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학생운동사

제3부, 제 21 장 1964년 학생연합조직운동

63동지회 2024. 2. 27. 18:13

제 21 장 1964년 학생연합조직운동

      1.  한·얼굴욕회담반대학생총연합회

      한·일굴욕회담반대학생총연합회는 각 대학의 한·일굴욕회담반대투쟁위원회의 위원장 및 투쟁위 소속 학생들이 연합한 조직이다.  이 조직은 5·20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철저히 사전준비로 치르고,  회장인 김중태 등 굴욕투위연합소속 주요 멤버들이 수배,  구속됨으로써 사실상 활동이 중지되었다.
      5·20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 각 대학 연합으로 치러지게 된 것은 서울대의 대일굴욕회담반대투쟁위원회와 동국대의 투쟁위원회가 연석회의를 통한 논의에서 한·일회담 반대데모를 연합으로 할 것을 합의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동국대의 제대교우회 사무실에서  2차례의 회합을 갖고 사전논의를 하였으나,  동국대가 사립대학이었기 때문에 박정권이 폐교조치 등의 강경책을 쓸 우려가 국립대보다 컸고,  그 기간이 동국대 축제기간이었기 때문에 결국 20일 서울대에서 갖기로 결정했다.
      5월 16일 오후 7시에는 동국대,  성균관대,  건국대,  경희대,  서울대 등 5개 학교 투위대표가 모여 5·20장례식의 준비책과 집행책을 정했다.  서울대의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송철원,   최혜성은 각자 대회의 준비에서 한 부분씩을 맡았다.  집행책으로는 동국대 장장순이 대회장을 맡고,  성균관대 김광렬이 민생고 성토문 낭독을 맡았다.  또한 경희대의 이재우는 5·16 성토문을,  건국대의 김영목은 굴욕회담 성토문을,  서울법대의 정성철은 학원사찰 성토문을 각각 낭독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한·일굴욕회담반대학생총연합회가 주최하는 5·20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 대해 각 대학 학생회는 반대입장을 취했다.
      장례식 전날인 5월 19일  9개 대학 총학생회장은  “장례식은 학생회와 무관한 집회이다”라며 각 신문사에 해명하고 다녔다.  서울문리대 학생회는  “학생회와 굴욕투위는 전혀 무관하다”며  “학생회는 학림제 행사에만 침여한다”는 태도를 취했고, 고려대도 총학생회 교도부장을 통해  “고려대 총학생회의 공식입장은 불참”이라고 발표했다.
      5월 19일 밤 최종 점검을 하고 5월 20일을 맞았다.  오후 2시 1,500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인 가운데 대회가 시작되었다. 대회사에 이어 선언문이 낭독됐다.  "······  4월혁명의 참다운 가치성은 반외압세력·반매판·반봉건에 있으며  ······ 5월  군부쿠데타는 이러한 민족민주의 이념에 대한 정면적인 도전이었으며 노골적인 대중탄압의 시작이었다 ······  군사정권은 국제협력이라는 미명 아래 우리 민족의 치떨리는 원수 일본 제국주의를 수입,  대미의존적 반신불수의 한국경제를 2중 예속에 속박하는 것이 조국의 근대화로 가는 첩경이라고 하는 반민족적  음모를 획책하고 있다"
      이어 결의문이 낭독됐다.

 

       1. 일본에의 예속으로 직행하는 매국의 한·일굴욕회담을 전면 중지하라.
       1. 농민·노동자·소시민의 피눈물을 밟고 서서 홀로 살쩌만 가는 매판성 악덕재벌을 처형하고 몰수하라.
       1. 5,16 이래의 온갖 부정, 부패사건을 자진폭로하고 그 원흉을 조사, 처형하라.
       1. 불법상행위를 자행한 일인상사를 즉각 추방하라.
       1. 5월 군사정부는 5,16 이래의 부정,  부패,  독선,  무능,  극악의 경제난,  민족분열,  굴욕적인 한·일회담 등 역사적 범죄를 자인하고 국민의 심판에 부치라.
       1. 5,16 이래 구속된 정치범을 즉각 석방하라.

      1. 민족적 잉댐의 학생과 국민은 우리의 정당한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피의 투쟁을계속하려 한다.


그리고 조사가 낭독됐다.


      시체여! 너는 오래 전에 죽었다 ······ 절망과 기아로부터 해방자로 자처하는 소위 혁명정부가 전면적인 절망과 영원한 기아 속으로 민족을 함멸시키기에 이르도록 한 너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더냐?  ······

 
      이때 미술대 입구에는 방독면을 쓴 500여 명의 경찰이 대기하고 있었다.  조사낭독 후  “와아” 하는 함성과 함께 관이 선두로 떠밀리면서 데모는 시작되었고 데모대는 곧 무장경찰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이날 시위로 179명이 연행,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 등 13 명이 지명수배되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한·일회담반대학생총연합회는  5·20시위 후 거의 활동을 하지 못하다가,  다음해인 1965년 4월 6일에  불법집회 혐의로 성북서에 연행되기도 하였으나,   4월 7일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발표한다.


      1. 전남대를 비롯한 지방의 구속학생들을 석방과 동시에 즉각 복학시킬 것.
      2. 졸속주의적 한 · 일회담 가조인을 즉각 무효화하고, 국방선인 평화선을 사수할 것.
      3.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의 재침의 우려에 대하여 국가와 민족을 수호코자 하는 민족적 양심과,  진리와 정의의 정도를 인도코자 하는 역사적 사명감에 따라 합법적 투쟁을 계속할 것이다.
      4. 우리 투쟁일의 최초 시작일을 4월 9일로 결의하고,  투쟁방법은 적당한 성토대회와 평화적 시위로 한다.

 

      그러나 ‘학생평화선사수투쟁위원회’도 이후로는 별 자취를 남기지 않았다. 

 

      2. 난국타개전국학생대책위원회

      난국타개전국학생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는 한국학생총연합회(이하 한학련)를 모체로 한 조직이다.  한학련은 1963년 11월 20일 서울시내 32개 대학의 학생 총회장이 모여 교내 학생운동에서 교외 학생운동으로 번져나가자는 이념으로 조직체를 갖기로 합의한 데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한학련은 대중집회보다 회장단의 집단행동으로 정국에 대한 나름대로 의사를 표명하는 활동을 주로 전개함으로써 학생연합단체로서의 성격이 불투명해졌다.  주요뱀버는 각 대학의 총학생회장들로 서울대 정정길,  고려대 구자신,  연세대 안성혁,  성균관대 송영삼,  경희대 이건환,  동국대 김실,  한양대 이정재,  이화여대 김행자,  숙명여대 이경숙 등이었다
      이들의 첫 집단행동은 3월 25일 중앙청을 방문하여 정부측 입장을 요구한 것이었다. 4월에는 청와대 면담에서 한·일회담의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5·20장례식 시위 직후인  5월 22일  ‘한국학생총연합회’는 정부의 강경공세에 대해 성명서를 발표하여,  “본회는 여하한 정치성을 띤 단체가 아니며,  또 어떠한 정치단체의 시주를 받은 일도 없다”고 밝히고, ①  5·20시위 구속학생 및 시민을 전부 석방할 것,  ② 시위시의 서울대미대 경찰관 난입사건과 최루탄 투척사건,  미대 김 교수 구타사건 등 경찰의 불법 폭력행사에 대해 관계 장관을 즉각 인책할 것,  ③ 학원 주변에 배치된 사복경찰관을 즉각 철수할 것을 요구하면서 구금되지 않은 남은 회원들과 규합하여 연합회의 목표달성을 위해 계속 싸우겠다고 천명했다.
      난국타개학생대책위원회는 미발족된 한학련의 후신이랄 수 있지만,  5·25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를 주도함으로써  6 ·3 운동에서 일정한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5·25 궐기대회의 모의가 구체화된 것은 5월  22일 밤이었다.
      8개 대학 대표가 모인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행동통일에 대한 대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고 날짜도  25일로 결정되었다.  또한 궐기대회의 방식도 각 대학 교정에서의 동시다발집회로 하기로 하였다.  5월 23일의 모임에서 집회를 단순한 성토대회로 할 것이냐 가두투쟁까지로 할 것이냐가 논의되다가  “ 학교마다 특수사정을 고려하여 성토까지를 원칙으로 한다”는  것에 합의를 보았다.  24일에는 고려대에서  22개 대학 대표들이 회합을 가졌다.  이들은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각 대학에서 내놓은 초안을 절충,  혼합하여 선언문과 결의문,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행동강령 등의 문안을 만들고 똑같은 문안으로 정부를 성토하는 총궐기대회에 돌입한다는 최종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25일 아침 7시 비밀리에 프린트된 구국비상결의선언문  2천여 매가 각  학교별로 배분되고 자리에 박태원 치안국장이 나타나  “한학련이 채택한 구국비상결의선언문 중  5항이 국시에 위배되고  4,19정신을 모독했다”고  하여  17명의
학생대표를 연행했다.   5항의 내용은  “친진보·반보수의 거센  4,19,  3·24 열풍에 반진보·친보수의 악랄한 편승 흉계를 파쇄하라”는 것이었다.  연행된 학생들은 자체적으로 선언문 초안 경위를 규명하겠다는 서약을 받고  12시 20분경 훈방됐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준비된  25일의 총궐기대회는 한학련 소속 32개 대학 중 6개교만 열렸다.
      5월 29일 오전 11시 서울시내  11개 대학 대표 28명은 다시 모임을 가졌다.  25일의 궐기대회에서 요구한 부정부패 규명,  학원침입 책임자 엄벌,  사법부침입 책임자 엄단,  구속학생석방 등의 사항에 대한 1 주일의 유예기간이 다가옴에 따른대책 마련을 위해서였다.
      이들은  ‘25 일 대회에서 채택한 요구사항이  30 일 밤 12시까지 관철되지 않을 때 실력행사에 돌입할 것’이라는 대정부 통고문을 채택했다.
      그리고 5월 30일 정정길(서울대),  구자신(고려대),  안성혁(연세대),  김실(동국대),  이건환(경희대),  김중석(고려대) 등 한학련 대책위 대표  6명은 정일권 국무총리 공관을 방문하여 대정부 통고문을 전달했다.  이 자리에서 정 총리는  “조직의압력으로 국가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학생들에게만 조직체가 있는 게 아니다.  군대도 노동자도 조직체가 있다.  만약 불행한 사태가 나면 외원에도 영향이 있고 국제적으로도 부끄럽다”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