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학생운동사

제1부, 제 1장 6.3학생운동의 사회 · 정치적 배경 (2)

63동지회 2024. 1. 21. 15:52

제 1장 6.3학생운동의 사회 · 정치적 배경

     2. 미국 · 일본의 한반도 전략과 한 · 일회담

     18년 간의 장기집권 중 박정희정권이 가장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던 것은 첫번째 임기 4년 동안이었다. 6.3 학생운동과 월남파병 반대투쟁이 그것이었다. 이중에서도 6.3 데모가 월남파병문제보다 훨씬 심각했다. 굴욕적 한 · 일협정문제를 둘러싸고 연인원 35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토론, 성토, 시위, 집회, 항의에 참가한 6.3 학생운동은 6 .25전쟁 이후 한국이 경험한 최초의 폭발적이고 대중적인 정치투쟁이었다.
     6.3 데모가 이렇듯 폭발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웃지 못할 사건들도 발생했다. 1964년 공보부는 한국국민의 99.1 퍼센트가 궁극적으로 한 · 일관계의 정상화를 지지한다는 여론조사를 발포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시기에 『뉴욕타임스』는 굴욕외교 반대투쟁을 “일본의 가혹한 통치를 경험한 한국사람들이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으로 일본에 반응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굴욕외교 반대투쟁은 일본에 대한 한국민의 과잉반응도 아니었고, 국민 대다수가 찬성한 것도 아니었다. 한 · 일협정은 한 · 일 국교정상회를 통해 아시아 · 태평양 전략구도를 완성하려던 미국의 구상이 관철되는 것을 의미하며, 또한 이를 통해 권력의 기반을 다지고 경제개발의 자원을 확보하려는 박정희정권의 급박한 정치 · 경제적 요구가 관철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대일굴욕외교에 대한 반대는 곧바로 박정희정권에 대한 항거였으며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외세의 부당압력에  대한 항의였다.

     1) 한 · 일회담의 경제적 배경

     경제적 측면에서만 본다면 한 · 일협정의 필요성은 이승만정권 후반기부터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1958년부터 계속된 만성적 재정적자로 인해 미국은 무상원조를 줄이고 차관으로 전환하였는데 정부는 줄어든 해외자본을 충당할 수 있는 곳으로서 일본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은 박정희정권이 들어서면서 더욱 급하게 전개되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정권으로서는 정통성을 보완하기 위해 경제성장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경제성장에 필요한 해외자본에 대한 요구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정권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교 공화당에 대한 간접적인 자금원을 확보하며, 급속히 줄어드는 미국의 원조를 대체하기 위해 일본으로부터의 자금유입을 간절히 바랐다. 한편 일본은 그 사이 급속히 성장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대외적 팽창욕구를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미국과 일본, 그리고 박정희정권은 각각 다른 이해관계 속에서 한 · 일회담 타결을 서두르게 되었다.
     이렇듯 한 · 일간의 국교정상화는 미국이 한국에서의 지출을 줄이면서도 극동의 안정이라는 목적을 유지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만약 일본이 한국에 자본을 제공한다면 미국은 한국에 대한 원조를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한 · 일간에 경제적 관계를 확립하는 것은 한국상품에 새로운 시장을 제공하는 것이기도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은 미국 국제발전처 위원장인 벨의 발언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벨은 1964년 초 한국의 경제성장과 ‘새로운 경제원조원’을 이유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원조가 경감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서 새로운 경제원조원이 일본을 가리키는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실제로 한 · 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준비가 진행되는 동안 벨의 지적대로 한국에 대한 미국의 무상원조는 급속히 삭감되었다.  1962년 1억 6천 5백만 달러였던 것이 1963년에는 1억 l천9백만 달러후 1964년에는 8천8백만 달러후 그리고 한 · 일협정이 체결된 1965년에는 7천 1백만 달러로 줄었던 것이다.
     한국에 대한 일본 자본진출의 전환점이 된 것은 1965년 한 · 일협정 조인과 청구권 타결이었다. 그때까지 한국경제는 전적으로 미국에 의존해 있었는데 이 일본이 이 종속적 한국경제에 개입하게 된 것이다.
     대일경제개방은 1961년 이래 한 · 일조약의 체결을 위해 로비활동을 벌여왔던 매판재벌들에게는 하나의 행운이었다.. 또한 한국정부에게도 월남전 참전으로 인해 북한과 새로운 적대관계가 유발될 경우 필요한 방어조치일 뿐만 아니라 장래의 정치적 동맹을 위한 일보 전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65년 이후 일본정부는 대한국 외교에서 국가의 정치적 이해와 민간부분의 경제적 이해를 조정하기 위한 위원회 체제를 확립했다. 그것은 처음엔 한 · 일 각료회의와 한 · 일 경제위원회로 나타났고,  1969년 1월 초에는 기시 전 수상을 의장으로 한 한 · 일 협력위원회가 추가로 설치되었다. 일본 자본가들은 당연히 이런 삼중구조를 경제적 투자에 대한 정치적인 보장으로 간주했다.
     제 1 차 각료회의(1967.8)에서 사토내각은 한국에 2억 달러의 상업차관을 제공하는 데 동의했으며,  제2차 각료회의 (1968.8)에서는 9천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그리고 제3 차 각료회의(1 969. 8)에서는 포항종합제철공장 건설에 협조함과 동시에 500만 달러의 상업차관을 공여할 것을 동의했고, 제4차(1970. 7) 각료회의에서는 4개의 중공업 플랜트 건설과 중소기업, 농업, 수출산업 발전을 위한 재정지원으로 총 1억 6천만 달러의 차관을 공여할 것에 동의했다.
     정부차원의 ‘경제협력’이 진행되면서 사적 영역에서도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일본의 대한국 직접투자액은 1965년 120만 달러에서 1969년 2천7백만 달러로 증가했으며, 그 필연적 결과로 한국의 대일무역 격차는 같은 기간에 3.8대 1에서  6.7 대 1 로 급증했다.


     2) 한 · 일회담의 군사 · 정치적 배경

     1950년대의 세계는 냉전의 시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협력했던 미국과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동유럽 처리문제나 독일문제 등의 쟁점을 둘러싸고 대립하였으며, 각각 핵무기의 보유를 배경으로 세계를 양
분하였다. 1950년대의 세계는 이러한 미 · 소관계를 기축으로 하여 전개되었다.
     미 · 소 양국이 세계를 분할하였다고는 하지만 역시 중심은 미국이었다. 미국은 군사 · 경제력에서 소련을 앞섰고, UN 등 국제외교 영역에서도 압도적인 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미국의 헤게모니는 195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도전받기 시작하였다. 먼저 기축통화인 달러가 흔들렸다. 미국의 지원에 의해 복구된 독일과 일본은 매우 빠른 속도로 성장했으며 달러를 위협할 정도까지는 안 됐지만 잠재적인 불안요소로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에 굴욕적 영향력을 키워  중국도 새로운 강자로 등장했으며,  1960년대로 접어들어서는 미국의 영향권하에 있던 대부분의 제 3세계 독재국가들에서민주화운동이 대두되었다.
     이러한 몇 가지 요인들이 1960년대의 양상을 1950년대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이 처 내외적 도전에 직면하여 대외적으로는 ‘진보를 위한 동맹’을 내세우고,  대내적으로는 뉴프론티어를 통해 ‘황금의 1960년대' 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지만, 실제로는 실업의 증대, 달러위기와 국제수지의 악화 및 그로 인한 단일 헤게모니의 퇴조라는 위기적 상황을 막아내지는 못 했다. 특히 미국의 영향하에 있던 국제연합까지 구성이 바뀌어 비동맹 반식민지주의가 공공연게 선언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점증하는 이해와 이를 실현할 자원의 고갈이라는 딜레마에 빠진 미국이 돌파구로 찾아낸 것이 바로 집단안보체제였다. 미국은 원조의 감소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미국의 세력권으로 확보해야만 되었는데, 이를 위해 일본으로 하여금 경제 · 군사적 부담을 감당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리고 또한 이것을 위해서 한국 · 일본 · 대만을 군사적으로 결합시키려 하였다.
     사실 미국은 이미 6 .25전쟁 때부터 미국을 축으로 하는 한국과 일본의 군사적 결합을 필요로 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미국이 구상하고 있는 동북아전략은 무엇이었으며 한국은 그 구상에서 어떤 지위와 역할을 요구받았는가?
     1940년대 후반 이래 미국의 아시아정책은 중국과 소련의 힘을 견제하여 태평양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동북아지역 내의 군사·경제적 세력을 배치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한국과 일본에 대해 일정한 역할을
담당할 것을 요구해왔다. 지역통합전략이라 명명된 동북아 기본전략구상은 미국에 의존한 일본의 공업화와 일본의 원조를 통한 한국의 근대화를 완성하여 이들 두 나라가 극동지역에서 강력한 반공보루로서 역할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이 동북아전략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한국 및 아시아의 옛 식민지 국민에 대한 일본인의 인종적 우월감까지도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국무장관 고문 덜레스는 1950년 6월 6일자 일본에 관한 비망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중국인,  한국인, 러시아인에 대한 일본인의 인종적, 사회적 우윌감을 적절히 이용하고, 일본인에게 자유세계의 일원으로서 공산세계보다 우월한 진영과 평등하게 협력하고 있다는 확신을 불어넣어줄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은 1948년 11 월, 점령된 일본을 패전국이 아니라 미세력권의 강력한 군사동맹국으후서 그리고 훌륭한 우방국으로서 대우하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은 49년 이래 미국의 아시아 · 태평양전략에서 중요한 축으로 등장했다.
     중국의 공산화를 계기로 동북아시아의 군사적 긴장은 계속 고조되었다. 그와 동시에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관심도 더욱 높아졌다. 1950년에는 한 · 미군사원조협정이 체결되고, 미국의 고위 군사지도자(합참의장 브래들리 ,해군참모장 셔먼, 육군참모장 콜린스,  공군사령관 반멘버그 등)의 한국 군사시설 시찰이 이어졌다.
     1950년 북한이 도발한 6 .25전쟁은 일본의 대한 군λh 외교관계에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1951년 9월 8일 미국과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오페라하우스에서 평화조약에 서명하고 군사동맹을 맺었다. 이날 요시다 수상은 에치슨 국무장관과의 각서교환에서 일본의 한국방위 개입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에치슨 · 요시다 각서에서 일본정부는 “일본에 미군기지가 있고 한국에 유엔군 사령관이 있는 한 주일 미군기지는 한국방위 임무를 계속해서 지원할 것” 이라고 동의하였던 것이다.
     6 .25 전쟁으로 인해 한반도에 대한 일본정부의 관계는 명확하게 설정되었다. 한국에게 일본은 한 · 미군사동맹의 기지를 제공하는 군사적 후방이자 군대집결지이며, 특별한 병참기지였다.
     미국은 6 . 25전쟁 후 일본을 아시아· 태평양전략을 실현하기 위한 병참기지로 상정하였는데, 이는 곧 일본이 아시아 인접국에 대해 제2차 세계대전 전의 수준으로 힘의 우위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위상에 대한 미국의 규정이 이렇게 시시각각으로 변하자 사태의 추이를 깨닫게 된 한국정부는 태도를 바꿔 그때까지 고수해온 권리 ‘요구’의 입장에서 ‘도움’을 구하는 입장으로선회하였다.
     일본은 처음부터 일본인의 한반도 강탈에 따른 한국정부의 재산권 요구를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한반도에 대한 그들 자신의 반대권리를 내세워 한국 내 재산의 85퍼센트 소유권을 주장하기까지 하였다. 결국, 일본은 ‘경제협력’이라는 명목으로 한국정부의 ‘재산권과 배상청구권’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과 오히라가 청구권에 관한 각서에 서명함으로써, 한국정부는 미국의 전반적인 동북아시아전략 구도 속에서 일본과 유착할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 미국의 아시아전략은 중요한 장애에 부딪혔다. 한국의 반일감정이 그것이었다. 미국은 통합된 한 · 미 · 일 군사동맹만이 전 아시아 반공군사동맹의 축이 될 수 있다는 자신의 전력구상을 이승만에게 납득시킬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한국국민의 반일감정은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고 이승만에게도 그의 권위주의적 독재정치로 인한 부담을 감소시켜줄 수 있는 민족적인 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지역통합전략의 또 하나의 장애물은 일본에 있었다. 1950년대 초 일본의 산업구조는 아직 취약했으며, 군사적으로도 평화헌법 제 9조 “다른 잠재적 전쟁요인 뿐 아니라 육 · 해 · 공군력은 결코 보유할 수 없다. 국가의 교전권은 승인될 수 없다는 규정에 발이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미국의 전략구상, 즉 한 · 미 · 일 지역통합은 당분간 2중 분업의 형태로 추진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분업은 지역통합에 비해 여러 가지로 불편했으며 불필요한 많은 비용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미국으로서는 당분간 한 · 미 · 일 분업체제를 유지하되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분업체제를 한 · 미 · 일 집단안보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구체적 목표를 갖게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한국과 일본 사이에 국교가 정상화되어야 했다 굴욕적 한 · 일회담이 강행된 데는 이러한 미국의 전략구도가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