 학생운동은 전환점을 맞게 되어 일본의 대한(對韓) 경제적 침략을 막고 평화선의 유명무실화로 현해탄의 거센 물결을 타고 우리 어로 전관수역 갚숙이까지 밀려올 첨단장비로 무장한 일본 어선단에 대항해 우리 어민들을 보호하자는 사회계몽적인 운동으로 전환하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는 특히 이화여대에서 시작된 경비정  ‘학생호’ 모금운동이 시내 각 대학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확산되어 시내 각 대학 학생대표와 관계 당국자인 언론사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 모금운동이 결실을 맺도록  『동아일보』 응접실에서 좌담회가 개최된 이후 억울하게 납북된  ‘납북어민 구호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연대생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어 큰 성과를 거두고 나중에는 이대생들로 가담했다.  양 대학 대표들의 선상좌담회가 정의웅(연세대 총학생회 부회장), 유중근(이대 총학생회장),  김영회(동림 제 66호 선장)가 참석하여  『조선일보』 이태희 기자의 사회로 열려 대학생들의 새로운  ‘극일’(克日) 운동 및 향후 예상되는 일본의 경제적 침략을 막기 위한 국민 계되뺨導운동이 신문에 보도되고 일반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하여 정치인 및 사회 지도층의 새로운 각
오와 자성을 촉구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정부가 지난 1965년 2월 20일 한·일 기본조약을 가조인하고 대다수 국민들이 거부감을 갖는 가운데 졸속으로 서둘러서  4월 3일에  ‘청구권협정,  어업협정, 교포 법적 지위에 관한 협정’을 일괄 가조인 후에 따라 촉발된 연세대학교의 10개월 간의 길고도 끈질긴 한·일협정 비준반대 투쟁에서 구속 및 불구속 입건된 학생은  총 54명으로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구속 수사중인 학생(65년 9월 20일 현재)
      채희달(화공과 4년),    조정현(행정과 3년),      조수영(행정과 1 년),
      이헌구(법과 1 년),      양재권(정외과 1 년),    이우석(행정과 3년),
      지충인(법과 1 년),     표정환(이공대 3년),      이일하(신학과 1 년),
      김원환(상과 2년),      김원웅{상대 2년)   이상 11 명

      구속기소 학생(65년 9월 20일 현재)
      홍현삼랑(문과대 학생회장),   오건환(행정과 4년),   이용재(법과 4년),
      이범관(정외과 4년) 이상 4명


      불구속기소 학생(65년 9월 20일 현재)
      권상운{총학생회장),          정의원상대 학생회장),        정정덕(정법대 학생회장),
      박완식(이공대 학생회장), 김상되신과대 학생회장),     조종식(행정과 3년),
      최상호(행정과 3 년),         조인영(행정과 2년),            신승기(행정과 3 년),
      진윤용{행정과 3 년),         김대호(화공과 3년),            이용진(건축과 1년),
      황인용{정외과 4년),          윤영오(행정과 3 년),           이영철(철학과 3 년),
      전명준(전기과 4년),          정준석(경래과 4년),            김규도(정외과 3년),
      박성구{정외과 4년),          김태환{법과 3년),               심웅호(신학과 3 년),
      최수일(사학과 4년),         김운준(신학과 4년),            국선환(성 악과 4년),
      김광부{법과 3년),             신희석(정외과 1년),            김성국t정외과 2년),
      유재한{정외과 3년),          김선일(법과 3년),               이근노(정외과 1년),
      김명근(법과 1년),            서성배(행정과 1년),            송광국(법과 1년),
      김형길(전기과 1년),         김철형(법과 1년),               장영수(행정과 1년),
      최두식(행정과 1년),          김용진(행정과 2년),           윤종득{행정과 2년)
     이상 39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