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6·3학생운동의 성격과 의의
1964년 6·3 데모를 정점으로 하여 연인원 350만 명이 침여하여 1년 6개월여 이상 전개된 6·3 학생운동은 학생뿐만 아니라, 야당과 각계의 지식인, 그리고 일반 국민대중이 침여한 범국민적 항쟁이었지만 운동의 주체는 학생들이었다. 6·3 학생운동은 3명이 운동과정에서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하며 격렬하게 전개되었는데, 이에 대한 정부의 대응도 매우 강경하여 1차례의 계엄령과 1차례의 위수령이 발동되었고, 이 과정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이 구속, 제적되었으며, 수십 명의 교수들이 강제 퇴직당하였다.
6·3 학생운동은 박정희 군부세력이 쿠데타로 집권하여 1963년 기만적인 ‘민정이양을 통해 제 3공화국을 출범시킨지 6개월이 채 되지 않은 1964년 3월에 시작되었다. 따라서 6·3학생운동은 직접적으로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반대한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4,19 ‘ 혁명’을 5,16 ‘쿠데타’로서 전승했다고 자입하는 군사독재세력에 대한 항거라는 성격을 쩨\가지고 있었다. 박정희정권이 계엄령과 위수령의 발동을 비롯하여 학생처벌 강화를 위한 학칙개정, 이른바 ‘정치교수’의 탄압, 휴교령 등 강경일변도의 자세를 견지했던 이유도 이렇듯 6·3학생운동이 진행되면서 정권 자체에 대한 반대를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6·3 학생운동은 초기단계에서는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반대한다는 점을 가장 부각시키고 있었다. 6·3 학생운동의 출발점이었던 3·24시위에서 학생들은 “한·일굴욕외교 반대”, “제2의 이완용을 소환하라”, “나라 파는 한·일회담을 즉각 중지하라”, “미국은 한·일회담에 간섭치 마라”는 구호를 내세웠다. 여기에서도 드러나듯이 시위의 초점은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강행한 박정희정권의 ‘굴욕외교’에 맞춰져 있었다.
데모학생들의 동향과 의사를 잘 반영해주었던 당시 동아방송에서 전한 3·24 주동학생들의 생각을 통해서 보면 3·24시위는, ① 한·일회담에 임하는 박정권의 굴욕적 자세에 대한 사전적 경고, ② 민족적 주체성을 유지하기 위한 구국항쟁, ③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한국민족의 정당한 경고, ④ 현 위정자에 대한 분노에 찬의사표시였다.
또한 학생들이 요구한 사항도 ① 군사혁명 직후 기도했던 외국 차관단을 다시 만들고, ② 실질적인 내핍생활을 제도화하고, ③ 매판자본을 민족자본화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고, ④ 기존 민족자본을 총동원하여 생산부문에 투자할 것 등 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학생들은 심각한 경제문제를 우려하면서 민족자존의 민주주의를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박정희정권도 6·3 학생운동의 초기단계에서는 학생들과의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3월 26일 문교부와 학생대표의 면담에서 학생대표들은, ① 굴욕적 한·일회담의 무조건 중지, ② 체일 대표 소환, ③ 박대통령과의 면담, ④ 연행된 학생의 즉시 석방을 요구했고, 이에 정부는 김종필을 소환하고 연행학생을 석방하는 등 학생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한편 박정희 대통령과의 면담을 주선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박정희정권은 결코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중단할 수는 없었다. 한·일회담은 박정희정권의 독자적 결정 영역만이 아니라, 미국의 동북아시아 전략과 관련히여 추진되었으며, 국내적으로도 정치적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경제개발과 한·일경제 협력문제 등 경제적인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된 정권의 운명을 좌우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정희정권으로서는 연행학생을 석방하고 김종필을 일시 소환하는 등 미봉적 조치를 취할 수는 있었으나 한·일회담 자체를 중단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므로 박정희정권과 학생들 간의 대화는 처음부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박정희정권의 대화노력이 근본적인 태도의 변화와 무관한 정치적 제최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면서 6·3 학생운동은 더욱더 전면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 고조되었고, 마침내 6·3 학생운동은 박정희정권 자체에 대한 항거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러한 성격 변화가 구체적으로 드러났던 것이 바로 5·20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이었다.
5월 20일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선언문에서 학생들은 5,16을 군부쿠데타로 규정하고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정권의 정통성을 근원적으로 부정하였다. 당시 신문은 이날의 학생시위에서 제기된 학생들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4월혁명의 참다운 가치성은 반외압세력·반매판·반봉건에 있으며 민족민주의 참된 길로 나가기 위한 도정이었다. 5월 군부쿠데타는 이러한 민족민주이념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었으며 대중탄압의 시작이었다.
군사정권은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말살했으며, 모든 부정과 부패를 조작하였으며 민족적 민주주의는 정보정치를 합리화하기 위한 가면이었다.
우리는 전 민족의 양심이 이러한 반역적 범죄행위를 묵과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한다. 우리는 오늘의 이 모든 혼란을 민족적 자립만이 해결할 수 있음을 재확인한다. 우리는 외세의존의 모든 사상과 제도의 근본적 개혁 없이는, 전체 국민의 희생 위에 홀로 군림하는 매판자본의 타도 없이는, 외세의존과 그 주구 매판자본을 지지하는 정치질서의 철폐 없이는 민족자립으로 가는 어떠한 길도 폐쇄되어 있음을 분명히 확인한다.
(중략)
이날학생들은,
1. 일본 예속으로 직행하는 매국적 한 · 일굴욕회담을 전면 중지하라.
1. 농민 · 노동자 · 소시민의 피눈물을 밟고서 홀로 살쩌만 가는 매판성 악덕재벌을 처형하고 몰수하라.
1. 5,16 이래의 온갖 부정부패사건을 자진폭로하고 그 원흉을 조사 처형하라.
1. 불법 상행위 를 자행한 일인 상사를 즉각 추방하고 그 주구와 방조를 각 처형하라.
1. 학원사찰을 비롯한 온갖 민족분열공작을 자진폭로, 그 총지휘자를 처형하고 반공, 방첩에 전력을 경주하라.
1. 5월 군사정부는 5,16 이래의 부정, 부패, 독선, 무능, 극악의 경제난, 민족분열, 굴욕적 한·일회담 등 역사적 범죄를 자인하고 국민의 심판에 부쳐라.
1. 5,16 이래 구속된 정치범을 즉각 석방하라.
1. 우리 민족적 양심의 학생과 국민은 우리의 정당한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피의 투쟁을 계속하려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날의 선언문과 결의문에서 지적된 박정권에 대한 비판은 “5·17을 성토한다”는 제하의 성토문에서 더욱 분명하게 기술되었다.
지금부터 3년 전 1961년 5월 16일 새벽 총성과 함께 이 나라의 모든 권력은 일군의 청년장교들에게 장악되었다. 그들은 전국 방방곡곡에 ‘혁명’을 공문으로 시달하고 온갖 화려한 형용사로 된 혁명공약, 갖은 환상을 나열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비롯한 각종 계획을 발표하고 모든 정의와 민족정기를 혼자 독점하면서 ‘세 대교체 ’, ‘체질개선’, ‘재건’, ‘인간개조’, ‘민족적 주체성', ‘민족적 민주주의’ 등 온갖 고귀한 말을 남발하였다. 그리고는 군사혁명정부와 그의 정책에는 한마
디의 비판도 용서하지 않는 철저한 장막을 쳤다.
그로부터 3년, 무비판의 뒷장막에서 온갖 화려한 계획과 공약 뒤에 도사리고 있는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권력기관의 모골이 송연한 공포정치와 수도방위사령부 등의 총칼의 보호를 받으면서 너무나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고 역사적 퇴보를 이 나라 민족사에 강요하였다······. 반민족, 탄압, 기만, 부정, 무능, 부패정부에게 양심적 국민은 무엇을 선사할 것인가?
6·3 학생운동이 이렇듯 박정희정권의 치명적 약점인 정치적 정통성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자 박정희정권도 강경진압태세로 돌변하여 시위학생들에 대한 폭력적 진압을 강행딴 한편 학생시위를 용공으로 몰려는 이데올로기 공세를 병행하였다. 이에 ‘한국학생총연합회’는 장례식 시위 직후인 5월 22일 “본회는 여하한 정치성을 띤 단체가 아니며, 또 어떠한 정치단체의 사주를 받은 일도 없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적극적 방어에 나섰으며, 5·25 ‘난국타개궐기대회 구국비상결의선언’에서는 ‘부정부패 규명’, ‘법원난입테러군인 엄단’, ‘구속학생 석방’, ‘망국 독점매판자본 몰수’ 등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가 아닌 포괄적인 항목을 박정희정권에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6월 2일의 시위에서 학생들은 “우리는 현 정권의 단말마적 횡포와 처절한 집권욕을 좌시할 수 없으며, 헌정을 배신하고 정권욕에 광분하는 현 집권자들의 계속적인 집권을 묵인하기에는 너무나 조국의 배고픔을 참을 수 없다 ····· .전대미문의 가공할 부정·부패·불신·악덕재벌행패 간악한 이 모든 정치적 퇴폐는 행동의 전위에 선 우리들과 전 국민의 과업으로 요구되는 박정권 타도의 이유이다”라고 선언하고, “주관적 애국심이 객관적 난국임을 직시하고 박정권은 하야하라”는 등의 구호를 내세웠다. 이러한 추세는 6월 3일을 기하여 “박정권 퇴진하라”는 대규모의 전국적인 반정부학생데모로 곧 6·3 데모로 폭발되어 군사독재의 기반을 흔들었다.
이와 같이 1964년의 학생운동은 초기에는 박정희정권의 굴욕외교에 항의하는 시위운동으로 전개되었으나 5·20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과 6·3 데모를 계기로 박정희정권 타도운동으로 발전되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5,16쿠데
타를 4,19혁명을 짓밟는 반민족적·반민주의적 폭력으로 규정하고 박정희정권을 폭력에 기반한 신악집단으로 규정함으로써 4,19혁명의 계승임을 자부하였다.
한편, 박정권 퇴진을 요구얀 6월 3 일의 전국적인 반정부 학생데모가 전개되자, 박정희정권은 계엄령을 발동하고 6·3 학생운동을 전면적으로 압살하였다. 이로써 박정희정권은 4,`9혁명을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4,19혁명을 계승한 6·3 학생운동까지 폭력으로 짓밟은 반역사적 정권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게 되었던 것이다.
굴욕외교 반대투쟁에서 박정권 퇴진투쟁으로 확대된 6·3 학생운동은 6월 3일에 발동된 계엄령으로 인하여 일시 중단되었다. 6·3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학생지도부는 대량 검거되고 내란죄 등으로 구속되었다. 그러나 박정권은 계엄령을 언제까지나 지속할 수는 없었고, 학생들도 언제까지나 숨을 죽이고 있지는 않았다. 1965년의 비준반대운동은 1964년의 6·3 학생운동의 맥을 이은 운동이었다.
1965년 3년 24일 제2선언문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략)
위대한 전 민족양심은 이제 구국항쟁의 햇불을 높이 올리며, 반외압세력·반봉건·반매판의 3월 투쟁이 기아와 질곡 속에 매몰된 조국을 발전적으로 변혁시키려는 엄숙한 역사적 요청이었음을 다시 한 번 천명한다.
민족적 양심세력의 무자비한 압살재 치기만만한 공갈로서 참된 3월의 추억을 중상한 현 정권은 사상공전의 정치적 공포주의의 엄호사격 아래 강도 일본과 매국적 한·일흥정을 계속 강행하고 있다.
(중략)
이러한 반민족사적 흉계에 신음하는 조국의 현실에 직면하여 우리는 역사적 사명감을 통감하고, 앞으후 여하한 망국책동도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 우리는 외세의존의 모든 사상과 제도의 근본적 개혁 없이는, 전체 국민의 희생 위에 홀로 군림하는 매판자본의 타도 없이는, 외세의존과 그 주구 매판자본을 지지하는 정치질서의 철폐 없이는 민족자립으로 가는 어떠한 길도 폐쇄되어 있음을 분명히 인식한다. 민족적 긍지와 이익을 비판하고 일본 예속화를 촉진하는 매국적 한·일흥정의 즉시 중단을 엄숙히 요구한다. (후략)
3월 31일 전남대 총학생회는 ‘매국외교 결사규탄 성토대회’를 개최하였고 4월부터는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매국외교반대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시기 학생들의 주장은 한·일협정 가조인과 조인 반대, 그리고 한·일협정 비준반대로 요약된다. 한·일협정 국회비준 후인 65년 8월 17일의 시위에서 학생들은 “일당국회 해산하고 총선거 실시하라”, “매국협정 폐기하라” 등의 주장을 하였다.
한편 당시 국민들은 6·3 학생운동에 대하여 학생애국운동의 전통 속에서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3·1 운동 때의 학생들의 활동, 특히 3월 1일 이전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광주학생운동, 민주주의 최전선이 좌초되었을 때에 일어난 4,19의거”라는 학생애국운동의 계승으로서 1964년 6·3 운동과 1965년의 비준반대투쟁을 규정하고, 박정희군사 독재정권에 대한 정당한 저항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세 속에서 학생들은 야권의 소극적 자세를 질타하면서 사회 각계의 양심적 지도층의 지지와 후원하에 힘을 모아갔다. 그러나 대학교에 정치방학을 강제한 정부는 7월 14일 공화당만의 비준동의안 처리에 이어 8월 14일 역시 공화당 단독으로 한·일협정 비준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학생들은 ‘정치방학’이 끝난 직후부터 한·일협정 비준무효화투쟁을 전개하는 등 박정희정권에 대한 반대투쟁을 계속 확산시켜나갔다. 8월 24일 학생들의 시위는 점점 거세게 확대되어갔고 8·.26투쟁을 계기로 사태가 1964년 6월 2, 3일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자 8월 26일 박정희정권은 전격적으로 위수령을 발동하였다. 65년도에는 위수령 이후에도 시위가 있었지만 굴욕적 한·일협정반대와 박정권 반대투쟁이 전면적으로 재개되지는 못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6·3학생운동은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투쟁에서 비롯하여 박정희정권에 대한 반대투쟁으로 변화되었다. 특히 6·3 학생운동은 박정희정권 반대투쟁을 통하여 5,16쿠데타로 부정당한 4,19혁명을 역사적으로 복원, 계승하였으며, 1919년 2·8독립선언으로 시작된 애국적 학생운동의 역사적 흐름을 계승하여 학생운동의 민족사적 지위를 밝히는 데 중요한 계기로 되었다.
여러 성명서가 증거하고 있는 바와 같이 6·3 학생운동은 조국의 민주주의와 민족자존을 목표로 하고 있었고,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민족자존을 포기한 박정희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하여 투쟁하였던 것이다. 6·3 학생운동이 역대 군사정권하에서 역사적 조명을 받지 못한 채 묻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러한 상황 때문이었다.
6·3 학생운동이 전개된 지 어언 30년, 그간 우리 사회는 엄청난 격변의 세월을 겪었다. 18년 동안의 박정희군시독재정권이 붕괴되고 뒤를 이어 등장한 전두환정권도 6월항쟁으로 끝났다. 그리고 노태우정권의 과도기를 거쳐 우리는 오늘
역사적인 문민정부시대를 살고 있다.
오늘날 문민정부가 추구하는 민주주의와 민족자존은 바로 6·3 학생운동이 추구했던 이념이었다. 6·3 학생운동은 군사독재에 대한 최초의 항쟁이었으며, 문민정부 수립을 위한 시원적인 운동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6·3 학생운동은 민족운동사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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