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장 이화여자대학교 6·3운동
1. 분단 후 최초의 이대 학생운동
이화여대의 6·3 운동은 1965년 들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므로 1965년은 이대 학생운동의 원년이 된다. 일제하의 이화는 민족해방투쟁에 앞장서기도 했으나, 분단 후의 이화는 4,19 등 한국 근현대사의 정치적 고비고비에서 거의 침묵해오다가 6·3 운동으로 비로소 그 모습을 눈부시게 일신하였다. 1964년 경비정 마련을 위한 모금운동으로 단결의 힘을 인식한 이대는 1965년 6월 전체 이화인이 참가한 대규모 집회를 가졌으며, 경찰과 대치하여 농성을 벌였고, 최초로 최루탄이 발사되고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학생회 임원을 중심으로 많은 학생이 참석한 단식투쟁을 벌였을 뿐 아니라 학생회 전부가 구속되거나 수배되었다. 1965년 이대가 개교 이래 겪은 최초의 사건들이다.
2. 1964년의 경비정 모금 운동
1964년 한·일회담 반대운동으로 전국의 각 대학이 데모로 들끓고 있을 때 이대는 고여 있는 물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당시 총학생회 회장 김행자(정외과 4)는 전교생이 모이는 대강당 채플에서 여러 번 학생들의 호응을 끌어내려고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64년 3월 2 일 서울대, 연대, 고대 등에서 첫번째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시작되던 날 중구 필동의 한 구석방에서 총학생회장 김행자와 김정자(사회 4, 『이대학보』 기자)는 여러 시간의 토론 끝에 경비정 마련을 위한 모금안을 만들어내었다. 그 다음날 총학생회 임원회에서 「역사의 대열에 서는 지성」이라는 결의문이 마련되고 이 결의문은 3월 26일 채플이 끝난 후 열린 학생총회에서 만장 일치로 통과되었다. 이날 학생총회는 자연스럽게 대일굴욕외교 반대 성토대회가 되었는데 데모는 하지 않고 항의의 의사표시만 하기로 합의하고, “정권의 유지를 위해 도매식 흥정을 서두르는 한·일회담을 즉시 중지하라, 이 나라의 보고인 평화선을 사수하라, 우리는 평화선경비선박의 조선모금운동에 솔선할 것을 엄숙히 사수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화여대의 경비정 모금운동은 당시 총학생회가 스스로 표현했듯이 ‘행동 없는 항의’로서 한·일회담 반대운동의 방법으로는 소극적인 것이었지만 “실력으로 조국의 영해를 지킨다”는 슬로건이 보여주듯 발상은 참신한 것이었고 이대생들을 하나로 묶는 단결의 경험을 제공하였다. 이대생들은 한 달 동안 미장원 안 가기를 결의히는 등 적극적으로 침여하였며 학교측도 모금운동에 협조적이었다. 경비정 마련 모금운동은 그해 4월부터 100만 원을 목표로 시작하여 2개월 만에 반액을 초과할 수 있었다. 총학생회 (2학기 임기교체, 신임 총학생회장 진민자)는 9월 17일 열린 학생총회에서 국민저축금 전액 헌납결의를 끌어내고 11월 27일에는 경비정 모금음악회를 여는 등 활발한 활동으로 당초 목표액의 3배를 초과한 320만 원을 모은 후 일단 모금운동을 끝냈다.
그후 경비정 모금운동은 몇천만 원이 드는 경비정 건조를 포기하고 쾌속정 건조로 목표를 수정하여 1966년 5월 30일 농림부 수산청에 380여 만 원을 전달하여 20톤급 쾌속정 건조를 시작, 1967년 드디어 쾌속정 ‘이화호’의 진수식을 가지면서 마무리되었다. 이대의 경비정 마련 모금운동은 여대생들의 안전한 현실 참여 방안이라는 비판도 있었지만, 이화로 볼 때는 4,19 당시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했던 자괴감을 극복할 수 있었던 중요한 최초의 단결의 경험이 되었다.
3. 1965년 본격적인 시위의 시작
1965년에 들어서면서 이대의 분위기는 급변하였다.
1965년 2학기에 총학생회는 김행자 집행부에서 진민자(과학교육과3) 집행부로 바뀌었다. 1965년 2월 20일 한·일기본조약이 가조인되자 전국의 대학은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으로 들끓었고 그 열기는 이대에까지 밀려왔다. 이대는 4월 15일 총학생회 주최로 외무부 아주국장 연하구를 초청하여 한·일회담 전말에 대한 질의·응답을 벌였고, 같은날 법정대 학생회 주최로 신상초 『대한일보』 논설위원의 ‘한·일회담 타결 후의 우리의 자세’에 대한 강연을 주최하였으며, 4월 16일에는 문리대 주최로 ‘일본을 초점한다는 제목하에 김성식 고대 교수 등 3명의 강연회를 열었다. 매일 강연회에는 약 3천 명의 학생들(당시 이대 학생수는 7천여 명)이 모여 열기를 띠었으며 연사들의 신랄한 비판이 있을 때마다 동조의 박수가 터져나오기도 하였다.
4월 16일 오전 10시 30분 대강당에서 임시 학생총회가 열렸다. 임시총회는 자연스럽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4천 명 이대생들의 열띤 집회가 되었는데 총학생회는 성명서 「평화선을 포기할 수 없다 정부는 국민의 강력한 반대여론에 최대의 성의로 해결을 보여라. 소위 대학생 선도비라는 명목
으로 쓰려던 2,500만 원을 경비정 건조에 쓰기를 건의한다」와 정부·국민에 대한 호소문 「위축되기만 하는 우리의 어업을 조금이라도 살리기 위하여 경비정 건조에 나라와 백성이 한마음이 될 것을 호소한다」를 발표하여 학생들의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총학생회는 그 이상의 행동계획을 갖고 있지 않았다.
5월달은 이대 개교기념 행사인 메이데이 행사로 교내 분위기가 들뜨곤 한다. 각 대학에서의 격렬한 시위 분위기 속에서 이대의 메이데이 행사에도 예년과 다른 점이 나타났다. 단과대학별 대항으로 이루어진 가장행렬에서 법정대가 한·일회담 내용을 풍자한 ‘진리 선생 장례식’을 연출하였던 것이다. 모든 비진리적인 것들(예를 들면 평화선을 팔아먹은 것)의 장례를 위해 정식 상여가 만들어지고 만장이 휘날렸으며 요령을 흔들면서 이어지는 사설은 비판과 풍자로 가득 차 학생들의 감탄을 샀다. 요령을 흔들며 구성진 사설을 뽑아낸 요령잡이는 이선하(정외4)였고 법정대 학생회장 신춘자(법학괴4)는 무대 위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이대의 6·3 운동에서 이 가장행렬은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 법정대의 ‘진리선생 장례식’으로 전체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며, 가장행렬을 준비하면서 법정대(법학과, 정외과)는 조직적 단합을 이루었고, 바로 이 법정대 학생회를 구심점으로 1965년 본격적인 이대의 학생시위운동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6월에 들어서면서 한·일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될 기미를 보이자 전국 각 대학에서는 단식투쟁을 하는 등 극한적으로 치달았고 이대에서도 마침내 6월 22일 동경에서의 협정조인이 있기 1시간 전인 오후 3시 운동장에서 총학생회 주최로 이대 최초의 대규모 성토대회가 열렸다. 이 성토대회는 김옥길 총장(김 총장은 당시 문교부의 해임조치에 의해 일시 총장직을 내놓고 서은숙 재단이사가 총장서리로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총장실에서 두 분이 함께 근무하는 상태였다. 따라서 학교 내에서는 그대로 ‘김옥길 총장’이라고 불렀다)과 총학생회의 사전 교감이 있는 후 열린 것이었기 때문에 학교측은 3시 이후 강의를 사실상 휴강 조치해주는 등 매우 협조적이었다. 성토대회 전날 채플에서는 채플연사였던 기독교학과의 정의숙 교수가 “이웃 연대생들의 시위를 우리 학생들은 그냥 서서 구경하는 것을 보고 너무 부끄러웠다. 우리도 그냥 있어서는 안되지 않겠느냐”는 요지의 발언을 할 정도로 이대 교수진의 분위기도 고조되어 있었다.
성토대회는 총학생회에서 준비한 프로그램 외에 학생회 임원이 아닌 많은 일반학생들{법학과 4년 김숙자, 성명미상의 흰 가운 입은 자연과학도 등)도 자발적으로 연단에 올라와 “평화선도 사수하지 못하는 정부가 일본의 경제침략을 어떻게 막겠느냐”는 울음 섞인 열변으로 계속 이어져 성토 분위기가 매우 고조되었다.
이날 성토대회는 성토대회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대회가 끝나자마자 법정대 학생회장이 앞으로 나와 마이크를 잡고 총학생회 집회는 끝났고 이제부터 법정대 학생회 주최의 모임을 한다고 선언한 후, 법정대생들은 뒤로 돌아 교문을 향해 나가자고 외치자 운동장 뒤편 출구 쪽에서 플래카드가 확 펼쳐지면서 법정대생들이 모두 뒤로 돌아 교문을 호냥배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운동장에 있던 학생들 거의 모두가 자연스럽게 법정대와 함께 운동장 밖으로 나가 순식간에 이화교와 이화광장을 메우고 “이동원 외무를 즉시 소환하라”, “국회는 한·일협정 국회비준을 반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
법정대가 앞장선 전교 규모의 시위대는 이대가 떠나갈 것 같은 우렁찬 구호를 외치며 교문 밖으로의 진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재빨리 교문이 잠기고 김옥길 총장이 잠겨진 교문을 두 팔로 가로막고 서서 “나가려면 나를 밟고 나가라”고 어두어질 때까지 수시간을 막무가내로 버렸다. 교문 밖에도 200여 명의 경찰이 출동, 대치하는 상황에서 결국 시위대는 차마 총장을 밀쳐내지 못하고 캄캄한 밤이 되어 다음날 아침에 다시 이화광장에 모이기로 결의한 후 밤 9시 반경 일단 해산하였다.
다음날인 6월 23일 아침, 학생들은 어제의 약속을 상기하며 넓은 치마나 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는 등 가두시위 할 복장을 하고 등교하였다. 그러나 학교 딩국은 하루 동안의 휴강을 공고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삼삼오오 이화교로 몰려 나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날 시위를 이끌어야 할 총학생회 임원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총학생회 임원들이 나타나지 않자 이화교에 집결한 1,500여 명의 학생들은 11시경 ‘국회 는 한·일협정 비준을 거부하라’는 등의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3 ·1 절 노래를 부르면서 시위에 돌입하였다.
이날 시위대의 맨 앞에는 법정대 학생들(이영빈, 양정자, 박애경, 차정자, 최관수, 박완규 등 법학과와 정외과의 거의 모든 학생들), 신문학과 학생들(이경순, 유경영, 이민자, 이정자 등)이 진을 치고 있었고 차명희가 시위를 주도하였다. 시위대는 이대 입구 사거리까지 진출하였으나 200여 명의 기동대에 밀려 교문 쪽으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교문이 닫혀 있어 학생들은 교문 앞에 앉아 연좌 데모에 들어갔는데 12시 40분경 경찰이 돌연 최루탄 30여 발을 마구 쏘아 치마 밑에서 최루탄이 터지기도 했으며, 원명자(과학교육과), 맹순용{화학과2), 김옥경(학과미상4), 차경자(기악과), 김인숙(법학4), 천경희(법학4)가 다치고 40여 명이 졸도하였으며 5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중 법학과 4학년 김인숙은 최루탄 파편에 눈을 다쳐 졸업도 하지 못하였다.
경찰은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키기 위해 연좌해 있는 학생들의 스크럼 위를 군횟발로 짓밟기도 하고 학생들 틈을 뚫고 들어가 경찰봉을 휘두르며 연행하려 하였다. 비명을 지르면서 버티던 학생들은 서대문서의 김모 경위를 향해 “징그러운 손을 폼에 대지 말라”고 아우성치며 달려들기도 했다. 최루탄에 쫓겨 울면서 골목과 다방으로 흩어졌던 학생들은 흥분한 상태에서 2시경 학교로 들어가 이화광장에 다시 모여 계속 연좌데모를 벌였다. 학생들이 최루탄에 쫓겨 이 골목 저 골목으로 흩어진 뒤 최루탄 연기가 자욱한 이대 앞 길거리에는 학생들의 구두가 100여 족이 넘게 흘어져 있었고 깨진 안경 등 임자 잃은 학생들의 물건이 한 광주리가 넘게 나왔다.
『코리아 해럴드』의 최종수 기자는 이대 앞의 최루탄 시위를 찍은 사진으로 그해 ‘보도사진상’을 탔고 최루탄 연기가 자욱한 가운데 학생들이 혼비백산하여 등을 보이며 교문 쪽으로 달려가는 이 사진이 외선을 타면서 이대생들의 한·일회담 반대시위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도 하였다.
처음으로 최루탄 세례를 받은 학생들이 분노와 울분에 차 이화광장에 다시 모이고 있을 무렵 총장실 연금에서 풀려난 총학생회 임원들은 항의하는 학생들 앞에 서서 강제로 총장실에 갇히게 되었음을 설명하고 사과를 했으며 곧 이후의 행동방침에 대한 토론에 들어갔다. 진민자 회장을 비롯한 학생회 임원들은 차례로 나서 “교문 밖으로 나가면 다친다. 계속 싸우기 위해서는 조기방학이나 휴교조치를 막아야 하니까 학교 안에서 하자”는 설득을 폈고, 학생들은 “학생회를 믿을 수 없으니 학교 당국이 나와 공개적으로 약속하라”고 요구하였다. 학교측에서 서은숙 총장서리가 직접 나와 “교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 조기방학은 없을 것이다”라는 공개 믿택을 하자 학생들은 이를 믿고 일단 해산하였다.
4. 목숨을건 단식투쟁
학생들을 해산시킨 후 총학생회 임원들이 학생회의실에 돌아와 다음날의 집회준비 등 대책회의를 하고 있던 중 기숙사생이 달려와 방금 휴교조치 공고가 나붙었다는 것을 알려왔다. 학교는 5시 30분 교무회의를 소집하여 6월 24일에서 8월 15일까지 방학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학생회 임원들은 일단 학교문이 닫히게 되었으니 수입을 정상적으로 받으며 온건한 방법으로 지속적인 투쟁을 하기로 한 결정은 소용없게 되었다고 판단하고 극한적인 투쟁이 불가피하다는 인식 아래 단식투쟁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6월 23일 밤 8시 20분경 총학생회 임원 15명 즉 ‘총학생회장 진민자(사대 과학교육), 총학생회 부회장 김정자(약학과), 법대회장 신춘자(법학과), 문리대회장 조건성(신방과), 의대회장 임영혜(의대), 음대회장 이덕혜(기악과), 미대회장 차양자, 체대회장 박성숙(체육과), 총무부장 연혜진(정외과), 학예부장 김현자(국문과), 이대 YWCA 회장 장명자(사대 가정과), 규율부장 이희인(미대생활미술과), 계몽부장 양수자(사회학과), 선교부장 김경옥(사대 교육과), 체육부장 최영하(체육과)’는 학생관에서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다. 총학생회 임원들의 단식 소식이 알려지자 기숙사에 있던 학생들이나 단과대학 학생회 간부들, 열성적인 학생들(법학과 양정자·이영빈, 정외과 최관수 등)이 동참하여 단식인원은 순식간에 1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의 구호는 “한·일협정 비준반대”, “교육포기정책 즉각 철회” 등이었다.
단식투쟁과정에서 법학과 차명희, 미대 학생회장 차양/자, 계몽부장 양수자, 문리대 회장 조건성 등이 먼저 탈진하여 엠불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갔괴 그후 쓰러지는 학생이 속출하였다. 이화섭(정외과3)은 단식으로 위를 버려 졸업 후에도 고생을하였다.
6월 26일은 그해 가장 무더운 날씨였다. 이날 이제까지 잠잠하던 여자대학 학 생들의 시위가 잇달았다. 서울여대, 덕성여대, 수도여사대 등 1,3 00여 명의 여대생들의 데모가 이날 서울을 휩쓸었다. 이대의 단식투쟁이 서울에 있는 여자대학생들에게 고무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다.
한편 단식중 계속 학생들이 쓰러지자 학생회는 어떤 명분으로 어떻게 단식을 끝내느냐는 문제로 고심하였는데 결론은 학교 안에서의 단식을 끝내고 학교 밖으로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을 확산시킨다는 것이었다. 그 방법의 하나는 국민과 함께 하는 한·일협정 비준반대 전국 가두서명을 각자의 고향에서 벌인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다른 대학의 대표도 함께 연사로 참여 하는 한·일협정 비준반대 대학생연대 토론회를 이화여대 주최로 연다는 것이었다.
6월 28일 오전 8시 마침내 이대는 단식투쟁 시작 108시간 만에 단식을 풀면서 성명서, 일본대학생에게 보내는 글, 미 『워싱턴 데일리 뉴스』 편집국장에게 보내는 글, 세계언론인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했다. 성명서와 메시지의 내용은다음과같다.
성명서
······ 우리는 보다 강력하고 적극적인 행동으로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가 되도록 하기 위해, ① ‘한·일협정준비 후의 우리의 자세’라는 논제를 가지고 심포지엄을 열고, ② 한·일협정 비준저지를 위한 국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가두서명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 .
IPI 에 보내는글
······ 오늘 한국의 대학생들은 굴욕적인 한 · 일협정 비준을 앞두고 세계언론인에게 호소한다. 일체의 외부 혹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간섭을 배제하고 자유로운 진실과 시시비비를 논함으로써 세계평화의 일익을 담당하고 단순한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이 아닌 신문인의 양심에 의해 우리들의 행동을 정확히 평함과 아울러 신식민주의 진상을 과감히 폭로하여 또다시 세계역사에 의댁강식의 오점을 남기지 않도록 호소하는 바이다 ······ .
『워싱턴 데일리 뉴스』지 펀집국ε뻐|게 보내는 글
······ “과거에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일부 야당의 이용물이 되고 있음이 명백하다”는 납득할 수 없는 귀지의 사설을 보고 우리 한국의 대학생들은 엄중히 항의하면서 이에 대한 성의 있는 해명이 있기를 요구한다. 우리는 항상 자주적으로 사고하는 행동인의 자세를 지켜왔고 그러기에 일부 야당의 아전인수에도 공격의 화살을 뽑았었다. 귀지는 데이터의 수집경로를 밝힘과 동시에 역사에 오점을 찍는 일이 없도록 한국을 올바르게 이해하라고 호소하는 바이다 ······.
5. 전국적인 가두서명운동의 전개
단식투쟁 후 이대는 비준저지를 위한 대국민 서명운동과 타대학과의 연대투쟁 등 새로운 단계의 투쟁으로 들어갔다. 6월 24일 총학생회에서는 한·일협정 국회비준저지와 일산품 불매를 위한 서명운동을 시작하였다. 가두서명은 국민에에게 한·일회담 반대를 이끌어내려는 것이었다. 서명운동은 시작 초에는 교내에서만 전개되었으나 7월 1일 오후 2시부터 가두서명으로 전환하였다. ‘한·일회담 비준반대’라고 쓴 흰 띠를 어깨에 걸어메고 미도파 앞, 광화문 조선일보사 앞, 시청 앞, 덕수궁 앞 등 시내 중심가에서 국민들의 호응 속에서 서명을 받았다. 일부는 두꺼운 받침으로 된 가두서명판을 메고 노트와 인주를 들고 다니며 이동식 가두서명을 받기도 하였다.
첫날인 7월 1일 미도파백화점 부근에서 비준저지 가두서명을 받던 법정대생 수명은 교통빙해를 이유로 남대문경찰서 경찰관에게 플래카드를 뺏기고 구타당하였고 진민자 등 4명은 약 1시간 반 동안 태평로파출소에 연행되어 진술서를 쓰고 나오기도 했다. 경찰은 이대생들의 가두서명이 “교통질서에 큰 지장을 가져온다”고 주장하며 학생들을 연행하였던 것이다.
한편 지방학생들은 귀향히여 각자의 고향에서 서명운동을 전개했는데 7월 3일 전주와 부산의 시내 번화가에서 비를 맞으며 서명운동을 벌였으며 예산에서는 차명희, 윤수경(신문학과1 )이 서명운동을 하다가 경찰의 저지를 받았다. 총학생회는 전국에서의 가두서명이 저지될 경우 각 가정을 방문얘 서명운동을 계속하기로 계획하였다.
7월 2일 2시 서명인이 2만여 명에 달하자 학생회는 가두서명운동을 11일까지 끝내고 국회가 개원하는 12일 그때까지 받은 서명록을 국회에 보내기로 하였다.
6. 시내 각 대학 연대모임 결성
한편 6월 30일 이대 총학생회는 대성빌딩에서 ‘한·일협정 조인 후의 우리의 자세’라는 제목하에 한·일협정 비준저지를 위한 토론회를 주최하였다. 이날 연사는 서울대 등 5개 대학 대표 5명이었다. 연사로 나온 학생들은 이번 조인된 한·일협정이, ① 우리의 신뢰를 저버린 것이고, ② 일본에 대한 우리의 민족적 주체의식이 뚜렷이 서기 전에 졸속히 맺어졌고, ③ 우리의 의사보다 미국의 뜻에 의해 영향을 받은 사생아적 현상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한·일협정 비준은 저지되어야 한다는 것, 좀더 강력한 비준저지운동을 펴야 한다는 것 등을 주장하면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한 · 일협정의 비준을 최종적으로 결정할 것을 촉구하였다.
대성빌딩 토론회는 비준반대운동을 위한 대학간 연대를 모색하는 일환이었지 토론회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다. 6월말 출옥한 장명봉 서울법대 학생회장이 이대법대 학생회장 신춘자(현재 이름 신인령)를 찾아와 서로 비준반대운동의 연대 필요성에 대하여 논의하였고, 그 결과 방학중의 비준저지운동을 위해 몇 개 대학의 연대모임을 조직하기로 합의하였는데, 여기서 이대 주최의 대성빌딩 토론회에 각 대학에서 연결이 될 수 있는 사람을 연사로 초청하여 대학생연대모임 결성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자는 약속이 이미 있었던 것이다.
대성빌딩 토론회를 계기로 하여 7월 13일 오전 11시 연세대 의대 학생회의실에서 이대, 서울대, 연대, 동대, 숙대, 고대 동 서울시내 6개 종합대학 대표들이 모여 ‘한·일협정비준반대각대학연합체(이하 ‘ 한비연’)를 결성하였다. 후에 외국어대 등 몇 학교도 ‘한비연’에 가담하게 되었다. 이들은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공동전선을 펴기로 하였으며 공동성명서를 채택하고 비준반대 제 1차 공동궐기대회를 15일 오전 11시 대성빌딩에서 갖기로 결정하였다. ‘한비연’은 각 학교의 학생회 대표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투쟁에 앞장섰던 사람들과 일부 학생회 임원 등이 합쳐서 구성된 조직이었다. 그 이유는 당시 대부분의 학생회 회장들이 정부의 회유에 넘어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대만은 총학생회 임원과 열정 있는 단과대학 임원이 대표로 참석하여 정부에 회유되지 아니한 총학생회를 과시하였다 이대 대표로는 처음에는 진민자·신춘자가 나중에는 차명희가 이에 추가로 조배하였다.
7월 15일 각 대학 대표 150여 명이 모여 최방학 이후 첫 연합전선을 위해 대성빌딩에서 모임을 조직하였으나 대회 직전 이대 진민자 등 12명이 개별적으로 연행되는 바람에 유산될 뻔했다가 간신히 강행되어 “한·일협정 비준동의를 저지하기 위해 각 대학은 연합전선을 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투쟁할 것”을 선언하였다. 7월 21일 ‘한비연’은 175 명의 국회의원에게 개별적으로 한·일협정 비준저지를 촉구하는 서한을 전달하다가 의원휴게실에서 전달대표 장명봉{서울대), 권석충(동국대), 신춘자(이대)가 연행되어 즉결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날 서울지법 즉결심판부는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 7월 30일 ‘한비연’은 비준반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8월 10일 ‘한비연’의 8개 대학 대표 10명은 오전 9시 반 동국대 교정에 모여 비준반대 성명서를 발표하고 조약폐기와 국회 해산을 위해 12일 오후 2시 서울 문리대 교정에서 매국국회해산 촉구대회를 열 것이며 6개항의 요구(매국협정 폐기, 현 국회 즉시 해산하고 비준반대 국회구성, 야당은 의원직 사퇴, 탈당 등 모든 수단을 다해 비준을 막고 일부 변절자를 민족의 이름으로 매장하라 동) 관철을 위해 14일 각 대학별로 비준반대성토대회를 열고 가두시위, 단식농성 등 실력행사에 들어갈 것을 결정·선언하였다
8월 12일 매국국회 해산촉구대회가 열리기로 되어 있는 서울문리대는 12시부터 교문을 닫고 학교 수위들이 신분증을조사하면서 타교생들의 출입을 금지하였고 2시 15 분에는 기동경찰이 남녀 대학생 10여 명을 트럭에 태워 연행하였는데이대의 진민자, 신춘자, 차명희, 이영빈(법학4) 이 연행되었다. 이들은 트럭에 실려가면서 국민에게 보내는 글, 매국국회해산촉구특별선언문 등 갖고 있던 유인물 뭉치를 길에다 뿌렸다. 이날 연행된 학생 중 이대에서는 진민자와 신춘자만 입건되고 차명희, 이영빈은 훈방되었다. 그러나 진민자와 신춘자도 두 번에 걸친 구속영장 신청이 기각되어 동대문경찰서에서 3일을 지낸 후 석방되었는데 진민자는 한상준 과학교육과 학과장이, 신춘자는 윤후정 법학과 학과장이 각기 책임진다는 각서를 내고 동대문경찰서에서 인계받았다.
학생들의 치열한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에도 불구하고 8월 14일 국회에서 비준안이 통과되자 이대는 ‘한비연’ 8개 대학과 함께 즉각 매국문서 무효선언을 하고 새로운 싸움을 위한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사태는 더 급림해져갔다.
박정희군사정부는 8월 26일 위수령을 선포함과 동시에 각 학교에 휴교조치를 명하였다.
이대는 8월 27일 4천여 명이 대강당에서 성토대회를 열고 150여 명이 학원방위를 위한 철야농성에 들어갔다. 학생들이 희생될 것 같은 위기를 느낀 학교 당국은 이례적으로 김활란 이사장이 대강당에 나와서 “학생들 이렇게 빌어요 해산하세요 여러분 뜻은 잘 알아요”라고 설득하였으나 진민자 총학생회장이 “우리는 계속합니다”라고 정면으로 맞섰다. 그러나 각 학과 교수들의 적극적인 만류로 결국 이날 철야농성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8월 28일 서울지검은 각 대학 데모주동자 및 배후조정자 92명을 발표하고 이들에 대한 지명수배를 내렸다. 이대에서는 진민자와 신춘자가 지명수배되었는데, 진민자는 9월 29일 체포되어 데모선동과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고 신춘자는 1년여의 도피생활로 들어갔다. 이후 진민자는 한 달 만인 10월 28 일 보석으로 풀려나고 신춘자는 1년여가 지난 1966년 9월 지명수배가 해제되었다. 이들은 모두 그해 2학기에 복학하여 1967년 2월에 졸업하였다.
진민자·신춘자가 지명수배된 후 ‘한비연’ 모임에는 차명희가 대표로 나갔으나 이후는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별 진전은 없었다. 차명희는 이대 가두시위 주동과 한비연 대표활동을 이유로 서대문서에 두 번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으나 구속영장은 기각되었다.
1965년 6월의 단식농성 이후 7월부터 총학생회 지도부가 지명수배된 8월까지 이대는 타대학 연대모임을 주도적으로 만들어 실질적 지도력을 발휘하면서 끈질긴 투쟁을 이끌었다. 또한 이대가 나서면서 숙대, 서울여대 등 다른 여자대학들도 적극 동참하여 남학생들만의 학생운동이 아니라 여성들도 동등하게 어깨를 겨루고 함께 하는 학생운동의 역사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이대 대표는 ‘한비연’의 주요 활동이었던 성명서를 매일 신문에 내는 성명전에서도 단연 중심적 역할을 맡아 성명서를 작성히는 핵심멤버로서 활동하였다.
이대 총학생회는 1965년 9월 2일 진민자 총학생회장과 신춘자 법대 학생회장이 구속과 수배로 인해 불참한 가운데 신구임원 이·취임식을 가져 새로운 학생회를 구성하였다. 이대는 1965년의 폭풍 같은 투쟁경험으로 한층 성숙하여 이후 잘못된 정치현실에 대한 발언이나 행동이 필요할 때 더이상 망설이거나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껴안는 학생운동의 역사를 만들어나갔다.
7. 학교 당국과 교수들의 동참
1965년 학생운동에서 이대가 보여준 또 다른 특징은 학교 당국과 교수들의 동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대의 역대 총장인 김옥길, 정의숙, 윤후정 교수는 모두 당시 이대 학생들의 한 · 일회담 반대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도와주었다. 김옥길 총장은 학교의 최고책임자로서 학생보호를 위해 가두시위를 막기는 하였으나 시위학생의 보호와 배려에는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이대에서 총학생회가 마지막까지 가동되면서 조직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진민자, 춘자 등을 보호하고 있는 해당 학과장들이 이들의 활동을 억제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신념껏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히여준 점도 크게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서울법대의 경우는 이와 대조적).
신춘자가 지명수배된 후에는 김옥길 총장이 직접 총장 차에 그를 태워 피신시키기도 하였으며, 그가 도피한 후 경찰은 가장 먼저 윤후정 교수의 집을 수색한 것은 물론이고 김옥길 총장 집을 뒤지러 오기도 했다. 수배학생의 행방을 집요하게 추궁당하며 시달린 윤 교수는 “설혹 내가 알더라도 제자의 도퍼처를 말해주겠느냐”며 버렸다. 특히 당시 서무과장을 맡고 있던 정외과의 김순겸 교수는 단식중 학생들에게 담요를 가져다주고 우유를 마시도록 설득하기도 했으며 학생들이 연행될 때에는 늘 동행하여 보호하고 보증을 서서 풀려나게 하였으며, 석방될 때는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안전한 귀가를 돕기도 하였다.
또한 타대학에서는 데모주동학생을 문교부 지시에 의해 거의 제적하였으나 이대에서는 무기정학에 그쳤다. 해당 학과장이 침여한 가운데 열린 문교부 지시에 의한 학생징계문제를 논의하는 교무회의에서 윤후정 법학과장과 이태영 법대학장은 사표를 쓰면서까지 이들의 제적을 막아 진민자·신춘자는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또한 김정옥 학생처장이 전국대학 학생처장 회의석상에서 문교부 지시를 거부하며 대치한 용기를 당시의 타대학 학생처장들은 증언하고 있다. 무기정학 처분을 받은 두 학생은 1년 후 복학될 수 있었다. 이후 이대에서는 학교 당국과 교수들이 학생운동에 대한 입장에 관계없이 적어도 학생보호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전통을 세웠다. 이대 교수들은 학생들의 최루탄 부상에 대해 정부 당국에 직접 항의하기도 했다.
1965년 6월 26일 이대 교수 일동은 정부에 보내는 항의문을 발표하고 이를 국무총리와 내무장관에게 전달하였다. 교수회의를 대표하여 김은우 교수가 낭독한 교수항의문은 “학생들에게 곤봉을 함부로 휘두르고 최루탄으로 수많은 부상자를낸 경찰의 비인도성”을 지적하고 “경찰들의 불법을 규탄하며 그 사유를 공개해명하면서 이 나라의 법이 살아 있다는 증거를 보여달라”, “경찰이 교정안에다 최루탄을 발사"하는 것은 만행이며, 서구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요지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7월 12일에는 한·일협정 비준을 반대하는 재경대학교수단선언이 나왔는데 이 선언에 서명한 교수 중 확인된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 중 이헌구 교수와 김성준 교수는 ‘정치교수’로 낙인찍혀 결국 해직되었다.
구연철(의대 교수, 당시 보건소장으로 단식학생들의 건강을 돌보았다), 강윤호(국문과), 고영복{사회학), 김영일(영문), 마경일(교목), 이병섭(기독교학), 이남덕(국문), 이혜숙(영문), 정병희(불문), 주낙원(사생), , 한준석(기독교학), 함홍근(사학), 이헌구{국문), 김성준(사학)
학교 당국과 교수진의 분위기는 대부분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협조적이었지만 일부 교수들의 탄압도 없지는 않았다. 특히 이대학보사의 학생회 출입기자 엄은옥{영문3)은 “학생회에 갚이 관여하고 데모에 휩쓸렸다”는 이유로 당시 학보사 주간 정충량 교수에 의해 권고 사직당하였다. 그후 이대학보사 기자들 사이에서 염은옥 기자는 ‘대한민국 해직기자 1호’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당시 엄은옥은 총학생회의 단식투쟁 기간 중 신문사 등 언론기관과 학생회의 연결을 도와주었다.
『이대학보』 기사 보도도 수난을 당했는데 1면 부장이었던 이경순(신문학과3) 기자는 편집국장과 함께 이대의 학교 앞 시위기사를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이화도 분노’라는 제목을 1면 톱으후 뽑았으나 정충량 주간이 ‘굴욕적인’이라는 표현이 너무 강하다는 이유로 삭제를 주장히여 심한 갈등을 겪었다. 결국 7월 5일자 『이대학보』는 인쇄 마지막 단계에서 ‘굴욕적인’이라는 글자 자리가 공백인 채로 발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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