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장 전남대학교 6·3운동
1. 1964년의 학생운동
‘5,16군사쿠데타’로 움츠러들었던 학생운동이 다시금 기세를 되찾은 것은 한·일간의 민족적 감정을 자극한 한·일회담의 진전이었다. 한·일간의 국교재개를 위한 교업은 한국전쟁 기간 중이었던 1951년부터 시작하였다. 1951년 9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여 미국의 점령지가 되었던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통해서 국권을 회복하면서이다. 일본은 다음 단계로 우리나라와의 과거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운 국가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대화를 제안하였고, 우리나라도 그에 응하여 한·일회담이 열리게 된 것이다. 양국간의 주된 의제는 ‘기본관계’문제,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 및 처우문제, 어업 및 선박문제, 문화재 반환문제 등이었다. 그러나 한·일회담은 ‘5 . 16’ 이전까지는 별 진전이 보이지 않는다.
‘5,16군사쿠데타’와 함께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부가 나름대로의 절실한 요구 때문에 한·일회담을 서두르면서, 회담은 급진전하게 된다. 당시 군사정부는 출 범시에 훼손된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히여 ‘조국의 근대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었다. 따라서 경제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이었는데, 이를 외자도입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고, 그 결과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에 따르는 보상금과 각종 지원을 기대했던 것이다. 미국은 또한 자신의 세계전략상의 이유로 한·일회담의 타결을 종용하는 형편이었다. 결국 한국의 군사정부와 미국, 그리고 일본의 요구가 맞아떨어지면서 한·일회담은 급속도로 진전하게 된다.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인 1961년 10월 20일 제6차 한·일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제6차 회담 역시 한동안은 이때까지와 마찬가지로 공전을 거듭하였지만,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1962년 10월 20일 및 11월 12일에 열린 ‘김종필·오히라회담’에서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를 통해 가장 중요한 안건인 대일청구권 문제가 타결되었다. 당시 청구권은 무상공여 3억 달러, 정부차관 2억 달러, 상업베이스에 의한 민간차관 1억 달러 선으로 합의되었다. 이어서 1964년 1월에는 한국의 군사정부가 이른바 ‘이승만 라인’이라는 어업문제의 대립점을 양보하면서 점차 타결이 가시화되었다.
이와 같이 한·일회담의 타결이 임박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에 반대하는 시위가 대학가를 중심으로 폭발적으로 전개되었다. 반대시위의 뇌관을 작동한 측은 정치권의 야당들이었다. 당시 대일비밀협상을 담당하고 있던 군사정부의 또 다른 실력자 김종필이 1964년 3월로 협상이 타결될 것임을 발표하자, 그때까지 사분오열되어 있던 야당들이 ‘한·일회담 반대’라는 구호 아래 하나로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1964년 3월 6일 민정당, 민주당, 자유국민당, 국민의 당 등 모든 야당은 ‘대일 저자세외교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였고, 3월 9일에는 여기에 재야인사가 가담하여 ‘대일굴욕외교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이하 투쟁위)가 결성되었다. 투쟁위의 주요한 무기는 유세였다. 이들은 3월 15 일부터 전국을 돌면서 유세를 통해 회담반대 여론을 고조시키고 있다.
한편 대학가에서는 그보다 조금 늦은 3월 말부터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22일 서울대학교의 ‘민족주의비교연구회’가 주최하는 ‘대일굴욕외교반대 강연회’가 개최된 후, 24일에는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를 중심으로 ‘4, 19’ 이후 가장 규모가 큰 학생시위가 발생하였다. “한·일회담 즉시 철폐”, “동경체제 매국노의 소환”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전개된 시위는 다음날 전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26일에는 고등학생들도 시위에 대거 참여하였다.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정부는 일본에 있던 김종필을 28일자로 소환하교 학생시위가 범국민적 시위로 번질 것을 염려하여 서울시내 종합대학교 학생들과 대통령의 면담을 주선하였다. 3월 30일 회담을 끝낸 뒤 학생들은 학원으로 복귀하고, 한·일회담 반대의 이론적 근거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당시 광주시역에서도 3월 26일부터 한·일굴욕외교 규탄데모가 시작되었다. 그날 오전 8시 30분경 시내 계림동파출소 옆 버스정류장에 모여 있던 약 700여 명의 전남대학생들이 미리 준비한 ‘대일굴욕외교를 반대한다’, ‘사수하자, 평화선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가두시위를 전개한 것이다. 그러나 시위대와 진압경찰들이 정면충돌했던 서울과는 달리, 광주지역에서는 경찰들이 시위대의 주위를 경계만 할 뿐 저지하지는 않아 큰 충돌은 없었다. 경찰의 ‘호위’ 속에 시위대는 금남로, 도청 앞 광장, 충장후 사직공원 광장에 이르는 도로를 구호를 외치면서 평화적인 시가행진을 하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학생들의 뜻을 정부에 충분히 전달하겠다는 김효영 부지사의 다짐을 받고 광주서중에 있는 학생운동기념탑을 참배한 뒤 10시 30분경 통학버스편으로 귀교했다.
이후 전남대는 한·일회담에 관한 과학적인 입장을 견지하기 위하여 1964년 4월 10일 ‘한·일문제 세미나’를 성황리에 개최하기도 했다. 이날 초청연사는 강문봉(국회의원. 민정당), 박동운{언론인. 한국일보.), 장준하(사상계 사장), 백남억
(국회의원. 공화당) 4명이었는데, 이에 관한 학생들의 관심도를 반영하듯 입추의 여지가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전 국민적인 반대운동에 직면하면서 한·일회담은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한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최초 정부가 가졌던 한·일회담의 필요성이 사라진 것도 아니며, 군사정부의 체면상 국민들이 반대한다고 해서 최초의 결정을 번복할 수도 없었다. 단지 반대여론을 무마시키고 반대시위를 주도하는 인사들을 제거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려 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4월과 5월에 들어서면서 정부와 학생 간의 대립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한편에서는 ‘서울대학교 괴소포사건’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학원에 대한 사찰을 강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일회담의 타결을 1년 시한부로 공약하는 개각을 단행한다. 정부측의 이러한 움직임은 ‘무장군인 법원난동사건’, ‘육군
참모총장의 경고발언’ 등으로 고조되다가 박정희 대통령의 ‘광주발언’ 에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정부의 이러한 움직임에 따라 학생들의 시위도 더욱 격화된다. 5월 11일 연세대학교 학생들의 대대적인 가두시위가 있은 후, 15일에 서울시내 각 대학이 연합하여 ‘한·일굴욕외교반대투쟁총학생연합회’(이하 ‘학총련’)가 결성되었다. 학총련은 5월 19일 미 8군에게 최루탄 공급중지를 요구하면서, 20 일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주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학생을 중심으로 한 반대투쟁 진영은 점차 운동의 목표를 ‘박정권 하야’에 모으기 시작했다. 그 최초의 계기는 5월 27일 전남대학생들의 시위에서 비롯된다.
그날 오전 8시경 계림파출소 옆 버스정류장에서 전남대학생 200여 명은 ‘법은 법대로 준수하라’, ‘신망 앓은 박정권의 하야를 권고한다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박정권 하야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에 들어갔다. 그러자 급히 출동한 경찰이 곤봉을 휘두르며 시위를 저지하려 하였고, 이에 학생들은 투석전으로 맞서면서 순식간에 유혈전이 전개되기 시작했. 여기에 때마침 학교에서 달려온 200여 명의 학생들이 합세하면서 경찰의 저지선이 붕괴되었고, 시위대는 “권고, 권고 하야권고!”, “배고파 못살겠다”는 구호와 「해방의 노래」 등을 부르면서 충장로 전남대 의대, 광주세무서, 광주경찰서를 지나 도청 앞에 이르는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어서 이들 시위대는 도청 앞 광장을 점거한 채 연행된 10여 명의 학생을 풀어주고, 학생들의 결의문과 선언문을 낭독하면서 오후 1시경에 해산하였다. 당시 부상을 당한 사람은 학생 10명, 경찰 5명이었다.
한편 이날 ‘광주학생구국투쟁위원회’ 명의로 나온 결의문에서는 ‘5,16군사쿠데타’ 후의 부정부패와 매판자본, 난동군인들을 규탄하고 있는데, 특히 “학원자유 보장하여 민주기틀 마련하라”는 요구가 있어 학생운동이 재건학생회로 지칭되는 침체기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이날 함께 낭독된 선언문에서는 이 난국을 타개할 새로운 개혁과 일대 혁신이 없는 한, 오늘 당장 과감한 용단을 내려 하야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혁신이나 하야의 용단이 내려질 때까지 여하한 저지나 압력에도 굽힘 없이 극한 실력투쟁을 전재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고하였다.
이와 같은 전남대의 시위에 자극받아 5월 30일에 열린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의 ‘자유쟁취궐기대회’에서는 ‘반매판, 반외세, 반봉건, 반전제’가 한·일굴욕외교반대 학생투쟁의 기본이념이자 실천적 목표임을 천명하면서, 이제 운동은 스
스로의 이념과 목표를 갖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6월 1일 전남대학생들의 시위를 선두로 2일부터는 서울에서 박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대적인 가두시위가 전개되었다.
이제 그동안의 “굴욕외교 반대”, “학원의 자유수호”라는 구호 대신에 “박정권 하야”가 투쟁의 공동목표가 되었다. 3일이 되면서 학생시위대는 ‘5,16군사쿠데타’ 이후 최대규모인 2만여 명에 이르게 되었고, 그날 오후부터는 시위대에 일반시민이 가세하면서 공격목표가 청와대가 되었으며, 시위대에 경찰이 밀리기 시작하는 등 ‘4,19항쟁’과 비슷한 양상이 전개되었다. 이른바 ‘6·3 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한편 광주의 ‘6·3 항쟁’은 5천여 명이 거리로 쏟아져나왔던 6월 4일을 정점으로 5일까지 계속되다가 5일 오후 4시를 고비로 진압당하였다. “계엄령 해제”를 주장하며 시위가 전개된 4일에는 전남대학교, 조선대학교 교육대학 등 당시 광주지역의 모든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부 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가담히여 시위대의 규모는 5천여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들 시위대는 수십 발의 최루탄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과 충돌하여 돌맹이로 응수하는 한편, 군 트럭을 탈취하여 도청 앞의 바리케이드를 돌파하는 등 험악한 사태가 빚어졌다. 또한 같은날 오후 2시부터는 사직공원 4,19기념탑 앞에서 100여 명의 전남대생들이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가 다음날 새벽 통행금지가 해제됨과 동시에 경찰봉을 휘두르는 경찰들에게 모두 연행되기도 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광주지역의 대학들과 고등학교들은 자체적으로 임시휴교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휴교령에도 불구하고 5일 아침 계림파출소 앞에 집결한 150여 명의 학생들은 연행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며 데모에 돌입하였다. 이어서 300여 명의 교대생들이 쏟아져 나오고, 흰 가운에 들것과 약상자를 들고 ‘개에 물린 학생 석방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운 전남대 의대생들이 경찰서로 밀어닥쳐 살별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정오 무렵, 무장군인을 싣고 앞에 기관총을 장치한 20여 대의 군 트럭이 시내로 들어오면서 학생들은 동요하기 시작하였고, 여기에 간곡하게 시위대의 해산을 권유하는 교수들의 설득이 주효하여 시위대의 일부가 귀가하였다. 그리고 귀가를 거부하고 현장에 남아 있던 나머지 학생들은 2시 30분경 도청 앞에서 경찰에 포위되어 거의 전부가 연행되었다. 당시 광주지역 학생시위의 주도자는 ‘4,19’ 당시 광주의 고등학생 데모를 주도했던자들로 당시 전남대학교에 재학중이던 이홍길, 홍갑기 등이었다.
이렇게 사태가 급박하게 되자 정부는 미국측의 동의하에 6월 3일 오후 8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동시에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1,500여 명의 무장병력으로 시위군중을 해산시켰다. 또한 정부는 계엄실시와 함께 6월 5
일을 기해 전국의 모든 대학들을 임시 휴교조치하였으며, 동시에 대대적인 학생징계를단행하였다.
6월 4~5 일의 시위로 광주지역에서는 총 338명이 연행되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6월 중에 석방되었, 8명이 구속입건되었으며, 47명이 불구속 입건되었다. 구속된 8명 중 6명이 전남대생이었다 . 한편 시위주도자인 이홍길, 홍갑기는 시
위 직후 도피하여 검거를 모면하였고, 박종희 등 6명이 구속되었다가 구속적부심에서 풀려났다. 그후 검찰의 수사과정에서 총 71명이 관련자로 지목되어 이중 66명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풀려나고 전남대학생 5명만 불구속기소를 딩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에 대해서도 검찰이 공소를 취소하여 이 사건의 형사적인 문제는 광주지역에서만큼은 일단락되게 된다. 다음은 당시 불구속기소된 사람의 명단이다.
이홍길(사학과 4학년), 김창호(상학과 4학년), 박종희(정외과 4학년), 민경수(농학과 4학년), 안청수(농학과 4학년)
정부는 한편으로는 대국민 강경책으로 반대투쟁의 기세를 억누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과의 비밀협상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국내외 소요가 진정되었다고 판단된 1964년 12월 ‘제 7차 한·일회담’을 개최하였다. 제 7차 회담은 기본 관계문제와 어업문제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졌지만,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1965년 2월 20일에는 양국의 아주국장(한국 연하구, 일본 後宮虎朗) 사이에서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에 대해 가조인이 이루어졌다.
1965년 한·일회담이 비준단계에 들어가면서 개학과 함께 학원가는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1965년의 학생시위에 처음 불을 당긴 것은 광주에서 일어난 전남대학교의 시위였다. 3월 31일 전남대에서는 오전 9시부터 학교 대운동장에서 800여 명의 학생이 집결한 가운데 총학생회 주최로 ‘매국외교 결사규탄’의 성토대회를 개최하였다 . 총학생회장 정동년이 “3천리 강토와 한민족을 일제의 간악한 무리 앞에 내어놓고 수억 불의 금액으로 흥정하는 현 정부의 처사를 규탄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낭독한 다음, 10시경부터 ‘매국외교 결사반대’, ‘김·오히라 비밀흥정 이완용을 웃긴다’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에 들어갔다. 스크럼을 짜고 “민족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사수하자”는 구호와 「전우가」를 부르면서 시위대가 임동 쪽으후 진출하자 대기중이던 300여 명의 경찰이 곤봉을 들고 진압을 시도하였고, 여기에 학생들은 투석으로 맞서면서 또 다시 혼전이 일어나고 말았다.
결국 경찰과 학생들 중 상당수가 부상당하고, 시위에 침여한 학생들 중 32명이 연행당하는 불상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이날 연행된 32명 중 29명은 4월 2일 새벽, 과료 및 구속기각, 형면제 처분 등을 받고 석방되었으며, 심우철(임학과 1
년)은 ‘집회 및 폭력에 관한 법률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되고 김광일(법학과 1년) 외 1명은 2일 간의 구류처분을 당했다. 그리고 정종희 등 4명의 전남대 졸업생들이 배후조정 혐의로 연행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또한 전남대는 문교부의 강력한 주동학생 징계지시에 따라 4월 1일 오후 2시 반 학장회의를 소집하여 전날의 시위를 ‘불법집회시위 및 수업빙해’로 인정하고, 주동학생 7명을 2일자로 제적처분하였다 . 당시 제적된 학생은 다음과 같다.
김재홍{철학과 2학년), 진성훼(정치학과 1학년), 송종호(정치학과 2학년), 서병수(법학과 1학년),
김영우{정치학 1학년), 안일근{정치학과 2학년), 정동년(화학과 4학년)
2. 1965년의 학생운동
1965년 2월 20일에 체결된 한·일 양국간의 가조인은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으로 정식 조인되었다. 한·일협정은 기본조약과 재일교포 법적 지위 및 대우에 관한 협정, 어업협정, 한·일재산 및 청구권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한·일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의 4가지 협정과 이와 관계되는 교환공문 9개, 합의의사록 2개, 왕복서한 1 개 등으로 되어 있다.
한·일협정의 체결 및 그에 따른 한·일국교정상화는 그 과정과 내용, 결과 모두가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심지어 굴욕적이기조차 한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내용을 모두 살펴볼 수는 없지만, 그 대략을 살펴보면, 첫째로는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의 반성과 배상이 전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청구권문제가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의 문제로 타결된 것이나, ‘기본관계’의 조항이 애매한 구절로 되어 있는 점에서 확인된다. 두번째로는 국교정상화의 본래 의미라고 할 수 있는 양국의 주권이 보장받는 상호호혜적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주된 이유로는 두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우선 회담의 타결과정에 미국이 깊숙이 개입하고 있어서 미국의 세계전략이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다음으로는 양국의 관심이 한국의 경우는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본이었고, 일본의 경우는 경제적·정치적 진출의 대상지를 찾는 것이었다는 사실에서 그 이유를 찾을수 있다.
한·일협정이 조인되던 날,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거의 누구도 조인 내용에 만족할 사람이 없는 가운데 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의 살림에 비관적인 영호탤 미칠 역사적인 전환이 이루어지려고 하고 있다. 야당의 극한적인 반대, 교문폐쇄와 학생들의 단식, ‘데모’가 계속되는 가운데 삼엄한 경계를 펴면서 조인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민족적인 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일국교정상화가 갖는 이러한 굴욕적인 성격 때문에 한·일협정은 조인된 이후에도 대대적인 반대여론에 직면하였다.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이 정식 조인되는 것을 전후하여 종교인, 문인,, 대학교수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한·일협정 조인 및 비준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또한 3~4월 시위 이후 소강상태에 있던 학생들의 시위도 재개되었다. 당시 학생들은 시위 초기에는 ‘6·3 항쟁’의 교훈을 살려 체제대결적인 주장을 삼가는 대신에 ‘평화선 사수’, ‘굴욕외교 반대’ 등 민족적 감정에 호소하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점차 투쟁이 고양되면서 또 다시 “박정권 하야’라는 구호와 회담의 배후에 있는 미국을 비판하는 구호가 등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여전히 강력한 폭력적 대응을 하고 있다. 1965년 8월 26일 또다시 서울 일원에 위수령이 발동되어 시위진압에 군대가 동원되었고 2개 대학교가 휴교조치를 당했으며, 학생운동 세력과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가했던 지식인들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졌다.
이와 함께 정부는 국회에서의 비준을 서둘렀다. 1965년 7월 14일 국회에서 여·야간의 난투극이 벌어지는 가운데 한·일협정 비준안은 발의되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움직이기 곤란한 여름방학 기간 중인 8월 11일 밤 11시 10분, 공화당은 특별위원회에서 비준안을 1분 만에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야당의원들은 이에 항의하여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으나 국회의장은 이들의 의원직 사퇴서를 반려하였다. 8월 14일 국회는 공화당 110명, 무소속 1명이 참가한 가운데 비준안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해서 한·일협정은 발효되었으며, 그에 따른 제반 문제는 역사의 장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당시 전남대에서도 한·일회담 비준을 규탄하는 성토대회가 열렸다. 8월 23일 오전 7시부터 이학부 앞에 플래카드를 걸어놓고 모인 60여 명의 학생들이 오전 9시께 200여 명으로 늘어나면서 본관 앞에서 성토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이들이 채택한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① 일딩국회 에서의 한 · 일협정 비준은 무효다.
② 국회는 즉시 해산하라.
③ 야당의원들은 탈당하라.
④ 미국은 한· 일문제에 간섭하지 말라.
또한 이날 성토대회의 주동자는 박석무(법대 3년), 전성훼(정치학과 2년, 뒤에 전홍준으로 개명), 박동근{정치학과 1 년) 등 인데, 그후 이들은 모두 경찰에 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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