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욕적인 한·일회담은 식민지의 쓰라린 경험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던 한국국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연인원 350만 명이 직접 투쟁에 참가, 광범위한 저항운동으로 전개되었던 6.3 운동은 박정희군시독재정권이 발동한 계엄령과 위수령에 의해 좌절되기는 하였지만 이후의 한국정치에 커다란 파급효과를미쳤다.
6.3 운동은 직접적으로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운동이었지만 넓게 보면 당시의 정치·사회경제적 구조하에서 산적해 있던 다양한 국민적 요구가 분출된 공동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6·3 운동은 박정희정권의 폭정에 대한 항의로서, 직접적 생활문제로서, 그리고 한·일회담에 임하는 정부의 저자세와 일본의 팽창주의 및 미국의 부당한 개입에 반대하는 민족자존적 운동으로 전개됨으로써 전체적으로 민족주의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6·3 운동은 5·16군사정권에 대항한 반독재운동과정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6·3 운동은 크게 1964년 굴욕회담 반대운동과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으로 구성된다. 63 운동은 굴욕적인 한· 일회담을 반대하교 한·일협정 비준을 반대한 운동이었을 뿐만 아니라 굴욕적인 한 · 일회담을 강행한 반민족적인 박정희군사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민족적 민주주의 운동이었다 6·3 운동은 한·일회담이 타결되고, 박정희정권의 반민족성이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남에 따라 운동의 목표와 방식을 변화시켰고, 후기로 갈수록 앞선 운동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보다 적극적인 대응을 모색하였다.
크게 보아 1964년의 6.3 데모의 전말은 다음의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① CD3 .24시위로 시작하여 4,17시위를 경과한 초기투쟁.
② 5,20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과 5 .25 ‘난국타개학생총궐기대회’로 한·일굴욕회담에 대한 반대투쟁이 연합적 성격을 띠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한 시기의 투쟁.
③ 6월 2일과 3일의 격화된 시위와 6 ·3 계엄령 선포로 64년의 투쟁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결정적 투쟁의 시기,
그리고 1965년의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은 다음과 같이 구분될 수 있다.
① 3월 31일 전남대 시위로 시작되어 4월 10일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한·일협정 가조인반대투쟁.
② 5월의 ‘학원자유수호궐기대회’ 등으로 부산했던 5월투쟁.
③ 서울법대생의 200시간 단식투쟁으로 본격화된 대학가의 단식투쟁 등 65년 투쟁의 절정을 이루었던 6월의 한·일정 정조인 반대투쟁
④ ‘정치방학’의 공백을 메운 ‘한·일협정 비준반대 각 대학연합체’의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
⑤ 대학가의 개학과 더불어 재개된 8월의 한·일협정 비준무효화투쟁.
⑥ 위수령 발동과 ‘정치교수’ 징계, 연 · 고대의 휴업령으로 이어지는 정부의 강압적 학원탄압으로 한 · 일협정 반대투쟁의 파파 잦아드는 9월 이후의 시기.
박정희정권의 초기집권기였던 6.3 학생운동의 기간은 박정권과 학생운동세력 양측 모두에 매우 중대한 시기였다. 박정권에게는 6 .3 학생운동이 아직 공고하지 않은 권력의 기반을 다져야 하는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어려움이 더욱 컸으며, 학생운동세력에게는 5,16쿠데타세력에 대한 최초의 대규모 투쟁이라는 점에서 향후 학생운동의 진로와 관련히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6.3 학생운동은 학생시위에 대해 정부가 계엄령과 위수령을 발동하게 하는 등 정부의 초강경진압책을 유발함으로써 박정희군사정권의 폭력성을 드러내게 하였고, 최초의 집단적 단식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학생운동의 사회적·정치적 파급력을 대폭 높였다
한편 6·3 학생운동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정부는 학교에 휴업령을 내리고 조기 정치방학을 실시하고 무장군인을 학교에 난입시키는 등 정권유지를 위해 대학의 지율성을 유린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정치교수라는 낙인을 찍어 많은 양심적인 교수들을 교단에서 몰아내는 등 대학에 대한 탄압을 노골적으로 자행하였다.
YTP사건이나 괴소포사건 등에서 보이듯이 박정희군사정권의 학원탄압은 학원사찰과 용공조작에까지 이르렀는데 이는 그만큼 박정희군사정권이 정치적 위기에 취약했음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6 ·3 학생운동은 2년 여에 걸쳐 전개된 장기간의 대규모 대중투쟁이었다 따라서 구속자도 총 500여 명에 이르고 연행자와 부상자 제적생은 수천 명에 이를 만큼 커다란 희생을 치렀다.
그러나 비록 이렇게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6 .3 학생운동은 사회 각계의 지원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이 땅의 민주주의와 민족자존을 지키는 데 커다란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6·3 학생운동을 통해 형성된 민주주의와 민족자존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공론은 그후의 한국역사에 면면히 살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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