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1964년 6·3데모의 전말
1. 정부의 한 · 일회담 강행과 3 .24데모
1964년 1월 10,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강력한 경제외교를 적극 추진하여 보다 나은 조건하에서 보다 많은 외자를 확보”할 것이며, “미국과 우리와의 관계는 우방 중의 우방으로” “양국간의 연대강화와 일층의 우호증진에 최선을 다할 것”이며, “한·일관계에 있어서는 극동에 있어서의 자유진영 상호간의 결속의 강화로써 극동의 안전과 평화유지에 기여한다는 대국적 견지에 입각하고 동시에 양국간 선린관계의 수립이 상호간 번영의 터전을 마련”함을 감안하여 “한·일회담을 조속히 타결코자 초당적인 외교를 추진토록 할 것이다”라고 언명하였다. 연두교서는 1 장에서 언급했던 한·일회담의 군사·경제적 배경과 한·일협정의 체결의지를 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1월 21일 일본의 이케다{池田) 수상은 새해 시정연설을 통해 “아세아정세의 안정을 위해 일본이 할 수 있는 응분의 역할을 성실히 해나가며,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해 한층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 의지에 가장 먼저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평화선 양보를 반대하는 한국의 어민들이었다. 한·일회담에서 ‘양보’될 어장 및 평화선 문제는 어민들에게 있어 직접적인 생존권 문제였기 때문이다. 어민들은 평화선 양보를 막기 위한 반대운동을 행동화하겠다는 굳은 태도를 보였으, 1월 21일에는 어업단체들이 ‘평회전 사수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2월 10 일 민정당은 김영삼 대변인 이름으로 ‘평화선 양보하는 한·일회담 반대’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성명서는 “한·일 양국의 국교정상화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나, 한 일합방과 같은 국교정상화는 강력히 반대한다. 평화선은 우리의 주권선이며 생명선이다”라고 하면서 “평화선을 양보하는 현재의 태도를 고집한다면 국가이익을 위하여 국민과 함께 범국민적인 반대투쟁에 나서겠다”고 하였다.
어민들과 야당의 반대에 아랑곳 않고 정부가 한·일회담의 ‘3월타결, 5 월조인’으로 조기타결방침을 굳게 세우자 민정당, 삼민회 등 야당은 ‘범야공동투쟁기구’를 3월 6일 결성하여 전국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3월 9일 투쟁
위는 ‘구국선언문’과 ‘경고문’을 채택하고, 야당의 총집결체인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이후 투쟁위)를 확정함으로써 한·일회담의 조기타결을 반대하는 야당의 태도를 처음으로 공식화하였다. 구국선언문에서 투쟁위는 ① 박정권 한·일회담을 즉시 중지할 것을 요구하고, ②대대로 한국에 해를 끼쳐온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 ③ 3천만의 생명선인 평화션을 수호하기 위해 온 국민의 궐기를호소하였다.
3월 19일 오후 2시 투쟁위는 경남중학 교정에서 약 3만여 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대일굴욕외교반대 강연회’를 열었다. 또한 투쟁위는 같은 시간 목포에서 한·일회담 반대유세를 하였다. 이날 유세에는 비가 내리는 중에도 시민 약 2천명모 모였다.
3월 19일에는 투쟁위의 지도위원장이며 민정당 대표최고위원인 윤보선이 “만일 정부가 민의를 무시하고 한·일회담을 기어코 조인, 국회에서 비준이 된다면 나는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구국운동에 앞장서겠다”고 한·일회담 조기타결반대의 결의를 표명하였다. 3 월 15일부터 20일까지 전국 12개 주요 도시에서 대회를 계속해온 투쟁위는 21일 2시 4만여 명의 청중이 운집한 가운데 서울고등학교 교정에서 제 1 차 원외투쟁의 마지막이 되는 ‘대일굴욕외교반대 강연회’를 열었다. 이날 연사들은 “단 3억 불로 평화션을 팔 수 없다” 고, “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대일협상은 일본의 경제식민지화를 초래할 수 있다”, “청구액 27억 불 전관수역 40리를 내용으로 하는 야당측 대안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이날 성토집회의 청중은 대부분이 학생들이었는데, 유세 후 청중들은 학생들의 앞장으로 세종로 네거리까지 진출하여 시위를 벌였다. 한국 내의 투쟁위에 호응하여 ‘재일본한국청년동맹’과 ‘재일한국학생동맹’ 회원들은 동경에 있는 소방회관에서 “굴욕외교를 중지하라라”는 등 경고문을 채택하고 법적 지위 관철을 요구하였다.
한편 집권당인 민주공화당은 21일 야당의 한·일회담 조기타결 반대유세에 맞서 현재 추진중인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 필요성을 역설하고 일반의 지지를 얻기 위한 지방유세에 돌입하였다. 3 월 23 일 민주공화당은 대구유세에서
한 · 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야당의 적극적인 반대투쟁에도 개의치 않고 3월 23 일 김종필은 동경에서 ‘ 5월 초순에 한·일협정이 조인될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였다. 이같은 발언은 이미 타오르기 시작한 투쟁의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고 말았다 김종필의 동경발언이 있은 다음 날인 3월 24 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8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초썩한 대규모 시위투쟁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마침내 2년여에 걸쳐 진행되는 6.3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4일 오후 1시 20분 서울대 문리대생 300여 명이 ‘민족반역적인 한·일회담의 즉각 중지’와 ‘동경 체재 미국 정상배의 즉시 귀국, ‘평화선 사수’ 등을 결의하고 시위에 들어갔고, 법대생들이 이에 합류했다. 오후 3시경에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한·일회담을 거부한다는 것과 김종필의 즉시 귀국을 촉구하는 결의를 하고 시위에 들어갔으며, 연세대생 2,300여 명은 4시 30분경 장준하· 함석헌 선생을 초청한 시국강연회를 끝마치고 교내 시위에 들어갔다.
대광고교생 500여 명이 시위에 들어간 5시 20분을 전후해서는 5천여 명의 학생시위대와 이를 따르는 수만의 시민들로 서울시내가 소용돌이쳤다.
서울 각 방면에서 파상적으로 몰려든 학생들은 국회의사당 근처에서 경찰과 부딪쳤는데, 경찰은 도합 5차례에 걸쳐 60여 발의 최루탄을 발사하였고, 25 차례나 시위군중과 육박전을 방불케 하는 혈전을 벌였다. 이날 시위 현장에서는 다음괴 같은 구호들을 외쳤다..
1. 미국은 한 · 일회담에 간섭치 말라.
1. 한 · 일굴욕외교 반대.
1 ..제 2의 이완용을 소환하라.
1. 나라 파는 한 · 일회담 즉각 중지하라.
서울지역 학생들의 3 .24시위가 확산될 것을 우려한 부산시경은 24일 오후 비상소집령을 내려 각 학교에 경찰관을 배치하는 등 경비태세에 들어갔으며, 대구에서도 황색경보를 내리고 학생들의 움직임을 살폈고, 전남도경도 낮 12시 20분을 기해 황색경보를 발했다 원래 이 경계경보는 공습경보에 앞서 발하는 것이었는데 이날 전남도경은 방공연습을 빙자하여 이 경보를 발한 것이었다.
3월 24일의 시위로 283명의 학생과 5명의 시민이 연행되었다. 엄민영 내무장관은 24 일 밤 학생들이 질서를 문란케 하였음에 유감을 표시하고 앞으로 이런 행동이 일어난다면 1, 2, 3단계로 나누어 가차없이 처벌하겠다고 언명했다.
그러나 25일에는 시위가 서울뿐 아니라 부산, 대구, 전주 등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한·일회담 즉각 중단’의 함성이 방방곡곡에 울려퍼졌다. 서울에서는 중앙대, 연세대, 한양대, 경희대, 건국대, 동국대 등 10여 대학의 학생 약 3만 명이 나서 서대문을 지나 청와대로 집결하였고 여기에 고교생도 가담하였다. 이들은 완전무장한 2개 중대와 경찰의 최루탄 발사에 밎섰다.
전국 경찰의 비상경계 속에서 25 일 오전에는 지방대학으로 시위가 파급되었고, 오후가 되자 서울대생 1 천여 명이 1 시 20분경부터 원남동로터리를 경유하여 종로로 행진, 화신로터리를 지나 을지로 입구에서 시청 앞으로 나가는 가두시위
를 전개했다. 2천여 명의 연대생들도 11시 30분경부터 ‘한·일굴욕외교 반대성토대회’에 들어가 시위감행 여부에 대한 찬반투표를 실시했다 만장일치로 시위감행을 결정한 학생들은 12시 30분 150여 명의 ROTC 학생을 선두로 조를 짜서 교문을 나서 서대문을 지나 의사당으로 향했다. 또한 동국대 500여 명, 경희대 1,500여 명은 종로로 진출했고 중앙대 1천여 명은 중앙청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였으며, 한양대 3,500여 명, 건국대 2천여 명 등은 청와대 입구로 밀려들었다. 시위대는 청와대 부근에서 수도경비사령부 소속군인 2개 중대와 대치했다. 25일시위는 중 고교생을 포함하여 약 4만 명이 침여했다. 이날의 시위는 실로 4,.19 이래 최대 규모로 전개되었다.
25일 오전 정부는 한· 회담 반대 학생시위를 수습키 위해 서울시내 36개 대학 학생대표 92명을 초청하여 수습회의를 가졌으나 모임은 아무런 결론 없이 해산되었다. 학생대표들은 ⓙ 한· 일회담 무조건 중지, ② 체일 대표 소환, ③ 박대통령과의 면담, ④ 연행된 학생의 즉시 석방을 요구하고 관철되지 않으면 극한 투쟁을 전개할 것이라 선언했다. 이에 대해 고광만 문교장관은 각 대학 대표 1명씩으로 구성된 ‘사태수습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우선 연행학생을 석방하는 것이 선결문제라고 주장하여 이에 불응하고 오후 1시경 모두 회의장에서 나와버렸다..
25일 시위사태에 대한 보고를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시위대원들이 외친 구호중에 ① 김종필의 즉각 소환, ②매판자본 악질재벌의 제거 등을 주시하교 김종필의 소환조치 등을 논의하였다
야당은 25 일 국회 본회의에서 한 일회담의 즉각중지와 구속학생의 즉각석방을 요구했으며, 제 변호사협회도 구속학생의 즉시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엄민영 내무장관은 “데모가 평화적。1 아니었다”고 주장하면서 “앞으로 불법적
데모는 엄중조처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민정당과 삼민회는 합동의원총회를 열고 ‘대일굴욕외교 반대 원내투쟁위원’를 구성한다.
26일에도 학생데모는 계속되었다 대학생뿐만 아니라 중·고등학생들도 대규모적으로 시위를 벌였다. 서울에서 시위한 중·고등학생만 약 9천 명에 달했고, 서울을 비롯한 광주, 대전, 대구, 부산 등 전국 11 개 도시에서 6만여 명 이상의 시민들이 거리로 진출하여 경찰과 충돌하였다.
경찰은 청와대 주변에 집결하여 두 겹 세 겹으로 방어진을 치고 있었다. 청와대 주위에 전기철조망으로 바리케이를 치고 헬멧과 방석모로 무장한 군대로 하여금 경비를 서도록 하는 한편, 청와대로 향하는 시내의 주요 포장로에 군대와 경찰을 파견하여 시위대의 진출을 차단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는 속에 박정희 대통령은 26일 정요 한·일회담을 당초의 정부방침대로 밀고 나가겠다는 것을 특별담화로 선언하였다. 박대통령은 날 “대학생들의 우국충정은 이해하나 이 이상의 시위는 외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밝힌 다음, “나는 오늘 학생들의 주장을 명심하고 우리의 주장이 관철되도록 끝까지 노력하라고 한 · 일회담 대표단에 훈령했다”고 말했다. 이어 박대통령은 “시위가 도를 넘는 위법일 경우 다수 국민의 이익과 질서를 위해 정당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함과 동시에, “임기 중 부과된 임무를 확고한 선념과 명확한 목표 아래 추호도 변동 없이 수행해 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박정희정권의 강경·강압대응에도 불구하고, 3월 27일 다시 수만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굴욕외교를 반대하며 거리로 뛰쳐나와 “김종필을 소환하라”는 등의구호를 외치며 7}두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렇듯 나흘째 데모가 계속되자 경찰과 수도경비사의 데모저지방법도 달라졌다. 청와대 근처에만 있던 저지선이 중앙청앞까지 전진했으며, 밤사이 새로 만든 수십 개의 바리케이드가 경기도청 앞 넓은 길에 늘어섰다. 군병력도 훨씬 늘어 삼청동 입구에 완전무장한 군인 2개 소대. 중앙청 정문 앞 2개 중대, 기동경찰대, 무술경관 등이 겹겹이 방어진을 치고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한 · 일회담과 관련된 약간의 정치적 전환이 있었다. 27일 박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동경에서 한 회담을 ‘측면지원’하고 있던 김종필 공화당의장이 소환되고 대표단이 개편됨으로써 대일교섭이 측면채널을 벗어나 공식외 교채널로 복귀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이것은 계속된 학생데모에 대한 박정권의 ‘굴복’임과 동시에 학생데모의 일정한 ‘성과’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성과’는 3 .24시위 이후 줄곧 확대되어왔던 시위를 일시 중단시키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3월 28 일 김종필이 귀국하는 날 성균관대 등 상당수의 대학이 김·오히라 비밀메모의 내역공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으나 김종필이 귀국 후 3 ·24시위를.주도한 서울지역 대학생들은 일단 가두시위를 중단하고 캠퍼스로 돌아갔으며, 지방의 학생들도 학원으로 복귀했고, 30일 오후에는 11개 종합대학 대표들이 박정희 대통령과 면담했다. 1주일 간 계속된 시위가 이렇게 김종필의 귀국과 박정희 대통령과의 면담을 계기로 일시 막을 내리게 된 것은 당시 학생들의 주요한 주장이 한 ·일회담 자체의 거부나 박정권의 타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동아방송은 3 .24주동학생들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3 .24 시위는 ① 박정권의 굴욕적 외교자세에 대한 사전적 경고이며, ② 민족적 주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구국항쟁이며 ③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한국민족의 정당한 경고이며, ④ 현 위정자에 대한 분노에 찬 의사표시이다.
또한 이들은 이를 위한 요구사항으로서, ① 군사혁명 직후 기도하였던 외국차관단을 다시 만들고., ② 실질적인 내핍생활을 제도화하\고 ③ 매판자본을 민족자본화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고, ④ 기존 민족자본을 총동원하여 생산부문에 투자할것 등을말하였다/
학생들의 데모는 한· 회담 자체에 대한 반대라기보다는 굴욕적이기만 한 박정권의 대일자세에 대한 분노의 폭발이라는 측면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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