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장 서울대학교 6·3운동
1. 1964년의 한·일굴욕회담 반대투쟁
1) 최초의 한·일회담 반대시위 : 3·24시위
1963년 말 출범한 제3 공화국은 대내적으로 권력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 한편 대외적으로 미국과의 공조하에 그동안 지체되어온 한·일회담을 조속히 타결할 것을 목표로 64년에 들어서면서 발빠르게 움직였다. 한편 군정이 끝난 후 상대적으로 느슨해진 상황에서 민족주의비교연구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한 서울대 학생들은 박정희정권에 대한 항의와 반대를 은밀히 도모하였다.
1963년 겨울방학을 박정희정권 반대의지로 불태운 학생들은 1964년 들어 박정희정권이 굴욕적 한 · 일회담을 강행하려 하자 이에 정면으로 맞서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친 최초의 전면적 학생시위가 바로 3·24시위였다.
서울문리대생은 1963년 초부터 한·일회담 반대학생운동을 준비, 겨울방학 때는 거사날짜를 잡고 개학을 기다리면서 사실상 6·3 학생운동에 불을 붙이교 이를 지속시킬 수 있는 조직을 만들었다.
김중태(정치4)가 조직과 고려, 연세 등 타교와의 연락 등 중심역할을 하고 현승일(정치4)이 현장지휘, 최혜성(철학4)이 자금, 김도현(정치 4)이 선언문 등 문건 작성을 분담, 한 학년 아래인 박삼옥, 박용한, 김헌출, 전계수, 이현배 등도 각각 역할을 맡아 3월 17일을 첫번째 결행일로 잡았다가 한 번 연기해 3월 24일 드디어 햇불을올렸다.
서울대는 3월 24일 오후 1시 20분경, 3월 23일의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주최 한·일관계 강연회에 이어 ‘제국주의자 및 민족반역자 모의 화형식’을 거행했니 이케다 수상과 이완용의 허수아비를 불태우는 모의 화형식에서 학생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잔혹한 압제하에서 피 어린 항쟁을 통해서 쟁취한 해방조국의 민족자주성은 다시 제국주의적 일본 자본 아래 박살되기 한 걸음 전에 있다”는 요지의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어 전국 대학생들의 총궐기를 호소하는 ‘전국 대학생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표한 학생들은 1시 50분경 허수아비에 불을 지르며 시위에 돌입하기 시작했다.
현승일의 진두지휘하에 학생들은 1시 55분경 “사수하자 평화선”, “일본 제국주의를 쇠망치로 때려부수자’, “해군을 총동원하여 일본어선을 격침하라”, “이완용이 따로 있나 나라 팔아먹는 자가 이완용이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나섰다가 현지에 출동한 무장경관과 충돌하여 19명이 연행됐다.
문리대 데모대가 연행된 직후 법대 50여 명의 학생들이 이화동 법대 입구에서 스크럼을 짜고 3·1절 노래를 부르며 종로로 향하자 길가에 있던 서울대생들이 합세하여 효제초등학교 근처 경찰저지선 앞에 이르러서는 3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여기서 경찰저지선을 뚫고 나가려다 30분 만에 경찰기동대에 의해 일단 흩어지게 되었다.
이날 오후 2시에 서울문리대 데모에서 송진혁(정치4) 이 최초로 경찰 곤봉에 쓰러졌으며, 안삼환(독문3)은 플래카드를 들고 문리대 데모 최선봉에 섰다가 기동경찰이 휘두르는 곤봉에 머리를 맞아 부상했고, 장중웅9정치4)도 머리에 타박
상을 입는 등 최초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버스에 실려 중부서로 연행되던 서울대생 40여 명은 3시 30분경 버스가 청계천 3가 네거리에 이르렀을 때 일제히 유리창을 깨고 탈출하여 시위를 계속하였고, 오후 5시 시위대원 전원이 연행될 때까지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때 연행된 학생 중 구속영장이 신청되었던 학생은 최준(문리대3), 김명수(국문2), 최일섭(국문3), 김진(문리대1), 윤광건(문리대 3), 오신남(법대), 임충배(법대), 박정호(문리대4), 최동위문리대4), 김유홍(문리대1), 송두율(문리2), 김수남(문리대), 박삼옥(정치3), 박영조(정치3), 허두영(정치2), 이원석(사학2), 송철원(정치4), 최혜성(철학3), 김헌출{사회3), 김동호(사회 4), 허현(철학2), 이상덕(불문2), 정태호(공대1), 안재건(중문2), 김복년(물리2), 안동건(중문2), 이무용(사회학), 이진환(국), 최희조(정치2), 이주훈{문리대), 김건진(영문3) 등 이었는데, 구속된 학생은 현승일, 이영구(철학4), 김도현 등이었다.
3·24시위를 주도한 조직은 서울문리대의 비공식조직인 대일굴욕회담반대투
쟁위원회(위원장 김중태)였다. 문리대 학생회와는 다른 이 조직의 구성원은 상
당수가 민족주의비교연구회(이하 민비연)의 회원이었다.
3 .24시위를 지휘했던 현승일은 당시 민비연 회장이었고, 투쟁위원장 김중태도 민비연 회원이었다. 민비연은 황성모 교수를 지도교수로 하여 명칭 그대로 후진국의 민족주의를 비교연구하는 학술단체로서 63년 4월에 발족하였는데, 3·24시위 이후 지속적으로 당국의 주목을 받다가 65년 9월 “ 정치활동을 하는 학원 내 서클을 해체시키라”는 정부의 지시에 따라 해체된다.
한편 수원 농대에서도 반대데모가 전개되었다. 시위는 태극기를 펼쳐 들고 농대의 여학생들이 쓴 플래카드를 앞세우며 교문을 나섬으로써 시작되었다. 시위대는 농대에서 수원역까지 10여 분 걸리는 장로를 말없이 행진했다. 농대 데모대가 역전에 이르렀을 때 길가의 시민들도 지지 성원을 보냈고 수원시내 고교생들도 뒤를 따랐다.
4·19 이후 최초이자 최대의 규모였던 3·24시위에 대해 정부는 이후 재발시 단호한 대처를 방침으로 세웠고, 여당도 24일 연행된 학생은 전원 훈방하되 이후로는 의법 엄단한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3월 25일 학생시위는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부산, 대구, 전주에서 학생시위가 일어났으며, 서울에도 제2파가 몰아닥쳐 10여 개 대학이 참가한 연대시위가 계속되었다.
서울대생들은 이날도 가두에 진출하였다. 25 일 1시 20분경 연행 동지 석방을 요구하기 위하여 교문을 박차고 나온 400여 문리대생들은 전날의 구호를 외쳐가며 원남동을 지나 1시 40분경 동대문서 앞을 통과, 때마침 풀려나온 39명의 동지들을 맞아 극적인 포옹을 하였다 이들과 합세한 데모대는 의기양양하게 행진을 계속하여 시청 앞으로 향하였다.
문리대생보다 조금 늦게 질서정연한 대오로 교문을 출발한 법대생은 앞서간 벗들과 합류하기 위해 종로 5가를 거쳐 1 시 45분경 종로 4가로 진출했다. 이들은 미국 대사관 앞을 지날 때는 “미국은 한·일회담에 개입치 말라”는 구호를 외쳤고,뉴코리아호텔 앞에서는 연좌하여 “일본 재벌 물러가라”고 성토대회를 벌였다. 국회의사당 앞에 도착한 서울대 데모대는 연세대와 동국대 데모대와 함께 연좌하고, 한·일회담 즉각 중지, 김종필 씨 소환 등을 주장한 후 오후 4시경 해산했다.
한편 25일 오전 정부는 한·일회담 반대 학생시위를 수습키 위해 서울시내 36개 대학 학생대표 92명을 초청하였다. 서울대에서는 김덕룡{사회학4)과 김용환(정치학과 회장) 등 8명이 참석하였는데, 이 모임은 아무런 결론 없이 해산되었다.
학생대표들은 ① 한일회담 무조건 중지, ② 체일 대표(김종필) 소환, ③ 박대통령과의 면담, ④ 연행된 학생의 즉시 석방을 요구하고 ” 이것이 관철되지 않으면 극한 투쟁을 전개할 것이라 선언하교 우선 연행학생을 석방하는 것이 선결문제라고 주장하였으나 정부가 이에 불응하자 모두 회의장에서 퇴장해 버렸던 것이다.
26일 오후부터 문리대생 150명은 반도호텔 앞에 몰려와 “일인 상사를 철수시키라”는 구호를 외쳤으며 광화문으로 행진하던 중, 감리회관 303호실에 있는 일본상사 포스터를 찢어들고 “민족자본은 궐기해서 매판자본을 내쫓아라”는 구호 등을 외치며 중앙청까지 행진했다. 이들 데모대 중 양동안(정치과), 유홍권(사회과) 등 2명은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27일 석방되었다.
한편 농대에서도 24일에 이어 26일 다시 1천여 명이 모여 굴욕외교 반대데모를 거행하였다.
2) 박정권의 여론조작과 학원탄압 : 괴소포사건과 YTP사건
약 일주일 간 계속된 시위는 4월로 접어들면서 김종필의 귀국 등으로 수그러들었다. 그러자 곧바로 정부는 여론조작과 탄압을 시작하였다.
4월 8일 오후 4시쯤 현승일은 문리대 학생과에서 ‘학술서적’이라 쓴 소포 우편물을 받았는데, 학생주임과 직원이 보는 앞에서 뜯어보았더니, 일본의 월간잡지 「강담구락부」 5월호 한 권과 책 속에 불온문서, 편지, 미 본토불 100달러짜리 1 장이 들어 있었다. 김중태도 이완용·이케다 허수아비를 불태운 혐의로 동대문경찰서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던 중 괴소포사건이 보도된 10일 오전 특수손괴, 재물손괴, 업무빙해, 공무집행방해 등 항목으로 서울지검에 송치되었다.
이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당신의 영웅적인 투쟁을 찬양한다. 박정권 타도에 계속 힘쓰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이 괴소포는 이들에게 전달되기 며칠 전 굴욕외교 반대투위의 핵심 야당의원인 조채천 의원에게도 배달되었고, 9일에는 고대 학생회 간부에게, 11일에는 연대 학생회장에게 보내졌다. 이 사건을 처음 폭로한 현승일은 “괴소포사건이 매카시즘의 희롱이라면 수법이 너무 저열하다”고 비난했다.
이렇듯 괴소포사건으로 뒤숭숭한 상황에서 학원가에는 이상한 세력들이 금품과 향응으로 학생들을 유혹하면서 여러 서클들을 조종한다는 얘기가 나돌았는데 그것이 바로 YTP조직이었다. YTP조직을 전격적으로 폭로한 것은 당시 문리대정치과 4학년 송철원이다.
송철원은 이즈음에 자진에게 학교선배라며 “정치를 하게 될지 모르니 좀 도와달라”며 접근해 왔던 김모라는 사람이 중앙정보부원임을 알게 되자 김모와 자신의 경기고 후배들과의 관계를 알아보기 위한 개인적 동기에서 프락치 사건을 조사하던 터였다
그러던 중 어느날 중대 대학생이라며 이름을 밝히지 않은 사람으로부터 YTP문건을 건네받게 된 것이다. 이에 송철원은 문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고, 손정박(정치4), 최혜성(철학3), 이영섭 등과 ‘학원사찰조사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러
나 YTP조직이 본격적으로 폭로된 것은 송철원이 린치를 당한 후인 5월 21일 이었다.
송철원은 ‘학원사찰성토대회’를 끝으로 조사위 활동을 끝내고 5월 20일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준비하였다. 5·20장례식에서 조사를 읽은 송철원은 경기고 동창이며 서울의대 재학중인 장충동의 최무웅의 집으로 도피했으나, 최무웅의 집은 조사위 활동을 했던 곳으로 이미 정보기관에 노출되어 있었다. 21일 0시 30분 연행된 송철원은 정보부 요원들에게 “네가 뭔데 국가기관을 상대로 싸우냐”며 발길로 채이고 담뱃불에 지지는 린치를 당했다. 다음날 풀려난 송철원은 자신의 신변보호와 수배중인 김중태, 현승일, 김도현의 외곽을 돕기 위해 YTP문건을 당시 학생운동을 취재하던 『동아일보』의 김원기 기자에게 넘겨주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어 YTP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YTP (靑思會)는 4,19 직후 구국당(KKP)으로 출발하여 문명퇴치회(MTP)로 변모했던 극우청년 대학생 단체가 63년 7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어용비밀 폭력단체로 재발족하여 학원공작에 이용된 학원사찰조직이었다.
4월 17일 오전 11시 30분 문리대 교정에 모인 150여 명은 성토대회를 열어, 한·일회담을 굴욕회담으로 규정하고, 회담의 임시중단은 기만술이라고 진단하면서 김중태의 석방을 요구했다. 성 토대회가 끝난 12시 55분 교문을 나선 시위대는 “학생들의 애국적 행동을 매카시즘적 수법으로 억압하지 말고 YTP를 비롯한 사이비 학생조직은 자진해서 해체하라”, “김중태 군을 즉각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는 가운데 탑골공원, 화신 앞, 광화문을 경유해 중앙청 바리케이드에 진입했다.
2시 25분 국회의사당으로 방향을 바꾼 시위대는 의사당 앞에서 연좌농성을 하였으며, “우리의 요구를 재천명한다”는 장문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3시 30분 해산했다.
한편 사대생들도 18일 정오 150여 명이 교문 앞에 진출하여 “민족주의 간 곳 어디냐 박정권 대답하라”, “애국학생 김중태를 즉각 석방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돌입했다. 12시 40분경 종로 5가에 도착한 시위대는 오후 1시 10분경 세종로에 도착하여 400여 명의 경찰과 대치했다. 1시 45분경 데모대는 작전을 바꾸어 애국가를 부른 후 감리회관으후 몰려가 일본상사의 간판을 내려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중에 박살내었다. 이들은 이날 “못살겠다 정보정치 정보부 해체하라”, “정보부 해체하여 산업자본 만들자”, “학원자유 보장할 법적 조치 강구하라”는 등의 구호도 외쳤는데 이는 YTP사건으로 학원사찰문제가 대두된 데 대해 항의하는 성격이었다. 계속되는 학생들의 시위와 요구로 정부는 마침내 18일 오후 김중태 군을 석방하였다.
4,19혁명 4주년 기념식은 정부와 학생이 따로 진행하였다. 정부는 시민회관에서 학생회는 문리대에서(참석자 50여 명, 대부분이 학생회장 및 학생회 간부들이었다) 거행하였다.
한편 한국학생총연합회(이하 한학련) 주최의 기념식이 시청 앞에서 있었는데, 이들은 기념식이 끝난 후 데모에 돌입하여 광화문까지 진출하였고 오후에는 경찰과 충돌하여 투석전까지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학생 10여 명이 연행되었다. 또한 19일 오후 김종필을 그린 간판을 차에 달고 가두방송을 하던 현승일군을 포함한 3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4월 20일 문리대 4월혁명 기념탑 앞에서 열린 4,19 네 돌 기념식에서 학생 들은 60년 제 1선언문의 맥을 이은 제 5선언문을 통하여 ‘한·일굴욕회담의 반대 ’, ‘사회구조의 민족적 재편성’, ‘대학의 완전한 자유화와 이의 제도화’ 등을 요구하였다. 선언문은 한·일회담 문제에 대하여 “정치·경제·문화의 제 영역에 있어서 일본의 모든 침투를 소화할 수 있는 민족적 자립의 토대를 완전 구축하고 민족적 주체성을 유지하면서 평등한 입장에서 재출발되어야 한다”고 하는 한편, 오늘의 빈곤과 혼란에 대한 궁극적 대안은 “민주주의적인 민족적 자립임을 재확인하면서 정치·경제·문화의 모든 사회구조의 민족적 재편성”이라고 지적하였다.
20일 2시 문리대 학생회는 4,19기념탑 앞에서 4,19기념식 후 약 300여 명이 “4 ,19의 붉은 피는 매국정권 증오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에 돌입했다. 이화동, 종로 5가를 통과한 시위대가 4가에서 무장한 경찰대와 충돌하는 동안 시민 20여 명이 합세했고, 경찰대는 문리대 김문원 외 30명과 민간인 6명을 연행했다.
이때 성대 데모대가 “한·일회담 찬반을 국민투표에 붙여라”는 구호를 외치며 동숭동을 지나면서 후퇴하던 문리대생 100여 명과 합세하였다.
한편 20일 문리대생 데모에 참가하였다가 주모자로 동대문서에 연행되어, 21일 오전 1시 30분 서울교도소에 구속 수감된 문리대 김문원(정치4) 군에 대해 제 1변호사협회의 김동진, 김종빈 두 변호사가 무료 변호에 나섬으로써 굴욕회담반대투쟁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하였다.
4,19기념식을 전후하여 재개되었던 시위는 4월 말로 접어들면서 일시 수그러들었다. 이 시기에 학생들은 향후 투쟁의 성격과 방법을 둘러싸고 집중적인 토론을 전개하였다. 5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학생들은 조직을 정비하여 재차 투쟁으로 돌입했다.
3) 정일권 ‘돌격내각’으| 발족과 5 .20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64년 5월 11일 정일권 내각이 발족했다. 정일권 내각의 제 1과제는 한·일회담의 강력추진이었다. 정일권 총리는 취임연설에서 한·일회담 성사에 “ 1년의 유예기간이 필요하다”고 말해 한·일회담 조기타결의 ‘시한성’까지 부여했다. 최두선 내각 때 김종필 당의장 및 공화당 불신을 내세워 대일접근 방침에서 멀어지려 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이제 모든 것이 김종필 체제”라고 평가받는 정일권내각을 출범시킨 것은 한·일회담의 강력한 추진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목표가 이렇듯 확실하게 되자 정일권 ‘돌격내각’이 굴욕적 한·일회담반대운동에 대해 취할 태도 또한 분명한 것이었다.
64년 5월은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시위와 이를 저지하는 박정희정권과의 대립이 전면화되어가는 시기였으며, 박정권의 폭력적이며 비상적 대책인 6·3 계엄령의 선포로 가는 길목이었던 것이다.
64년 5월 19일 ‘한·일굴욕외교 반대투쟁 전국학생연합회’(회장 김중태)는 미 8군사령관에게 “한국 경찰에 대한 최루탄 공급을 즉시 중지하라”고 요청했고, 성명서를 통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 8군이 한국 민족의 이익에 배치되는 외교협상 반대투쟁을 저지하고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최루탄을 공급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20일, 예정대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가 서울문리대 교정에서 약 3천 명의 학생과 1천여 명의 시민 침여로 거행되었다.
5·20장례식은 5월 초부터 준비되었다. 5월 어느날 현승일은 민비연 사무실을 찾아온 동국대 박동인과 함께 한·일회담 반대데모의 서울대·동국대 연합전선 구축을 합의하고, 김중태 등과 함께 제대교우회 사무실에서 몇 차례의 회합을 가졌다. 처음엔 장례식 날짜를 박정희의 쿠데타일인 5·16으로 잡았으나 시간이 촉박하여 5·20으로 재확정하고, 각 학교 대표자들도 선정했다. 5월 16일 저녁 서울대, 동국대, 성균관대, 건국대, 경희대 등 5개 학교 투위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 준비를 최종 점검하였는데, 여기서 김중태는 각 학교별 동원상태 점검, 송철원은 민생고 및 학원사찰 성토문 작성, 최혜성은 자금조달과 유인물 인쇄, 김용술은 모의 관, 두건, 죽장 구입담당 등으로 역할분담이 이루어졌다.
5월 20일 오후 1시 대회장에는 ‘축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 쓴 만장이 펄럭이는 가운데, 건을 쓰고 죽장을 든 네 명의 학생이 관을 메고 입장했다. 오후 2시 대회장인 장장순(동국대)이 정세연이 작성한 대회사를 읽고, 김도현, 김정남이 초안한 선언문을 박동인(동국대)이 낭독했다.
선언문
민족사는 바야흐로 위대한 결단을 요구하는 전환기에 섰다. 이제 우리는 ‘빈곤과 부자유 그리고 외세의존’의 참담한 현실을 전진적으로 변혁시키려는 민족적 양t심의 깃발을 올린다. 5월 군부쿠데타는 4월의 민족 민주 이념에 대한 전면적인도전이었으며, 노골적인 대중탄압의 시작이었다. 경제적 민족자립을 외치는 정부는 노동자·농민의 소비대중에 실업, 기아임금, 살인적 물가고를 선물하면서, 매판적 반민족자본의 비만을 후원하였다. 우리는 전 민족의 양심이 이러한 반역적범죄행위를 묵과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민족적 긍지를 배반하고 일본예속화를 촉진하는 굴욕적 한·일회담의 즉시 중단을 엄숙히 요구한다. 우리의 지성과 양심은 민족 이익에 역행하는 어떠한 기만과 왜곡된 논리에도 증오와 거부를 계속 할 것임을 선언한다.
이러한 선언은 6·3 운동의 기본성격인 반외세, 반독재, 반매판 민족적 민주주의가 최초로 집약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선언문 낭독에 이어서 민승(건국대)이 결의문을 낭독하고, 이어 송철원이 김지하가 작성한 조사를 옮었다.
시체여! 너는 오래 전에 이미 죽었다. 죽어서 썩어가고 있었다. 넋없는 시체여! 반민족적 비민주적 민족적 민주주의여!
썩고 있던 네 주검의 악취는 ‘사쿠라’의 향기가 되어 마침내는 우리들 학원의 잔잔한 후각이 가꾸고 사랑하는 늘 푸른 수풀 속에 너와 일본의 2대 잡종 이른바 ‘사쿠라’를 심어놓았다. 생전에도 죄가 많아 욕만 먹던 시체여! 지금도 풍겨온다. (중략)
시체여! 죽어서까지도 개악과 조어와 번의와 난동과 불안과 탄압의 명수요, 천재요, 거장이었다. 너 시체여 ! 너는 그리히여 일대의 천재(殘才)요 희대의 졸작이었다. 구악을 신악으로 개악하여 세대를 교체하고, 골백번의 번의의 번의를 번의하여 권태 감의 흥분으로 국민정서를 배신하고, 부정불하, 부정축재, 매판자본 육성으로 ‘삐쩡꼬’에 ‘새나라’에 최루탄 등등 주로 생활필수품만 수입하여 노동자의 언덕으로 알았던 ‘워커힐’에 퇴폐를 증산히여 민족정기를 바로잡아 국민의식을 고취하여 경제를 재건한 철두철미 위대한 시체여! 해괴할손 민족적 민주주의여! (중략)
절망과 기아로부터 해방자로 자처하는 소위 혁명정부가 전면적인 절망과 영원한 기아 속으로 민족을 함멸시키기에 이르도록 한 너의 본질은 과연 무엇이었느냐? 길고 긴 독재의 채찍을 휘두르다가 오히려 자신의 치명적인 상처를 스스로 때리고 넘어진 너. (중략)
안개 속에서 살다가 안개 속에서 죽은 우유부단과 정체불명과 조삼모사와 동서남북의 상징이요 혼합물질이었다. 한없는 망설임과 번의, 종잡을 길 없는 막연한 정치이념, 끝없는 혼란과 무질서와 굴욕적인 사대 근성, 방향감각과 주체의식과 지도력의 상실, 이것이 곧 너의 전부다. (중략)
시체여! 우리 3천만이 모두 너의 주검 위에 지금 수의를 덮어주고 있다. (중략) 백의민족이 너에게 내리는 마지막의 이 새하얀 수의를 감고 홀홀히 떠나가거라. 너의 고향 그곳으로 돌아가거라, 안개 속으로 가거라! 시체여! (후략)
장장순이 폐회를 선언하자 함성과 함께 ‘축!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라고 쓴 조기와 민족적 민주주의 시체가 든 검은 관을 8명이 들고 앞장섬으로써 시위가 시작되었다. 시청 앞에서 관을 태우기 위해 교문을 나선 2천여 시위학생들은 이화동 삼거리에서 경찰과 충돌, 약 5시간 동안 최루탄 발새 연행, 투석 등의 사태가 벌어진 후 오후 7시 40분경 해산했다.
이날 서울시내 모든 경찰은 일반 업무를 중단하고 연쇄적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시위에 비상대기하였다. 경찰은 5월 20일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시위 충돌과정에서 188명을 연행하였으며, 그중 107명에게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과 특수공무집행빙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며, 21일 새벽 장례식 시위를 주동한 것으로 알려진 송철원을 연행하고 서울문리대 4년 김중태, 현승일 등 13 명을 지명수배하였다.
20일 데모관련 구속자는 총 13 명인데 조승현, 김세열, 김형주, 윤희섭, 이상준, 임동원, 정중용, 김창신, 이종관, 전익호, 이광열 등 학생이 11 명이고, 시민 2명이었다
한편 이날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미대로 난입때 최루탄을 투척하고 이를 말리던 미대 김세중 교수를 구타한 사건이 발생했다. 20일 오후 4시 30분경 데모학생들은 경찰에 밀려 미대 캠퍼스로 몰려들었다. 이때 2학년 조소과 교실에서는 30여 명의 학생들이 교내전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학생을 뒤쫓던 곤봉을 든 기동경찰 4명이 교실에 들이닥쳤다. 이때 문을 열려고 하는 경찰에게 이해범(조소2)은 “작업중이니 들어오지 말라”고 항의했다. 옥신각신 끝에 교실에 들어온 경찰은 “여학생은 제외하고 남학생은 전부 나오라”고 말했다.
경찰에 밀려 밖으로 나온 남학생 9명은 경찰의 발길과 몽퉁이로 강제로 꿇어 앉혀졌다. 10여 분 동안 사복경찰들이 꿇어앉은 학생들의 사진을 찍으며 호통을 칠 때, 지도를 담당한 송상수 강사가 현장을 보고 “공부하는 학생을 왜 잡아가느냐”고 항의하자 경찰은 송 강사에게도 폭행을 했다.
경과를 듣고 박갑성 학장, 김세중 교무과장, 김종영 교수 등이 달려왔다. 학장이 항의하며 꿇어앉은 학생들을 일으키려 하자 경찰은 이를 저지하면서 “훈장질을 하려면 똑똑히 하라”는 등의 폭언을 하고 학장을 밀어젖히고 김세중 교수의 팔을 비틀어 끌고 갔다.
학생들은 경찰차에 실려 동대문서에 연행되어 1시간 동안 조사를 받고 밤 9시에 “불법적인 데모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절대 참가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나왔다.
박정희정권의 강압통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5월 23 일 오전 11시 서울법대생 300여 명은 ‘법의 존엄수호’ 궐기대회를 갖고 “국민의 공복인 경찰이 학원에 난입하고 무장군인이 사법부에 침입하는 행위는 우리나라 민주기본질서인 헌법을 뒤덮으려는 극악무도한 반민족적 반국가적 반역행위임을 단언한다”는 메시지를 채택했다.
5월 25일에는 전국 31개 대학생대표들이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는 3·24시위를 주동한 ‘한·일굴욕회담반대투위’와 5·20장례식을 주도한 ‘대일굴욕외교반대학생총연합회’가 김중태와 현승일 등의 지명수배로 사실상 마비된 상태에서 경찰의 미대 난입과 송철원의 린치, 무장군인의 법원 난입 등 박정권의 강경대응이 계속되자, 서울시내 대학 총학생회장댄한학련)이 ‘난국타개전국학생대책위’를 결성히여 준비된 것이었다.
이때부터 학생들의 공식대표기구로서 학생회가 데모의 전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한·일회담 반대데모에 대한 학생들 간의 의견차이를 조율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온 학생회는 일면 서울대학교 각 단과대학별로 의견통합에 주력하는한편, 한국학생연합회(한학련)에서 전국 학생회장들간의 행동통일을 위해 논의를계속해왔다.
서울대에서는 정정길이 침여한 한학련은 종로 2가의 한국청년단 빌딩과 여왕봉다방 등에서 4월경부터 거의 매일같이 회합을 가졌으나 공식기구의 성격상 모임이 쉽게 공개되어 정부보안기관의 끊임없는 방해공작에 쉽게 의견통합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러나 5월 20일 데모 후에 취한 정부의 여러 가지 악수들 때문에 학생들 간에 강경론이 우세해지고 여론이 비등하게 되면서 한학련의 주도적 의견도 강경해지기 시작했다.
5월 23 일 법대 데모가 있은 후인 오후 5시경에 한학련은 5월 25일의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를 의결하였다.
서울대는 정정길(법대 학생회장 겸 총학생회 본부회의 의장. 대외적으로 총학생회 대표)과 김덕룡(문리대 학생회장 겸 총학생회 운영위원장. 교내행사에서 총학생회 대표)의 사전준비에 따라 총학생회의 주도하에 행동을 같이 할 수 있는 동숭동 캠퍼스 내의 문리대, 법대, 약대, 미대 등이 중심이 되어 5월 25일 12시 20분경, 4,19기념탑 앞에서 500여 명이 모여 대회가 시작되었다. 정정길이 그동안 한학련의 논의사항과 앞으로의 행동에 대한 보고를 곁들인 개회사를 한 후에, 김덕룡의 한학련에서 합의한 선언문 낭독, 이양희(법대 신임 학생회장)의 구국비상결의문 낭독과 채택으로 이어졌다.
가두시위는 폐회선언 후 굴욕투위 학생인 박영호(외교4), 조영주(정치3) 등이 “지성이여 단결하라, 양심은 반항한다, 일주일 유예는 참을 수 없다”고 외치면서 시작되었다. 대회가 4,19탑 앞에서 개최된 것은 운동장에서 열 경우 가두시위로 이어질 염려 때문이었지만 결국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12시 55분쯤 학생 200여 명이 ‘배고파 못살겠다. 악질재벌 잡아먹자’, ‘구속학생 즉시 석방하라’, ‘학원의 자유를 사수하자는 플래카드를 들고 교문을 나서 종로 5가에 이르렀다.
학생들은 경찰의 저지선에 걸려 연좌했지만 미대 앞쪽에서 대기중인 경찰과 종로 5가에서 저지하던 경찰에 포위되어 전원 연행되었다. 미대생 150여 명도 이날 오후 2시경 ‘학원난입경찰관 규탄대회’를 열고 시위에 들어갔으나, 경찰에 포위되어 50여 명이 연행되었다. 5·25 ‘구국학생총궐기대회’로 학생 총 132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는데 이중 8명이 구속되었다. 서울대 구속자는 조영주(정치3), 김병석(생물2), 강광남(화학2), 박지동(정치3), 이방원(외교4), 장영호(사회4), 정학
철(법대1) 등이다.
한편 정부의 강경태도는 계속되어 급기야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의 학생시위를 ‘사회주의 찬동자’에 의해 조종된 것으로까지 몰고 갔다. 26일 오전 내무장관은 "5·20데모는 반국가적 요소가 내포되어 있고 그 배후에 일반 정치인과 혁신계 정치인들이 관련되어 있으며, 민비연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있음이 경찰의 조사결과 밝혀졌다”고 말하고 “민비연도 전 민통련의 후신이다”고 하였다.
또한 20일의 “민주주의 장례식도 일부 혁신계 정치인들이 제공한 자금으로 거행되었으며, 경찰은 돈을 댄 전 혁신계 인사에 대한 입건조사를 하고 있는 중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경찰은 주동자로 알려진 학생 5명의 집에서 가택수사를 한 결과, 민통련 규약, 신진회 회칙이 발견되었으며,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이 나와 이를 압수했다고 말하고 이런 사태로 미루어 민통련과 관련을 가진 사회주의 찬동자로 규정했다고 밝혔다.
이에 민비연은 내무부장관의 발언에 반박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① 민비연은 연구히는 단체이며, 어느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단체도 아니다.
② 회원 일부가 데모의 주동 혹은 참가했다면 그것은 개별적 행동일 뿐 본회의 대표거나 전체적 의사일 수 없다.
③ 본회의 취지와는 다른 반국시적 사상을 가진 회원이 있다면 언제나 단호히 제명하겠다.
④ 내무부의 발언은 본회를 매장하려는 1957년의 매카시의 재판이다.
조봉개(사회4)는 “아카데믹한 연구단체를 말살하려는 태도는 민족의 역사창조의 진로를 암담케 하는 것이며, 오히려 비밀조직 YTP를 발본색원함이 내무의 책임이 아닐까 한다”고 지적했다.
27일에는 긴급 교수총회가 열려 “정부는 난국수습에 있어서 그 책임을 전가하거나 실력행사만을 능사로 삼지 말고,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시책을 단행하라”고 요구했다. 이날 1시부터 문리대 강당에 모인 서울대 전체교수협의회(회장 이하윤 교수)는 200여 교수들이 모여 다섯 시간 동안 논의한 끝에 아래와 같은 6개 항목의 시국수습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결의문
우리 서울대학교 500여 교수 일동은 현하의 국가적 위기를 깊이 우려하고 시급히 학원의 평정을 회복함으로써 교수로서의 본연의 사명에 충실키 위해 다음과같이 결의한다.
1. 정부는 금번 사태에 대해 그 책임을 전가하거나 실력행사만을 능사로 할 것이 아니라 사태혼란의 근본 원인을 직시하고, 모든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과감하고 발본적인 시책을 단행하라.
2. 군은 정치에 대해 엄정 중립을 지켜야 할 것이며, 그 본연의 사명인 국토방위에 전념하라. 학생은 그 행동이 미치는 정치적·사회적 영향을 고려하여 조국을 건지기 위한 최후의 순간을 제외하고는 본분인 학업에 전심하라.
3. 정부는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고 학원 내 사찰을 즉각 중지키 위한 결단을 보여라. 5월 20월 미대에 경찰관이 침입, 수업중인 학생은 물론 교수에게 대해서까지 폭행을 자행한 사실은 비단 서울대학교뿐만 아니라 실로 학원의 존엄성과 교권 그 자체가 유린된 것으로 전국 학원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므로 국무총리와 관계 장관의 공개사과와 앞으로 이러한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공표하라.
4. 현 시국 타개의 시점에서 구속된 학생은 전원 석방하라.
5. 학원자치에 위배되는 현행 교육법을 개정하여 총 · 학장 임명제를 즉시 시정하라.
6. 정부는 교수 본래의 사명인 연구는커녕 생활고에조차 허덕여야 하는 현재의 국립대학 교수들의 정상을 중시, 우리들로 히여금 교수의 사명을 다하도록 조치하라.
한학련은 5월 29일 오전 11시 서울시내 대학생대표 28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법대 구내다방에서 회합을 갖고, “25 일 대회에서 채택한 요구사항이 30일 자정까지 관철되지 않을 때 실력행사에 돌입할 것”이라는 대정부 통고문을 채택하였고, 이튿날에는 정정길(서울대), 구자신(고대), 안성혁(연대), 김실(동국대), 이건환(경희대) 등 총학생회장을 중심으로 한 한학련 대책위대표 6명이 정일권 국무총리를 방문해서 대화했다. 그러나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정부의 강경대응 의사만을 확인하였다.
30일 오후 1시 30분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는 독자적으로 ‘자유쟁취 궐기대회’ 를 열었다. 김덕룡 학생회장의 선언문 낭독으로 고조된 이날 집회는 29일에 있었던 김중태, 현승일의 무기정학 처분을 성토하고, 경찰의 학원침입과 교수구타를 비롯한 정부의 반민주적 처사를 규탄한 뒤, 단식집단농성에 돌입했다. 이날의 시위는 단식농성으로 이어지면서 5월 25 일 궐기대회 이후 점차 식어가고 있던 반대운동의 열기를 치솟게 한 계기임과 동시에 학생회가 이전의 학생운동의 주도세력이었던 ‘대일굴욕회담반대투쟁위원회’ 등의 비공식 조직원들과 손을 잡게 되는 계기도하였다.
4) 최초의 단식농성에서 6.3시위까지
오후 3시부터 시작된 단식농성은 우리나라 학생운동사상 최초로 채택된 새로운 투쟁형태였다. 단식농성은 5·20장례식 직후 김영일(현재 김지하)이 생각한 것이었다. 5·20장례식 조사를 쓴 김영일은 당국에서 주모급으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새로운 지도부가 될 수 있었다. 학생회 주최의 ‘자유쟁취궐기대회’가 단식농성으로 연결된 것도 김영일이 손정박과 함께 김덕룡을 만나 공조문제를 구체화시켰기 때문이었다.
5월 31일 단식 24시간 돌파기념으로 ‘반민주요소 소각식’이 거행되고, 이날 밤에는 김지하가 지은 풍자극 「위대한 독재자」가 공연되었다. 6월 1일 오전 11시에는 ‘국민총궐기호소대회 및 학원침입 민생고책임자 화장식’이 김지하의 사회와 김덕룡의 호소문 낭독으로 거행되었다.
처음 20여 명으로 시작한 단식학생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과 여학생들, 상대와 의대, ROTC까지 합류하면서 6월 2일에는 200여 명으로 늘었다. 단식장의 상황은 교내방송뿐만 아니라 동아방송의 「앵무새」 프로 등 대중전파 및 일간지를 통해서 매일 보도되고 있었다.
단식의 여파가 확산되면서 고려대에서는 최초로 “박정권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했으며, 서울상대 400여 명은 ‘매판세력 성토대회’를 가졌다. 또한 2일 오후에는 서울문리대 교수 30여 명이, “학생들이 굶고 쓰러져 있는 모습을 더이상 앉아 볼 수만은 없다”, “학생들의 주장은 관철되어야 한다” 는 등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법대생 500여 명이 중심이 되고 문리대 미대생들이 일부 가세한 총 700여 명은 총학생회 주도하에 2일 오전 11시 45분 문리대 교정에서 ‘자유쟁취 총궐기대회’를 갖고 원남동을 거쳐 종로 4가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이날 상대생 400명도 매판세력 성토대회를 갖고 데모대에 합류-하였다. 법대는 그동안 배후에 있던 운동권의 심재택, 이태일, 이헌재, 정성철 등이 가세하고 이돈(총학생회 특별부장), 그리고 법대 산악반의 리더들인 조해녕(산악반장), 김정룡, 오낙준, 김병만 등이
정정길과 더불어 전면에 나서 데모대를 이끌었다.
이날 시위에서는 200여 명이 무더기로 연행되어 곳곳의 경찰서에 분리 수용되었다가 정정길, 이돈, 조해녕, 김정룡, 오낙준, 김병만 등만 남고 전원 풀려나서 법대 강의실에서 단식농성에 돌입하였다. 동대문서를 방문한 정부대표 윤천주 문교장관과 홍성철 문교차관은 12시부터 1시 30분까지 이들의 설득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전체 학생들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판단하에 전원 석방하였다. 풀려난 이들은 밤 2시 30분경에 전원 법대 단식농성에 가담하여 6·3 데모시에 법대데모를 이끌었다.
단식의 열기가 한참 고조되던 6월 2일 저녁, 수배중이던 김중태가 단식장에 출현함으로써 농성은 절정을 향하고 있었다. 김중태는 현승일, 김도현과 함께 5·20시위로 수배중이었는데, 현승일과 김도현은 각각 5월 30일과 6월 1일에 경
찰에 자진출두하였고, 김중태에 대해서는 정보기관에 의한 타살설 등 소문이 무성하였다. 김중태는 이러한 소문이 학생들을 불필요하불필요하게 자극해 과격행동을 하게 함으로써 정부에게 탄압의 빌미를 주어서는 안된다는 현승일 등 학생지도부의 판단에 따라 6월 3 일 오전 단식현장에서 선동연설을 한 후 동대문경찰서로 자진출두했다.
6월 3일 오전, 시위는 전면적으로 확대되었고 구호도 “박정권 하야”로 모아졌다. 시위는 최고 1만여 명에 이를 정도로 급속하게 고양되었다. 서울대 문리대생이 단식투쟁에 돌입한지 5 일째인 이날 서울에서는 18개 대학 1만여 명이 시위를 벌이다 경찰과 충돌하여 쌍방이 많은 부상자를 냈다.
오전 10시 30분 의대생 200명이 시청 앞에서 데모한 것을 비롯해, 농대, 상대, 사대, 음대, 약대 등 약 2천 명의 학생이 “구속학생 석방하라”는 구호와 그밖에 각양각색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누볐다.
약대생 300명은 오전 10시 교내에서 성토대회를 갖고 교문을 진출하다가 250명이 연행되었고, 치대생 300명도 교문을 나서 국회의사당 앞에서 비상구국선언문을 낭독한 후 연좌하다 오전 11시 20분 무술경관에 의해 트럭에 실려 강제 해산되었다. 사대생 400명도 성토대회를 갖고 구호를 외치며 신설동 쪽으후 진출했으며 의대생 200여 명도 교문 밖으로 진출하였다.
농대는 수원을 출발, 총 170리를 도보 행군하여 서울시위대에 합류했다. 농대의 도보 행군은 6월 2일 학생회와 자치회, 서클, 동창회 대표들이 오랜 토론 끝에 합의하여 결정한 것이었다. 아침 6시에 발대식을 가진 서울 농대는 7시에 여
학생들이 받쳐든 대형 태극기를 선두로 행군을 시작했다. 농대의 행군은 식당주방을 가동시켜 만든 도시락을 먹어가면서 12시간여 계속되었다. 농대생 거의 전부가 동참한 이날의 행군 대열 중 먼저 도착한 150여 명이 중앙청에 당도했을 때는 오후 6시 55 분이었다. 이 대장정 동안 신영무{농대학생회장)가 이끈 데모대는 경찰의 저지에 막혀 국도를 버리고 산등성이를 타는 등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 중앙청에 도착하여 데모대의 환호를 받았다.
단식 100시간을 돌파하던 3일 오후 4시 50분 문리대생 400여 명은 단식을 그치고 학생회장 김덕룡을 선두로 가두시위를 시작하였다. 문리대 시위대가 교문을 나와 종로 5 가로 향했을 때, 법대생 200여 명이 합세하여 화신백화점과 을지로 입구, 시청 앞을 거쳐 중앙청으로 향해 오후 5시 55분경 세종로에 도착했다. 세종로는 이미 1만여 시위대에 의해 돌파되어 있었다.
고려대, 연세대, 성균관대 등의 시위대는 “박정권 타도”를 외치며 비 내리는 서울거리를 누비고 저지하는 경찰대와 충돌하면서 최루탄이 부족한 경찰저지션을 뚫고 집단 또는 산발적으로 국회의사당 앞에 모였다. 이 숫자는 약 3천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이 다시 청와대 쪽을 향해 파도처럼 밀려가다가 세종로의 시민회관과 유솜건물 앞의 경찰 l 차 방어선에 이르렀을 때, 학생과 시민 약 1만여 명이 모여 있었다. 오후 3시 10분 학생들이 철조망 1개를 50미터 가량 끌어내고 투석을 하자 경찰은 최루탄 발사를 위해 공수부대의 풍차까지 동원하여 극력 저지하였다. 이때부터 시위저지 임무가 경찰에서 수도경비사령부로 넘어갔다. 학생들은 또다시 제2저지선(경기도청), 제3저지선(중앙청 정문 앞)을 연달아 돌파했다.
청와대로 들어가는 길목인 제 4저지선(조달청 앞) 뒤에는 겹겹이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이때 학생들 사이에는 박정희정권이 모종의 강경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설이 무성했다. 이 무렵 학생회에서 내는 유일한 신문인 『새세대 』 사무실에서는 현장상황을 토대로 한 계엄선포시의 회군문제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이 내용은 즉시 현장에 알려졌다. 7시 50분쯤 서울 농대 2진이 중앙청 앞에 도착하자 학생들이 기세는 더욱 거세졌다. 그러나 시위대가 수경사 군인대열의 강력한
저지로 더이상 진출하지 못한 상태에서 농대의 선언문과 결의문 낭독이 끝나고 구호와 노래가 이어지는 순간 최루탄이 마구 뿌려지기 시작했다 대열은 흩어지고 있었다 . 이날 서울대 연행자는 422명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날 밤 9시 40분, 1시간 40분을 소급한 오후 8시를 기해 서울특별시 일원에 걸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사령관에 육군참모총장 민기식 대장을 임명했다. 이로써 2개월 여에 걸쳐 격렬하게 전개된 굴욕외교 반대시위는 일단중단되었다.
6월 7일 시국수습을 위해 서울대는 새 총장에 신태환 씨를 임명했다 신임총장은 6월 25일 오후 대학신문과의 회견에서 “대학의 임무는 지성의 방향을 제시하는 데 있다”고 소신을 피력하고 또한 “지나친 사회침여는 안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고 이해하는 건전한 태도는 필요하다”고 함으로써 학생시위의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발언을 하였다.
6·3시위의 사후조치로서 대학 당국은 문교부의 지시에 따라 학생 18명을 무기 정학에 처하고, 1명을 유기정학에 처하였다.
정학 처분된 학생들은 다음과 같다..
• 무기정학 : 김도현(정치 4), 이현배(사회 2), 김영일(미학4), 김덕룡{사4), 이수용{정치3), 최희조(정치2), 김용술(정치4), 이준열(정치4), 김용구{정치3), 박지홍(정치3), 정지식(사회4), 이영훈{사회사업1 ), 이명원(외교4),
사대에서는 현세일(사교2), 조응현(사교1), 윤희성(사교1), 임정인(사교2),
농대에서는 전영사(농생4)
• 유기정학 : 상대 이종태(경3)
또한 6월 20일자로 계엄 당국의 지명수배를 받은 17명의 학생은 다음과 같다.
• 문리대 : 송철원(정치4), 최혜성(철학3), 이원재(사회4), 박삼옥{정치3), 이현배(사학2), 김덕룡{사회4), 손정박(정치4), 이문승(정치 4), 조봉개(사회 4), 김병석(식물2), 김정남t정치4)
• 법대 : 정정길(행정 4), 김병맨행정 2), 조해녕(행정꺼, 김정용{행정 4), 오낙준(법학4)
• 사대 : 김각t일반사회 2)
계엄령하인 8월 3일 문교부는 총학장회의에서 학생회장을 간선제로 하고, 중간시험 재실시를 지시했다. 8월 17일, 74일 만에 학교가 개교되었다 . 한편 문리대는 8월 22일과 25일에는 6·3 이후 무기정학되었던 학생 중 13명의 처벌을 취소하였다.
9월에는 학생회 주관 ‘구속학생석방추진위원회’에서 구속학생 석방서명운동을
전개했다.
9월 28일에서 30일까지 3일 간 1,200명이 서명하였고, 이것은 10월 5일 박정희 대통령에게 발송되었다. 박대통령의 9·15특사로 정정길, 김덕룡, 이돈 등 서울대 총학생회 간부들은 모두 풀려나고 이때까지 구속중인 서울대 학생은 김도현(정치4), 김정강t정치3), 김중태(정치, 4), 현승일(정치4), 김정남t정치4), 서정복(철학4) 등이었다 . 10월 16일 서정복과 오병철은 석방되었다.
10월 26일 문리대학생회는 학생총회를 열어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하고,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채택했다. 이에 대해 박 치안국장은 “법이 시비를 결정할 문제”라며 “학생들의 행위는 국내법 질서를 교란하는 것”이라며 의법처단할 방침이라고 응수하였다.
10월 28일 김중태, 김도현, 현승일이 구속 140여 일 만에 풀려났다. 이로써 6.3 관련 서울대 구속자는 모두 석방되었고, 1964년의 굴욕외교 반대투쟁도 마무리되었다.
2. 1965년의 한 · 일협정 반대투쟁
1) 4.10시위로 출발한 4월투쟁
6·3 계엄령 발동 후 긴 겨울을 보낸 대학가는 1965년 4월 들어 다시 본격적으로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나섰다. 1964년의 한·일회담 반대투쟁이 서울문리대 중심이라면 1965년의 한·일협정 반대투쟁은 서울법대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64년의 투쟁으로 문리대는 주도세력의 운신의 폭이 제한되는 등 투쟁을 본격적으로 재전개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한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6·3 계엄령으로 학원가를 잠재운 박정권은 1965년 2월 20일 한·일기본조약을 가조인하고 4월 3일에는 청구권과 어업문제, 교포의 법적 지위 등 3개 현안협정을 가조인하였다. 이에 서울법대가 4월 10일 서울지역에서는 처음으로 가두시위를 벌였다.
4·10시위는 정성철(법4), 박세원(행4), 정해주(행3), 김길환(행2), 강창웅{행 2) 등을 중심으로 준비되었다. 4월 10일 오전 9시 20분, 법대학생 약 500여 명(당시 법대 총인원은 700여 명)은 ‘매국외교 반대 성토대회’를 개최했다. 정해주의 사
회로 시작된 성토대회는 “우리의 생명선인 평화선 철폐를 반대하며, 정부는 한·일협정 가조인을 즉시 파기하고 국민의 의견발표를 억압하지 말라”는 요지의 선언문을 강창웅이 낭독한 데 이어, 정성철의 선동연설, 그리고 박세원이 낭독한 7개항의 결의문 채택으로 이어졌다.
결의문의 내용, ⓘ 미국이 한·일회담에 너무 갚이 관여하고 있음을 주시하며, 이 이상 관여하지 말 것, ② 국민의 권익을 무시하고 현 정부가 일본과 합의한 가조인을 정부는 즉각 무효화할 것, ③ 평화적인 시위를 하려던 우리의 학우를 구속에서 석방할 것, ④ 정부는 순수한 학생운동을 비겁한 수단으로 억압치말것 등이었다.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하고 10시부터 교문을 나와 시위에 들어간 학생들은 ‘사수하자 평화선’, ‘왜 하나 매국외교’ 등의 플래카드를 앞세워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고 종로 5가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시위대가 종로 4가 쪽으혹 “평화선을 사수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계속 행진하려 할 때, 동대문서장의 진두지휘하에 출동한 경찰이 종로 4가 네거리를 막았다. 시위대는 그대로 강행하여 10시 25분 탑골공원 앞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탑골공원 앞에는 곤봉으로 무장한 200여 명의 기동경찰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어 시위대는 더이상 나아가지 못 하고 연좌데모에 들어갔다.
경찰은 정성철을 비롯한 주동급 3명을 연행하는 것을 신호로 학생들을 포위하여 데모 시작 40여 분이 지난 10시 40분 시위법대생 170명 전원을 연행하였다. 이중 13 명은 불구속입건, 39명은 즉심, 그리고 4·10주동자인 정성철, 박세원, 강창웅, 김길환, 그리고 보름 후에 검거된 정해주 등 5 명은 모두가 구속되었다.
1965년 서울대학교에서의 첫 데모이자 서울지역에서의 첫 가두시위였던 4·10시위에 대한 이러한 강경진압은 이후 지속적으로 전개될 학생시위에 대한 박정희정권의 강경일변도의 태도를 예시하는 것이었다.
4·10시위를 벌인 법대생 400여 명은 12일 학생총회를 열고 학생총의로써 4·10시위의 정당성을 재확인하는 한편 구속된 학우들과의 공동운명을 약속하는자퇴서날인을했다.
4월 13일 시위는 전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고려대와 동국대의 수천 명 시위대가 거리로 나섰고 연세대, 경희대, 성균관대도 교문을 박차고 나와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바로 이 4·13시위에서 동국대 김중배는 경찰봉에 맞고 이틀 후에 사망하였다.
4월 15일 정오 법대생 300여 명은 도서관 앞에서 다시 학생총회를 열어 4·10시위의 정당성을 재확인하고, ‘가조인 철회’를 주장하였다. 학생들은 “36년 간의 피의 대가로서 겨우 3 달러를 받아내는 굴욕외교를 왜 하는가”라고 성토한 후, 이들 중 100여 명이 가조인 철회 등 매국외교를 규탄하는 5일 간의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이날 서울법대 구국투쟁위원회 명의로 3개항의 행동지침을 발표했다.
행동지침
① 우리의 투쟁은 2단계로 나누어질 것이다. 첫째, 가조인의 철회를 목표로 한다. 둘째, 본 조인비준의 저지를 목표로 한다.
② 제 1 차 투쟁의 목표는 가조인 철회와 우리의 목표를 수락할 것을 정부에 요구하며 오늘부터 5일 간 단식을 결행한다.
③ 우리는 이 단식으로써 전국민에게 우리의 신념을 천명하고 전국학생에게 하나의 행동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일대 호응이 있기를 기대한다.
이에 서울법대 당국은 15일 밤 11시 긴급교수회의를 열고 16일부터 7일 간 휴강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학생들의 데모로 흔란이 일어날 것을 막기 위해 ‘긴급교수회의’를 거쳐 유기천 학장의 직권으로 취해진 조처였다 단식 이틀째인 4월 16일 법대생들은 다음과 같은 제2선언문과 대정부 결의문을 발표했다.
제 2선언문
우리들 청년학도의 가슴에는 국가와 민족의 위기를 당하여 조국의 참다운 자주독립과 민족번영을 위해 뿌린 선열의 투쟁의 피가 명백히 흐르고 있음을 강력히 느낀다. 정부는 민족적 양심으로는 용납될 수 없는 저의하에 굴욕적 한·일회담을 실리외교라는 허울 좋은 미명으로 강행해 급기야 가조인의 우를 범하고야말았다.
일언으로 가조인된 한·일회담 내용은 시종일관 매국외교였음을 단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현금 한·일회담이 일부 반민족적인 경제인, 정치인에게는 더 없는 부정축재와 권력장악의 호기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들 청년학도는 현명한 전 국민의 총의에 부응히여 가조인된 한·일회담 내용을 전면 무효화할 것을 거듭 정부에 요구하는 바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정당한 요구에도 불구하고 더이상 국민을 우롱할 때에 빚어질지 모르는 제반 사태에 대한 책임이 정부에 있을 것임을 재삼 경고하는 바이다.
대정부경고문
l. 정부는 가조인을 즉시 무효로 하라.
2. 정부는 구속학생을 즉시 석방하라.
3. 정부는 우리의 요청이 전 국민의 의사임을 인식하라.
4. 정부는 부정부패를 과감히 일소하라.
5. 정부는 반민족적 매판자본의 생성을 제거하라.
6. 정부는 자주적 민족진로를 확립하라.
한편 상대생들 200여 명은 16일 오전 11시 상대 교정에 모여 ‘민족적 민주주의는 누구를 위한 이념인캐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한·일회담 반대 성토대회를 벌였다. 선언문과 전국대학생에게 보내는 호소문 및 결의문 낭독이 있은 후 약 50명의 학생들은 본관 앞에서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단식투쟁에 들어가기로 결의하였다. 17일 오후 7시 단식중인 상대학생들은 단시일 내에 교수회의를 열어 한·일회담에 대한 교수의 의견을 날벼줄 것을 요청하고 일단 해산했다.
한편 사대는 다음날인 17일 오전 10시 4,19기념탑 앞에서 성토대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한·일협정에 민족의 대의명분과 이익의 그 어느 것도 반영되지 않았음을 대학의 지성은 직시하고 한·일협정을 폐기할 것을 요구한다는 선언문을 채택했다.
이렇듯 긴장이 계속 고조되자 16일 법대의 휴강에 이어 문교부의 ‘학교책임자 재량에 따른’ 임시휴교 긴급지시로 사대가 17일에서 22일까지 휴강되는 등 서울시내 대부분의 학교들이 임시휴교에 들어갔다. 그런데 한상봉 문교부차관은 임시휴교는 각 대학에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휴교중인 4월 17일, 유기천 법대학장의 요청에 따라 경찰이 투입되어 15 일부터 단식농성중이던 법대생 39명 전원이 연행된 사건이 일어났다. 덕으로 다스려야 할 스승이 나서서 경찰을 학교에 투입시킨 이 사건은 대학가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고 19일 오후 서울대 긴급 학장회의는 “학원이 정상수업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이유로 24일까지 휴강을 연장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 더해 24일에는 법대 교수회의에서 시위 및 단식 주동학생 12명에 대해 무기정학 처분을 내렸다.
• 4·10시위 주동자 : 정성철(법4), 박세원(행4), 정해주(행3)
• 단식농성 주동자 : 정대철(법4), 유종헌(행4), 윤재기(행3), 이협(법3), 이영희(행3), 김규칠(행3), 성경섭(법3), 김용회{법3), 진의장(법2)
이러한 무더기 처벌은 유기천 학장의 처벌결정에 교수회의가 따른 결과였다. 한편 서울대 총학생회는 정부 주최 4,19행사를 보이콧하기로 결정하고, 독자적인 기념행사를 거행키로 했다. 4, 19추도식은 약 300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4,19기념탑 앞에서 행해졌다.
추도식에서는 4 . 19 당시 서울대생으로 희생된 김치호 군 등 6명의 넋을 위로하고 4,19 제 6선언문과 결의문을 채택했다. 결의문은 ① 가조인의 거부와 무효선언, ② 구속학생 즉시 석방, ③ 학생들이 순수한 의사표시에 대한 폭압저지 만행중지 등 9개 항목이었다. 추도식이 끝난 후 12시경부터 김정숙, 유재식 등 유족 5명과 함께 학생들은 묵념데모를 벌이면서 진출하다 이화동 입구에서 대기중이던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에 학생들은 경찰에게 구호나 플래카드 없이 종로 5가에서 4가를 돌아 원남동, 혜화동을 거쳐 학교로 되돌아올 것이라고 설득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경찰의 에스코트하에 예정코스를 돌아 오후 1시 30분 귀교하여 해산하였다.
4월 27일에는 농대 학생회가 한·일회담 성토대회를 개최했다. 여기에는 600여 명의 농대학생과 학장 이하 다수 교수가 참석하였다. 이들은 한·일회담 성토대회 후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낭독하고, 별다른 행동 없이 대회를 끝냈다.
29일 오후 1시 30분경 문리대학생회는 학생총회를 개최했다. 약 3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된 이날의 모임에서는 “자유에 대한 무력적 도전은 항상 무의미하다”는 요지의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어 이들은 손에 태극기를 들고 ‘누구를 위한 한·일흥정인가’, ‘매국적 한·일회담을 백지화해라’, ‘일체의 외세는 한·일흥정을 강요 말라’, ‘폭력적 매판정부는 하루 속히 반성하라’는 등의 플래카드를 앞세워 시위에 나섰다.
이들은 이화동로터리 부근에서 대기중이던 경찰에게 포위되어 5분여의 실랑이 끝에 128명의 학생이 중부, 동대문, 종로경찰서 등에 연행되었다. 이 데모에 가담한 학생들 중 대부분의 학생들은 다음날 300원의 벌금을 물고 나왔으며, 구
속된 학생은 조양(외교4), 정틱t철학3), 박지됨정치4), 최주언(사학3), 최병권(정치3), 손중웅{정치3), 조순문{정치4) 등 7명이었다. 또한 이날 데모의 주동혐의로문리대의 조양(외교4)과 이조연(사회3)이 30일자로 무기정학 처분당했다.
이어 다음날인 30일에는 50여 명의 문리대생들이 교정에 모여 구속학생 즉시 석방을 요구하는 성토대회를 열었다 . 이날 성토대회에서는 ‘피끓는 지성이여, 내 조국 사수하자’는 플래카드가 세워졌다. 사대에서도 4,19기념탑 앞에서 5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한·일회담 성토대회를 벌였다. 이들은 “위정지는 민족적 양심에 귀를 기울여 굴욕적 한·일외교를 즉각 중지하라”는 제목의 선언문과 “구속학생을 석방하라”는 등 7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5월 4일 오후 12시 10분경 문리대 운동장에서 문리대 학생 70여 명은 한·일회담 성토대회 겸 ‘신제국주의 박살식’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학생대표는 「박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와 선언문을 낭독하고 일장기가 그려진 게다짝을 불태웠다. . 이 집회로 인해 김환겸(사회3), 강두수(사회3), 최훈준(사회3), 김도(철학2) 등 4명에게 2개월의 근신 처분이 내려졌고, 20일에는 강두수와 김도에게 무기정학처분이 내려졌다.
한편 1964년 말부터 서울문리대 학생신문 『새세대 』지가 내용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학교 딩국에 의해 발간 정지당했다가 학교측 요구로 학생기자 3명이 물러서는 등 학교 당국과 학생기자들 사이에 여러 차례 타협이 이루어져 재발간 약속을 받은 바 있었는데, 학교측이 “발간물 지도위원회가 아직 구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를 내세워 그후 5개월이 지나도록 복간이 되지 않고 있었다. 이 시기에 『새세대 』 복간투쟁위원회가 결성되어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 학교 당국을 상대로 한 복간운동에 나섰다.
5월달에 접어들어 문리대 학생회는 구속학생 석방서명운동을 전개했다 . 5월 12일과 13일에 걸친 서명운동은 500여 학생의 호응을 얻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한 · 일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세미나가 집중적으로 개최되었다. 문리대 산하 낙산사학회는 22일 ‘한말에 있어서의 한·일간의 제 문제’ 심포지엄을 가졌고, 미대는 15일 ‘한·일회담 타결에 따르는 한·일문화계의 전망’이라는 제하로 박세원, 유근준 강사의 강의를 들었다. 또한 민족주의 비교연구회는 ‘한국 자본과 일본 자본’에 관한 세미나를 개최했, 총학생회도 정일권 총리 이하 관계 5부 장·차관들을 초청하여 한·일문제와 학생과 정부의 원만한 의사소통을 위한 공개토론회를 추진하였다.
2) 학원자유수호투쟁
이렇듯 세미나 등으로 잠시 조용하던 학원가는 5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다시 시위의 열기에 휩싸이기 시작하였다. 5월 18일 법대, 사대, 문리대에서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있었다.
5월 18일 오후 1시경 법대 도서관 앞에서 15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성토대회가 있었으나 유기천 학장의 강력한 제지로 교문을 나서지 못하고 해산되었다.
이중 이영희, 이헌재, 임종률, 이협 , 진치남 등 시위지도부와 일부 시위대원들은 1시 30분경부터 성토대회를 열고 있는 문리대에 합류하였다.
문리대는 성토대회 후 ‘미국은 한·일회담 간섭 말라’는 등의 플래차드를 들고 교문을 나서 이화동 네거리까지 진출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해산되었다. 이날 시위로 강두수, 안택수, 한일상, 김환겸, 김영철 등이 연행되었고, 법대의 이헌재, 임종률, 이협도 함께 연행되었다.
사대는 오전 10시 30분부터 ‘일장기 화형식’을 가진 후, ‘한·일회담 체결 이전에 민족주체 세력 확보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에 돌입했다. 그러나 급거출동한 경찰 100여 명과 충돌하여 김장천(국어2), 노수관(국어2), 윤덕흥(사
회1), 김정님t체육3), 정무{화학1) 등 5명이 연행되고 5 0여 명은 교정에 돌아와 연좌데모하다 11시 40분경 해산했다.
5·18시위 이후 시위의 초점은 학내문제로 넘어 갔다. 5월 19일 12시 45분경 법대생 150여 명은 제 7강의실에서 학생총회를 열고 유기천 법대학장이 지난달 단식농성을 하고 있던 학생들을 경찰에 연행해가도록 한 데 대해 유 학장의 해명을요구하며 농성에 들어 갔다. 이에 19일 오후 5시 법대 교수회의에서는 20일 하루 동안 휴강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휴강조치에도 아랑곳없이 20일 9시 법대생 200여 명은 학생총회 및 ‘학원자유수호 궐기대회’를 열고 “정당한 법적 이유 없는 강제연행, 체포 미행 등을 즉각 중지하고 감금 학생들을 무조건 석방하라”는 대정부 경고문을 채택한 후, 「전국 학우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채택하였다. 법대생들은 학교 당국이 20일 하루 휴강조치를 한 것과 유 학장이 단식학생을 연행토록 한 것, 그리고 주동학생을 무기정학시킨 것과 18 일 학생데모를 못하도록 압력을 가한 사실 등을 해명할것을 요구하면서 동맹휴학을 결의했다 . 그리고 맹휴기간 중 요구조건이 관철되지 않을 경우 유기천 학장의 불신임도 불사하겠다고 교수회의에 통고했다. 법대생들이 맹휴결의는 해방 직후 국대안반대와 1957년 이강석(이승만의 양자)의 입학거부에 이은 서울대 사상 세번째의 일이었다. 다음은 법대생들의 결의문 요지와 다섯 항목의 요구사항이다.
결의문
우리들 서울법대생은 순수한 학생활동에 대한 학장의 고식적 압력과 독선적이고 비교육적인 부당한 학생징계에 대한 혐오와, 형사들의 교내 침입 상주사찰로 말미암아 공포분위기에 질식하지 않을 수 없는 바 현금 온갖 부당한 세력에 의해 위축된 숭엄한 학원의 자유를 되찾고, 이를 영원히 수호하기 위해 제 1차적 행동으로 5월 20일부터 22일까지 3일 간의 동맹휴학에 돌입하기로 결의한다.
요구사항
1. 정부와 학교 당국은 학원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라.
2.. 정부와 학교 당국은 학생 사찰을 즉시 중단하라.
3. 4월 10일 이후 일련의 제반 사태에 대해서 충분히 납득할 수 없는 학교 당국의 처사를 규탄하여, 차후에는 이런 불미스러운 처사가 없을 것임을 확약하라.
4. 학교 당국은 무기정학 처분을 해제하여 원상 복귀시켜라.
5. 진정한 학원의 자유는 학생자치에서 이루어진다. 기능이 마비된 학생자치 활동을 즉시 부활시켜라.
이러한 우리들의 요구와 주장의 관철을 위해 유예기간으로써 우선 3일 간을 정하여 동맹휴학에 돌입키로 하며, 아울러 학교 당국에서 우리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을 때에는 학장 불신임도 불사하기로 결의한다.
학생들이 맹휴결의에 따라 20일 학교측은 긴급 교수회의를 열었으나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21 일 다시 교수회의를 속개하여 학칙 42조에 의거, 맹휴주동자와 참여자 35명을 처벌하였다.
• 무기정학 : 이헌재(법4), 임종률{법3)
• 6월 정학 : 권경술, 김명, 서종환, 서광옥, 이계천, 이복한, 이상지(이상 법3), 박찬, 이정남, 장명봉{이상 행3)
• 3월 정학 : 김일수, 유호민, 조길성, 채태병(이상 법 3), 권순대, 김춘호, 김해룡, 변득수, 이종신(이상 행 3),
이창식(법 2)
• 3월 근신 : 신영무, 이진수(이상 법3), 강희문, 김영옥, 김여순, 마서홍, 박주환, 원은섭, 이강국,
조성서(이상 행정 3), 주원태(법 2), 임도빈, 조영래(이상 법1)
이런 와중에서 앞에서 서술한 대로 4월 17일 유기천 법대학장의 요청으로 학원에 단식농성 학생의 연행이 있었고, 4월 24일 학생징계가 있었으며, 다시 5월 21일의 무더기 징계사태가 있었던 것이다.
학생징계 후 유기천 학장은, “대부분의 학생들은 공부하려고 애쓰는데 극단 소수의 학생들이 다른 학생들을 선동, 조용한 학원 분위기를 깨침은 결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학생의 징계도 교육의 한 과정이며, 학교 당국의 처사는 옳다. 학생들은 학원을 떠나면 생명을 잃는 것 아니내 학원의 자유란 그런 한도 안에서만 보장되고 또 그것이 참다운 학원의 자유인데 학생들은 이를 남용하고 있는 것 같다. 학원의 자유를 깨뜨리는 학생들은 앞으로도 철저히 다스리겠다” 는요지의 발언을 했다.
이에 맹휴와 휴강조치가 끝나 학교문이 열리는 5월 24일, 9일 만에 등교한 법대생들은 낮 12시부터 학생총회를 열고 유기천 학장의 사임을 주장하게 되었고 급기야는 유 학장이 물러나지 않는 한 무기 동맹휴학에 들어가기로 결의함으로써써 극한사태로 줄달음쳤다.
결의안은 다음과 같다.
결의안
1. 학원, 각종 연구학회와 학생활동의 자유를 학교측으로 하여금 보장토록 한다.
1. 학원사찰은 중지케 한다.
1. 지난 4·18사태 이후 처벌된 47명 학생의 처벌을 즉각 해제토록 한다.
1. 학장의 사퇴 여부는 보류한다.
이에 유 학장은 “이번 학생들이 재차 맹휴에 들어간 것은 소수 불순학생들의 장난으로 본다. 학생처벌 등 일련의 학교측 처사는 교수회의의 의결을 거쳐 된 것이므로 나 혼자 책임질 문제가 아니다. 국대안반대 소동의 재연이 있어서는 안된다. 학생들의 행동은 학칙에 위반되는 행위이므로 학칙에 따라 엄격히 처벌할 방침은 변함이 없다”고 반격했다.
350명의 동조서명으로 맹휴가 강행되어 강의실에 학생들이 출석치 않자 그는 “몇 해가 걸리더라도 사태를 수습해놓고학장직을 물러서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사태가 이렇게 진행되자 법대 동창회측에서 중재에 나섰고, 이에 따라 29일 법대대의원 총회는 29 부터 일단 등교하기로 결정하였다. 29일 250명의 학생들이 등교하여 학생총회를 열었다. 이들은 동창회측과 협의하여, ① 학원 학회 학생활동의 자유를 보장할 것, ② 학원사찰의 중지, ③ 4·10시위 이래 처벌된 47명의 처벌을 해제하라고 요구하교 유 학장의 사퇴요구는 일단 보류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의 요구가 31일 오전 9시까지 관철되지 않을 경우 동창회도 학생편에 서서 싸울 것이며, 24일 학생총회의 결의대로 유 학장 사퇴시까지 무기한 맹휴를 계속한다는 뜻을 학교측에 통고했다.
이렇듯 학생들과 동창회의 최후적 요구에 더해 사회적으로도 학교 당국의 비교육적 조처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법대 학교 당국은 5월 31일 교수회의를 열어 학생들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47명 처벌학생들의 처벌이 일제히 해제되었다.
한편 4·18시위 이후 강화된 학원사찰에 대해서 신태환 총장은 침해된 학원 자유를 회복해야 된다는 취지로 문교부에 대해 사찰중지를 정식으로 건의했다
3) 200시간 단식투쟁과 한 · 일협정 조인
6월 12일 서울법대 시위는 200시간 단식투쟁으로 가는 길목이었고, 단식투쟁은 각 대학의 단식으로 파급되었다. 6월 12일은, 지난 5월 20일 이양희 법대 학생회장이 사퇴함에 따라 지난 5월 6일의 선거에서 당선된 차기 정·부학생회장인 장명봉과 서종환이 공식적으로 학생회 일을 맡은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6·12시위는 선임 학생회장 장명봉이 최초로 주도한 시위였다.
토요일이던 6월 12일 11시 30분 서울법대생 200여 명은 5월의 동맹휴학기를 정리하고 “투쟁목표는 대외적인 것임"을 재확인하면서 한·일협정 조인 반대투쟁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동안 학내문제로 시위의 중심이 옮겨졌던 것을 다시 본래 투쟁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이날 학생들은 ‘분쇄하자 매춘외교 타도하자 매판자본’이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이화동로터리까지 나갔다. 시위대를 인솔했던 장명봉은 여기서 체포되고 앞장섰던 임종률 등 15 명도 연행되었으며, 나머지 학생들은 단식농성을 선언하였
으나 학교측의 저지로 이날은 일단 귀가하였다.
월요일인 6월 14일 서울법대생 50여 명은 한·일회담 조기타결 반대와 한·미행협에서의 미국측 성의를 촉구하는 의미에서 무기한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그들은 목표를 ‘민족주체성 확립과 부정부패 일소’로 잡았다. 동대문서의 정보과 간부가 “농성을 풀면 장명봉과 임종률이 석방되도록 힘쓰겠다껴 회유했지만 학생들은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후 서울지검 공안부 박찬종 검사는 장명봉과 임종률을 전격 구속기소했다. 장명봉과 임종률은 동대문유치장에서 지신들의 석방을 위한 어떠한 타협도 단호히 거부하고 단식을 적극 지지했다.
단식 하루가 지날 때부터 졸도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15일 밤 2명이 병원으로 실려갔고 단식 이틀째인 16일에는 21명이 쓰러졌다. 이러한 중에도 학생들은 링거를 맞아가며 다시 단식투쟁을 하였다 17일에는 44명이 졸도한 가운데 일부 학생들은 이날부터 실시되는 시험에 침여하였고, 시험 도중에 또 11 명이 졸도하는 등 단식투쟁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힘입어 단식투쟁의 열기는 점차 확산되어갔다. 단식학생수도 계속 증가하여 16일에는 120명으로 늘어났으며, 18 일에는 서울상대 300여 명이 성토대회를 갖고 법대 단식투쟁장을 향해 침묵행진을 벌이다 경찰과 충돌뼈 23명이 연행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해산된 시위대 중 40여 명이 법대 단식에 합류하였다. 이로써 단식학생은 160여 명이 되었다. 또한
6월 19일 오후 3시쯤 서울대 단과대 학생회장들은 시내 모처에서 모임을 갖고, 22 일까지 정부 당국이 단식투쟁 학생들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서울대 전체 학생이 공동행동으로 투쟁할 것을 결정했다.
이날 엿새째 단식을 계속중인 서울법대생 232명 외에, 오후 1시에 문리대생 63 명, 상대생 320명, 사대생 20명이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때까지 모두 100여 명의 단식학생이 졸도하였고 27명이 입원했다.
법대생 단식투쟁의 열기가 고조 확산되어가던 5월 20 일, 서울대는 긴급학장회의를 소집하여 6월 21일부터 8월 20일까지 방학에 들어갈 것을 결정하였다. 예전보다 20일이나 앞당겨 방학이 실시된 이유로써 학교 당국은 “한·일회담을 반대하여 농성중인 일부 대학 학생들의 건강이 우려되고 예정대로 학기말 시험을 치를 수 없어서”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돌연한 조기방학 실시는 한·일협정 조인을 앞두고 대학을 봉쇄하려는 처사였다. 서울대가 20일에 방학에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21일 서울의 사립대학 총장들은 조선호텔에서 회합을 갖고 조기방학 실시에 원칙적으로 합의했으며, 21일과 22일을 기해 대부분의 대학들이 하기방학에 들어갔다. 서울시내 58개 남자고교들도 시도교육위원회 긴급지시로 22일부터 2일 내지 5일 간 일제히 휴교에 들어갔다
한·일회담 정식조인을 하루 앞둔 21 일 서울대, 고대, 연대, 경희대, 중앙대, 숭실대, 외대, 동대 등 시내 12개 대학교 학생들과 대광, 숭실, 양정 등 3 개 고교생 도합 1만여 명이 교문을 박차고 시위행진에 나서 ‘매국외교 반대’를 절규했다. 그리고 22일에는 13개 대학이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서울대도 법대, 문리대, 사대, 공대, 의대, 약대, 치대 등 각 단과대학이 20일부터의 조기방학에 대한 성토와 한·일회담 즉각 중지를 외치며 데모에 들어갔다. 그러나 경찰의 대규모 진압작전으로 캠퍼스를 벗어나지 못하고 많은 학생들이 연행됐다. 이러한 속에서도 서울법대 제 10강의실에서는 단식투쟁이 계속 강행되었다. 22일 정오 현재 졸도학생은 185명에 이르렀다.
6월 22 일 오후 5시, 전국 경찰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진 가운데, 반대데모의 거센 함성 속에서 한·일협정이 정식 조인되었다. 오후 7시, 법대생 단식은 ‘민족주체성’과 ‘호혜평등’이라는 단식학생 전원의 혈서가 쓰여진 채 눈물로 마치게 되었다. 학생운동사상 전무후무한 200시간 단식투쟁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단식을 마치면서」의 선언문에는 국회비준반대투쟁의 의지가 새겨져 있었다. 200시간 단식투쟁에 끝까지 침여한 학생은 다음과 같다.
· • 법대생
재학선배그룹 : 박정태, 박종익, 정무일, 정태기
61 학번 : 이영희
62학번 : 김우기, 유종헌, 이대우, 이헌재, 임종률(구속중), 정대철, 정성철, 진치남
63 학번 : 구덕서, 권경술, 권순대, 김규칠, 김명, 김여순, 김영규, 김일수, 마서홍, 박찬, 백남치, 서종환, 성경섭, 윤재기, 이계천, 이복한, 이상지, 이소라, 이승진, 이진두, 이합, 장명봉{구속중), 정민수, 정해주, 채태병
허규철
64학번 : 강상철, 강상훈, 강창웅, 김계인, 김길환, 김수동, 김영철, 김영훈, 도용락, 문정흥{개명 문희상), 민원기
박수혁, 백우섭, 선우태호, 성영수, 안경은, 안상수, 안왕선, 양석근, 유광삼, 유현, 유충걸, 윤여헌,
윤태남, 이상구, 이원, 이창식, 장석화, 전계휴, 정형근, 조병윤, 진의장, 최기선, 추광태, 한정길, 허홍중,
홍정표,황산성,황인행
65 학번 : 강만수, 강복수, 강완구, 권태욱, 김규식, 김능요, 김대희, 김영배, 김영수, 김재진, 김종구, 김태영,
문영극, 박동수, 박승만, 박휴상, 배영길, 백승현, 백운철, 안길용, 안성덕, 안평, 윤기향, 윤석분,
윤세문, 이재수, 임도빈, 정영일, 조병대, 조영래, 최경후, 최창근, 황창연
• 상대생(원정단식) : 갈정웅, 강보현, 강춘구, 김국주, 김종범, 이병규, 김성호, 김태희, 명정기, 문충식, ‘양무웅,
윤명상, 이순철, 한이헌, 강철규, 이창식, 정운영, 이종성, 홍유수, 최성림, 전수신, 김근태
• 공대생(원정단식) : 이시우
4) 한 · 일협정 비준과 한 · 일협정 비준무효화투쟁
이제 한·일회담 반대투쟁은 비준반대투쟁으로 이어졌다. 서울의대 200여 명은 7월 3일 9시 반 한·일협정 비준반대 성토대회를 열었다. 성토대회에서 학생들은 “경찰은 평화적인 학생들의 시위에 악랄한 수법을 버리라”는 등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대학을 봉쇄하고 곤봉으로 두들긴다고 해서 이 어쩔 수 없는 숙명적인 역사의 명령을 어떻게 어기고, 냉소하거나 침묵을 지키라는 것입니까?" 라는 내용으로 「박대통령에게 보내는 건의문」도 채택했다. 이들은 가운을 입은 채 150여 명이 데모에 나섰다. 학생들은 원남동로터리를 거쳐 종로 4가 쪽으로 나가다 경찰기동대에 의해 저지되어 104명이 연행되고 이중 강명식(본과3) 등 3 명이 구속되었다
7월 12일에는 서울시내 16개 대학교수 345명이 한·일협정 비준반대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한·일협정비준반대재경교수단’의 명의로 발표된 선언문에는 “국회는 여야를 초월하여 치욕적인 협정을 결연히 거부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7월 14일 밤, 국회본회의에서는 한·일협정 비준동의안이 전격 발의되었다. 야당의 결사 저지 속에 공화당이 일방적으로 발의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8월 11일 밤 국회 한·일관계 특별위원회에서 공화당이 날치기로 비준동의안을 통과시킨 데 이어, 민중당 소속 국회의원 전원이 사퇴서를 국회에 제출한 가운데 14일 한·일협정 비준동의안을 공화당만의 일당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이렇듯 긴박한 정국 속에서 서울법대 학생회는 방학중인 8월 17일 오전 10시 ‘한·일협정 비준안 일당국회통과 무효선언식’을 가졌다. 학생회장 장명봉이 낭독한 선언문에서 학생들은 한·일협정 비준안이 일딩국회에서 강행통과된 것을 규탄하고, ① 국시를 부인하는 일당국회에서 통과된 매국협정을 박살하기 위해 투쟁한다. ② 일당국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하라. ③ 현 정권은 민주주의를 부인하고 헌정 위기사태를 유발한 책임을 지고 자진 매국협정을 폐기하라는 등 4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어 8월 18일 오전 11시, 법대학생회는 다시 긴급학생총회를 개최하였다. 200여 학생이 참석한 가운데 성토대회를열고, ‘일딩국회에서 통과된 협정의 무효화’를 위해 개학과 동시에 강력한 실력투쟁을 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러한 17, 18일의 법대생 성토는 개학과 동시에 전개되는 대학가의 한·일협정 비준무효화투쟁의 봉화가 되었다.
한·일협정 조인 직전부터 시작된 긴 ‘정치방학’이 끝나고 개학 첫날인 8월 21일, 서울법대생 300여 명은 오전 10시 30분경 도서관 앞에 모여 학생회장 장명봉의 사회로 성토대회를 시작했다. 이들은 김규칠(행 3) 이 낭독한 선언문을 통해 “비민주·반민족적 방법으로 비준안 통과를 강행한 일당국회는 민주헌정이 근본이념을 뒤흔드는 행위를 했다”고 규탄했다. 이어 법대생들은 ‘매국문서, 매국국회, 매국정권 화형식’을 거행한 뒤 데모에 들어 갔다. 시위대는 이화동로터리까지 진출했으나 대기중인 경찰과 대치, 최루탄과 투석의 공방전을 벌이다가 60여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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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날(21일) 같은 시각에 문리대생들도 성토대회를 열고 다음 사항을 결의했다.
1. 일당국회에서 통과된 협정의 무효회를 위해 간단없는 투쟁을 계속한다.
2. 집권당은 반민족적 폭거를 자성하고 국민의 심판을 받기 위해 현 국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하라.
3. 대학 내의 순수한 학술단체를 정치적 제물화하려는 딩국의 비민주적 처사는 이를용납치 않는다.
4. 야당의원은 과감히 전원 탈당하여 매국협정 박살을 위한 투쟁에 앞장서라.
5. 일본은 신제국주의의 흑심을 버리고 위장된 제국주의 협정을 자진 폐기하라
6. 미국은 민주국가 본연의 자세로 할까 양국 유대를 위협하는 우행을 하지말라
이날 성토대회를 마친 문리대생들은 ‘매국협정 무효화하라’는 플래차드를 들고 데모에 나서 이화동 입구까지 진출했다가 경찰의 저지를 받아 법대교정으로 일단 후퇴하여 나중에 법대생들과 합세하여 다시 데모를 벌였다.
이날 문리대 데모의 주동자로 최희조(신임학생회장)와 최준(총무)이 경찰에 연행되어 구속되었다.
한편 8월 21일, 법대 유기천 학장은 긴급교수회의를 열어 한·일협정 반대투쟁을 선봉에서 주도해온 법대 학생회장 장명봉에게 퇴학 처분을 내렸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23일 낮 1시 반 서울대 11개 단과대학 신구 학생회장과 총학생회 간부 등 30여 명은 대학본부 회의실에 모여 24일부터 시작되는 학기말 시험을 당분간 연기할 것을 결의했다. 이들은 ‘한·일협정 비준무효화’를 위한 서울대학생 전체의 통일된 의견을 결집하고 학원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24일 오전 10시부터 문리대 교정에서 서울대 전체 학생총회를 열 것을 결의하고, 총회에서는 ‘한·일협정 무효화’를 위한 투쟁방안과 지난 21 일 있었던 법대 학생회장 장명봉의 퇴학 처분의 철회에 관한 방안을 의제로 삼기로 하였다.
5) 정부의 강경책과 법대생의 한 달 간 맹휴
8월 23일 오전 서울법대생 300여 명은 동교 도서관에서 긴급 학생총회를 열고 지난 21일의 학생회장 장명봉의 퇴학 처분 조치를 논의한 뒤 찬통교수의 자숙성명 발표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유기천 학장이 물러나고 장명봉을 복적시킬 시킬때까지 24일부터 무기한 동맹휴학에 들어가기로 결의하였다.
예정대로 24일 오전 10시경 11개 단과대학생 2,500여 명은 문리대 교정에 집합, 학생총회를 연 뒤 ‘매국문서 불사르라’는 등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데모에 나섰다. 이들 학생들은 이화동로터리를 지나 효제초등학교 앞까지 나갔다가 최루탄
을 쏘며 저지하는 경찰에 밀려 이화동로터리로 후퇴, 데모를 정비한 다음 다시 동대문시장 앞까지 진출했으며, 일부 학생은 국회의사당 앞까지 나갔다. 이날 데 모로 60여 명의 학생이 연행되었다. 이에 대해 대학 딩국은 25 일 열린 총·학장회의에서 24일의 데모를 주동한 혐의로 총학생회 간부 전원을 처벌하였다.
• 퇴학 : 서성준(미대 회화과 4년, 총학생회장, 학교측 처분에 앞서 자퇴함)
• 무기정학 : 원광종공대 화공과 3 년, 공대회장), 한휘언(농대 축산과 4,년, 농대회장), 조양(문리대 외교과 4년, 문리대회장), 최충남( 사대 외국어과 4년, 사대회장), 이용회{약대 4년, 약대회장), 서세진(음대 작곡과 4년, 음대회장), 이수종(치대 치과 3 년, 치대회장), 김우기(법대 행정과 3년), 이윤(사대 수학과 3년), 이창원사대 수학과 3년), 정선영(사대 사회과 3년)
• 근신 : 윤경자(음대 기악과 4년, 여학생회장), 강명식(의대 3년, 의대회장)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가운데 25일에도 문리대 4,19기념탑 앞에서 총학생회의 신임간부들 주도하에 1,500명이 모여 성토대회를 연후 종로 5가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때 법대학생회 부회장 서종환과 법대생 유충걸이 동대문서에 연행되어 구속되었다.
25 일 무장군인들이 고려대에 난입한 사건이 발생한 데 이어 26일 정부는 서울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 정부는 27일, 학원혼란에 대한 책임을 물어 신태환 총장을 해임하고 그 후임에 유기천 법대학장을 임명했다(이에 따라 단대학장들도 총사퇴하였다). 그리고 데모사태의 책임을 물어 윤천주 문교부장관을 해임하고 권오병 법무부차관을 문교부장관으로 기용하였다. 권오병 장관은 취임과 동시에 데모학생 엄중처벌과 데모선동교수의 명단제출, 징계요구 등의 지시를 내렸다.
총장경질사태를 맞은 서울대는 27일 오후 11개 단과대학 대표모임을 갖고 ‘총장과 학장의 사임거부’, ‘유기천 학장의 총장취임 거부’ 등을 결의하고, 유 학장의 총장취 임문제와 처벌학생의 구제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전교생이 자퇴하겠
다고 결의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새로 임명된 유기천 총장은 긴급 학장회의를 열어 29일부터 1주일 간 휴교할 것을 결정하였다.
데모주동자와 배후조종자의 일제 검거선풍이 부는 가운데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29일 서울대생 300여 명은 문리대 교정에 모여 ‘전서울대학학원방위단’ 결성대회를 가졌다. 학생들은 “정부가 나치나 파시스트 정권하에서도 감히 하지 못하던 학원 강간을 다반사로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휴교조치엔 구국등교로, 괴뢰총장 임명에는 불승인으로 맞설 것임을 고한다”고 선언했다. 이어 학생들은 “학원을 분쇄한 군은 즉시 사과하고 본연의 임무로 복귀하라”는 등 6개 항목의 결의문을채택하였다.
대학가의 징계선풍 속에 9월 4일 문교부는 마침내 데모주동학생 처벌을 보류해 온 연세대와 고려대에 6일부터 무기휴업령을 내렸다. 이는 대학의 자율성을 극도로 위협하는 것이었다.
한편 8월 24일 맹휴에 돌입한 법대생은 9월 6일 오전 학생총회를 열고 맹휴 문제에 대한 투표를 실시하여 계속 맹휴할 것을 결의하였다{총 476명 투표 328명 찬성). 이어서 학생들은 성토대회를 열어 유기천 총장의 사퇴, 학생회장 장명봉의 복적, 연대와 고대의 휴업령 철폐 등 8개항을 결의하고 해산하였다. 이날 밤 동대문서는 맹휴 주동혐의로 이영희(행3), 이협(법3), 최기선(법2), 김규칠(행3) 등 4명을 연행 조사하였다. 9월 8일 이들 중 이영희, 이협, 최기선은 제적처분을, 김규칠은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서울상대생 500여 명도 학생회 주최로 일 오전 10시경 ‘한·일협정 비준무효 및 학원방위 궐기대회’를 가졌다. 이들은 “일당국회의 비준동의는 절대무효이고, 대학의 자유를 멸시하고 학원을 정치도구화하려는 저열한 의도에서 취해진 연대와 고대의 무기휴업조처가 철회될 때까지 동정휴교에 들어갈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사회의 지탄을 받고 서울대의 명예를 더럽힌 유기천 총장은 사퇴하라”는 등 9개 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최루탄, 군, 경찰봉의 화형식을 가졌다. 이 화형식을 주동한 조상희 (4년)는 제적(자퇴처리)되었고, 지무남(2년), 양승배 (2년), 정운영 (2년) 등은 무기정학당하였다.
또한 같은날 문교부는 서울법대의 황산덕 교수와 김기선 교쉬당시 학생처장)를 이른바 ‘정치교수’라는 이름으로 파면조처했다. 그리고 문교부가 징계를 요구했던 양호민 교수는 얼마 후 자진사퇴하여 학원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문교부가 징계를 요구했던 문리대의 황성모 교수에 대해서는 서울대 당국에서 불문에 부치기로 했다. 이렇듯 ‘정치교수’로 지목되어 교직을 떠난 교수는 전국적으로 18명이나 되었다
한편 9월 16일, 중앙정보부는 문리대의 김중태, 최혜성, 이수용, 박재일, 송철원과 법대의 진치남 등 6명을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의 배후 책임을 물어 내란음요 내란선동, 폭발물 사용음요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하였다. 그런데이때 정보부에는 김지하, 송철원, 최혜성, 박재일이 모여 작성했으나 미발표인 채로 소각되었던 ‘3· 24 제 2선언문’과 ‘격문’이 있었다. 이 또한 반공법 위반의 혐의가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1966년 7월 12일 서울고등법원으로부터 전원 무죄선고를 받았다{당시 재판장 백낙민, 배석 김진우·박충순 판사) . 이것은 당시 사법부가 정부의 영힐ε을 받지 않고 의연한 자세로 판결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였다.
9월 22일, 법대생들은 약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학생총회를 열고 ‘학생들의 주장을 충분히 고려, 최선을 다하겠다’는 학교 당국의 ‘약속’을 받아들여 맹휴에 들어간 지 한 달 만에 이를 풀기로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학교 당국이 처벌학생 징계 해제, 징계교수 구제 등에 대해 성의 있는 대책을 마련해주지 않을 때에는 정상적으로 등교하면서 계속 투쟁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로써 서울대의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도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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