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학생운동사

제2부, 제 1 장 1964년 6 · 3데모의 전말(4)

63동지회 2024. 2. 7. 14:37

제 1 장 1964년 6 · 3데모의 전말

      4.  6 ·3 데모와 계엄령 선포

      정부는 학생들의 계속적인 항의와 시위에 대해 무력탄압으로 일관하였고, 급기야는 “학생시위가 용공색채가 농후한 서울문리대의 민족주의비교연구회에 의해 조장되고 있다”는 ‘매차시즘적 탄압’까지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이렇듯 정부가 강경책으로 일관하는 사이에 6월이 다가왔다.  6월에 접어들면서 한국의 주요 사회·정치세력들은 한 · 일회담에 대한 찬반 여부에 따라 뚜렷이 두 개의 집단으로 갈라졌다. 학생, 지식인, 언론, 야당, 종교단체와 일반 국민은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강행하는 정부에 대항하여 투쟁전선에 결집했고, 박정권과 그 후원을 받는 기득권 집단은 그 맞은편에 섰다.  이제 어차피 한 번은 이 두 세력 사이에 전면적 투쟁이 전개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6월 1일 오전 11시 반 전북대학 학생 약 500명은 교정에서 ‘난국타개학생궐기대회’를 열고 구속학생 즉시 석방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한 후,  데모에 돌입했고, 같은날 정오 청주대생 400여 명도 “기본권 박탈은 망국행위이며, 5,16 이후 감행된 부정부패를 철저히 규명하라”고 외치고 데모에 돌입한다. 또한 숭실대생 500여 명은 교내 성토대회를 마치고,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군인깡패엄단하라”고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한편 ‘난국타개전국학생대책위원회’의 서울시내 327개 대학 대표 35명은 “직접 대통령을 만나 난국타개를 위한 9개 항목의 주장에 대해 답변을 듣겠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을 연행해온 버스 속에서 단식투쟁을 벌이겠다고 농성하였다.
      시위는 6월 2일 들어 한층 격렬해졌다.  5월 30일부터 단식농성에 들어간 서울 문리대생들은 계속 단식투쟁을 하였는데,  이를 지켜보던 문리대 교수 30여 명은 “학생들이 굶고 쓰러져 있는 모습을 더이상 앉아 볼 수만은 없다”, “학생들의 주장은 관철되어야 한다”는 등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고려대,  서울대,  동국대,  성균관대,  건국대,  경희대,  한양대,  중앙대 등 약 6천명의 학생들은 2일 오전 11시경부터 ‘박정권 하야'와 공포정치 지양을 외치며 데모에 나서 신설동 등 몇 군데서 대규모 경찰대와 충돌하였다 . 그중 고려대생
300여 명은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히여 연좌데모를 벌였으나 200여 명이 연행되어 해산되었다.  이때 중앙청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500여 명의 경찰관과 700여 명의 군인이 집결해 있었다.
      이날 고려대는 “우리는 현 정권의 단말마적 횡포와 처절한 집권욕을 과시할 수 없으며 헌정을 배신하고 정권욕에 광분하는 현 집권자들의 계속적인 집권을 묵시하기에는 너무나 조국의 배고픔을 참을 수 없다.  ······ 전대미문의 가공할 부정, 부패,  불신,  악덕재벌행패,  간악한 이 모든 정치적 퇴페는 행동의 전위에 선 우리들과 전 국민의 과업으로 요구되는 박정권 타도의 이유이다”라고 선언하고, 다음과 같은 구호를 내세웠다.
      ⓙ 주관적 애국심이 객관적인 난국임을 직시하고 박정권 하야하라.
      ② 미국은 가면을 벗고 진정한 우호국임을 보여달라.
      ③ 민족분열 일삼는 독재정권 물러가라
      ④ 배고파 못살겠다 악덕재벌 잡아먹자.
      6월 3일, 학생시위는 전면적으로 확대되었고 초점도 ‘박정권 하얘에 맞취졌다. 이날 아침에 이슬비가 내렸지만 이에 개의치 않고 학생과 시민 약 5만여 명은 서울시내로 몰려나와 거리에 설치된 철조망을 부수고,  최루탄을 발사하는 경찰을 밀어젖히며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경찰서가 피습되고 학생들은 네 군데의 교통관제탑을 점거하여 독자적으로 교통통제반을 조직했다. 학생들은 군용트럭 10여 대를 탈취하여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시내를 활주했고, 연도의 시민들은 행진하는 학생들에게 환호를 보냈다. 그중 수천 명의 시민들은 직접 학생데모대에 합류하기도 하였다.
     서울에서는 한양대 3천여 명, 서울대 2천여 명과 고대 2천여 명,  연대 2천여 ,  동국대  1, 500여 명, 성균관대 1천여 명, 홍익대  1천여 명,  경희대,  중앙대, 숭실대,건국대생들이 시위에 나섰으며,  수원에서는 서울농대 600여 명이 도보로 경수가도를 달려 북상했다.  대전에서도 충남대생 400여 명과 청주상고생 1,500여 명이 성토대회를 마친 뒤 시위를 했다. 데모학생들은 ‘무단정치 박정권은 족을 위해 물러나라’,  ‘썩고 무능한 박정권 타도’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경찰과 충돌하면서 도심을 향해 진출했다.
      서울시내 약 1만 2천여 대학생들은 제각기 교내에서 ‘박정희,  김종필 민생고화형식’, ‘5 ,16 피고 모의재판’ 등과 성토대회를 연 다음 스크럼을 짜고 교문을 나서 분산 약화된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오후 2시 종로, 을지로,  청계천까지 진출했다. . 데모학생들이 지나가는 연도엔 다수의 시민들이 모여 갈채를 보내고 최루탄을 터뜨리는 경찰에게 항의하는 등 수많은 시민들이 함께하였다.
      연세대생 2천여 명과 홍익대생 1천여 명은 대현동을 거쳐 아현동로터리에서 경찰 600여 명과 대치하여 일진일퇴를 거듭했는,  학생들은 경찰에 보급된 최루탄 상자를 탈취하고 충정로로터리까지 진출했으며 2시 25분 충정로파출소 유리창을모두 부줘버렸다.
      성균관대학생 1천여 명은 ‘박정희’와 ‘민생고’ 꼭두각시를 앞세우고 시위하여 한때 경찰과 대치하다 몇 명이 경찰에 연행되자 모두 동대문서를 포위하고 “연행학생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경찰이 학생들을 풀어주었으나 시위대는 계속 도심으로 진출했다.  연도엔 수천 명의 시민들이 구경하려고 모여들어 교통은 완전 두절상태가 돼 버렸다.
      고려대생들은 안암동 입구 부근에 400~500명, 안암동로터리 쪽에 70~80명이 몰려 있었고,  나머지 학생들은 안암동 입구부터 안암동로터리 사이의 골목마다 숨어 있다가 연도에 있던  1천여 명의 시민들과 호응하여 경찰에 투석을 가하였
다.  2시 15분경 안암동로터리에서는 일반 민간인이 학생데모대에 합류하였다.
      이날 오후 2시에는 동국대생 1천여 명, 고려대생 약 200명이 국회의사당에 집결,  연좌데모에 들어갔다.  중앙대생 800여 명과 숭실대생 500여 명은 노량진에서 한강을 건너 광회문에 모여 연좌데모에 들어갔다.  이보다 앞서 1시 40분 흰 가운을 입은 서울대 의대생 약 150명이 구호를 외치다가 청와대 쪽으로 갔으며,  경찰은 l1시 50분쯤에야 달려와 데모대를 둘러썼다.
      동국대생 2천여 명과 서울 음대생 150여 명은 국회의사당으로 진출하려고 달음질치다가 을지로 3 가 로터리에서 경찰 300여 명과 대치했으나,  곧 저지선을 뚫고 을지로 1가를 거쳐 시청광장을 향해 진출하였다.
      충남대 농대생 400여 명도 오전 9시 반 교정에서 학원사찰중지를 비롯한 현 정부 규탄 성토대회를 열고 교문을 나와 시가행진에 들어갔으며,  광주에서도 2개의 대학과 2개의 고등학교 학생 약  1만여 명이 최루탄을 터뜨리는 경찰에 맞서 2개의 파출소와 도청건물,  그리고 경찰이 경비하고 있는 민주공화당 본부에 돌을던졌다.
      한편 닷새째로 접어든 서울문리대의 단식농성은 각 대학으로 번져  6월 3일 현재 서울문리대를 비롯해 법대, 동국대 등 각 대학에서 단식투쟁이 계속되었다.
      6월 3일의 서울 시위에서도 경찰과 학생 쌍방간에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시위대는 “박정권 타도”를 외치며 저지 경찰대와 충돌하다 청와대 쪽을 향해 파도처럼 밀려갔다.  세종로의 시민회관과 유솜건물 앞의 경찰 1차 방어선에 걸려 일단 멈춘 학생과 시민은 약 1 만여 명에 달했다.  오후 3시 10분 학생들이 철조망 1개를  50미터 가량 끌어내고 투석을 하자 경찰은 최루탄을 발사하고 공수부대의 풍차까지 동원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제 2저지선(경기도청)과 제 3저지선(중앙청 정문 앞)을 연달아 돌파하였다.  여기서 데모대원들은 트럭을 탈취하였는데, 건국대 초급대학 농경과 1 학년 이윤식이 이 트럭에 탔다가 떨어져 중상을 입어 결국 7월 2 일 숨지게 된다.
      데모대는 제 4저지선(조달청 앞)으로 밀려들었다가 오후 7시 30분경 경찰과 대치했다. 시위대는 여기서 수경사 군인대열의 강력한 저지로 더이상 진출하지 못하고해산되었다.
      학생들이 청와대 외곽의 방위선을 돌파하고 청와대를 경비하고 있던 중무장한 공수부대를 포위함으로써 6.3시위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학생들이 청와대를 포위하고 있던 밤 9시를 지난 시각에 버거 대사와 해밀턴 하우스 주한미군사령관은미군 헬리콤터를 타고 청와대에 도착해 박정희와 긴급회담을 열었다.  미국 대사관 대변인에 의히여 이때 하우스 장군은 완전무장한 한국군 2개 사단을 서울에 출동시키는 것을 허락했다고 한다.  한·미협정에 의거하면 시위 진압에 군대를 사용하는 경우 사전에 유엔군 사령관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6월 3일 오후 9시 40분,  대통령공고 11호로 서울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은 3일 오후 8시로 소급되어 선포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학생데모의 난동화는 국가기본을 흔들고 밍L국의 씨를 뿌리는 철없는 한탄스러운 일”이라고 말하교 “파국을 예방하기 위한 불가피한 단안을 내리기에 이른 것”이라고 말하였다. 다음은 담화문 요지이다 .
      ... 나는 무엇보다도 나와 정부가 참을 대로 참다가 이 마지못한 결단을 내리게 된 것을 먼저 국민 앞에 밝혀두면서 이 나라 이 민족 발전을 위한 부득이한 조치를 깊이 이해해줄 것을 호소한다 ...... 학생들의 도에 넘치는 현실참여는 ...... 동기여하를 불문하고 ..... . 평화적 시위의 한계를 벗어나 ...... 해괴망측한 방법과 극렬한 언동,  그리고 끝내는 공공시설의 파괴로써 민의에 의해서 선출된 정부도 부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정부는 학생들에게 인내로써 다스리려 했으나 이 이상의 계속은 더욱 사태의 악화를 초래할 것이 예측되어 ...... 파국을 예방하기 위한 효과 있는 사전조치가 절실함을 느껴 단안을 내린 것이다 ...... . 차제에 데모만능의 풍조를 발본색원할 방침인 것을 분명히 해두는 바이다 ..... . 계엄기간 중 난동, 파괴, 불온한 선동,  유언비어 조작을 비롯한 범법행위와 혼란을 틈탄 일체의 공산세력은 단호히 엄단될 것이다 ...... .


다음은 계엄사포고 제 l호 및 제2호 내용이다.


      계엄사포고 제 1호
      1. 옥내외 집회 및 시위를 금한다. 단 관혼상제 및 극장상영은 제외한다.
      2. 언론출판 보도는 사전검열을 받아야 한다.
      3. 일체의 보복행위를 금한다.
      4. 직장을 이탈하지 못한다.
      5.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지 못한다.
      6. 서울특별시내의 각급 대학교와 중 · 고등학교 및 초등학교는 1964년 6월 4일을 기하여 별도지시가 있을 때까지 일제히 휴교한다.
      7. 통금시간을 엄수하여야 한다. 통금시간은 하오 9시부터 익일 상오 4시까지로 한다. 이상 포고위반자는 영장 없이 압수·수색 체포·구금한다.

 1964년 6월 3 일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민기식


      계엄사포고저 2호
      본관은 1964년 6월 3 일 하오 8시를 기하여 계엄법 제 13조에 의거 비상계엄지역 내에서는 압수·수색·체포·구속에 관하여 법관의 영장 없이 이를 집행한다.


1964년 6월 3 일
계엄사령관 육군대장 민기식


      이날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투입된 수도경비사령부 산하 군병력은 수도경비사 소속 헌병 제 5 대대 (503),  공수단(500),  수도경비사 제 33대대 (559) 등 도합 1,562명이었다 . 이들은 중앙청 정문으로부터 시위군중을 세종로 방면으로 밀어내면서 이들을 해산시켰고, 3 일 자정 시위를 완전히 진압하였다.  이날 연행된 인원을 대학별로 보면,  고려대가 206명,서울법대와 문리대가 384명,  서울상대가 37명,  명지대와 외대,  서울공대, 동국대가 각  l1명이었다.
      이틀 후인 6월 5 일자 『뉴욕타임스』는 6월 3 일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전투 태세를 갖춘 군대가 한밤중에에 서울로 출동하여 계엄령에 따라 서울시에 있는 대학,  경기장,  고궁 등을 점령했다.  헬멧과 방독면으로 무장한 군대는 주요 관공서를 경비하고, 아직도 최루탄의 자취가 생생한 서울 시가를 순찰했다. 그들은 바주카포와 총검이 부착된 소총을 소지하였고, 주요 도로에는 기관총을 설치하였다.  계엄령의 효력이 최초로 드러난 것은 다음날 조간신문이었다.  신문의 지면은 까땅게 칠해져 있었다. 국내 신문에 대해서 군 당국이 검열을 실시했기 때문에 공식적인 포고나 발표만이 그대로 게재되었을 뿐 다른 기사 중에서는 읽을  만한 뉴스가 없었다. 집회와 시위는 완전 금지되고 학교는 무기한 휴교로 들어갔다.  밤 9시부터 새벽 4시까지의 야간통행금지령도 발표되었다.  어셋밤까지 군대는 모든 시위를 완전히 제압하고 일반인 90명 정도를 체포했다. 여기저기서 대학생들은 다시 시위를 일으키려고 시도했지만 군대와 경찰에게 저지당했다. 계엄령의 선포에도 불구하고 학생과 시민들의 저항은 밤중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학교가 폐쇄당땐서 학생들은 더이상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하기가 어려웠다. 계엄령으로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 학생들까지 모두 ‘임시휴교’에 처해진 상황에서 경희대생 200여 명이 4일 오전 11 시쯤 교내 문화탑 앞에 모여 데모에 들어갈 기세였으나,  급거 출동한 군경에 의해 해산되고 그중 30명 가량은 경찰에 연행됐다. 그러나 4일 오전 부산,  대전,  광주,  목포, 춘천 등지에서는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다. 4일 오전 중앙청에서 열린 임시국무회의는 지방학생들이 서울에서와 같은 난동사태를 벌인다면 정부는 부득이 비상계엄을 지방에까지 확대하지 않을 수 없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로써 서울에서는 당분간 어떠한 시위 움직임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시민들 또한 시위를 이끌던 학생들이 움직일 수 없게 되자 개별적으로 분산되었다.  하루 동안 200명의 시위대원이 부상을 당하고 1,200명이 체포된  6 ·3시위는 이렇게 하여 계엄령을 발동한 박정희정권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