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학생운동사

제3부, 제 2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 각 대학연합체운동

63동지회 2024. 2. 27. 19:39

제 2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 각 대학연합체운동

      1. ‘한·일협정 비준반대 각 대학연합체’(한비연) 결성경위

      1965년 6월 22일 일본에서 한·일협정이 정조인되자 각 대학에 조기방학 조치가 취해졌고 고등학교마저 임시 휴교령이 내려졌다.
      그동안 한·일협정 반대를 위해 단식투쟁을 해온 서울법대생들은 한·일협정이 조인되자  200시간 단식기록을 남기고 일단 해산했다.  연이어 한·일협정 정조인을 규탄하는 데모와 단식이 6월 23일 이화여대,  6월 24일 연세대를 필두로 하여 경희대,  성균관대,  서강대,  숙대,  수도사대,  경기대,  덕성여대로 이어지며 투쟁이 계속되었다.
      한편 이화여대 지휘부 진민자(총회장),  신춘자(법대회장,  현재 이름 신인령), 차명희(법과학회장)는 단식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새로운 돌출구를 찾기에 고심하던 중,  구속중이던 서울법대 학생회장 장명봉이  6월 말에 보석으로 출감하여
이화여대 단식투쟁장을 격려차 방문하던 날 각 대학연합으로 비준반대 심포지엄을  6월 30일 대성빌딩에서 개최하기로 제안·의했다.   이 모임을 계기로 ‘한·일협정 비준반대 각 대학연합체’(‘한비연’)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2. 투쟁 경위

      1965년 6월 30일 오후 3시(이화여대 주최 심포지엄)

      명동소재 대성빌딩 강당에서 200여 명의 대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시내 6개 대학 대표들이  ‘한·일협정 비준 후 우리의 자세’라는 제목으로 한·일협정 비준반대를 위한 방안을 토론했다.
      대학별 참석자는,
      서울법대 : 장명봉{법대 학생회장), 이영희(행2,  발표),  진치님(법4),  김우기(행3)
      연세대 : 김영수(의대 총학생회장,  발표 의4)
      고려대 : 김의철(총학생회 총무부장,  발표)
      동국대 : 권석충(투쟁위원장, 정3),  이석기(법3 ,  발표)

      숙명여대 : 박경자(법정대 학생회장)
      이화여대 : 진민자{총학생회 회장, 화4),  신춘자(법대 학생회장, 법4, 발표 현재이름 신인령)


      발표내용의 요지는, 
      1) 한·일협정은 우리에게 불리한 환경에서 불리하게 체결되었다.
      2) 한 일협정은 우리의 의사보다 제3강국의 일방적 의사에 의해 강요된 것이다.
      3) 한·일협정의 경과와 비준내용을 철저히 규탄받아야 한다.
      4) 모든 학생과 국민이 한 대열에 나서서 비준저지를 위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여야 한다


      각 대흑변합체 제1차 회의
      심포지엄이 끝난 후 각 대학 대표자들은 별도 회합을 갖고 다음과 같은 합의를 보았다.
      1) 각 대학은 앞으로의 모든 투쟁을 서로가 연대하여 투쟁한다.
      2) 전국대학교를 하나의 연합체로 구성하고 방학 동안 대표들이 공동으로 투쟁한다.
      3) 7월 13일 연세대 의대에서 연합체 발족모임을 갖는다.


      1965년 7월 1일

      연세대학교 : 의대 학생회장 김영수가 이끄는 단식투위들은 정각 12시 단식을 끝맺고 12시 30분에 동교 외래진료소 앞뜰에서 일본의 경제침략을 분쇄한다는 뜻으로 일장기와 일본상품 소각식을 가졌다 . 이날 소각식에는 230여 명의 단식 학생들과 교수들이 모두 ‘일제상품 사지 말자’라는 표찰을 가슴에 달고 참석하였으며,  교수들과 학생들로부터 수집된 일제의류,  화장품,  책 등 200여 점을 불태웠다.  연세대 박대선 총장은 5명의 교수들을 대통하고 일본제품  ‘보이콧’  서명록에 서명하였다.
      이화여대 : 진민자(총회장)와 신춘자(법대회장)는 108시간의 단식투쟁을 끝맺은 다음  6월 28일부터 한·일협정 비준반대 가두 서명운동을 벌여  7월 11일까지 서명을 받은 뒤 국회에 제출하고 지방과 가정으로 분산하여 계속 서명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정했다.
      건국대학교 : 문영재 중심의 200여 명의 단식투쟁위는 연세대학 단식 종결과 거의 동일한 시점에 단식을 중단하고 서교동 축산대학 기숙사에서 일장기 및 한·일협정 정조인서 소각과 밀수범 친일 아부 자본가 처단 화형식을 갖고 한·일협정 비준 저지투쟁에 앞장설 것을 다짐하는 선언문과 결의문 채택을 했으며,  낮 1시에는 명동 입구에서 일본상품 안 사기 운동을 벌였다.


      1965년 7월 13일 오후 3시(랜|연 발족대회,  제 12차 회의)

      한·일회담 비준동의안이 국회에서 공화당에 의해 일방적으로 제출되기 하루 전날인  7월 13일,  한비연이 정식 발족되었다.  당초 발족대회는 연세대 의대 학생회실에서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김영수 의대 학생회장이 교수실을 빌려 집행하게 되었으며,  참석한사람은, 
       서울대법대 학생회 회장 장명봉,  법대 4년 진치남
       고려대 총학생회 총무부장 김의철

       동국대투쟁위원회 위원장 권석충
       이화여대 총학생회 회장 진민자, 법대회장(신춘자)
      숙명여대 법정대회장 박경자
      연세대학교 의대회장 김영수이고,
      합의사항은,
      1) 각 대학 대표들은 현재 6개 대학 모임을 전국대학으로 확산시켜 명칭을  ‘한·일협정 비준반대 각 대학연합체’로 결정하였으며,
      2) 제 1차 투쟁일정은 7월 15일 오전 11시 대성빌딩에서 한·일협정 비준반대 공동궐기대회를 개최키로 합의했다.
      3) 이날 성명서의 내용은 반외세,  반독재의 빛나는 투쟁을 벌여온 우리는 이 이상 욕된 역사의 연장을 방관할 수 없음을 깨닫고 그 어떤 간교한 수법도 극악한 탄압도 이를 분쇄하면서 매국협정의 비준을 저지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1965년 7월 15일 11시(제1차 한·일협정 비준저지 공동성토대회)
      7월 14일 밤 8시 35분,  공화당은 야당을 힘으로 밀치고,   분 30초 만에 한·일협정 비준동의안을  ‘날치기 보고’하는 데 성공했다.  야당과 여당이 엎치락뒤치락하는 동안 번개처럼 의장석에 오른 경호를 받으며  “비준동의안이 제출되었습니다” 하면서  ‘땅땅땅’ 의사봉을 쳤다.  이로써 한 · 일협정 비준동의안이 통과된 것이다.
      이러한 긴박한 정국에서 한비연은 한·일협정 비준저지 공동성토대회(한·일협정 비준반대궐기대회)를  15일 11시에 열 예정이었다.  그러나 당초 11시에 강행하려던 성토대회는 정보형사들이  철수한 다음인 12시 15분이 되어서야 서울법대 장명봉,  진치남,  김우기,  이영희 외 20여 명과 동국대학교 권석충,  박정영(정외3) 외 20여 명이 대성빌징 강당에 모인 가운데 열 수 있었다.  이들은 「한·일협정비준반대 공동선언문」,  「대통령과 국회위원들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등을 채택한 후 각 대학의 한·일협정 비준반대 성토연설을 듣고,  장명봉의 선언문과 행동방침 결의문 낭독으로 대회를 끝마쳤다.  한편은 이날 성토대회에 참석하려다 연행된 학생은 진민자(이대 총학생회장),  신춘자(이대 법대회장),  김상립(건국대 총학생회장),  김병권(건대 상4),   이기원(건대 정외4),  박경자(숙대 법정대회장),  백광세(연세 의대3),  한휘언(서울 농대학생회장),  이재우{6·3 동지회) 등이다.


      한·일협정 비준반대 공동선언문 요지
      학생들의 민족양심에 입각한 평화적 시위가 무차별 구타,  구금,  퇴학,  학원사찰 매수 분열공작,  휴교령,  조기방학으로 탄압되었다.  우리는 어떠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매국회담을 분쇄할 것임을 선언한다.


      행동 방침 결의문요지
      1 ) 전체 학생은 비준반대 서명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2) 공화당 소속의원들은 형제의 정으로 민족양심에 호소하고 설득한다.
      3) 일본상품의 배척운동을 전개한다.
      4) 우리의 의사가 무시될 때 불행한 사태가 올 것임을 경고한다.

 

      1965년 7월 18일 오후 1시한비연 제3차 회의)

      연대 의과대 학생회의실에서 각 대학 대표들은 7월 15일의 공공성토대회가 미약한 투쟁이었다고 분석하고 적극적인 쿠쟁방법을 논의한 끝에 각 대학연합체 대표단을 국회 기자실로 직접 잠입케 하는 방법을 채택하고 그 대표로 서울법대 장명봉,  동국대 권석충,  이화여대 신춘자를 선발했다.  이날 각 대학 대표로 참석한 사람은 고려대 김의철,  서울대 장명봉,  김우기,  전치남,  동국대 권석충,  이대 신춘자,  숙대 박경자,  연대 김영수 외 1 명이다.


      1965년 7월 21 일 오전 10시(국회 여야 의원들에게 서신 전달)

      장명봉,  신춘자,  권석충은  9시 50분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유인물을 분산 지참하고 방청객으로 가장하여 국회 옆문을 통해 안으로 침입하였다.  곧바로 여야 원내총무실에 들러 유인물을 전달하고 기자실로 내려와 장명봉이 여야 의원에게 배포했다 . 그러나 이들은 유인물 낭독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사복경찰에 의해 연행되었다.  때마침 국회 정문 앞에는 온몸이 불에 타고 있는 사람이 “한·일협정 비준을 결사반대한다”라고 외치며 핑굴고 있었다(추풍회 회원의 분실자살광경).
      세 사람은 이튿날 도로교통법 위반으로 즉결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무죄 판결을 받고석방되었다.


      서신 요지
      여당 : “비준을 기다리고 있는 한·일협정은 일제의 조국약탈을 합법적으로 승인하고 36년 간의 혈애를 포기했고 황금어장을 양보하는 등 온갖 민족적 수모를 감수하면서 조국을 일본의 새로운 식민지적 철쇄에 강박하는 음모이다"  여당의원들은 매국범죄의 공범자로 타락하지 말고  7·14의 의사를 백지화하라.
      야당 : 국민은 야당의원들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다. 민족사적 사명을 배반한 변절유화,  파쟁 등 매국반제 역량을 위촉케 하는 행위는 매국의 공범행위임을 분명히 인식할 것을 요청한다.  야당의원들은 매국범죄의 방조자가 되지 말라!


      1965년 7월 25일 오후 2시 서울문리대 교정(각 단체벌 연합회의)

      당시의 투쟁조직은 6·3사태 때 구속자로 만들어진  6·3동지회와 서울문리대 출신의 모임인 민족수호학사총연맹,  그리고 각 대학연합체뿐이었고 투쟁은 언론을 통한 성명전에 불과하였다 더구나  6·3 동지회와 학사총연맹의 회원들은 거의 다 다  졸업을 하였거나 수배를 받고 있는 입장이어서 사실상 행동적 투쟁은 어려웠다.  이러한 가운데 김도현,  최혜성은 개학 후 좀더 효과적인 투쟁의 결과를 위하여  3개 모임의 회동을 제의하였다. 이날 서울문리대 교정 잔디밭에는 3개 모임 대표들이 모여 향후투쟁에 관하 토의했다.
      이날 참석자는,
      6·3동지회 : 박동인(동대),  김경님(동대),  박병환(한양대),  김도현(서울문리대), 민승(건국대)
      한비연 : 장명봉(서울법대),  진치님t서울법대),  권석충(동대),  진민자(이대),  신춘자(이대)
     학사총연맹 : 이수용(서울문리대),  최혜성(서울문리대)

     

      이날 토의결과는

      1) 한·일협정 비준이 국회에서 통과하기 직전 대대적인 비준반대집회를 공동개최한다.
      2) 개학 후 각 대학연합체 대표들이 본격적 투쟁을 시작했을 시  6·3 동지회와 민주수호학사총연맹은 대학별로 이를 적극 지원한다.


      1965년 7월 26일 오후 1시(민주당 박순천 총재 방문)

      각 대학연합체에서는 박순천 총재 진영이 강력한 투쟁으로 선회하여 야당과 국민이 공동투쟁할 때 비준을 저지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박순천 총재를 개별 설득할 것을 합의하고 대표단 파견을 결정하였다.  서울법대의 장명봉,  이대의 진민자,  신춘자,  연대의 김영수,  동대의 권석충으로 구성된 대표단은 오후 1시 30분경 합정동 박순천의 집에 도착하여 박순천 총재와 김대중 민주당 대변인을 만나 면담하는 자리에서 야당의원 전원이 의원직을 사퇴하고 생명을 건 투쟁대열에 동참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김대중 의원은 학생들은 학업에 동참해야 한다고 하면서 한·일협정 반대도 국회 내에서 여당을 타협적으로 설득하고 저지하여야만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65년 6월 29일 오후 3시 연대 뒷산(한비연 조직확댜, 제 4차 회의)

      그간 6개 대학으로 투쟁해 왔던 각 대학연합에서 건대와 경희대,  외대의 참여로  9개 대학으로 확장되었다.  한·일합정 비준일이 가까워지자 각 대학연합체는 범국민적 투쟁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으나 보다 더 순수하고 선명함을 국민에 알리기 위해  7월 30일 오전 다음의 성명서를 발표할 것을 합의했다.


      성명요지
      “우리는 한·일협정 폐기 이외에는 어떠한 대안도 있을 수 없고 오직 비준반대를 위한 투쟁을 타협 없이 전개할 것이다.한·일협정을 반대하는 교수,  종교인,  예비역 장성 등 사회단체의 활동을 전폭 지지하나 학생들은 독자적인 투쟁을 벌여 결정적 시기에는 실력투쟁으로 나서겠다"

 

      이날 참석자는 연대의 홍현삼랑(문리대 회장),  고대의 고팔훈(태권도부장),  이대의 진민자,  신춘자,  차명희,  동대의 권석충,  건대의 문영재,  경희대의 김경남, 외국어대의 백낙환이다.
      이 제 4차 회의에서 한비연이 조직확장된 것을 계기로 후에 중앙대(대표 이재오)도 참여하게 되었다.


      1965년  8월 5일 오후 4시 연대 뒷산*한비연 제 5차 회의)

      정부와 공화당은 한·일협정 국회 비준일을 14일로 내정했다.  이에 각 대학연합체 대표(장명봉,  진치남,  김우기,  이영희,  신춘자,  차명희,  고팔훈,  홍현삼랑,  김경남,  송창달,  권석충,  백낙환, 문영재)들은 효과적으로 투쟁하기 위해  8월 14일 당일까지 투쟁계획을 수립했다.
      1) 8월 7일 정오 명동 국립극장 노사에서 한·일협정 비준반대 제2차 연합성토대회를개최.
      2) 8월 10 일 동국대학교 교정에서 공개 기자회견.
      3) 기자회견 대표는 권석충,  장명봉,  진치남.
      4) 8월 12일 오후 1시 서울문리대 교정 한·일협정 비준반대 제3차 연합성토 대회.
      5) 8월 14일 매국문서 무효선언성명 발표.


      1965년 8월 7일 정오(국립극장 노상 성토대회 실패)

      이날 대회는 정보의 사전 누출로 실패하고 장명봉,  권석충,  진치남만이 9일 저녁 권석충의 집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한편 서울법대 학생들은 국립극장 접근에 실패하자 김우기를 중심으로  7명씩 조를 짜서 종로,  청계천,  을지로로 분산되어 플래카드를 들고 다시 나타나 달리는 일명 신출귀몰작전을 감행했다.


      1965년 8월 10일 오전 10시 동국대 교정(효벼|연 공개 기자회견)

      기자회견에서 권석충은 결의문을 낭독하고 장명봉은 향후 투쟁계획을 발표했다.

1965년 8월 10일 한비연 5차 회의에 서 합의된 대로 동국대 교정에서 서 울대 장영몽파 진치남이 배석한 가운데 동국 대 권석충이 한·일협정 비준반대 성명 서를 낭독하고 있다


      1) 8월 12일 정오 서울문리대 교정에서 전국대학생 연합체 주최로 한·일협정 비준반대 성토대회를 개최한다.
      2) 8월 14일 이후 각 대학별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실력행사에 들어간다
      3) 결의문 요지
      “우리 민족의 피맺힌 원수 일본에게 조국을 다시 팔아먹는 을사 매국조약이 비준 일보 전에 놓여 있다.  조국광복을 위해 숨져간 선열의 피 아직 뜨겁고 매국역적에의 저주 아직 치떨리는데 이 무슨 매국행위냐?  민족의 손마다 쥐어진 이 분노의 불길은 매국역적 그대들이 매국협정에 비준 도장을 찍는 날 그대들의 가슴 위에서 폭발하리라"
      기자회견이 끝난 후 권석충은 중부서 정보과에 연행되어 11일 아침 훈방되었다.


      1965년 8월 12일 오후 3시(매국국회 해산 촉구대호회,  제3차 성토대회)

      11일 밤 11시 13분 국회특별위원회에서 한·일협정 비준동의안이 또 한 번 날치기 통과되었다.  그리하여 국회비준을 이틀 앞둔 12일은 각 대학연합체의 마지막 투쟁의 날이 되었다.  아침부터 서울문리대 정문 앞에는 들어가려는 학생과 붙잡으려는 경찰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오후 3시가 되어 문리대 4,19탑 앞에는 ‘찢어라  배국문서’라는 플래카드가 걸렸고 15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서울문리대 수위들과의 몇 차례 충돌 끝에 장명봉의 선언문 낭독이 시작되고 김우기의 결의문 낭독과 진치남의 국민에게 보내는 글,  권석충의 전국 학생에 대해 호소문 낭독,  문영재의 야당 국회의원에게 보내는 공개장 낭독을 끝으로 대회를 마쳤다.
      이날 연행된 학생들은 연대의 홍현삼랑·현해인·정의웅,  이대의 진민자·신춘자·차명희,  동대의 이진탁·김의빈·이원범·박상영,  경희대의 송창달 등 모두 17명이었고 이중 홍현삼랑과 송창달을 비롯한 15명은 즉심에,  진민자와 신춘자는 구속영장이 신청되었으나 재판부에서 기각딩해 13일 오후 석방되었다.


      성명요지
      현재 한·일협정은 매국협정이므로 이는 폐기 이외에 어떤 대안도 타협도 없다.
      현 단계에서 헌정질서를 수호하는 길은 매국국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로 국민의 심판을 물어 비준 폐기 국회를 구성하는 길밖에 없다.


      1965년 8월 14일

      8월 14일 밤 국회에서 한·일협정 비준이 통과되자 각 대학연합체를 비롯한 투위모임에서는 무효화투쟁을 위히여 대책에 분주하였다.  한편 한학련 유인물사건으로 도피중이던 고대 총학생회 총무부장 김의철은 긴급히 학교로 돌아가 도서관의 학생들을 동원하여 UPI,  NHK,  AP 등 세계 통신사 및 방송국의 기자들을 초치한 자리에서  “굴욕적 한·일협정이 국회에서 일당독재에 의해 비준이 통과되었으나 우리 백만 학도는 이를 무효로 선포하며 개학 후 생명을 건 투쟁을 전개할 것을 선언한다”라고 발표했다.

 

      1965년 8월 15일 오후 1 시(효삐연 저 16차 회의)

      한·일협정 비준이 국회에서 통과되자 실의에 찬 각 대학 대표들은 경기도 송추 유원지에서 새롭게 결의를 다지기 위한 모임을 가졌다.  이날 일부 대표들은 효과적인 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최루탄에 맞설 수 있는 공격무기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 공격무기는 사제폭탄(화염병)이라고 하여 이대 등 일부 대학의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으나 대다수의 각 대학 대표들은 이러한 공격무기가 순수한 학생들의 투쟁을 왜곡시킬 수 있다고 판단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훗날 각 대학 대표들이 검거당할 때 이 사제폭탄 혐의를 미끼로 내란선동죄와 반공법을 적용받았다.
      이날 참석자는 건대의 문영재,  연대의 홍현삼랑,  이대의 진민자,  신춘자,  차명희,  고대의 고팔훈,  동대의 권석충,  서울법대의 진치남,  김우기,  외대의 백낙환이다.


      1965년 8월 17일(한·일협정 비준무효 선언식) : 서울법대 학생회

      서울법대의 학생회는 개학 이전이라도 한·일협정 국회 비준이 무효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판단,  오전 10시 대학구내 학생휴게실에서  ‘한·일협정 비준안 일딩국회 통과 무효선언식’을 갖고 앞으로 개학이 되면 비준무효화와 폐기를 위해 강력한 실력행사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학생회장 장명봉은 선언문을 통해  “한·일협정 비준안이 야당의 총사퇴 속에서 일당만으로 강행 통과된 것은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며 의회제도를 말살하는 것”이라고 규탄하고 결의문에서는,
      1) 국시를 부인하는 일당국회에서 통과된 매국협정을 박살하기 위해 투쟁한다.
      2) 일당국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하라.
      3) 현 정권은 민주주의를 부인하고 헌정위기 사태를 유발한 책임을 지고 자진 매국협정을 폐기하라.
      4) 개학 후 각 대학연합체와 공동보조로 강력한 실력투쟁을 전개하겠다고 선언했다.

      1965년 8월 18일 오전 11시(한·일협정 비준무효화 결의): 서울법대 학생회

       전날의 결정에 따라 서울법대 학생회는 대학도서관 열람실에서 200여 명의 법대생이 모인 가운데 학생회장 장명봉의 사회로 한·일협정 비준 성토대회를 열고 개학이 되면 한·일협정의 비준무효화를 위해 강력한 실력투쟁을 펴기로 결의했다.


      결의문요지
      1) 협정의 무효화를 위해 개학과 동시에 강력한 실력투쟁의 전열을 편다.
      2) 집권당은 반민족적 폭거를 지정하고 국민의 심판을 받기 위해 현 국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하라.
      3) 야당의원은 대여협상도,  국회복귀도 거부하고 전원 탈당히여 매국협정 박살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라.  이러한 국민의 외침을 외면할 때는 매국협정의 공범자로 인정할 것이며 정치적 생명을 매장시키겠다.
      4) 일본은 제국주의의 흑심을 버리고 선린우호의 입장에서 위장된 제국주의 협정을 자진 폐기하라.
      5) 매국협정을 배후 조종해온 미국은 민주국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또다시 이 민족에게 죄악을 범치 말라.


      1965년 8월 19일(각 대학변합체 창가학회 기습작전)

      서울법대 김우기,  진치남과 건국대 문영재,  경희대 김경남,  외대 백낙환,  동국대 서수일 등은 최근 한국에 상륙하여 급성장하는 일본 사이비종교 창가학회를 기습할 특공대를 각 대학에 요청했다.  오후 2시 김경남과 김우기,  백낙환은 창
신동 창가학회 본부를 현지 답사하고 도주골목까지 확인한 다음 돌아왔다.  이날 저녁 서울대 김우기,  진치남 외 10명,  건대 문영재 외 4명,  외대 백낙환 외 3명, 동대 서수일,  김상규 외 3명,  경희대 김경남,  송창달,  운선명 등은 각 대학연합체의 명칭을 ‘무궁회수호대학생총연합회’로 위장하여 호소문을 준비하고  6시 55분경 창신동 창가학회에 도착하여 각목을 휘두르며  ‘본존’을 찢고 창가학회 총회장인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의 사진을 때려부수었다.  특공대원들은 삐라를 살포하며  “매국적인 창가학회를 없애자!”,  “창가학회를 믿는 자는 민족반역자다! "고 외쳤다.  호소문의 요지는  “과거 일진회와 흡사한 저들의 망국적 소행은 우리 민족의 민족적 양심으로 물리쳐 그 화를 끼치지 않도록 하자!"였다.


      개학과 각 대흐변합체 대표들의 수난

      방학중 한비연의 지속적인 결연한 투쟁의 결과,  2학기 개학과 동시에 한·일협정 비준무효화를 외치는 데모가 각 대학에서 일제히 전개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한비연 대표들은 큰 수난을 겪게 되었다 동국대의 권석충은 반공법,  이대의 진민자,  연대의 홍현삼랑,  서울대의 진치남,  경희대의 송창달은 내란선동죄로 구속되었다.  서울법대의 장명봉,  김우기,  외대의 백낙환,  경희대의 김경남,  건대의 문영재,  이대의 선춘자는 도피했다.  특히 장명봉은 1학기 중인  6월 1 일 시위주동자로 구속·수감된 후 보석으로 출감한 상황에서 한비연 활동을 계속해온 관계로 사전 구속영장이 나와 있었다.
      한편 한비연 대표들은 거의 전원이 학교에서 제적 처분의 중징계를 당하였다. 그후 한비연 대표들은 제적학생 복적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는 한편, 파면 및 자퇴교수의 복직을 위한 운동도 계속 전개하였다.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의 여파로 파면되었거나 자퇴당한 교수의 명단과 제적학생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파면교수
       황산덕(서울대법대 교수, 형법·법철학)
      김기선(서울대법대 교수, 민법)
      박삼세(대구대 교수·법학)


      자퇴교수
      김성식(고려대 교수, 서양사)     

      김경착(고려대 교수,  철학)
      이항녕(고려대 교수,  법학)

      양호민(서울대법대 교수,  정치학)
      서석순(연세대 교수,  정치학)
      이극찬(연세대 교수,  정치학)
      정석해(연세대 교수,  철학)

     권오돈{연세대 교수,  한문학)
     정범석(건국대 교수,  민법)

     양주동{동국대 교수, 국문학)

     이헌구{이대 교수, 불문학)

     김성준(이대 교수,  국사)
     전경연(한국신학대 교수)

     조윤제(청구대 교수,  국문학)

     김경광(청구대 교수,  법학)

 

       제적학생
       서울대 (7명) : 김중태(정4),  김도현(정4),  장명봉{행3),  최기선(법2),  이협(법3),  이영희(행3),  한휘언(축4)
       연세대(1명) : 오건환(행 4)
      고려대 (8명) : 김의철(상4),  김남흥{농햄),  성인용{정4),  안종근{법2),  맹건영(행4), 조홍규(정4),  한두봉{정2),  박철헌(정4)
      동국대 (3 명) : 권석충(정3),  이진탁t정외2),  이원범(대학원1)
      성 대(1명) : 오성섭(중문3)
      중앙대 (6명) : 배정운{정2),  김종기(정2),  김종관(정2),  홍순철(정4),  김재현(정4),  이재오(농개3)
      경희대 (7명) : 김경님t중문3),  오재국(정2),  송창달(법3),  윤소년(정2),  신광섭(법3), 유천도(법2),  이경표(정외2)
      한잉대 (2명) : 최수영(법2),  박병환(정외4)
      건국대 (3 명) : 민승(정외3),  유대원(정외3),  문영재(정외4)
      외 대 (5명) : 홍준표(이2),  백낙환{정외2),  이성희(외교2),  유승렬(노어2),  채홍윤(말레어2)
      명지대 (3 명) : 유금정(전공2),  김길웅{전공2),  민병우{행정실무2)
      전남대(1명) : 정동년(화학4)
      국민대 (1 명) : 최원규(행 3)
      경기대 (1명) : 김달환(상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