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0 장 한양대학교 6·3운동
1. 6·3 거사 이전의 데모
1964년 3월 24일 ~ 5월 31일까지 한·일회담을 추진하고 있는 정부의 평화선, 청구권, 어로협정 등의 만족스럽지 못한 외교자세에 대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리고 한‘때는 매번 6천 명 이상의 학생이 10여 차례에 걸쳐 노천극장에 집결 총궐기하고 때론 가두로 나가 청와대까지 진출하여 박정권을 규탄해 왔다.
결의문
우리 한양대의 순수한 지성은 현시대 조국이 정치적 위기에 봉착하였음을 절감하고 조국의 젊은이로서 국민 앞에서 구국운동에 앞장설 것을 결의하여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한다.
우리는 한민족드로서의 민족적 의식에서,
• 민족감정이 허용하지 않는 굴욕적인 한 · 일외교를 결사반대한다.
• 평화선 양보는 매국적 행위라고 규정한다.
• 미국은 한 · 일외교에 간섭하지 말고 한 · 미행정협정을 조속히 채택하라.
한양대에서는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총학생회와 단과대학 학생회가 중심이 되어 진행하였다.
총학생회 수석 부회장 이정재는 한국학생총연합회의 모든 회합과 의결사항에 침여하고, 이를 교내에 유입시키고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왔으며, 64년 5월 25일에는 종로서에 연행되기도 했다.
한양대 6·3 데모 당시 주동학생과 지도체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총학생회 : 수석부회장t이정재 섬유4)
차석부회장(이기문 원자3)
체육부쟁이기환 건축4)
※ 잠재지원조직 : 태권도부 270명(강효종 섬유4, 김재복 전기4)
공대학생회 : 수석부회장(김용달 토목4)
차석부회쟁전국현 토목3)
정경대학생회 : 회장(이종락 법학4)
수석부회장t왕영환 경제 4)
차석부회장(이길호 상학3)
총무부장(박종해 법학4)
문리대학생회 : 수석부회장(민광길 사학4)
2. 6·3 거사준비
학생지도부는 그동안 십여 차례의 한·일외교 규탄대회(대노천극장)와 가두진출을 시도함에 있어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대응에 미흡한 점이 있어 5월 25일 이후부터 6월 3일 전까지 일사불란한 데모진행 전략을 강구했다. 학생동원은 학생회를 중섬으로 하되 특히 총학생회 체육부장 이기환과 태권도 대부격인 강효종(섬유4)과 태권도주장 김재복{전기4)을 주축으로 전체 태권도 회원 270명을 풀가동하도록 조를 편성해 각 대학 건물과 학교 후문, 학교 뒤편 변방으로 나가는 부분까지 활동영역을 정하고 점검을 실시했으며, 연락만 오면 즉시 행동 개시할 수 있도록 조직화하고 학생들을 유도·통제할 수 있도록 하였다. 데모가 진행될 때는 행진대열 좌우사이드와 특히 후미부분 질서와 YTP 등의 불순세력 침투, 유언비어 날조 등을 차단토록 준비했다.
3. 의견수렴과 이념정립
데모 총지휘자 이정재는 모든 활동조직을 점조직체로 상호 연결을 어렵게 만들었다. 비밀이 새어 교내에 배치된 기관정보원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가 이용한 조직은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조직체와 태권도부, 경북 김천고를 중심으로 한 향우회, 선거전에 동원되었던 참모조직이 있었고 외곽에서는 이념을 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숭덕학생회(서울시내 각 대학에 다니는 주로 지방에서 온 학생으로 학교의 추천을 받아 일정한 면접을 거쳐 선발된 우수학생집합체로 당시 학장은 방영출 목사, 학생회장 이정재)에서 저녁마다 각 대학의 정보와 시국토론을 거쳐 이념과 행동 정립에 도움을 얻게 되었고, 2주에 1회씩 사회 저명인사 초청강연을 듣게 된 것도 시국의 안목과 역사의식, 가치관 확립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4. 6·3거사
1964년 6월 3일 10시 총학생회는 대의원을 소집히여 당일 총궐기히여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전개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고 중앙청 앞까지 진출할 것을 결의하고 대노천극장에 한양대생 전원을 집합시키니 구름떼같이 모여 노천극장 전체와 외곽까지 입추의 여지가 없었고 대일굴욕외교 반대 구호를 외치니 천지가 진동하는 함성이 터졌다. 한학련에서 채택한 결의문과 행동강령을 이정재와 이종락이 재수정을 가했고, 이정재가 선언문을 낭독하고 행동강령을 선창했으며, 학생 전원의 제창으로 이어졌다.
이후 굴욕한·일회담 반대 구호를 외치며 곧바로 가두진출을 시작하여 교문을 나서고 선두에 이정재, 이종락, 이기문, 김용달, 민광진, 박종해 등 학생간부들이 앞장서 길을 인도해나갔교 선두가 성동경찰서를 지나 왕십리 배명고 가까이 오니 경찰병력 저지선이 완전히 대로를 차단하고 있어 이정재가 행진데모대를 정지시키고 성동경찰서장을 직접 면담하여 평화적 시위를 할 테니 길을 비켜달라고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을 나서고 선두에 이정재, 이종락, 이기문, 김용달, 민광진, 박종해 등 학생간부들이 앞장서 길을 인도해나갔교 선두가 성동경찰서를 지나 왕십리 배명고 가까이 오니 경찰병력 저지선이 완전히 대로를 차단하고 있어 이정재가 행진데모대를 정지시키고 성동경찰서장을 직접 면담하여 평화적 시위를 할 테니 길을 비켜달라고 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그때 이정재가 데모대 쪽으로 와서 학생간부들과 협의 후 저지선을 뚫고 중앙청으로 진행하자는 신호를 보내니 일제히 경찰병력과 충돌, 대접전이 벌어져 최루탄이 난무하고 경찰봉과 돌팔매가 교차되어 대난투극이 벌어지고 후미부분에서는 성동경찰서 유리창을 완전히 다 깨버리는 사태가 벌어졌고, 정보원이 찍는 카메라가 박살났으며 뭇매가 가해졌다.
데모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원체 숫자가 많은 한양대생은 무사히 저지선을 뚫고 을지로를 거쳐 시청 앞을 지나 중앙청에 도착하였다. 중앙청 제일 앞쪽에 한대생 6천 명이 운집하여 계속 구호를 외쳤고, 데모진행 도중 을지로 입구쯤 가서 민광진이 눈물을 흘리며 쉰 목소리로 태극기를 구해와 이정재의 앞가슴과 배에 이르기까지 태극기를 감아주며 끝까지 분투하라는 격려를 해주었다.
중앙청 앞에서 계속 한·일굴욕외교 타도를 외치다가 급기야는 박정권 타도로 구호가 빼어갔는데 급기야 계엄령이 선포되고 데모군중은 무장군병력에 의해 해산되었다. 데모주동자들은 도피하기 시작했으나 이종락, 이기문, 김용달, 전국현, 이길호, 이기환이 1964년 6월 초순에 먼저 잡혀갔다.
이정재는 계엄이 선포되면서 첫날밤은 하숙집에 들어가지 않고 왕영환 집에서 1 박을 하고, 다음날 전화로 이기문과 만나 앞일을 협의하고자 학교 학생과장(김진일 교수)을 만나자고 약속하고, 학교 앞은 위험하니 서로 다른 길로 교내에 들어가자고 제의하고 학교로 들어가는데 미행자가 수상쩍어 이정재는 빨리 몸을 피해 예술관 지하 태권도장으로 숨어들어가 하루를 보냈다. 다음날 학교 뒤편에 있는 정경대 김춘도 선생 댁을 방문, 그곳에서 1주일 숨어 있다가 그분의 정릉에 있는 처가로 안내되어 그곳에서 계속 숨어 있었다. 그곳에서는 외부와의 일체 관계를 끊고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 정보를 입수하고 있었다.
6월 중순쯤 “이정재 자수하라”는 광고가 2번 나오고 얼마 안되어 현상금이 붙어 신문에 나오기 시작했다. 6월 20일이 지나서는 그외 주동학생들이 잡혀가고 없었다. 성동경찰서와 동대문경찰서에서 이정재를 체포하기 위해서 숭덕학사에 두고 온 각종 명단을 찾아 전국을 찾았다는 것을 여러 사람을 통해 나중에 알게 되었고, 이정재가 기거하던 숭덕학사 김천 본가에 경찰이 잠복근무하고 있었으나 헛수고였다.
6월 말경 이정재는 이기문집에 전화를 걸었다. 이기문 여동생이 전하는 말이 오빠(이정재)만 자수하면 구속된 한양대샹 전원이 석방된다는 말에 자수를 결심, 학교측과 성동경찰서장에게 전화를 하고 지수할 테니 2가지 요구조건을 들어달
라고 서장에게 제시했다. 내용은 ① 내가 숨어 있던 곳을 묻지 말라. ② 내가 자수하므로 다른 학생들을 석방하라는 요구였다. 그 요구에 성동경찰서장은 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으나 다른 학생 석방요구는 일찍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동경찰서에서 1주일 취조가 밤낮없이 시작되었고, 그후 필동 계엄군검찰로 이송되어 거기서 계엄군검찰관의 취 후 서대문교도소로 이감되어 숨막히는 교도소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종락, 김용달, 이기문, 전국현, 이길호, 박종해는 9월 기소중지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소하고 왕영환, 민광진은 무사히 잘 넘어갔다. 이정재는 최종 한 사람으로 남아 있지만 오히려 다른 동지들이 나갈 수 있었다는 것이 반가웠다.
이 옥고로 인해 ROTC 제적생 6명이 발생되었는데 이정재, 이종락, 김용달, 이기문, 전국현, 이길호가 그 대상이었고” 그중에 이종락은 못내 아쉬워했다(장군이 되려고 했는데 이 점은 이정재가 지금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정재
는 재판중에 입영영장이 나와 연기되었고, 이기문, 전국현, 이길호는 다음해(1965)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조차 할 수 없는 결격사유가 되어 이들도 잠시 실의에 빠져 있기도했다.
5. 6·3 운동 구속 마지막 재판(구형 5년)
6·3 거사로 인해 건국대 박원규, 고려대 이명박, 이경우, 동국대 김실(김의종), 한양대 이정재가 내란죄(형법 제 87조 제 1 항 사형 또는 무기징역)로 죄명이 붙었으나 재판과정중 소요죄로 비뀌면서 구형이 5년이 내려 졌고, 나중에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이정재는 이로 인해 박정권하에서 해외연수, 세미나, 회의, 시찰 등의 기회가 많았으나 여권신청을 하면 중앙정보부에서 ‘부적’으로 떨어져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고, 직장에서도 진급 등의 불이익이 계속되었다. 5공정권
이 들어서면서 해외연수를 갈 수 있었고,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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