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학생운동사 58

제3부, 제 17 장 제주대학교 6·3운동

제 17 장 제주대학교 6·3운동 1965년 3월 당시 제주대학은 2개의 학부로 분리되어 법문학부는 제주시에, 이농학부는 서귀포에 있었다. 제주대 학생들을 다 합쳐봐야 600명 정도였고, 그것도 제주시와 서귀포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므로 제주시의 법문학부학생은 300명 정도였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법학과 4학년인 서경림에게 법학과 3학년 학생들이 찾아왔다. 저녁 9시경, 교정에서 한·일협정을 반대하는 데모를 할 예정인데, 서경림에게 사회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서경림의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계획에 침여할 수는 없었지만, 교정에서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는 의사표시를 한다는 것은 정당하게 보였고, 또 이러한 의로운 일을 하는 후배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서경림은 쾌히 승낙했다. 법학과 3학년 고태현..

63학생운동사 2024.02.27

제3부, 제 16 장 전남대학교 6·3운동

제 16 장 전남대학교 6·3운동 1. 1964년의 학생운동 ‘5,16군사쿠데타’로 움츠러들었던 학생운동이 다시금 기세를 되찾은 것은 한·일간의 민족적 감정을 자극한 한·일회담의 진전이었다. 한·일간의 국교재개를 위한 교업은 한국전쟁 기간 중이었던 1951년부터 시작하였다. 1951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여 미국의 점령지가 되었던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통해서 국권을 회복하면서이다. 일본은 다음 단계로 우리나라와의 과거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국가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대화를 제안하였고, 우리나라도 그에 응하여 한·일회담이 열리게 된 것이다. 양국간의 주된 의제는 ‘기본관계’문제,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 및 처우문제, 어업 및 선박문제, 문화재 반환문제 등이었다. 그러나 한·일회담은 ‘5..

63학생운동사 2024.02.27

제3부, 제 15 장 이화여자대학교 6·3운동

제 15 장 이화여자대학교 6·3운동 1. 분단 후 최초의 이대 학생운동 이화여대의 6·3 운동은 1965년 들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1965년은 이대 학생운동의 원년이 된다. 일제하의 이화는 민족해방투쟁에 앞장서기도 했으나, 분단 후의 이화는 4,19 등 한국 근현대사의 정치적 고비고비에서 거의 침묵해오다가 6·3 운동으로 비로소 그 모습을 눈부시게 일신하였다. 1964년 경비정 마련을 위한 모금운동으로 단결의 힘을 인식한 이대는 1965년 6월 전체 이화인이 참가한 대규모 집회를 가졌으며, 경찰과 대치하여 농성을 벌였고, 최초로 최루탄이 발사되고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학생회 임원을 중심으로 많은 학생이 참석한 단식투쟁을 벌였을 뿐 아니라 학생회 전부가 구속되거나 수배되었다. 1965년 ..

63학생운동사 2024.02.27

제3부, 제 14 장 연세대학교 6·3운동

제 14 장 연세대학교 6·3운동 1. 햇불을 올리다 1964년 3월 24일 오후 신촌골 독수리가 거센 날갯짓으로 대일굴욕외교 반대운동의 햇불을올렸다. 이날 연세대학교에서는 총학생회(회장. 안성혁 행정 4)가 주최하고 학내 서클인 한국문제연구회가 주관한 시국강연회가 오후 2시부터 대강당에서 열렸다. 당대 최고의 지사로 꼽히던 장준하 씨와 함석헌 옹이 초청돼 먼저 장준하 씨가 한·일회담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이어 함석헌 옹이 역사의식에서 본 한·일회담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펴 학생들의 열띤 호응을 얻고 있었다. 강연이 진행되고 있는데 갑자기 총학생회장 안성혁이 단상의 함 옹에게 양해를 얻고 마이크를 인계받았다. 안성혁은 지금 서울대학교와 고려대학교가 대일굴욕외교 반대시위를 벌이기로 했다면서 연세..

63학생운동사 2024.02.26

제3부, 제 13 장 숭실대학교 6·3운동

제 13 장 숭실대학교 6·3운동 1. 6·3 데모 이전의 운동 1964년 6월 3일, 전국의 대학생들은 “정부의 대일굴욕외교 반대”로 시작히여 “박정희군사독재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 강력한 반정부데모를 벌여 이른바 6·3 계엄사태를 야기하였다. 6·3 학생운동의 시원은 3·24데모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4년 3월 24일, 서울문리대·고려대·연세대생 수천 명은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데모를 시작하였다. 다음날 3월 25일 숭실대학의 데모에 돌입했다. 이날 데모는 학생회장 강우석(철학과 4년), 학생회 부회장 현홍광(농촌사회학과 3년), 대의원회 부의장 유영렬(사학과 3년) 등 학생회와 대의원회간부들이 주도하였다. 강당에서 굴욕외교 성토대회를 마친 500여 명의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학교(상도..

63학생운동사 2024.02.26

제3부, 제 12 장 숙명여자대학교 6·3운동

제 12 장 숙명여자대학교 6·3운동 1. 정치적 상황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한국정치는 다소 안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기만적 ‘민정 이양으로 집권한 박정희군사정권은 정치, 경제 등의 측면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시키고자 일련의 회담을 전개하였는데, 이 당시 정부의 자세가 너무나도 굴욕적이어서 국내 정치인뿐만 아니라 양식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우려와 비탄을 금치 못하였다. 대학생들도 정부의 저자세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명하기 시작하였다. 1964년초부터 소규모로 학생시위가 끊이지 않았고 같은해 3월 한국학생총연합회가 결성되면서 한·일굴욕외교 반대시위가 거국적이며 조직적으로 전개되었고 3·24데모와 6·3사태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정부는 ..

63학생운동사 2024.02.25

제3부, 제 11 장 성균관대학교 6·3운동

제 11 장 성균관대학교 6·3운동 1. 개 요 1964년 봄은 유난히도 길고 가슴 설레이며 분주했다. 신입생들의 싱싱하고 환한 웃음 속에서 진로를 고민하던 상급생들의 우수에 찬 가슴도 조금은 위안을 얻는 계절이다. 그것은 대학의 낭만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땅의 민주헌정은 중단을 거듭하면서 4,9혁명의 깃발이 채 나부끼기도 전에 5,16군사쿠데타에 의해 하강식도 없이 송두리째 뽑혀지고 말았다. 그들은 ‘원상복귀’라는 스스로 내세웠던 대국민 의k속을 팽개치고 군복을신사복으로 갈아입는 절차만으로 이승만에 이어 장기 군사독재집권의 대장정에 올랐다. 사실 6·3 운동은 이미 이때부터 출발하고 있었다. 성대는 1963년 5월 초부터 약 1개월 간 재단분규문제로 군사정권과 투쟁했던 실전경험이 축적되어 있었다 ..

63학생운동사 2024.02.25

제3부, 제 10 장 서울대학교 6·3운동

제 9 장 서울대학교 6·3운동 1. 1964년의 한·일굴욕회담 반대투쟁 1) 최초의 한·일회담 반대시위 : 3·24시위 1963년 말 출범한 제3 공화국은 대내적으로 권력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 한편 대외적으로 미국과의 공조하에 그동안 지체되어온 한·일회담을 조속히 타결할 것을 목표로 64년에 들어서면서 발빠르게 움직였다. 한편 군정이 끝난 후 상대적으로 느슨해진 상황에서 민족주의비교연구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 서울대 학생들은 박정희정권에 대한 항의와 반대를 은밀히 도모하였다. 1963년 겨울방학을 박정희정권 반대의지로 불태운 학생들은 1964년 들어 박정희정권이 굴욕적 한 · 일회담을 강행하려 하자 이에 정면으로 맞서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친 최초의 전면적 학생시위가 바로 3·24시위였다. 서울..

63학생운동사 2024.02.25

제3부, 제 9 장 서강대학교 6·3운동

제 9 장 서강대학교 6·3운동 서강대학은 1960년 4월 18일 4,19혁명이 일어나기 전날 개교하였다. 카톨릭 예수회의 교육봉사정신과 한국의 민주적 교육이념에 의거한 지도혐 양성할 목적으로 6개학과 160명을 선발하여 출범하였다. 개교 때부터 서강대학은 소수정예의 교육을 내세우고 학사행정을 매우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특히 출결석과 성적처리에 있어서는 그 엄격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학생들은 개교한 지 2개월이 지난 1960년 6월부터 학생회의 구성을 논의하였으나 1962년 5월에 이르러서야 제 1 회 학생회장 선거를 치를 수 있었다. 학생회 명칭도 ‘서강대학 재건학생회’였다. 당시 학생회의 활동은 체육대회, 신입생환영회 등의 교내 행사에 치중되었고 대외적인 교류는 많지 않았다. 이에 제 1..

63학생운동사 2024.02.21

제3부, 제 8 장 명지대학교 6·3운동

제 8 장 명지대학교 6·3운동 “한·일회담굴욕타결반대”를 부르짖는 전국 대학, 중고등학생들의 데모에 호응하여 1964년 3월 26일 본 대학 1천여 명의 학생들도 데모에 침여하였다. 이날 정오 별관 4층에서 ‘대일굴욕외교 반대 성토대회’를 벌인 학생들은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한 후 만세삼창으로 대회를 마치고 곧바로 태극기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데모에 들어갔다 “현 정부는 국민의 의사를 한·일회담에 반영하라”, “평화션을 사수하고 일본의 간계에 속지 마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거쳐 국회의사당 앞에 온 학생들은 먼저 애국가‘를 봉창하고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결의문 낭독과 만세삼창을 한 후 다시 광화문 거리를 지나서 중앙청 앞까지 밀고 갔으나, 경찰의 제지로 양정고등학생 등 약 5천 명의 학생과 같..

63학생운동사 2024.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