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장 성균관대학교 6·3운동
1. 개 요
1964년 봄은 유난히도 길고 가슴 설레이며 분주했다. 신입생들의 싱싱하고 환한 웃음 속에서 진로를 고민하던 상급생들의 우수에 찬 가슴도 조금은 위안을 얻는 계절이다. 그것은 대학의 낭만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땅의 민주헌정은 중단을 거듭하면서 4,9혁명의 깃발이 채 나부끼기도 전에 5,16군사쿠데타에 의해 하강식도 없이 송두리째 뽑혀지고 말았다. 그들은 ‘원상복귀’라는 스스로 내세웠던 대국민 의k속을 팽개치고 군복을신사복으로 갈아입는 절차만으로 이승만에 이어 장기 군사독재집권의 대장정에 올랐다. 사실 6·3 운동은 이미 이때부터 출발하고 있었다.
성대는 1963년 5월 초부터 약 1개월 간 재단분규문제로 군사정권과 투쟁했던 실전경험이 축적되어 있었다 또 성균인들은 대부분 한 번쯤 전기대 입시의 실 패라는 인생의 첫 실패를 경험했던 쓰라린 상처를 간직하고 있어 사회와 인생을 보는 안목이 침착하고 생각이 깊었다. 그러나 성균인들의 기질에 더 갚은 영향을 준 것은 성균관 대성전의 당당한 위용이다.
600여 년 간 민족지성의 요람으후 그 기상과 품위를 잃지 않고, 고색창연하게 버티어 서서 내뿜는 전통의 향기 앞에 다시 눈뜨게 되는 민족사에 대한 시각이다. 조석으로 드나들며 느낄 수 있는 이 감동은 새로운 성균인을 탄생시키는 동력이 되어왔다. 역사와 더불어 사는 지혜 그것은 성균인의 자존심이었다. 그래서 성균관대학의 6 .3 운동도 성균인 나름의 기 속에서 이루어 졌다.
6·3 운동은 이념투쟁의 산물이 아니라 구국운동이요 애국적 민족운동의 차원에서 전 성균인들의 가슴속에 불타는 애국의 충정에서 발원되었다. 다른 대학처럼 이념연구단체나 몇몇 주동자에 의해서 발발된 것이 아니라 성균인 모두의 합의에의해서 이루어졌다. 성대에는 공조직을 제외한 어떠한 사조직도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다.
당시의 학생활동기구는 총학생회와 대의원회, 학회로 구성되어 있었다. 총학생회는 통합기구로 7개 단과대학 회장단으로 구성하고 총학생회장은 단과대학 회장 중에서 l 1명을 호선하고 단과대학 회장은 그 대학에서 학생들의 직접선거에 의하여 선출되었다. 모든 학생운동은 총학생회에서 이루어졌다 대의원회는 각 학년 반대표가 모여 구성하고 의장은 대의원들에 의해 선출되었다. 그 임무는 총학생회의 예산 결산을 심의 감사하는 일이며, 학회는 주로 연구활동에 전념했다. 이와는 별도로 여학생들의 전통예절, 교양, 다도실습을 위해 정정회가 있었다.
1964년 6·3 운동 당시의 공조직 간부들로는 총학생회장이 송영삼t경제4)이었고, 단과대학 회장으로는 김삼연(법4), 김정모(영4), 김원근(회4), 박대원(상4), 박상은{종제4), 윤여국(예4), 최대근{정 4) 등이 있었다. 그리고 총학생회 산하에 6개부가 있었다
대의원회는 의장이 권오철(경제4)이었고, 각 학회장은 해당학과에서 선출된 20개 학과 32명이 있었다. 그리고 정정희 회장은 유화자였다. 그리고 대학본부 지휘계통은 총장 우관 이정규 박사, 학생처장 신동욱 교수, 학생과장 김철삼, 주임 김석동, 서무주임 이중기, 직원 정소묵, 신현구, 오형선, 권오균 선생이었다.
성대의 6·3 운동은 독립운동가요 자유사상가이신 우관 이정규 총장 선생님의 투철한 민족혼과 애국심에 심취했던 바 크다. 선생은 1946년 9월 25일 성대의 개교와 함께 심산 김창숙 학장의 간청으로 부학장에 취임해서 북경·상해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다진 동지애로 몸이 불편한 심산을 도와 오늘의 성대를 있게 한 선배 중의 한 분이다. 4,19 당시 청주대학 학장으로 있으면서도 당일로 상경해 평소 교분이 두터운 교수들을 자택으로 초치, 25 일 교수시위와 시국선언을 주도했던 거목이었다 . 이때 선생의 집에 모였던 교수로는 변희용, 손명현, 박희성, 김영달, 이항녕 제씨였다.
6·3 운동 당시에도 성균인들의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으며, 4월 20일 시위로 학생간부 송영삼, 김삼연이 전격 구속되자 21일 아침 일찍 엄민영 내무부장관을 직접 찾아가 구속학생들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했던 일들은 참으로 우관이 아니
면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언론에서도 지적했지만 어느 대학 총장이 그러한 일을 했던가 군사정권에 대한 정면 도전이나 다름없는 석방요구는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시위를 막기 위해 학생회비를 동결한 학교도 있었으니 성대는 학생회비 사용에도 전연 불편함이 없었다. 3·28시위에서 학생들이 학교행사용 태극기를 사용했다고 해서 이를 학교 당국이 부추긴 것으로 보고가 되어 당국에서 책임자 문책이 있었으나 불문에 부쳤다.
또 한 분 잊을 수 없는 은사는 신동욱 학생처장이다. 신동욱 선생은 직접 시위현장을 찾아다녔고 구속자 석방시에는 언제나 신원보증을 섰다 그리고 학생주임 김석동 선생의 종횡무진한 활약도 빼놓을 수 없으며 서무주임 이중기 선생의 플래카드 글씨 청부도 잊을 수 없다. 그밖에 학생과 직원들이 불철주야 시위현장을 돌며 애를 썼던 그 노고가 성대의 6·3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음을 먼저 밝혀둔다.
성균인의 6·3 운동은 7천 학우 모두의 것이며 고통이든 명예든 함께 공유하는 역사의 기록임을 전제해둔다. 성균관대학의 6·3 운동은 대략 3단계로 나누어 초 · 중 · 후기로 구분얘 기록하고자 한다.
2 . 6·3운동의 실상
제 1 단계(초기) 투쟁(1964. 3. 24~ 3. 30)
우리는 이미 3·21 범국민투위가 주최한 서울고 집회에 참여하여 무거운 시국의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6·3 운동 최초의 본격적인 시위인 3·24의 시위는 출발의 의미는 있다고 보지만 전술적, 효과적인 면에서는 실패한 출발이라고 평가한다. 왜 하필이면 3개 대학뿐인가? 사전에 연락을 통해 전 대학에서 동시에 출발하는 공동전선을 구축했더라면 보다 뚜렷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에서이다. 당시에는 충분히 대규모의 연대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한두 사람의 소영웅보다 백만 학도의 중지가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일단 사태를 예의 주시 하자는데 뜻을모았다.
당시 총학생회장이었던 송영삼은 정부초청 동남아 각국 시찰되유에 참여하느라 국내에 없었다. 거기에다 후임 대표도 지정하지 않고 떠나 총무부장 김창영(경영 4) 이 활동하고 있을 뿐 사실상 마비상태에 있었다. 25일 오전 11시 김삼연이 학생회에 들어갔을 때는 안균(시동) 혼자서 사무실을 지키고 있었다. 20분 후 김창영이 들어왔다.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시국에 대한 토론이 분분했다. 김삼연은 1시 정각에 즉각 회장단회를 개최할 것을 교내방송을 통해 수차공고했다.
정오가 가까워오자 성토대회를 요구하며 학생들이 총학생회 사뮤실로 몰려와 아수라장이 되었다. 김삼연은 운영부장 최영길(영4)에게 학교 마이크 준비를 의뢰하고 1시 이후 성토대회 개최를 약속하고 모두 사무실에서 내보냈다. 그러나 십여 차례 방송을 했는데도 1시까지 회장단은 한 사람도 나타나지 않았다. 참으로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회장단 중 2명은 ROTC 교육을 받고 있었으며 그외 사람들도 분명히 방송을 들었을 터인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회장단회의에서 시위결정을 하려던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러나 이미 학생들과 한 약속시간을 넘었고 문리대 앞 운동장에서는 마이크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김삼연은 최영길과 지도부장 권광남(경제4)을 대동하고 성토대회장으로 참석했다. 주위에는 정치학회장 정일용{정4), 4,19 상의자 강상수(행4), 강수형(법4)과 김광열(법 4), 박형길(법4), 오성엽(중2, 복학), 이성구{정 2) 등의 얼굴이 보였다. 1시간 반 정도 자유토론, 비상총회 형식으로 26일 전교생 시위를
약속하고 이성구 등 정치과 저학년생들이 준비한 일본 수상 이케디{池田勇人)의 화형식을 끝으로 이날 성토대회는 막을 내렸다.
김삼연 등 성토대회를 주도한 학생들은 그 길로 즉각 김석동 학생주임을 만나 총학생회를 부장들에게 맡겨 방치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비상시국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범대책기구 구성을 제의하여 수락을 얻었다. 사실 이는 허가사항은아니지만 학교측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하여 회장단 중에서 김삼연, 부장 중에서 김창영, 대의원회 의장 권오철로 3인 지도부를 구성하고 뒤에 학회대표로 정일용 정치학회장을 추가 침여케 했다.
권오철은 김삼연과 같이 군제대 후 면학으로 개인친분도 있었지만 그보다 대의원들의 신임이 두터운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3인이 각기 임무를 분담하여, 김삼연은 최영길, 권선남 두 부장의 보조를 받으며 시위현장 지휘 및 기획을 담당하고 권오철은 대의원회 부회장 김철욱{정3), 서호석(사3)의 보조로 섭외 및 대외 업무를 담당하며, 김창영은 체육부장 문정길(경영4), 기획부장 송찬호(경영4) 등과 함께 준비업무 일체를 맡기로 했다. 그리고 ROTC 교육을 받고 있던 학예부장 김의배(경제4), 조직 송광호(경제4), 지도위원 김건(경영 4), 양득춘(경영4) 등은 배후에서 지원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3월 26일 10시 반 약 1,700여 명이 원남동 종로 4가 입구에서 경찰과 대접전을 벌인 후 일단 해산했고 일부는 광화문까지 진출했으나 효과적으로 투쟁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이날 오후에는 ‘평화선 사수’ 전교생 리본달기운동을 전개했다.
3월 27일 11시 교문을 출발한 시위대는 일부는 창경궁 앞을 지나고 일부는 서울대 앞을 지나 양면작전을 전개한 후 탑골공원을 지나 동아일보사 앞에 도착하여 건국대와 함께 시위를 전개했다. 이날 시위는 약 2천여 명이 참석하여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12시 정오 뉴스에 김종필을 28일 소환한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이 보도를 듣는 순간 기회가 왔다고 직감하고 김삼연은 김창영, 권오철과 상의하여 28일의 시위를 계획, 성균인들이 무엇인가 국민들에게 보여줘야 하겠다는 결의를 굳히고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그 구상은 한강대교에서 지키고 있다가 매국노 제 2의 이완용, 김종필을 차에서 끌어내려 김·오히라{大平正芳) 비밀흥정의 내막을 국민 앞에 공개토록 한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보안을 위해 준비장소도 정정회사무실로 옮기고 준비했다.
밤 10시가 넘어서 광목을 구하러 갔던 김창영과 문정길이 돌아왔다 이날은학회대표로 정일용도 함께 침여했다. 3·24이후 성대로서는 최대의 시위준비였다 . 그런데 플래차드 구호가 문제였다. 그래서 김삼연이 미리 생각해두었던 ‘돌아 온 제 2의 이완용, 김종필 도사(盜士)’, ‘그대를 기다렸노라!’를 정일용에게 보였더니 좋다고 적극 찬동했고, 다른 두 사람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 그대로 쓰기로 했다. 밤이 늦어 서무주임도 퇴근해버려 구호를 쓸 사람이 문제였다. 궁리하던 끝에졸필이지만 김삼연이 직접 쓰기로 하고 붓을 들었다. 글짜가 많아 전반부는 생략하기로 하고 후반부 ‘그대를 기다렸노!’만을 직필했다. 그 날 밤 구호는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이들은 밤 11시 반에 헤어졌는데, 김창영은 유인물 등 준비를 위해 부근 여관에서 투숙했다.
3월 28일은 토요일이라 시위에는 별지장이 없었으나 날씨가 잔뜩 찌푸려 있었다. 김삼연은 저학년을 동원하고 지도부장 권선남에게 부탁하여 도서관 문을 잠그도록 했다. 이에 김삼연은 이 학생들에게 옛 우리 선배 성균관 유생들은 국난이었을 때는 책을 덮고 거리로 나와 항쟁했다, 반대하는 자가 있으면 말하라고 했더니 모두가 숙연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에 순응했다. 9시 30분 이날 총지휘는 김삼연이 맡고 최대근, 박병만(법 4, 법률학회장)이 전위에, 여학생 한신자(법1), 김명복{법1), 이청자(사2), 차동희(법1)가 대형 태극기를 받쳐들고, 전위에, 그뒤에 ‘그대를 기다렸노라!’ 플래차드를 길게 받쳐들고 구호로 “매국노 김종필은 공개하라, 공개하라, 비밀흥정내막을"을 외치며 시위에 돌입했다.
이날 시위에는 3,500명 이상이 침썩했다. 책가방에 비상의 무기도 준비했다. 그것은 돌이었지만 어디까지나 방어용이었다. 동대문경찰서 담당형사들에게 평화적인 시위를 할 테니 신사협정을 하자고 했다 보라, 김종필의 환영행사를 치르러 간다고 했더니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그대를 기다렀노라!’ 우리들의 애인이라 했더니 또 한 번 웃었다. 그러나 우리들의 영원한 매국노 김종필이라 했더니 얼굴색이 변해버렸다. 전중한담이었다고 할까 밀리고 밀리면서 광화문 네거리에 진입했을 때쯤 뉴스에 김종필이 사전정보를 입수하고 삼각지, 이태원, 한남동, 반공센터, 스카라극장, 돈화문, 효자동을 따라 청와대로 도착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우리들은 졸지에 닭 쫓던 개꼴이 되고 말았다. 궂은 비는 그날 따라 왜 그렇게 내리는지 모두들 맨뭄으로 비를 맞으며 학교로 되돌아와 해산하고말았다
이날의 모든 신문들은 전면 또는 3면 전단에 ‘그대를 기다렸노라’고 휘갈겼다. 온통 성균인들의 시위가 화제였다. 왜 잣길을 막는 학생들 앞에 내려 당당히 회담의 당위성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대낮에 야반도주하듯 길을 피해 도망을 했는지 매국노 김종필이 혁명의 제 2인자라 하니 그들의 대의가 무엇인지 참으로 한심하였다.
3월 30일, 중앙청 회의실에 각 대학 학생대표를 초청하여 한·일 문제현안을 설명하는 회담이 있었다. 김삼연, 박대원, 최문근도 성균관대 대표로 참석했다. 정일영 외무부차관이 김·오히라 메모를 설명하고 아주과장 황호을이 가방에서 메모원본이라며 보여주었다. 우리는 뒤에 앉아 있어 확인하지 못했다.
오후 2시에는 청와대에서 대통령면담이 있었는데 성대 대표로 권오철이 참석했다 . 이들 학생대표들의 면담 이후로 시위의 열기가 식어버렸다, 학원 복귀를 선언하며 후퇴함으로써 총학생회장단들은 사실상 학생들로부터 불신을 받게 되고그들의 행동도 한동안 묘연해 졌다. 그러나 분노는 누구도 가라앉힐 수 없었다.
제 2단계(중기) 투쟁(1964. 4. 17 ~ 23)
외유에서 돌아온 송영삼은 여행의 목적이나 결과에 대하여 설명이 없었다. 정부의 초청으로 외유를 다녀온 총학생회장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았다. 특히 학회장들의 불신은 대단했다. 대외적으로는 정부의 태도변화를 기대했지만 오히려 그동안 체제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시간을 벌고 있었다. 이에 4,19혁명의 정신을 한 번 더 확인함으로써 5,16군사정권의 모순성을 지적한다는 의미로 5,16은 4,19의 연장일 수 없다는 분명한 태도를 국민들에게 알리고 한·일회담을 할 자격도 없는 정부라고 규정하기 위해서 재차 시위에 돌입하기로 결정했다.
4월 19일, 교내 문리대 앞 광장에서 4,19혁명 제 4주년 추념식을 마쳤다. 송영삼, 김삼연은 이날의 시위를 시청 앞 광장까지 끌고 가 한동안 잠잠했던 국민 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알리기로 했다. 이날 시위대는 시청 앞 광장에서 기념식을 마치고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한 후 오후 2시경에는 이효상 의장과의 면담을 요구, ‘굴욕회담 즉각 중단’을 결의하라고 촉구했다. 꾀가 많은 이 의장은 학생들의 충정을 충실하게 의회에 반영하겠다고 받아넘겼다. 이날도 세차게 비가 쏟아져 시위는 오후 3시경 해산하고 말았다.
4월 19일이 일요일이었으므로 월요일인 4월 20일 4,19혁명을 추모하는 대학이 많았다. 20일 정오를 기해 2천여 명이 서울문리대 앞을 지나 종로 5가로 돌진했는데 후미에 서울문리대생 200여 명이 합세했다. 시위대는 종로 4가와 탑골공원 사이에서 포위 경찰과 대치하여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전개했다. 현장에는 보도공사로 돌이 많아 투석전으로 오래 버틸 수 있었다. 그러자 저녁 6시에 경찰병력이 동원되어 대회전이 시작되었고 투쟁중에 김삼연이 전위에서 붙잡히고 송영삼도 잡혔다. 이들은 즉각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호송되어 여기에 김철욱 이외 5명이 들어왔다. 김삼연은 자신과 송영삼이 시켜서 어쩔 수 없이 침여했다고 진술하라고 김철욱 등에게 단단히 일러두었다. 이날 밤 11시경 송영삼, 김삼연은 서울교도소에 전격 구속되었고 다른 6명은 그날 밤 풀려났다. 3·24 이후 연행은 자주 있었으나 학생간부를 전격 구속하기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4월 21일, 아침 일찍 이정규 총장은 엄민영 내무부장관을 찾아가 구속된 학생간부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고 나섰다. 이날도 시위는 계속되었고, “구속학생석방과 5,16 은 4,19 의 연장이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시위대는 격렬하게 투쟁했다. 이날 시위로 권오철, 정일용, 이성구, 임학릭(영1)이 구속되고 이근진(상3), 조청자(약4), 이춘광(정2), 이훈재(정 2)이 연행되었다가 그날로 풀려났다. 또한 양일간의 투쟁과정에서 정일모(법 3), 남궁해(화4), 김대우(동철2), 이상열(행 3), 유형목{정4), 한상운{경영 3), 김종철(정1), 정시훈{정4) 등이 부상을 당했다.
제 3 단계(후기) 투쟁(1964. 5. 20 ~ 6. 3)
학원사찰중지, YTP(청사회) 박멸,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참석, 박정권 퇴진 요구 등이 이 시기의 주요 투쟁이다. 송영삼은 학생총연합회 관계로 후기투쟁에는 학교에 없는 날이 많았다. 5·20 서울문리대 민족주의 장례식 집회에는 성대생 300여 명이 참석했는데 이중 김광열, 박형철, 정중용{정4), 조병회{국4), 임동
철(동철2) 등이 구속되었다. 성대 대표로 참석한 이들은 총학생회가 공인하는 간부는 아니었지만 5·20대회에서 ‘민생고 성토문’을 낭독한 김광열은 웅변이 뛰어나고 대중지휘능력이 있는 운동가이며 박병길도 말은 어눌하지만 기동력이 뛰어나 두 사람 모두 성대 시위의 명장들이었다. 임동철은 면학도로 성대신문사 기자로 참석하여 옥고를 치른 적이 있다.
5월 25일 난국타개성토대회 개최 후 시위를 시도했으나 학교 앞에서 격전이 벌어져 가두진출이 좌절되었다. 그러자 5월 30일 송영삼이 단식투쟁을 주장하게 되었다. 김삼연은 이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김삼연은 이 중대한 시기에 전 학년이 총투쟁의 노선을 피해 단식투쟁을 유도하는 것은 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기만적 술책이라고 맹공하고 성대는 그러한 소극적인 보신주의적 행동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단호히 맞섰다 김삼연은 권오철, 정일용, 박병만, 조근덕(독4, 독문학회장), 김 영철(상4, 상학회장), 우정하(중4, 중문학회장), 최영길 등과 상의하여 성대의 독자노선을 구축하여 당당하게 투쟁할 것을 분명히 하고 대중호소 전략으로 6·3운동의 종반을 맞았다. 송영삼의 분열로 투쟁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닥쳤다. 학생활동비로 송영삼이 집행하고 있어 김창영이 집행하던 초기와는 전혀 판이한 상황이 벌어졌다. 학생활동비를 독점한 총학련의 활동이 성균관대학의 후기 투쟁에 혼란만 가중시켰을 뿐 효과적인 투쟁에 장애요인이 되었다는 점을 이 기회에 분명히 밝혀둔다.
6월 2일에는 1,500여 명이 참가하여 혜화동, 서울대 앞, 종로 5개 청계천, 탑골공원 앞까지 가두시위를전개했는데 투쟁이 산발적으로 전개된데다가 비가 내려 조직적 통제가 어려워 해산되었다.
6월 3일, 아침 9시부터 10시까지 교내에 모여 다시 시위를 벌였다. 10시 50분 경, 3천여 명이 교문을 돌파하고 목적지인 광화문 종각 부근에 집결했다.
도중에서 1천여 명이 분산되고 2천여 명이 도착했다. 그러나 각 대학이 모두 시청 앞, 광회문 일대를 목적지로 정하고 있어 오후 4시가 넘자 통제가 어려워졌다. 권오철, 정일용, 김삼연은 종각 옆에 중심부를 지키고 김창영, 문정길, 최영길 등 각 부장들도 열심히 뛰었다. 이날 성대도 몇 번 전위에 서서 효자동 쪽으로 향하는 진출을 시도하다 최루탄 세례로 밀려니는 등 끝까지 버렸다. 저녁 8시가 넘자 기동대 앞에는 화염이 치솟고 완전히 통제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나중에는 지휘부도 해체되고 무법천지가 되어버렸다.
밤이 갚자 중앙청 건물 뒤에서 불빛이 요란하고 검은 물체들이 분주히 오고 갔다. 9시 40분 계엄이 선포된 것이다. 어느새 중무장한 병력이 무개차에 실려 질주하며 광화문을 향했다. 몰려 있던 학생들은 서로를 피신하느라 아수라장이 되었다. 계엄은 8시로 소급해서 발효되었는데 정일권 총리는 “학생들의 데모의 난동화는 국가의 기본을 흔들고 %댁의 씨를 뿌리는 철없는 한탄스러운 일이며 파국을 예방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서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른 것입니다”라고 상황설명을 했다.
왜 깨끗이 물러나지 못하고 또 군횟발로 역사를 짓밟는단 말인까 이같은 학대해 독재정권과 그 주역들은 아무도 말이 없다.
6월 3일 이후 검거 선풍이 일고 학교는 무기한 폐쇄되었다. 학원의 수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시위는 금지되고 언론사건 검열 등 독재로 가는 길이 가속화 되었다. 전국 주동자급 168명의 수배자 명단에 등재된 권오철, 정일용은 깊이 잠적했고, 김삼연은 동료회장단(K요 Y모 씨)의 밀고로 하숙집 다락방에 숨어있다가 4일 오후 동대문경찰서 형사대에 연행되었으며, 학생연합을 주도하던 송영삼도 갚이 잠적했다. 정정회 부회장 홍사임은 4일 아침 학교에 오다 연행되어 구속되었다. 후기시위에 초썩해 선봉에 섰던 조성균(정4), 탁형춘(경제3), 이성구, 오성업, 김충언(법4), 김일중(경제2) 등도 구속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성대 6·3 운동의 맹장들이다. 끝으로 김승균(동철4)은 58학번으로 4,19 당시부터 활동해오다가 6 3년 복학, 6·3 운동 당시에는 인혁당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운동가였다.
7월 29 일 비상계엄이 해제되고 8월 13일 1 급주동자(168명)로 분류되었던 성대의 주동자 권오철, 정일용, 송영삼은 오랜 수배에서 해제되고 6월 4일 연행구금되었던 김삼연은 l1차 구속 때부터 탈이 났던 위궤양이 급속으로 악화되어 명륜동 3가 1의 406호 하숙으로 주거제한되어 담당형사의 감시하에 투병하며 수도경비사령부 보통군법회의 검찰부 이기창 검찰관에게 수사로 소환조사를 받아오다 기소되었고, 유예 처분으로 주거제한이 풀려 고향으로 갈 수 있게 되었다. 홍사임은 부친사망으로 조기에 풀려나교 탁형춘, 이성구, 조성균, 김일중도 기소되었다가 마지막으로 풀려났다. 그외 서정식(정4), 박훈(정4), 성의경(동4), 김영락(법 4) 등도 6·3 운동에 적극적으로 침여했다.
3. 1965년 한·일협정 반대투쟁
1965년 2월 20일 박정희정권은 전국 대학생과 교수, 언론인, 문인, 종교인, 법조인, 야당과 재야단체 등 전 국민적인 한·일굴욕회담 반대운동에도 불구하고 한·일협정을 가조인하고 말았다. 따라서 1964년도 한 해 동안 성균관대는 주로 학생자치회, 대의원 총회, 법정대 학생회 정치학과를 중심으로 한·일굴욕회담반대운동을 펼쳤고 한·일협정이 가조인이 된 1965년 2월 2 0일 이후부터는 법정대의 법률학회와 정치학과를 중심으로 비준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965년 4월이 다가오자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명륜 캠퍼스는 새 학기를 맞아 신입생 환영회와 4,19혁명 기념행사 문행제(文杏祭)의 준비로 한껏 들뜬 분위기였다. 65년도 신입생 환영회가 전교생이 참석한 가운데 명동 국립극장에서 열렸다. 이날 손우정 대학원장은 신입생 환영 연설에서 프랑스 소르본대학과 일본 동경대학의 학생운동에 대한 예를 들어 대학의 지유는 신성 불가침한 것이라며 대학생은 정의와 자유를 위해 분연히 일어설 줄 알아야 하며 대학생은 긍지를 가지고 공부할 때는 공부에 전념하고 또 데모할 때는 데모도 해야 하는 것이다라는 요지의 연설을 하여 전교생의 가슴에 뜨거운 불길을 지폈다.
성대는 해마다 4월이 오면 다른 대학과는 달리 각별한 의미 를 지녀왔다. 자유당 독재정권에 항거한 4,19혁명 당시 희생자가 많았던 대학이었기 때문이다. 65년에도 성대는 여전히 4,19기념일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를 맞아 4월 13일 10시 라일락 꽃향기 그유한 명륜동산의 문리대 교정에는 약 2천 명의 재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법정대생이 주동이 된 한·일협정 비준반대 성토대회가 열렸고 곧 이어 성토대회에 참가한 2천 명은 3개 편대로 시위대를 형성하여 l1개 편대는 창경원 쪽으로, 1개 편대는 명륜시장 쪽으로, 1개 편대는 혜화동 쪽으로 나뉘어 진입, 종로를 거쳐 시청 앞과 태평로의 국회의사당에 집결하기로 하였다. 이날 성토대회의 선언문과 결의문은 법학과 3학년의 정병철이 작성하고 성토연설은 정치과 3 년 박동규가 맡아 이날 시위를 주도하였다. 따라서 제 2단계 투쟁인 65년 4월 13, 14일 양일간의 한·일협정 비준반대 및 무효회투쟁부터는 학생회 간부 중심이 아닌 주로 법정대 학생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단, 학생간부 중에는 ROTC생이 대부분이어서 시위참여에 엄격한 통제를 받아 적극 침여하지 못했고 대표적인 것은 법정대 학생위원장인 조재학이 시위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사병으로 강제 입대, 학교를 떠나게 됐다.
이날 성토대회장에는 정치과 3년 이성구{64년 4,19데모로 구속), 손진홍{2·28 대구학생운동 주동자), 법과 3년 오태성(응원단장), 문리대 중문과 3년 오성섭(4,19의거 학생)과 경제학과 3년 탁형춘이 선봉에 섰다 그리고 법과 3년의 김남수, 이석효, 이병준, 현양규, 유정일, 안종훈, 박충남, 전영열 등이 시위대의 맨 앞줄에서 경찰봉과 최루탄을 물리치며 시위대를 이끌고 있었다 이날 성토대회에서는 다음 6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1. 조국수호는 젊은 학도의 사명이며 역사의 명령이다.
2. 한 · 일협정을 즉시 철회하라
3. 평화션을 사수하자.
4. 한 · 일협정은 제 2의 을사조약이다. 선열들은 통곡한다.
5. 애국적 학생을 탄압하지 말고 구속학생 즉시 석방하라.
6. 학원사찰 중지하라.
시위대의 주력부대는 혜화동로터리를 통과해 동숭동 서울 문리대와 서울법대를 지나 이화동로터리에서 경찰과 대치한 가운데 민족반역자 박정희·김종필의 화형식을 거행하고 종로 5가 쪽을 향하다 경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약 1시간 정도의 대치 끝에 경찰이 퇴진하기 시작하였고 시위대는 돌을 던지며 진압 경찰들을 종로 5가 한일극장 앞까지 뒤쫓았다. 그 와중에서 시위진압 경찰 지휘자인 경감 한 사람이 시위대가 던진 돌에 맞아 중상을 입고 쓰러졌고, 시위대는 계속 질주해 마침내 서울시청 앞에 이르렀다. 그곳으로 모여든 다른 대학의 시위대와 합류,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인 후 광화문으로 향했으나 경찰의 강력한 저지로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이날 시위로 성대생은 230명이 경찰에 연행되었으나 곧 모두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성구(정3)와 탁형춘(경3)은 1964년에 이어 두번째로 구속되었고 오태성(법3), 오성섭(중3), 임무성(경1 )은 불구속 입건으로 풀려났다. 또 정병철(법 )은 문교부의 압력에 의해 무기정학 처분과 지명수배령이 내려져 그는 김남수(법 3)와 오태성(법 3)과 함께 온양과 수원, 문산 등 친척과 친지의 집을 전전하며 피신했다가 그해 8월 21일 다시 학교로 돌아오게 되었다.
해마다 5월이 오면 젊은 성대인의 향연인 문행축제가 열린다. 그러나 65년에는 좀 늦게 시작되었다. 명륜당 뜰 교정엔 아카시아꽃 향기가 물씬 풍겼다. 6월 14일 축제행사의 하나인 시국강연회가 법정대 강당에서 열렸다.
당시 유명한 김성식(고대 교수), 신상초(전 성대 교수,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창열(고대 교수)이 연사로초청돼 강연하였다. 시국강연답게 한·일회담 문제와 학생운동 진로에 관한 내용에 관한 것이었다. 특히 이날의 강연에서 김성식 고대 교수는 “양심의 의지, 도덕적 결단으로 부정에 항거하고 정의를 위해 젊은이는 분연히 일어서야 한다”라고 열변하여 강당을 가득 메운 성대생의 붉은 피를 끓게 하였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서게 했다.
5월 18일 구국외교학생위원회(회장, 정병철 법3) , 오대영(정3), 하종하(법2), 오성섭(중문3) 등이 주동이 되어 11시부터 문리대 광장에서 한·일협정 반대 성토대회를 열었으나 전날 모의에 참가했던 학생들이 대부분빠진데다가 학교 당국의 제지로 이날 개최 예정이었던 성토대회와 시위는 무산되었다. (이 기사는 『동아일보』에 보도)
정치방학이 끝나고 8월이 되자 그동안 연기되었던 1학기말 시험이 8월 23일부터 시작되어 전교생이 시험과 2학기 등록을 위해 등교하였다. 그 무렵 교내에서는 성대 교수단이 한·일협정 반대서명을 하였다. 밖에서는 조국수호국민협의회(함석헌·장준하 등 중심), 4,19혁명 관련단체, 한국학사청년연맹(박정훈·김덕규·조홍규·서진영·김재현(고대), 안성혁·박동혁(연대), 백환기(서울대), 박동인·정기용·김경남(동국대), 정병철(성대), 서헌무{한대), 장두석(경희대)) 등을 중심으로 6·3세대들이 모인 단체에서 한·일협정 비준무효화 선언을 하고 나섰다{각 일간신문에 보도).
1학기말 고사가 23일부터 시작되어 교정 안에서는 면학 분위기에 젖어들고 한편 시국은 시위관련 학생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구속·수배 및 퇴학·무기정학 처분 등 정부 당국의 강압정책으로 공포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던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8월 24일 10시 법률학회가 주동이 된 한·일협정 비준무효화선언 성토대회를 열었다. 오후부터는 법정대 2205 강의실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50명이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단식투쟁에 참여한 학생들은 법률학과 3년생이 중심이었으며 2학년과 1학년들도 참여했다. 이날에는 법과 3년의 김용집·전영열·백종인 등 제대파 학생들이 대거 참여한 것을 비롯하여 변재훈·안종훈·김남수·유정일·이의섭·현양규·이석효·박충남·장태환· 금영수· 유대수·오태성 등과 민병혁·하종덕·김종화 등 법과 2년생들과 오대영(정3) , 이추자(정2, 여) 등이 참여했으며 한신자·차동희·김명복 등 법과 2년 여학생들이 단식 농성장에 음료수와 계란을 가져와 격려하는 등 적극 가담하였다.
단식투쟁 이틀째인 25일 정병철(법3)은 단식투쟁장 안에서 김남수·김용집 등과 8월 26일 한·일협정 무효화투쟁선언대회를 열어 가두로 진출 시위를 벌이기로 모의하고 극비리에 선언문과 결의문, 플래차드를 작성하였다. 학기말 시험 중이라 전교생이 모두 등교하게 되므로 이들을 한곳으로 모으기 위해 대회장을 교문 안 가장 가까운 대성문 앞뜰로 정했다. 그리고 김용집군이 전교생을 집합시키는 데 행동대장을 자임했다.
26일 새벽 단식중이던 주모들은 강의실에서 책상과 걸상을 대성문 옆의 등교 통로와 양현교 쪽 등교 통로를 막았다. 그래서 일단 시험을 치력 위해 등교하는 학생들이 교문에 들어오고 나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모든 통로를 봉쇄했다. 한편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고 있던 500여 명이 학생들을 모두 대성문 앞으로 몰아세웠다. 이러한 작전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오전 8시경부터 9시 사이에 전교생 4천 명이 대성문 앞뜰에 모여 서게 되었다. 투쟁선포대회는 9시 30분경부터 시작되었다.
선언문 낭독은 법과 2년생인 한신자 양이, 결의문은 법과 2년 김명복 양이 낭독했다. 그리고 법률학회 신임 간부이며 수많은 전국 대학교의 토론대회와 모의국회 등에서 이름을 떨쳤던 법률학과 3년 정병철 군이 성토연설을 하였다.
이날 비준무효화 투쟁선포대회에서 채택한 5개항의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1. 매국정권 박정희는 물러가라.
2. 한 · 일협정 비준한 국회는 해산하라.
3. 구속학생 석방하고 학원의 자유 보장하라.
4. 위수령을 즉각 해제하고 언론지유 보장하라.
5. 민족정기 되찾기 위해 우리 성균학도들은 끝까지 투쟁한다.
투쟁선포대회를 마친 후 전교생은 대성문을 활짝 열어제치고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며 명륜동과 혜회동로터리를 돌아 동숭동 대학로 앞을 통과해 종로 5가 쪽으후 진군, 시청 앞을 향하여 최루탄과 경찰봉과 맞섰으나 이들을 이기지 못하고 시위대는 분산되고 말았다. 이날 데모로 인해 오대영(정3) 이 구속되었으며 오세희(약1), 김인택(상3), 최준복{상), 최연옥{상)이 경찰에 연행되고 김원준(법2)이 부상을 입고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였고, 정병철(법3), 오성섭(중3)은 제적당했다.
1965년 8월 26일 위수령이 내려진 가운데 감행된 한·일협정 비준반대 및 무효화투쟁선언대회와 시위를 끝으로 성균관대학생들의 6·3 민족민주투쟁을 위한 시위는 막을 내리게 되었으나, 시위관련 학생들의 구속기소 및 재판, 그리고 무더기 학사징계, 또한 교수들에 대한 문교당국의 각종 압력행사로 인해 대학은 심한 후유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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