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6.3학생운동의 사회 · 정치적 배경
3. 박정희정권의 한 · 일굴욕회담 강행
1961 년 5 .16쿠데타가 발생하자 미국의 대한정책은 아연 활기를 띠었다.5.16 쿠데타가 발생한 직후 미대사관이나 주한미군사령부는 “합헌정부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지만. 미국무성은 쿠데타에 대해서 ‘노 코멘트’와 불간업주의를 표방했다. 미의회의 영향력 있는 의원들도 대체로 한국의 군사쿠데타에 대해 ‘ 예상하지 못했던 의외의 사태’가 아니라 오히려 ‘불가피한 것’으로 논평하기까지 하였다. "뉴욕타임스" (l 961. 6. 17)는 아예 사설에서 “혁명지도자들이 미국과 계속 협력할 것을 원함과 아울러 공산주의자들의 파괴활동 및 침략과 단호히 싸울 결의를 표명하였음은 적어도 만족스러운 일”이라고 긍정적으로 논평했다.
한편 일본 외무성도 군사쿠데타에 대해 “한 나라의 정부가 무능력한 경우 그 나라의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이 보통”이라는 식으로 논평했다. 일본의 이러한 다소 방관적인 태도는 쿠데타의 지도자가 일제 때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박정희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완전히 일변하였다. 군사정권 적극 지지입장으로 선회하였던 것이다
사태가 쿠데타 성공으로 기운 5월 18~ 19일경에는 미국도 쿠데타 지지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상황은 5.16 당시 미 CIA국장이었던 덜레스가 1964년 5월 3일 영국 BBC 텔레비 전에 출연해서 한 연설에서도 분명하게 표현된다. “내가 재직중에 CIA의 해외활동에서 가장 성공한 것이 바로 이 혁명 (5.16쿠데타)이다. 미국의 일부 지 도자가 지지하고 있던 장면내각은 이승만정권을 타도한 민중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참 위험한 순간이었다 만약에 미국이 아무것도 안했더라면 아마도 민중은 공산주의의 선전에 말려들어 남북통일을 요구하는 ‘폭도’들을 지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부는 미국에 대해 두 가지 작업을 최우선적으로 수행해야 했다. 첫째는 정치적 안정을 이룩하여 한국군과 미군의 이해관계를 일치시켜야 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대외적인 인정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른바 로스 토워 발전전략에 입각해 한국을 경제적으로 안정시키는 일이었다.
한편 195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제력의 성장과 동시에 미국과의 군사적 협력관계도 한층 긴밀해졌기 때문이다. 1956년 유엔에 가입한 일본은 미국과의 안보조약을 개정하여 신안보조약을 체결했다. 신안보조약은 자위대의 발전을 가로막는 국내의 장애요소를 경감시키는 데 목적이 있었는데, 구조약이 6 .25전쟁에 대한 일본의 계속적인 지원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개정된 신조약은 월남전이 격화됨에 따라 일본의 공식적인 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미국은 일본 자위대 본부에 설치된 미군사고문단을 통해 일본의 방위계획에 한국을 적극 고려할 것을 계속 주문했다. 1963년 2월 1일 미 국방성의 요청으로 일본 방위청이 착수한 미쓰얘三失) 연구는 한국방위에 대해 군사작전상으로 증대되는 일본의 책임을 측정할 수 있는 분명한 기준을 제공하였다.
한 · 일 국교정상화 조약의 체결에 앞서 1964년 9월 CIO(일본의 CIA)는 정부발행의 『연구보고서 』에서 한국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표명했다. “일본은 한국 방위에 필수불가결한 기지이다. 역으로 한국은 일본해양의 입구를 통제하므로 일본방위에 극히 중요하다. 역사적으로 한국이 적대세력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일본의 대외정책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메이지시대의 두 전쟁, 즉 중 · 일(청 · 일)전쟁과 러 · 일전쟁은 한국을 적대세력의 수중에 두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군사정권이 한 · 일회담을 감행한 데에는 군사정권 자체의 정치적 이해관계도 작용했다. 군정기간 중 터진 4대 의혹사건이 공화당 창당에 필요한 정치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감행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군사정권이 필요로 했던 막대한 정치자금이 4대 의혹사건으로 모두 충당되었다고 하기 어렵다. 오히려 더 은밀하고 확실한 자금원은 각종 차관이나 합작투자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른바 라베이당}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한 · 일회담은 군사정권의 정치자금 조달에 매우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할 것이 기대되었을 것이다.
한 · 일협정이 비준된 2년 후인 1967년에 전 법무장관인 김준연 의원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일본측으로부터 5개년 계획의 자금으로 1억 3천만 달러를 사전 수수했, 이와 별도로 공화당 활동자금으로 2천만 달러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동아일보", 1967년 3월 27일자). 기시 전 일본 수상과 (당시 수상의 형) 동경대 법학부 동창생인 김준연 의원은 일본의 정통한 소식통으로부터 믿을 만한 정보를 입수했다고 이와 같이 폭로했던 것이다. 이 사건은 김준연 의원이 ‘허위 사실유포’로 징역 1 년 6월을 선고받고 유야무야되었다. 그러나 그후에도 한· 일간에 정치자금 파이프가 가동되고 있다는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국제정치 · 군사적 배경하에서 한 · 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이 시작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미 · 일안보조약이 발효되기 직전인 1952년 2월에 열린 제 1 차 한 · 일회담은 일본 · 대만조약의 준비와 함께 진행되었다. 미국의 주도하에 한국 · 일본 · 대만의 결합이 추구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동맹국들의 역할을 증대시킴으로써 자신의 힘을 보충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한 · 일 국교정화와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은 이러한 맥락에서 추진되었다. 겉으로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렇듯 한 · 일 국교정상화는 일본의 자본을 한국에 진출시킴으로써 동북아시아에서의 일본의 역할을 강화시키기 위한 사전조치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1964년 1월에는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과 러스크 국무장관이 내한하여 한 ·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회담을 조속히 타결하라고 종용한 데 이어 , 9월에는 국무성 차관보 윌리엄 번디가 일본과 한국을 잇따라 방문하여 “미국은 한 · 일 국교 정상화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는 매우 적극적인 의지를 재천명하였다. 이렇듯 한 · 일협정은 미국의 아시아 · 태평양 전략구도하에서 미국과 일본의 조율을 거쳐 추진되었던 것이다.
미국에 의해 주도된 일본의 재 무장과 한 · 일 국교정 상화에 의한 한 · 일 양국의 통합적 안보체제 구축이 궁극적으로는 동북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음은 1963년 2월 일본을 방문한 질 패트릭 국방장관이 NHK - TV에서 행한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미국은 앞으로 아시아에서 한국전쟁, 대만해협분쟁과 같은 국지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그 경우 재일미군이 분쟁지(예컨대 베트남)로 이동하여 북태평양군에 ‘진공상태 ’가 일어날 수 있는데, 이를 일본이 메워야 한다 "
물론 이같은 보충이 갖는 의미를 일본은 일찍부터 간파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를 1958년 6월 한 · 일회담의 전권대표로 임명된 사와다(澤田)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청 · 일전쟁과 러 · 일전쟁은 어쨌든 일본을 위협하는 세력이 한반도에 진출해왔기 때문에 이를 압록강 밖으로 몰아내기 위한 싸움이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38션을 압록강 밖으로 몰아내지 않는다면 선조들을 대할 면목이 없어진다.이것이 일본 외교의 임무이다. 한 · 일 양국이 당면한 현안 문제도 중요하지만 38선을 북으로 후퇴시키는 노력 또한 중요하다"
사와다의 이러한 발언은 “한국이 일본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자 하는 이유는 한국의 경제적 부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점점 국력을 키워가고 있는 중국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라는 김종필의 발언과 짝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일본의 군사력 강화는 1965년 2월에 폭로된 이른바 ‘미쓰야(三失)작전’을 통해 더 분명하게 빌L혀졌다. 미쓰야작전 입안에는 미 국방차관 질 패트릭이 깊숙이 관여한 사실도 확인되었다. 미쓰얘세 개의 화살)작전이라는 명칭은 “일본이라는 활에 한국이라는 화살을 재어 대륙{중 · 소)으로 향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미쓰야 작전계획의 입안을 총지휘한 육군 중장 요시오 다나카는 의회에서 “미쓰야작전이 단순한 연구가 아니라 실전을 위한 계획이었다”고 밝혔다.
미쓰야계획은 제 2의 한국전쟁에 대한 대비책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있었다. 계획안에는 ‘징병, 징용’과 ‘전국적 전시체제’와 같은 법들이 입안되어 있었다.즉 미쓰야계획은 일본 전역을 즉각적으로 완전한 전시동원체제로 전환시키는 작전계획서였던 것이다. 특기할 것은 이 계획에 따르면 일본 육 · 해 · 공군의 60퍼센트가 남 · 서지방에 배치되는데 이 지방은 한반도와 연결되는 관문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미쓰야계획에는 특히 한 · 일 공동작전이 실시될 경우, 한국군은 유엔기 아래 작전을 수행할 것이나, 실질적으로는 일본군의 지휘를 받게 될 것이라는 구상이 들어 있었다. 미쓰야계획이 단순한 연구가 아니라 실제적인 작전계획이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데서도 확인된다.
일본자위대는 1961년 11월 일본 이와테현(岩手縣)에서 1만 2천 병력과 2천 대의 차량을 동원한 군사연습을 실시했는데 데, 이는 한반도의 38선 돌파를 상정한 산악전 연습이었던 것으로 알려 졌다. 그리고 1962년 10월에는 일본 해상자위대가그 대한해협 봉쇄작전을 실시하였으며, 이에 호응하여 한 · 미 공동의 해협봉쇄 연습도 행해졌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보아, 한 · 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일본의 관심이 어떠하였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62년 10월 일본 방위청은 한 · 일 국교정상화에 수반되는 군사적 과제로서 다음의 다섯 가지 점에 관해 검토를 시작였다.
@ 비상시에 있어서 대한해협의 공동봉쇄
@ 군사계급제도를 한국 · 대만과 일치시킬 것
@ 한국군 병사의 훈련·양성
@ 한국군 병기의 수리 및 보급
@ 방위주재관의 서울 파견 및 한 · 일 양국 군인의 상호교류
이러한 구상은 한 · 일협정이 비준된 후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다 1967년 9월부터 일본인 방위주재관이 서울에 상주하였으며, 1968년 10월부터 자위대 막료장의 방한이 정기화되었다. 1971 년부터는 한국 국방대학원 연수단과 일본 방위연구소의 현지연수가 정기화되었고, 1975년부터는 퇴역 고급장교들의 상호교류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미국 · 일본 · 한국을 하나의 집단안보체제로 엮는다는 미국의 아시아 · 태평양 구상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시작되어 한 · 일 국교정상화를거치면서 구체화되고, 1970년대에 접어들어 본격적으로 실현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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