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학생운동사

제3부, 제 19 장 한국외국대학교 6·3운동

63동지회 2024. 2. 27. 17:11

제 19 장 한국외국대학교 6·3운동

      1.  64년의 한·일회담 반대투쟁

      서울 이문동에 위치한 한국외국어대학교는 외국어 교육을 위한 전문대학교로 출발하여 한국의 외교역량 강화에 막중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우리 사회 각 분야에 인재를 배출하여 국제화에 앞장서는 등 사회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외국어대학교는 중앙정보부와 인근해 있었던 관계로 정부의 직접적인 관찰대상이었으며 그로 인해 학생운동에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외국어대학교는 1964년에 접어들어 굴욕적인 한·일회담이 재개되자 개학과 동시에 곧바로 굴욕외교 저지를 위한 학생운동 조직을 결성하였다.
      외국어대학교는 64년 3월 2일 굴욕한·일회담 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날 결성된 굴욕한·일회담 반대투쟁위원회의 위원장은 당시 학생회장이던 신용철이, 그리고 부위원장에는 당시 외교학과 학생이었던 이성희가 맡았다.  그러나 신용철이 졸업을 앞둔 4학년 학생임을 감안하여 부위원장인 이성희(외교학과 2학년)가  3월 10일 투쟁위원회의 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이성희가 굴욕한·일회담 반대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후 외국어대학교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성토대회와 가두시위를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64년 3월 24일,  최초의 전면적인 굴욕한·일회담 반대투쟁이 전개되자 외국어대학교는 3월  25일  300여 학생이 집결하여 데모를 벌였다.  24일부터 시작된 한·일회담 반대투쟁의 파고는 경찰의 학생연행에도 불구하고  25일에 와서는 더욱  높아졌다.  외국어대학교도 이러한 전국적 규모의 한·일회담 반대투쟁에일익을 담당했던 것이다.  특히 투쟁위원장을 맡은 이성희는 서울대에서 굴욕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주도한 현승일과 경북중·고등학교 동기였던 관계로 반대투쟁 초기부터 다른 학교들의 동향과 투쟁계획을 소상히 알 수 있어서 외국어대학교가 다른 대학들과 보조를 맞춰 연대투쟁히는 데 유리했다.
      64년 5월 25일,  전국 32개 대학교 대표들은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를 각 학교별로 동시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미 몇 차례의 예비모임을 거쳐 준비된 이 대회는 32개 대학이 선언문과 결의문도 같은 내용으로 채택하도록 하였다.  외국어대학교도 이에 동참하여 5월 25일의 난국타개궐기대회를 열었다.
      3월 24일부터 시작된 대학가의 시위가 정부의 진압 노력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형태로 확대되면서 계속되자  6월 3 일 정부는 마침내 서울지역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6·3 계엄선포로 수많은 학생들이 내란죄 등으로 구속되었고 대학가는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의 열기를 속으로 삭여야만 했다.


2.  65년의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

      1965년에 들어서면서 정부는 한·일회담 강행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한·일협정조인의 예정된 수순이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2월 17일 시이나 일본외상이 방한하여 19일 한·일간 기본조약이 가조인된 데 이어  4월 3일에는 교포의 법적 지위,  어업,  청구권 등 3개 현안이 가조인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6·3 계엄령 이후 잠잠했던 대학가의 시위가 본격적으로 재개되었다.
      외국어대학교는 65년 접어들어 임기를 마친 신용철 학생회장의 후임으로 강철은이  학생회를 이끌었으며,  굴욕 한·일회담 반대투쟁위원회는 이성희가 계속 주도하였다.  학생회장 강철은과 투쟁위원장 이성희는 정부가 한·일협정을 강행하자 대대적인 반대투쟁을 위해 긴밀히 협력하였다.
      65년 외국어대학교의 첫 시위는 4월 15일 12시에 있었다.  학교 교정에 모인  400여 학생은 굴욕적인 한·일회담 성토대회를 개최했다.  이성희 투쟁위원장이 미리 작성한 한·일회담을 반대한다는 요지의 선언문을 낭독하고  6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한 후 학생들은 시위에 돌입했다.  ‘지키자 평회선,  물러가라 매국노’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나선 시위대는 기동경찰대와 충돌하였다.
      이 시기에는 정부의 강경책으로 인해 경찰의 진압책도 매우 과격하였다.  그리하여 학생시위대는 기동경찰대의 최루탄에 맞서 투석전을 전개한 끝에  17명이 청량리서로 연행되었다.  이로써 이날의 데모는 더이상 진행되지 못하였다.  다행히연행된 학생들은 모두 훈방으로 풀려나왔다.  그러나 이날 시위를 주도한 이성희는 경찰에 의해 수배조치되었다.  수배중임에도 불구하고 이성회는 계속 강은철은,  유승렬 등과 연계를 가지면서 학내외 시위를 조직하였다.
      4월 26일 낮 12시 30분 외국어대학교는 다시 한·일회담 반대성토대회를 열었다.  총학생회의 주최로 열린 이 대회는 300여 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가운데 시작되었다.  성토대회에서는  “굴욕적이며 방향감각을 잃은 졸속외교를 거부한다"는  등 7개 항목의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이어 한·일회담 가조인에 대한 화형식을 가졌다.  한편  30여 명의 학생들은 오후 1 시를 기해 한·일회담을 결사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하였으나 밤 9시쯤 학교 딩국의  만류로 결국 귀가하였다.
      한편 외국어대학교의 영자신문 『디 아구스』지가 굴욕적 한·일회담을 성토한  4월 15일자 기사내용이 말썽이 되어 배부를 중지딩하였다.  이에 대해 학교 당국은  “동 신문에 실린 일부 기사와 사설내용이 특정학생의 명예를 훼손시킬 우려가 있고,  외부의 물의를 일으킬 염려가 있기 때문에 배부를 중지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학생들은  4월 29일 학생대의원회를 열고,  학교 당국의 배부중지 조치는 “학생들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을 탄압하는 행위”라고 지적하고 신문의 즉시배부를 요구했다.  5월  4일 학교 당국은 다시 배부중단의 이유가 한·일회담에 대한 성토 및 데모기사와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해명을 하였으나  이 사건이 굴욕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전개한 학생들에 대한 정부와 학교 당국의 탄압이었음은 모든 학생들이 다 알고 있었다.
      5월을 자체 정비로 보낸 외국어대학교는  6월  22일 한·일협정이 정조인되는 긴박한 정국을 맞아 다시 본격적인 투쟁에 니섰다.  6월  21일 정오경  500여 명의 외국어대학생들은 한·일회담 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날 투쟁위원회는 교내방송을 통해 학교교정에 약  500여 명의 학생들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1965년 7월 5일 한·일협정 비준반대를 외치며 경잘기동대와 공방전을 빌이고 있는 외국어대 학생들

 

      유승렬(러시아어과4)의 사회로 시작된 성토대회는 이성희가 작성한  “한·일회담을 반대한다”는 내용의 선언문과 결의문을 채택하고,  1시 10분경 ‘ 망국 정권의 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하라’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이동원 외무부장관을 즉각 소환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나섰다.  시위대는 교정을 나와  100여 미터 지점까지 나아갔으나 경찰과 충돌히여 더이상 전진하지 못하였다. 경찰은 최루탄으로 시위대를 진압하고 불어과의 신은길 등 57명을 연행하였다.

      한편,  4월 이후 수배중이었던 투쟁위원장 이성희는 언제나 시위현장에 나타나 시위를 주도하고는 동료들의 도움으로 교묘히 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을 다녔다.  이에 청량리 경찰서의 이일세 형사를 반장으로 하는 이성희 검거특별반이 가동되었다.  6월  21일 숭실동 친구의 하숙방에 은신해 있던 이성희는 연고지를 모두 조사하던 특별체포반에 의해 붙잡혀 구속되었으며,  신용철,  유승렬도 같이 구속되었다. 또한 학교 당국은 이날 시위를 문제삼아  백낙환,  채홍륜,  흥준표 등을 제적하였다.
      6월 22일 외국어대학생 70여 명은 전날의 시위열기를 지속시켜 한·일회담 조인 반대집회를 가졌다.  오전  11시 30분경 성토대회를 벌인 후 시위에 들어가려던 학생들은 학교 당국의 만류로 진출하지 못하고  402호 강의실에서 단식에 들어갔다.
      이렇듯 한·일회담이 정조인되던 시점에서 전국의 대학들은 가두시위와 단식투쟁 등 극한 투쟁을 가열차게 전개하였다. 경찰의 무자비한 연행과 검찰의 구속이 연이어지는 속에서도 시위가 그칠 줄 모르자 각 대학은 돌연히 조기방학에 들어갔다.  외국어대학교도  6월  24일  ‘정치방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방학 중에도 시위는 계속되었다.
      6월 28일 낮 12시 20분 한·일협정 비준반대 성토대회를 가진 300여 명의 외국어대 학생들은 오후 1시 20분경  ‘최후의 국민의 발언이다’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교문을 나서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그러나 시위대는 휘경동 시장 입구에서 대기중인  200여 명의 기동경찰대와 충돌하여 1시 40분경 해산당하고 말았다. 이날 시위 도중 한기식(이태리어과2) 등  80여 명이 연행되었다.
      기나긴 ‘정치방학’이 끝나자마자 외국어대학교는 다시 시위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부는 정치방학중 이미 한·일협정 비준안을 일당국회 아래 통과시켰다.  이제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은 한 일협정 비준무효화투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8월  23일  500여 명의 외국어대 학생들은 한 · 일협정 비준무효화투쟁을 전개하였고,  이어  24일에도  200여 명의 학생들이 집결한 가운데 성토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8월  26일 위수령이 발동됨으로써 한·일협정 반대투쟁은 더이상 확대될 수 없었다.
      한편 정부는 위수령을 발동한 가운데 학교 당국에 압력을 가해 그간 학생들의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음양으로 도움을 주었던 외교학과 주임교수 김홍철 교수,  학생처장 박회영 교수를  ‘정치교수’로 몰아 사표를 받아내었다.
      그후 이성희,  신용철은 보석결정으로 나왔고,  유승렬은 좀 더 있다 풀려나왔다. 시위를 주동한 학생들이 거의 복교되었으나 이성희만 유독 제적이 풀리지 않아 끝내 외국어대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사업을 시작하였으며,  학생회장을 지낸
신용철,  강철은은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