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
3. 6월 단식투쟁과 한·일협정 정조인
5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은 존슨 미대통령과 제2차 회담을 갖고 한·미 현안 문제에 대해 한·미 양국이 계속 긴밀히 협조하며, 미국은 가조인된 한·일협정을 환영, 찬성한다는 요지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한·일회담에 대한 미국의 노골적인 개입과 함께 불평등한 한·미행정협정 교섭의 진전은 당시 학생들이 시위에서 자주 반미 구호를 외치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6월 12일 서울법대생 200여 명은 5월의 학원 내 투쟁으로부터 방향을 전환하여 ‘투쟁목표는 대외적인 것임’을 재확인하고 이때까지의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 주장에 “한·미행협 체결에 있어서 호혜평등을 관철하라”는 주장을 보댔다. 그리고 학생들은 ‘분쇄하자 매춘외교 타도하자 매판자본’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이화동로터리까지 진출했다. 이날 시위로 법대 학생회장 장명봉과 임종률이 구속되었다.
서울법대생들은 14일 다시 총회를 열어 한 · 일회담 조기타결 반대와 한·미 행협에서의 미국측 성의를 촉구하고 “민족주체성 확립”과 “부정부패 일소”를 구호로 내세우면서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단식장에는 ‘제2의 굴욕 한·미 행정협정 반대’ 등의 플래카드가 같이 걸려 있었다. 200시간 단식으로 이어지는 이 투쟁은 각 대학의 단식투쟁으로 파급되면서 한·일협정 조인반대투쟁의 정점을 이루었다.
한·미행협 문제는 격화되는 한·일협정 조인반대 비준무효회투쟁에 가려졌지만, 7월 초 대한변호사협회가 한·미행협에 관한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다시 국민적 관심사로 부각되었다. 이는 당시 여론을 집약한 내용이었다. 성명서는, 행정협정안을 국민에게 공표하교 형사관할권문제에서 주권우선의 원칙을 지킬 것과 민사청구권에 있어 우리나라의 민사 및 그 정신을 위반해서는 안되며, 대한민국헌법 제28조와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등을 미 8군 고용주라는 이유로 배제 또는 제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한·일협약 조인 일정이 다가오자 서울 대학가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18일 고대생 1천여 명과 서울상대 300여 명이 시위를 벌여 경찰과 충돌한 데 이어 6월 19일에는 서울대 단과대 학생회장들이 시내 모처에서 모임을 갖고 22일 까지정부 당국이 단식투쟁 학생들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서울대 전체 학생이 공동행동으로 투쟁할 것을 결정했다. 이날 엿새째 단식을 계속중이었던 서울법대생 232명 외에, 오후 1시에는 문리대생 63명과 상대생 320명 그리고 사대생 20명이 단식농성에 합류했다.
한·일회담 정식조인을 하루 앞둔 21일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경희대, 중앙대, 숭실대, 외국어대, 동국대 등 시내 12개 대학 학생들과 대광, 숭실, 양정 등 3개 고교생 도합 l1만여 명은 교문을 박차고 시위행진에 나서 “매국외교 반대”
를 절규했다. 서울대는 20일부터 실시된 조기방학에 대한 성토와 한·일회담 즉각 중지를 외치며 끈덕진 시위를 시도했으나 경찰의 대규모 동원으로 캠퍼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많은 학생이 연행되었다.
정부는 21일의 대규모시위에 대처하기 위해 21일 오후 5시를 기해 전국 경찰에 갑호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단식학생들의 수도 부쩍 늘어 22 일 밤 현재 서울시내 10개 대학과 지방 3개 대학에서 약 800여 명이 단식농성투쟁을 전개했다.
6월 21일 오전 9시 45분 150여 명의 서울사대 학생들은 교정에서 학생총회를 열고 “대학휴강 즉시 철회” 등 5개 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서울공대도 오전 10시 20분, 800여 명의 학생이 “정부는 비민주적인 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하고 일본의 도덕적 반성 위에 선 평등호혜원칙 위에 재출발하라”는 등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데모에 돌입해 육사 앞에서 경찰과 맞섰다.
단식 8일째에 접어든 서울법대생들은 158명이 졸도한 가운데 계속 단식투쟁을 전개했으며, 고려대는 오전 11시경 약 400여 명이 성토대회를 연 후 신설동 로터리에서 경찰기동대와 충돌했다. 연세대도 낮 12시 50분경 약 2천여 명이 대강당에서 한·일회담 반대 성토대회를 연 뒤, ‘누구 위한 조인이내냐? 3천만은 통곡한다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나서 이대 입구까지 진출하여 400명의 경찰과 충돌했다. 또한 중앙대 500여 명, 숭실대 200여 명, 동국대 500여 명, 외국어대 300여 명, 경희대 1.200여 명도 성토대회를 개최하였다. 서울시경은 6 ·21 데모학생 중 906명을 연행하여 이중 2명을 구속하고 31명을 불구속, 394명을 즉심, 나머지를 훈방조치했다.
한편 서울대가 전년보다 20일 정도 앞당겨 6월 20일 방학에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21일 서울의 사립대학 총장들은 조선호텔에서 회합을 갖고 최방학 실시에 원칙적으로 합의하여 21, 22일을 기해 대부분의 대학들은 여름방학에 들어갔다. 서울시내 58개 남자고교들도 시교육위원회의 긴급지시로 22일부터 2일 내지 5일 간 일제히 휴교에 들어갔다.
한·일협정이 정조인되는 날인 6월 22일 전국 대학에서는 성토대회와 시위가 전개되었으나 경찰의 강력한 저지로 전면적 가두시위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서울시경은 경찰전문학교생 150명을 포함한 경찰병력 약 4천 명을 동원해 각 지역에 배치하고 결사적으로 시위저지에 나섰는데 특히 이날 낮 12시 45분 트럭 12대 스리쿼터 5 대에 분승한 약 300여 명의 무장군인이 고대 시위대가 진출했던 안암동로터리에 출동해서 긴장상태를 고조시켰다.
고려대는 이날 오전 11시 30분" 1,200여 명이 성토대회를 개최한 후 ‘정조인 즉시 중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데모에 돌입하였고, 연세대도 오전 11시 500여 명이 데모에 나서 굴레방다리 앞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동국대는 오전 10시 40
분 1천여 명이 퇴계로 5가에서 경찰과 대치하였고, 건국대도 같은 시간 단식학생 중심으로 1천여 명이 성동서로터리까지 진출했다. 명지대 500여 명과 성균관대 1천여 명도 각각 성토대회를 열고 시위에 들어가 경찰과 충돌했고, 숭실대, 수도공대, 가톨릭의대, 서울대, 서울사대, 외대, 수도의대, 홍익대, 한양대 등 각 대학에서도 조인반대 집회와 시위가 열렸다. 6일 22일 데모로 1,134명이 연행되어 이들 중 1명이 구속되었고 34명이 불구속입건되었다.
6월 22일 오후 5시, 마침내 전국적으로 맹렬하게 전개된 반대투쟁에도 불구하고 굴욕적인 한·일협정이 정식 조인되었다. 동경에 있는 일본 수상관저에서 한국측 수석전권대표 이동원 외무장관과 일본측 수석전권대사 시이나 외상 사이에서 재협정안 및 그 부속문서가 서명된 것이다. 이로써 14년 간 끌어왔던 한·일간의 국교정상화교섭은 종지부를 찍었다 이제 남은 것은 국회의 비준동의절차뿐이었다.
한편 서울법대생들은 22일 오후 5시 한·일협정이 정식조인되자 단식 200시간의 기록을 남기고 자진해산했다. 이날 끝까지 남아 있던 64명의 단식학생들은 중계방송을 통해 정식조인 진행상황을 들은 다음 64명 전원이 ‘민족주체성 확립’이라는 혈서를 쓰고 난 뒤 눈물을 흘리며 해산식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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