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학생운동사

제3부, 제 18 장 중앙대학교 6·3운동

63동지회 2024. 2. 27. 16:47

제 18장 중앙대학교 6·3운동 

      1.  3·24데모

      우여콕절 끝에 민정(民政)이양이 이루어져 박정희정부가 들어서자 현안 중인 한·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이에 학생회는 대일국교 저자세 외교를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일본정부는 36년 간 한국민족에게 끼친 죄과를 진심으로 사과하고 재일교포 북송과 정경분리정책을 시정하지 않는 한 국교를 정상화할 대상 국가가 되지 못하며,  따라서 정부는 망국적 졸속외교를 중단하여야 하고 특히  ‘평화선’은 한국의 국방과 수산업의 보호를 위해 사수하여야 한다"
      1964년 3월 24 일,  중대생은 정오를 기해 전교생이 교정에 모였다.  학생회가 주관한 이 성토대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의문이 채택되었고,  평화적인 시위에 나설 것을 결의하였다.


      결의문
      1. 정부는 한·일 저자세 외교를 즉각 중지하고 평화션을 끝까지 사수하라!
      2. 정부는 국민여론에 귀를 기울이고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어선을 강력하게 단속하라!
      3. 일본정부는 36년 간 한국국민을 탄압 통치한 죄상을 솔직하게 시인하고 사과할 것이며,  재일교포 북송 등 양면 외교를 즉각 중단하라!

 

      이 결의문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자  ‘일장기’를 갈기갈기 찢는 것을 신호로 전교생이 스크럼을 짜고 교문을 나섰다.
      중앙대 총장 임영신 박사는 “본교생이 평화적인 시위를 하니 방해하지 말라”는 사전 통보를 당국에 보내는 한편,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구급약품을 준비하고 임민규 이사장과 전 교직원으로 하여금 우발적인 사고에 대비히여  ‘데모대’의 앞과 뒤에서 보호토록 지시하였다.
      오후 3시 삼각지를 거쳐 서울역에 도착한 본교생은  “바다 팔아 정치 말고,  비밀외교 공개하라”,  “중지하라 매국외교,  3천만은 통곡한다”는 구호를 외쳤으며,  서울역 광장과 연도에 늘어선 시민들의 박수갈채와 격려를 받는 가운데 시청과 국회의사당을 통과하여 중앙청 광장에 도착하였다.
      도착하자마자 연좌에 들어간 데모대는 선언문,  결의문을 낭독한 다음 최두선 국무총리를 불러 한·일회담에 관련된 정부측 입장을 듣고 또한 국민의 요구가 무엇인가를 직접 전달할 것을 만장일치로 채택해 교섭대표로 박경일 총학생회장과 윤재만 부회장을 선출하였다.
      오후 4시 30분,  중앙청 현관에 나타난 최두선 총리는 학생들이 미리 교섭대표에게 제출한 질문에 대하여 비교적 상세히 답변하면서,  “중대생의 애국충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학생들의 의사와 요구사항을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국가정책에 반영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결론지었다.  최두선 국무총리의 답변을 듣고 난 데모대는 일단 해산하였다.
      이날의 시위는 아무런 사고 없이 평화적으로 진행되어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2. 총·학장,  ‘학원사찰 중지’  등 결의

      3·24데모 이후 산발적인 데모가 계속되고 특히  ‘학원사찰 중지’를 위한 학생데모가 연일 계속되었다.  학원질서와 사회의 안녕 질서가 동시에 파괴되고 있음을 절감하여 사회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서울시내 28개  대학(교)  총·학장이 외교구락부에서 긴급 간담회를 열고 「시국수습 결의안」을 채택하여 이를 문교부를 비롯한 정부 요로에 전달하였다(1964년 4월 24 일).
      「시국수습 결의안」은 임영신 총장,  유진오 총장(고대),  권중휘 총장(서울대) 등  5명이 초안을 수정하며 다음과 같이 성안되었다.

 

       ①  학생들의 의사는 충분히 발휘되었으니 학생들은 학원에 돌아가 학생 본분인 학구에 전념하라.
       ② 학생들의 데모는 애국충정에서 출발한 것임을 재확인하며,  정부는 항간에 유포되고 있는 부정과 부패를 과감하게 일소하여 학생들이 다시는 거리에 뛰어 나오는 일이 없도록 하라.
      ③ 여야는 구태의연한 대립만을 고집하지 말고 대국적인 면에서 정쟁을 지향하는 데 노력하라.
      ④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고,  학원사찰을 중지하라.


      3.  6·3사태와 비상계엄령

      전국적으로 계속되던 한·일회담 반대 학생데모는  6월 3일에 절정에 달하였다.  서울시가는 각급 학교의 학생데모대에 의하여 교통이 두절되고 상가는 문을 닫는가 하면,  몇몇 파출소가 학생들에 의해 장악되는 등 실로 치안질서는 거의 마비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본교생은 첫 시간이 끝나자마자 교정에 모여 성토대회를 열었다.  전교생이 모인 성토대회에서 학생들은  “①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공개하라.  ② 평화선은 끝까지 사수히여야 된다.  ③ 공화당의 부정부패는 나라를 망친다”  등의 구호를 외
치며 학교 당국의 만류를 뿌리치고 교문을 나서 한강교를 힐빼 돌진하였다.
      교문 주변에서 대비하던 경찰기동대와 최루탄과 투석전 등 격렬한 공방전을 치르고 후퇴한 데모대는 다시 대열을 수습하여 스크럼을 짜고 교문을 나섰다.

1964년 9월 1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6·3동지의 출감을 축하해주고 있는 6·3데모의 주동자들 앞줄 중앙에 흰옷을 입은 이가 중앙대 고장섭이다.

 

      중대 입구 델타 교착지는 수백을 헤아리는 완전무장한 경찰에 의해 수비되었고, 1차 공방전에서 최루탄의 독한 가스와 투석전을 거치면서 차츰 격화된 데모대는  2차 공격에 돌입하였는데,  여기서 10여 명의 부상자와 100여 명의 연행자를 내는 희생을 치렀다.
      오후  4시 쫓기고 쫓는 전진과 후퇴가 숨가쁘게 계속되는 가운데 경찰기동대는 교묘한 전술로 데모대를 포위하였으며 한강돌파가 불가능한 것을 감지한 데모대는 국립묘지를 향해 후퇴하였다.  공중에서는 계속 경찰 헬리콤터가 해산을 종용하는 라우드 스피커를 울렸으나,  최루탄 가스로 눈을 뜰 수 없는 살별한 분위기 속에서도 흑석동의 주민들은 줄을 지어 모여들었고,  학생들을 감싸 피신시키는 등 학교 주변 주민답게 학생들과 행동을 같이 하였다.
      저녁 무렵 국립묘지로 쫓긴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원이 교정에 되돌아왔다.  하루 종일 지칠 대로 치진 데모대는 캠퍼스 내에서 계속 성토대회를 산발적으로 가진 후 오후  7시경 서서히 대열을 풀고 귀가하기 시작하였다.

1965년 4월 14일 한·일협정 반대를 외치며 데모하는 중앙대 학생들에게 데모진압경 잘이 무자비한 구타를 가하고 있다

      마침내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경찰에 연행된 학생들은 육군 제 6관구 사령부에 설치된 서울지구 계엄사령부로 이송되어 군·검찰의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108명의 연행자 중 서청원,  차진요,  유원철,  공석근,  백광수,  김용길,  고창섭 등  7명의 학생만 고등군법회의에  구속·송치되고,  나머지 학생은 6월 4일 0시 25분 학교버스에 실려 귀가하였다. 계엄령 선포는 학원에 임시휴교, 즉 조기방학이란 변칙사태를 가져왔다.
      학교 당국은 긴급 학·처장 회의를 소집하고 문교부 지시에 따라 하계방학에 들어간다고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고,  “당국의 지시에 의하여  6월 4일부터  8월 24일까지 휴교함”이란 고시가 교문에 게시되었다.
      6월 4일,  등교시간이 되자 휴교 사실을 모르는 학생과 이미 알고는 있었으나 돌연한 방학조치에 따르는 궁금증을 풀려는 학생들이 삽시간에 교문을 메웠다.
      문교부와 계엄사령부의 강력한 지시에 의히여 교문을 폐쇄하였으나 학생들은 “내 학교 내가 들어가는 데 막는 법이 어디 있는가” 하고 항의하면서  “교문을닫게 한 비상계엄령을 즉각 취소하라”고 즉석 성토를 벌였다.  이에 기동경찰이 출동하는 등 소동이 재연되었으나 오후  2시경 서서히 해산되어 평온을 되찾고 모든 학사계획은 물론 학생회 활동도 중단되고 말았다.


      4.  6·3계엄령 선포 후의 사태전개

      1964년도 학생회 임원선거는 종전과 같이 실시되었는데 새로 구성된 학생회는 6·3사태로 구속된 학생들의 석방운동을 전개하였다.
      개학과 동시에 총학생회는 6·3 데모에 희생된 서청원,  차진모 , 유원철,  공석근,  백광수,  김용길,  고창섭 등 7명의 구속학생의 석방을 위한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틀 동안에  4,986명의 서명을 받아 행정부와 사법부 등 요로에 제출하여 뜨거운 학우애를 발휘하였다{9.11).


      호소문
      중대 학우 여러분! 의와 참의 터전에서 지성을 함께 연마하던 학구들이 6·3 사태로 구속되어 학원과 학우를 그리면서  영어의 그늘 아래 묶여 있는 모습을 우리는 그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기에 . (중략)
      여기!  우리들의 마음과 뜻과 정성으로 전체 중앙인의 뜨거운 우정의 표지에 서명날인함으로써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고 당국으로 하여금 관용을 베풀어줄 것을 믿으며 우리 다 함께 구속학생 석방서명운동에 적극 참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