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학생운동사

제3부, 제 17 장 제주대학교 6·3운동

63동지회 2024. 2. 27. 16:25

      제 17 장 제주대학교 6·3운동

      1965년 3월 당시 제주대학은 2개의 학부로 분리되어 법문학부는 제주시에, 이농학부는 서귀포에 있었다.  제주대 학생들을 다 합쳐봐야 600명 정도였고,  그것도 제주시와 서귀포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므로 제주시의 법문학부학생은 300명  정도였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법학과  4학년인 서경림에게 법학과  3학년 학생들이 찾아왔다.  저녁  9시경,  교정에서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데모를 할 예정인데,  서경림에게 사회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서경림의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계획에 침여할 수는 없었지만,  교정에서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의사표시를 한다는 것은 정당하게 보였고,  또 이러한 의로운 일을 하는 후배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서경림은 쾌히 승낙했다.
      법학과 3학년 고태현의 자취방에서 대통과 석유를 묻힌 솜을 준비하여 밤  9시에 교정 본관 앞에 12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당시 초배했던 학생들은 박용차, 박영호,  고태현,  양재하,  문정헌,  김승정,  고태영,  오성춘,  김희만,  서경림 등이다.
      학생 수는 몇 명이 안되었지만,  깜깜한 밤에 햇불을 쳐들고,  한·일협정의 부당성을 외치는 고함소리는 우렁차게 울렸다.  교정 밖에서는 경찰들이 교정에 진입하지 않고,  사태의 추이만 지켜보고 있었다.  때마침 동아방송의 기자가 와서 학생들의 외침을 녹취하여갔다.  햇불데모는 교정에서 마찰 없이 30분 만에 끝났다.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선언문을 낭독한 학생이 다소 서툴러서 의사전달을 제대로 못 한 점이었다.
      동아방송을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진 햇불데모의 반뽑 의외로 컸다.  그때는 공교롭게도 박정희 대통령이 휴가차 서귀포에 머물고 있었던 때였다.  조용히 쉬고 있는 대통령에게 이 햇불데모는 상당히 불쾌했던 것이다.
      “학생들이 햇불을 들고 밤에 데모를 하다니,  빨갱이 자손들이군!" 하고 박대통령이 도청의 고위층에게 내뱉었다는 말을 들었다.  학생들은 이 말에 더욱 반감을 가졌다.  박대통령의 젊었을 때 전력을 알고 있는데,  빨갱이 운운하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었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학생들은 순수하고 소박하였다.  가난을 명예롭게 생각하고,  막걸리 한사발에 국수 한 그릇이면 더 바랄 게 없을 정도였다.  실리보다는 명분을 더 존중하였다.  한·일협정으로 대일청구권 자금이 얼마만큼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를 의심하였다.  그보다는 평화선이 허물어져,  제주 앞바다에 일본배들이 출몰하게 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학생들 중에는 정보기관에 매수되어 학생들의 동태를 하나 하나 일러바치는 학생들이 있었다.  계획을 오래 끌다가는 사전에 노출되어 데모가 성사되기 어려웠다.  그래서 햇불데모는 하루 전에,  그것도 소수의 학생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교정에서 어둠을 밝히는 햇불로 의사표시를 한 것이었으므로,  학생들을 처벌할 근거가 없었다. 학교 당국에서는 당연히 회유책만을 쓸 수밖에 없었다.  주동한 학생들을 불러 학교비용으로 국내여행을 가라고 달래었다. 학생들은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1965년 4월 15일,  따스한 봄날이었다.  학생들은 대학 강당에서 결의대회를 갖고 가두로 진출하기로 계획하였다.  강의를 받고 있는 모든 학생들을 어떻게 강당에 집합시키느냐가 문제였다.  예정된 10시가 넘어가도 모이는 기색이 없고, 또 학생들 모두에게 계획이 알려져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할 수 없이 비상수단을 취했다.  학교종을 사정없이 울리게 하였다.
      법문학부 대다수 학생(당시 신문에는 200명)들이 강당을 가득 메웠다. 서경림은 진행을 맡아 먼저 법학과 4학년 고태영으로 하여금 한·일협정의 부당성을 논박하는 취지의 연설을 하게 하고,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교문 앞에는 경찰들이  2열 횡대로 서 있었는데,  그들의 표정은 당혹스러움으로 굳어 있었다.  학생들도 일생에 처음으로 데모를 하게 되었고,  경찰들도 처음으로 데모를 저지하는 형편이었으므로 서로가 당황스런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학생들은  ‘평화션을 사수하자’라는 플래카드와 태극기를 들고,  학교 교문의 저지선을 뚫고 시의 중심가인 관덕정으로 달렸다.  도중 서문다리에서 경찰들의 곤봉세례를 받으며 27명의 학생들이 연행되었다.
      관덕정 앞 광장까지 진출한 학생들은 70명 정도였다.  그들은 연행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연좌데모에 들어갔다.  연도에는 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었고,  경찰 백차에서는 학생들의 철수를 요구하는 확성기의 소리가 요란하였다.
      이 와중에서도 도 경찰국장은 ‘친동생 같은 마음으로 연행학생을 다룰 것이며 학생들이 연행된 학생들을 위하는 길은 데모를 그만두고 돌아가는 것’이라고 연좌한 학생들을 설득하였다.  학생들은 대표  3명을 뽑아 연행학생의 석방을 위해 진력하도록 하고,  30분 후에 해산하였다.
      이날 연행된 학생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4학년 : 김의종,  오성춘,  서경림
      •  3학년 : 이재병,  정영부
      •  2학년 : 고석희,  고정언,  홍봉협,  고완봉
      • 1학년 : 고동훈,  오용수,  부봉하,  김희순,  김봉수,  백원지,  김승웅,  임찬진,  강원식,  신두완,  김장철,  김충희,  김근근병, 김석환,  오경호,  김봉주,  홍승협,  박성종


      당시에는 참으후 조용했던 섬에 처음으로 데모라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부상자는 없었다.  그런데 불상사는 학생들이 해산한 후에 일어났다. 이날 12시 20분경 제주상고 학생  600명이 “① 질서를 존중한다,  ②평화션을 사수하자,  ③ 굴욕외교를 반대한다”는 요지의 결의문은 낭독하고 스크럼을 짜고 교문을 나와 관덕정으로 진출하려고 하였다.  서문다리에서 경찰의 저지에 밀고 밀리는 과정에서 투석과 곤봉이 난무하게 되었고,  학생  8명이 연행되었다.  이중 학생 오세보 군이 부상당했고,  경찰관 1명이 돌맹이에 이마를 맞았다.
      대학생들에 이어 고교생들이 데모를 한 것은 사전에 서로 연락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학생들의 데모를 자극받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스스로 행동을 결정한 것이었다.  그들의 어린 마음속에서도 순수한 민족의식이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연행된 학생들이 이틀 후에 다 풀려나 다시 학업에 전념하게 되었다.
      경찰 당국의 유연한 대처와 학생들의 자제로 제주시는 조용하게 되었으나,  4월 19일 서귀포에서 제주대 이농학부 학생  8명과 남주고 학생  9명이 데모 중에 연행되었다.  당시 학생들의 말에 의하면 데모를 막는 경찰들의 태도가 이전보다
더 완강하고 사정이 없었다고 한다.
      정부는 야당이나 학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일협정 조인을 서두르고 있었다.  학생들의 울분도 가라앉지 않았다.
      6월 22일,  드디어 한·일협정이 조인되었다.  이날을 기해 제대학생  20명이 대학 강당에서  5일 간의 예정으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이들 중 끝까지 남아 단식투쟁을 한 학생들은 강승부,  강종호,  고태영,  김의종,  문정헌,  김승정,  박용하, 
고태현,  오성춘,  박영호,  박동일 등이었다.
      이들은 대학 딩국과 학부형들의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단식을 계속하였다.  단식 이틀째는 2, 3명이 이탈했으나,  다른 학생들이 가담하여  20명 선을 유지하였다.
      단식학생들이 농성하고 있는 강당 벽에는 한·일협정이 허수아비임을 상징하는 큰 붉은 허수아비가 세워져 있었고,  ‘학원을 정치도구화 말라’라는 글씨가 써 붙여져 있었다.
      단식투쟁은 26일 낮에 끝을 맺었고,  처음 참여했던 학생  20명 중 반이나 중도에 그만두었다.  여기에는 건강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학부형들의 하소연도 크게 작용하였다.  단식 학생들 중에는 설득하러 온 부친을 오히려 설득시켜 단식투쟁의 정당성을 확신시킨 경우도 있었다.  당시에 학생들만 외로운 투쟁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의 단식투쟁이 한창이던  22일 밤  8시 25 분경,  야당이던 민중당원  7명이 시내 중앙극장에 모여 일장기 화형식을 갖는 한편,  제 2 이완용을 규탄하는 매국표창장 낭독 등을 하였는데,  이때 마침 학생들과 시민 등 극장 관람객과 겹쳐 혼잡을 일으켜 경찰에 연행되기도 하였다.
      단식투쟁을 끝으로 학생들의 의사표시도 갈 곳을 잃었다.  학생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었다.  당시 투쟁에 앞장섰던 학생들은 자기 나름대로 다 성실하교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공부했으므로 학업에 큰  지장을 받지는 않았던 것 같다.  조금이라도 정의감을 가지고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하는 학생들이라면,  그 상황에서 책장만 넘길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한·일협정이 국회에서 비준된 지도 35년이 되어간다.  한·일협정은 어느 정권이 담당하든 한 번은 홍역을 치러야 할 과제였다 . 그만큼 한·일간에는 메워야 할 골이 깊은 것이다.
      당시 투쟁에 침여했던 학생들은 지금 사회에서 교육자로서,  공무원으로서 또는 사업가로서 중견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신뢰받는 시민A로서 자기의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마음 한구석에는 그때의 투쟁을 정의로운 투쟁으로 간
직하고 있다.  어쩌다 먼 훗날 제주대학 교정 앞을 손주의 손을 잡고 지나게 되면,  그들은 옛날이야기처럼 65년 당시의 투쟁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