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전국대학교 6.3운동
건국대학교는 장안동에 위치해 있으나{현 모진동) 낙원동 캠퍼스에서 많은 학생들이 학업은 물론 각종 세미나를 하고 있었다. 6 .25전쟁을 치르면서 때를 놓치거나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던 사회 각 분야에 종사하는 청 · 장년 또는 노년의 민초 4천여 명이 모여 만학의 꿈을 안고 공부를 하는 건국대학교 낙원동 캠퍼스는 만학당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일과 후 학교를 다녀야 하는 어려운 실정에 놓여 있는 바 시국에 대한 불평불만이 있어도 공식적으로 표현키 어려웠고 행동으로 표현할 수 조차 없었던 실정이었다.
1963년 6월 대구대학t현 영남대) 주최 세계모의평화회의(분단국가의 평화통일)에 참석하여 박원규가 특상을 탔지만(34개 대학 참석) 토론내용이 반공법에 저촉된다 하여 서너 시간씩 조사를 받았던 시절이었대. 학술세미나 장소에까지 정
보형사가 참석하는 실정이었다). 이를 계기로 세미나를 따고 귀교한 학생들은 학원의 자유를 부르짖었고 학원사찰 반대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낙원동 캠퍼스의 학생회장이 된 박원규는 1964년 들어서 의회의장이었던 이우영, 총학생회 총무부장 김영목, 섭외부장 원무희, 정치대학 학생회장 유통원, 의회의장 임경민 등과 유대를 같이 하면서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에 나섰다.
외부와의 연결망은 낙원동에 인접한 동국대 총회장과 종로에 있는 여왕봉다방에서 자주 만나 형성하였다(당시 박원규는 총학생회가 정보기관에 감시를 많 이 받게 되는 사정을 감안하여 단과대학별로 활동하여 데모대를 결성하자는 제
의를 하였다).

정외과에 재학중이던 박상래는 성대·고대 등을 왕래하면서 3·24시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게 되었고 이를 도와 3학년인 문영재, 민승, 유대원 등이 활동하였다. 동시에 5월에 학내 한·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가 결성되면서 박원규, 이유영은 장안동 본교를 수시로 왕래하게 되었으나 3·24시위 때에는 서울 중심권에서 너무 떨어져 있는 전 대학생들이 성동교를 넘지 못하고 뿔뿔이 헤어져 개인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후 잠잠했던 학내시위는 총학생회장 유해성의 국제시찰 외유로 인하여 총학생회가 주관하던 투쟁위원회가 조직력을 상실하면서 단과대학별로 투쟁결속이 다져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6월 3 일 장안동 본교의 대강당에는 단과대학별로 데모강행을 위하여 학생들이 운집하게 되었다{낮 12시경). 학생회의 만류로 본교학생회 간부들과 옥신각신하는 속에 낙원동 캠퍼스의 박원규, 이우영이 본교 강당에 도착하게 되
었다. 대략 2천여 명이 집결한 가운데 건설적인 시위를 하자는 온건파와 대외적으로 시위를 하자는 강경파가 웅성거리며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시점에서 박원규, 원무희, 김영목, 박상래 등은 최종적으로 장외투쟁 시위를 결정하고 질서를 유지하면서 오후 1 시경 교문을 나섰다.

성동경찰서의 데모저지 경찰은 처음에는 진로를 막았으나 질서를 유지하며 행진한 시위대는 경찰과 큰 충돌 없이 성동교를 넘었다. 성동교를 넘어앞에 이라 동시다발적인 저지능력을 상실한 경찰은 진압을 포기하였다 이에 시위대는 왕십리를 거쳐 을지로까지 무난히 진입하여 중앙청을 호f해 학교별로 재결집하였다{오후 6시경).
인솔책임을 맡은 박원규, 원무희, 김영목, 임경민은 한국일보사 쪽에 시위대를 정렬시켰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위열기는 고조되었지만 각 대학 시위대가 청와대를 목표로 할 무렵 계엄령선포가 거의 확실시된다는 정보가 시위대에게 알려
지기 시작했다{오후 9시경)
이에 시위지도부는 시위대 200여 명의 안전을 위해 시위대를 이끌고 낙원동 캠퍼스로 후퇴하였다. 박원규, 원무희, 김영목, 임경민도 다음 투쟁을 기약하면서 헤어졌다.
그러나 박원규는 계엄령 선포 다음날인 6월 4일 오전 7시 신당동 집에서 성동경찰서로 연행되어 6월 7일 서울구치소로 이감되었고, 그후 87조 2항에 의거군검찰에 의해 내란죄로 기소되었다.
박원규는 서울구치소에서 각 대학에서 데모를 주동했던 동지들을 만났다.
당시 구치소에는 약 370여 명의 학생들이 수감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내란 또는 소요 등으로 기소되었던 바 계엄령이 해제되면서 구속학생 석방데모가 일어났고 그 와중에서 대다수의 학생들은 기소유예 또는 기소중지 등으로 대략 3차례에 걸쳐 석방되었다. 이때 김영목, 임경민, 원무희 등도 석방되었다.
3차례에 걸쳐 대다수의 학생들은 석방되었지만 김중태, 현승일, 김도연, 김실, 이명박, 이경우, 이정재 약 12명의 학생지도부는 계속 수감되었다.
박원규는 김실, 이명박, 이경우, 이정재 등과 함께 10월 2일 오후 7시경 금보석으로석방되었다.
졸업반이었던 이들은 각자 학교로 돌아갔고 그해 12월 22일 내란(예비적 청구죄며 소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판결에서(합의부 주심판사 원종백) 2~3년에 집행유예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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