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1964년 6 · 3데모의 전말
2. 4월 학생시위의 재개와 정부의 강경대응
3 ·24시위 이후 연일 계속되었던 학생시위가 김종필의 소환 등 ‘약간의 정치적 전환’이 있은 후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중에 삼민회 소속 김준연 의원이 3월 26일 “대일청구액 1억 3천만 불을 미리 받았다”고 발설한 데 이어, 4월 2일에는 “박정희·김종필 라인이 일본으로부터 약 2천만 불의 선거자금을 받았다”는 새로운 사실을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4월 3일 투쟁위는 “매국적 대일굴욕외교를 감행하고 있는 박정권은 애국적인 데모와 전국민의 여론을 묵살하고 철면피하게도 가면전술과 현혹전술을 써가면서 한·일회담을 계속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앞으로 한층 더 단호한 행동으로 구국투쟁을 전개하겠다”라고 선언하였다. 한편 일본의 사회당도 4월 8일 중의원에 한·일회담 중단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내놓았다.
이즈음 서울대, 연대, 고대의 시위주동 학생들에게 정체불명의 괴소포가 날아들었는데, 여기에는 불온문서, 편지, 100불짜리 달러 등이 들어 있었다. 의문의 소포발송과 더불어 학원 내에는 정치사찰이 강화되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당은내무, 법무, 문교장관의 국회출석을 요구하였괴 문교부가 소집한 전국국립대학교 총장회의에서 각 대학 총장들은 “학원사찰은 오히려 학생들의 반감을 사 데모를 유발케 했다”고 말하였다.
4 ,19를 전후하여 학생들의 데모는 재개되었다. 4월 17일 정오경 200여 명의 서울대학생들이 “한·일굴욕외교 반대”, “학원사찰의 즉각 중지”와 “구속된 김중태 군의 석방” 등을 외치면서 데모를 전개하였으며, 4월 18 일 낮 12시 30분에는 서울사범대학생 250명도 데모에 돌입하였다.
4월 19일 성균관대생 800여 명은 교내에서 4 ,19기념식을 마치고 시위에 돌입했다. 학생들은 ‘정부는 여전히 대일 굴욕교섭을 중지하지 않고 있다’, ‘고급 레스토랑에 드나드는 사람은 애국자가 아니다’, ‘대일회담을 중지하라’, 나라를 팔아먹는 정부를 거부한다’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국회의사당을 향해 행진하였다. 한편 경희대(1천 명), 연세대 (1 천 명), 중앙대 (500명) 등 5, 6개 대학 학생 3천여 명은 오전 10시경 시청 앞에서 4 ,19기념행사를 한 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하고 중앙청 쪽으로 빌려가다 경찰과 충돌하고 해산하였다. 이날 시위로 50여 명의 학생을 포함, 125 명이 체포되었다.
4월 20일 데모는 계속되었다. 이날 서울문리대생 200여 명은 ‘붉은 피는 매국정권을 증오한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에 돌입하여 원남동을 거쳐 종로 4가까지 나와 경찰의 제지를 받아 연좌하다 30여 명이 연행되었다. 2시 55분경 성대생 1,500여 명도 교문을 나와 데모에 돌입했다. 성대 데모대는 “정치사찰히는 정보기관을 해체하라”, “한·일회담 중지하고 초당파적인 대표단을 구성하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종로 2가 탑골공원 앞까지 진출했다.
한편 이날 청주에서도 데모가 벌어졌는데, 청주에서 벌어진 학생데모에서는 “5월혁명의 자랑은 4월혁명의 모독이 다”는 새로운 구호를 외쳐 주목받았다. 또 낮 12시 30분 건대생 천여 명은 교정에 모여 학생총회를 열고 “정부 당국은 5,16혁명。 4 ,19의 연속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여기에 대해 더 이상 4,19정신을 이용, 모욕당할 수 없다”는 3 개 항목의 성명서를 채택했다.
다음날인 21일 오후 2시 20분 성대생 l 천여 명은 ‘구속된 애국학생 즉시 석방하라’, ‘5,16은 4 ,19의 연장일 수 없다’는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나서 2시 30분경 명륜동 어귀에서 경찰과 충돌하여 6명이 연행되었고, 10여 명이 부상당했다.
또한 동국대 1,300명도 “5 ,16은 4,19의 연장일 수 없다”, “구속학생 즉시 석방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데모에 돌입하여, 몇 군데서 밀고 밀리며 경찰과 유혈충돌을 벌였다. 한동안 종로거리는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수라장을 이루었다. 이날 학생데모대는 경찰의 숱한 최루탄 발사에 투석으로 응수하기도 했는데 경찰은 이날 곤봉으로 학생들을 마구 내리쳐 많은 부상자를 냈으며 학생 106명, 민간인 21명, 도합 127명을 연행했다. 이날 데모로 학생 80명, 민간인 20병과 경찰 40명이 부상당했다
4월 17일 서울대 데모 이후 시위가 계속되자, 20일 엄민영 내무장관은 20일부터 법에 의거하여 여하한 데모도 엄단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4월 21일 문교장관은 각 대학과 전문대학 당국에 대해 시위에 참가했던 학생은 “재판결과에 관계없이 퇴학 처분시킬 것이며 학생에 대한 적절한 지도에 태만한 대학의 학장은 책임을 문책한다”는 요지의 지시를 하달했다. 같은날 박정희 대통령은 ‘시정의 일대 쇄신을 위한 훈령’ 제3호를 내려 “민주질서를 파괴하고 국기의 대본마저 흔들리게 할 우려를 금할 길이 없다”고 말하고, 법질서의 유지, 문교정책과 언론정책의 재검토 등 5가지의 항목을 지적하여 최대한 노력을 다할 것을 국무위원들에게 지시하였다. 또한 22일 정부는 데모진압 강경책을 수립하고, 데모진압이 강경책으로 전환한 이유를 “연발하는 학생데모가 국7까본질서를 위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정부가 데모에 대한 강경책을 수립하였지만, 23일과 24일에도 학원사찰에 대한 성토대회와 굴욕적 한 · 일회담 반대시위는 계속되었다. 4월 23일 서울문리대생 200여 명은 문리대 4월혁명기념탑 앞에서 학원사찰에 대한 성토대회를 열고 소위 YTP 조직의 정체와 학원사찰의 전모를 폭로했고, 24일 낮 동국대학생 500명도 성토대회를 열고 ⓘ 5,16은 4,19의 연장이 아니다; ② 대일굴욕회담 반대, ③ 구속학생 즉시 석방 등의 격문을 낭독했다.
정부의 데모저지 강경책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시위가 계속되자 24일 서울 시내 28개 대학 총장들은 시국수습을 위한 4개 항목의 결의안을 채택하고, 정부는 학원사찰을 중지할 것과 학생들은 의사가 충분히 표명되었으니 학업에 전념할것을 호소하였다.
4월 25 일에는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 대변인 김영삼이 정부 당국이 이 투위 주최 시국대강연회의 집회를 방해하고 있다고 지적하교 이는 독재말로의 최후수단이라고 비난했다.
이와 같이 한·일회담을 둘러싸고 정부와 학생·시민 사이에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박정희는 전면적인 내각개편을 단행했다. 정일권을 국무총리로 하는 새로운 내각에 대해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사설에서 “새 내각은 한·일회담의타결을 목표로 하여 돌진하는 내각이라고 생각된다”고 논평했다. 그만큼 새 내각은 국민과의 정면대결을 각오하면서까지도 한·일회담을 성사시키겠다는 박정희정권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5월 11일 ‘돌격내각’이 출범한 후, 5월 13일 중앙정보부는 정부의 공식견해와 일치하지 않는 투서를 발표했다는 이유로 카톨릭계인 『경향신문』 편집장 등 기자 4명을 체포했고, 5월 22일에는 YTP사건을 폭로한 송철원에 대한 폭행사건이
폭로되기도 했다. 5월 25일에는 박정권의 정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아일보』의 편집진이 공수부대에 의해 구타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학생들에 대한 체포영장의 발행을 거부하고 있던 재판관들이 역시 공수부대
에 의해 협박을 받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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