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장 1964년 6 · 3데모의 전말
3. 5 ·20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과 5 ·25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
4월 말에 재개된 시위는 정부의 학원사찰과 강경책으로 5월 들어 좀 수그러들다가 5월 20일 ‘한·일굴욕외교 반대 대학생총연합회’가 주최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는 서울문리대 교정에서 서울대, 동국대, 성균관대, 건국대, 경희대가 주축이 된 한·일굴욕회담 반대 대학생총연합회의 주관 아래 학생 3천 명과 시민 1천 명이 모인 가운데 거행되었다. 다음은 대회의 선언문과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의 조사 요지이다.
선언문
민족시는 바야흐로 위대한 결단을 요구하는 전환기에 섰다. 이제 우리는 ‘빈곤과 부자유 그리고 외세의존’의 참담한 현실을 전진적으로 변혁시키려는 민족적 양심의 깃발을 올린다. 5월 군부쿠데타는 4월의 민족민주이념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었으며, 노골적인 대중탄압의 시작이었다. 경제적 민족자립을 외치는 정부는 노동자·농민의 소비대중에 실업, 기아임금, 살인적 물가고를 선물하면서, 매판적 반민족자본의 비만을 후원하였다. 우리는 전 민족의 양심이 이러한 반역적 범죄행위를 묵과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민주적 긍지를 배반하고 일본 예속화를 촉진하는 굴욕적 한·일회담의 즉시 중단을 엄숙히 요구한다. 우리의 지성과 양심은 민족 이익에 역행하는 어떠한 기만과 왜곡된 논리에도 증오와 거부를 계속 랗것임을 선언한다.
조사
시체여! 너는 오래 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 어가고 있다. 넋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
썩고 있던 네 주검의 악취는 ‘사쿠라’의 향기가 되어 마침내는 우리들 학원의 잔잔한 후각이 가꾸고 사랑하는 늘 푸른 수풀 속에 나와 일본의 2대 잡종 이른바 ‘사쿠라’를 심어놓았다. 생전에도 죄가 많아 욕만 먹던 시체여! 지금도 풍겨온다
시체여! 죽어서까지도 개악과 조어와 번의와 난동과 불안과 탄압의 병수요 천재요 기장이었다. 너 시체여! 너는 그리하여 일대의 천재(殘才)요 희대의 졸작이었다. 구악을 신악으로 개악하여 세대를 교체하고, 골백번의 번의의 번의를 번의
하여 권태감의 흥분으로 국민의 정서를 배신하고, 부정불하, 부정축재, 매판자본 육성으로 ‘빠쩡꼬’에 ‘새나라’에 최루탄 등등 주로 생활필수품만 수입하여 노동자의 언덕으로 알았던 ‘워커힐’에 퇴폐를 증산히여 민족정기를 바로잡아 국민의식을고취하고 경제를 재건한 철두철미 위대한 시체여! 해괴할손 민족적 민주주의!
절망과 기아로부터 해방자로 자처하는 소위 혁명정부가 전면적인 절망과 영원한 기아 속으로 민족을 함멸시키기에 이르도록 한 너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더냐? 길고 긴 독재의 채찍을 휘두르다가 오히려 자신의 치명적인 상처를 스스로 때리고 넘어진 너. 구더기 안개 속에서 살다가 안개 속에서 죽은 우유부단과 정체불명과 조삼모사와 동서남북의 상징이요 혼합물질이었다. 한없는 망설임과 번의, 종잡을 길 없는 막연한 정치 이념, 끝없는 혼란과 무질서와 굴욕적인 사대근성, 방향감각과 주체의식과 지도력의 상실, 이것이 곧 너의 전부다.
장례식을 마친 학생들은 5,16 이념, 민생고, 한·일회담, 학원사찰 등에 대한 성토대회를 열었다. 성토대회는 각 학 대표가 5,16쿠데타 성토(성대), 민생고 성토(고대), 한·일회담 성토 (건대), 학원사찰 성토(서울문리대)를 분담하여 진행하였다.
학생들은 성토대회를 마치고 시위에 들어갔다. 이날 시위는 ‘축!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고 쓴 조기와 민족적 민주주의 시체가 든 검은 관을 8명이 들고 앞장섬으로써 시작되었다. 시청 앞에서 관을 태우기 위해 교문을 나선 2천여 시위학생들은 이화동 삼거리에서 경찰과 충돌하여 약 5시간 동안 투쟁하다 오후 7시 40분경 해산하였다.
이날 낮 3시 조금 지나 서울대학 교문을 나선 데모학생들은 전에 볼 수 없는 일반시민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으면서 미대사관 앞까지 진출했으나 경찰의 최루탄공세로 더 나아가지 못한 채 대학가 여기저기에서 농성을 벌였다. 이날 시위는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합류한 투석전으로 전개되어 학생, 경찰 서로간에 유혈극을 빚었고, 한때는 경찰간부를 포함한 10여 명의 경찰관을 연금하는가 하면 영업용 트럭까지 빼앗아 돌을 싣고 종로 5가 쪽까지 나아가는 등 기세를 올렸으나, 6시 반쯤부터 동원된 무술경찰대의 철저한 해산작전으로 기세가 꺾여 7시가 넘으면서부터 뿔뿔이 헤어졌다.
경찰은 ‘5 ·20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시위 충돌과정에서 학생 87명, 시민 94명 등 181명을 연행하여 그중 107명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과 특수공무집행빙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하였다. 그러나 13명에게만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한편 5 ·20정례식 주모혐의로 21일 새벽에 연행된 서울문리대의 송철원이 기관원에게 심하게 구타당한 사건이 발생하여 크게 물의를 빚기도 했다.
5 ·20시위를 계기로 굴욕회담 반대운동이 박정희정권에 대한 반대투쟁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고 한다면, 다음날인 21일 새벽에 일어난 무장군인의 법원 난입사건은 일종의 친위 쿠데타적 사건으로서 박정희정권의 강경한 진압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21 일 새벽 4시 반경 완전무장한 육군공수단 소속 군인 13 명이 법원에 난입한 후 숙직판사 자택으로 몰려가 데모관련 영장 발부를 협박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카빈소총으로 무장한 공수부대 군인들은 군용 엠율런스 차를 타고 법원 청사에
들어와 검찰 숙직실과 법원 숙식실에 머물렀다가, 오전 5시 20분경 숙직원을 데리고 이날의 구속영장 담당판사인 양헌 판삿집으로 갔다. 공수부대원들은 6시 10분경 양헌 판삿집에 도착하여 7시 40분까지 있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공수부대원들이 법원에 침입할 당시 시경 수사과장과 중부서, 성동서 형시주임 등이 현장에 있었다는 점이다. 즉 군인과 경찰들 간에 모종의 연락이 사전에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이는 곧 권력에 의한 의도적인 행위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 사건 당일 검사의 진술서를 보면, 21 일 밤 10시 30분 종로경찰서에서 청구한 10명의 영장이 양헌 판사에 의해 모두 기각되어 검찰이 경찰에게 소명자료를 추가해오라고 지시했으나, 종로서는 담당 검사에게 연락도 없이 서류 일체를 시경국장에게 가져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날 공수부대원의 법원난입 사건은 경찰과 군이 사전에 공모히여 사법부를 위협한 일종의 쿠데타적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정권은 이 사건을 애국적 충정에 의한 우발적 행동이라 해명했다. 더욱이 민기식 육군참모총장은 5월 22일 오전 “앞으로도 데모가 계속된다면 군인들이 5 ·21 집단행동 같은 것을 않겠다는 보장을 할 수 없다”고 말하고, “공수단 장병들의 이같은 경거망동의 재발을 막는 것은 학생들의 데모가 없어지는 일뿐”이라고 하였다.
5월 22일 국회 본회의에 나온 정일권 총리, 양찬우 내무장관, 김성은 국방장관은 모두 무장군인의 사법부 난입이 애국적 충정에서 우러나왔교 학생들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폭동이라 규정했다. 김성은 국방장관은 “일부 군인들이 법원을 찾은 것은 국기마저 흔들려 도를 넘은 학생들의 난동을 다스려야 한다는 애국충정을 호소하려는 극히 사소한 사건이었는데, 마치 난동이라도 한 것인 양 신문이 어마어마하게 보도를 해 그렇게 됐다”고 난입사건을 정당화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5월 23일 박정희 대통령도 무조장군인의 법원난입 사건에 대해 일부 정치인, 언론, 학생들이 반성하게 된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몇 명의 군인들의 행위를 두고 군의 정치적 중립 운운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라 하였다.
한편 현 난국의 책임이 일부 야당 정치인, 언론인, 학생의 무책임한 행동에 있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광주발언’에 대헤 5월 23일 야당은 박정희의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김영삼 민정당 대변인은 “난국의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대통령으로서 스스로 책임을 포기하는 일이며, 국민을 총칼과 강압정치로는 이끌 수 없다”고 하였고, 박영록 민주당 대변인도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시키는 것은 천만부당하며, 사태수습에 자신이 없으면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자 5월 23일 서울법대생은 ‘법의 존엄 수호’ 궐기대회를 열어 무장군인의 사법부 침입행위를 비난하였다. 서울법대생 300여 명은 오전 11시 개최한 궐기대회에서 “국민의 공복인 경찰이 학원에 난입하고 무장군인이 사법부에 침입하는 행위는 우리나라의 민주기본질서인 헌법을 뒤엎으려는 극악무도한 반민주적 반국가적 반역행위임을 단언한다”는 메시지를 채택했다.
5 ·20장례식에 이은 대규모 연대 시위가 5월 25일 개최된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였다. 이 대회는 전국 31개 대학 학생대표들의 사전협의로 이루어졌다. 학생대표들은 25일 각 학교에서 동시에 궐기대회를 열기로 하고 선언문과 호소문도 공동으로 채택하였다. 고려대생 1,200명과 서울대생 800여 명, 그리고 중앙대, 연세대, 동국대, 단국대, 경희대, 숭실대 학생들이 각각 교내에서 궐기대회를 열었고, 부산 동아대생 4천여 명과 춘천교육대생 300여 명도 궐기대회를 열었다. 춘천교육대생은 대회 후 기두로 진출했다가 80여 명이 연행됐다.
이날 공동으로 채택한 ‘난국타개궐기대회 구국비상결의 선언’에서는 아래의 7개항의 결의가 채택되었다.
1. 현 위정자는 5 . 16 이후 감행된 수많은 부정부패행위를 철저히 규명하여 국민 앞에 사죄하라.
1. 새벽에 법원을 강간한 일부 무법테러군인과 관계책임지를 즉시 엄단하라.
1. 구속중인 애국학생을 즉시 석방하라.
1. 파국에 직면한 민생고 타개는 망국 독점매판재벌의 엄단 몰수로부터 출발하라.
1. 정치자금을 양성화하는 입법조치를 하라.
1. 위험천만한 비상시국을 조성하는 과장된 포고나 무장괴한의 과장난동을 지양하라.
1.진정한 학생의 외침이 퇴폐타락한 구정객들이나 몰지각한 일부 정파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하며, 여하한 이들의 편승도 규탄 타도할 것이다.
26일에도 서울의 대학가는 ‘난국타개’를 외치는 학생들의 외침이 끓어올랐다. 이날 성남고교생 1,200명은 대학생들의 움직임에 호응하여 가두에 진출, 경찰대와 충돌하여 투석전을 벌이면서 “사법부침입 무징군인의 엄중처단”을 요구했다.
오전 11 시에는 한양대생 약 800명도 노천강당에서 난국타개총궐기대회를 열었고, 동덕여대 100여 명, 단국대 500여 명, 국제대 100여 명도 궐기대회를 열었다.
27일에는 전남대학생 300여 명이 “박정권의 하야를 권한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낭독하고 데모에 돌입하여 “애국충정남았거든 하야로 보답하라”, “권고, 권고, 하야권고” 등의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이를 계기로 ‘박정희 하야가 시위구호로 정착되었다. 전남대학생들은 경찰저지선을 뚫고 도심지로 진출하여 도청 앞에서 경찰과 충돌하고 계림동파출소 유리창 30여 장을 파괴하였다.
한편 5월 25일 서울변호사협회 인권옹호위원회는 5 ·20데모 주동자로 구속된 38명 중 많은 수의 학생들이 경찰에게 구타·고문당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관계경찰관들을 독직혐의로 집단고발키로 결정하였다.
27일 서울대에서는 긴급 교수총회가 열렸다. 교수들은 “정부는 난국수습에 있어서 그 책임을 전가하거나 실력행사만을 능사로 삼지 말고,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시책을 단행하라”고 요구하고, 서울대 전체교수협의회 명의의 6개 항목으 된 시국수습 결의문을 채택했다. 결의안은 군의 정치적 중립과 학생의 학업전념을 당부하고, 5월 20일의 미술대 경찰 난입사건에 대한 공개사과를 요구했다. 이날 채택된 결의문은 대통령, 국회의장, 국무총리에게 전달되었다.
결의문
우리 서울대학교 500여 교수 일동은 현하의 국가적 위기를 깊이 우려하고 시급히 학원의 평정을 회복함으로써 교수로서 그 본연의 사명에 충실키 위해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1. 정부는 책임을 전가하지 말고 사태혼란의 근본 원인을 직시하고 과감하고 발본적인 시책을 단행하라.
2 군은 엄정중립을 지켜야 할 것이며, 학생은 조국을 건지기 위한 최후의 순간을 제외하고는 본분인 학업에 전심하라.
3. 정부는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고 학원 내 사찰을 즉각 중지키 위한 결단을 보여라.
4. 현 시국 타개의 시점에서 구속된 학생은 전원 석방하라.
5. 학원자치에 위배되는 현행 교육법을 개정하여 총 · 학장 임명제를 즉시 시정하라.
6. 정부는 생활고에조차 허덕여야 하는 현재의 국립대학 교수들의 정상을 중,, 교수의 사명을 다하도록 조치하라.
한편 5 ·20시위 이후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를 주최했던 학생회장단의 모임인 한국학생총연합회 난국타개전국학생대책위원회는 29일 오전 ‘대정부 통고문’을 발표했다. 대정부 통고문은 “민족의 진보와 전국 백만 학도의 피맺힌 애국의 호소를 정부에 전했으나, 우리들 지성의 외침은 정부 당국의 무관심한 회유정책 내지 매카시즘적 수법으로 그 초점을 흐리게 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앞으로 정부가 아래의 결의를 30일 밤 12시까지 받아들이지 않을 때에는 예정대로 실력행사에 돌입하겠다고 선언했다. 대책위가 재확인한 6개항의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1. 현 위정자는 5 . 16 이후에 감행된 수많은 부정부패를 철저히 규명하고 국민 앞에 사죄하라.
2. 신성한 학원에 침입한 경찰관을 즉각 파면하고, 관계 책임지는 엄벌하라.
3. 새벽에 법원을 강간한 일부 테러군인과 관계책임자를 엄벌하라.
4. 파국에 직면한 민생고 타개는 망국 독점매판자본의 엄단 몰수부터 출발하라.
5. 정치자금의 양성회를 입법화하라.
6. 구속중인 애국학생을 즉시 석방하라.
5월 30일 오후 시 30분 서울문리대는 ‘자유쟁취궐기대회’를 열었다. 이날 집회는 학교 당국의 시위주동학생에 대한 무기정학 처분을 성토하고, 5 ·20장례식 때 경찰이 미대블 난입하여 최루탄을 투척하고 학생은 물론 교수까지 구타한 사건을비롯한 정부의 반민주적 처사를 규탄하였다. 이들은 ‘민생고 해결은 매판자본 몰수로부터’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단식에 들어갔다. 오후 3시부터 시작된 단식농성은 우리나라 학생운동사상 최초로 채택된 새로운 투쟁형태였다. 이 단식투쟁은 64년 투쟁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6 ·3 시위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였다
5월 31일, 단식 24시간 돌파기념으로 ‘반민주요소 소각식’이 거행되고, 이날 밤에는 풍자극 「위대한 독재자」가 공연되었다. 6월 1일 오전 11시에는 ‘국민총궐기호소대회 및 학원침입 민생고책임자 화장식’이 거행되었다.
처음 20여 명으로 시작한 단식학생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과 여학생들, 상대와 의대, ROTC까지 합류하면서 6월 2일에는 200여 명으로 늘었다. 단식장의 상황은 교내방송뿐만 아니라 동아방송의 「앵무새」 프로 등 대중매체 및 일간지를 통해서 매일 보도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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