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
7. 위수령 발동 이후의 전개상황
1) 무장군인 학원난입과 학원방위단 결성
위수령 발동 전후 발생한 첫번째 사건은 연대와 고대의 무장군인 난입사건이었다. 26일 오후 2시 15분경 6대의 군 트럭과 스리쿼터에 분승한 200여 명의 무장군인들이 연대 정문에 몰려와 그중 50여 명이 학교 구내로 몰려들어가교 150di 명은 교문 근처에서 최루탄을 터뜨리며 구경하던 시민과 학생들을 연행했다. M1 소총에 대검을 꽂고 학교 구내에 들어간 50여 명의 무장군인들은 교실과 교정에 있던 학생들이 뒷산으로 달아나자 학교에서 물러났다.
연대에 이어 고대에도 무장군인이 난입했다. 고대생 1천여 명은 위수령 발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26일 2시 반쯤에 교문을 뛰쳐나와 안암동로터리까지 나갔는데, 300여 명의 헌병들이 최루탄을 쏘는 바람에 쫓겨 일단 교문 안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3시경에는 10여 대의 군용차에 분승한 200여 명의 무장군인들이 25 일에 이어 또다시 고대 구내에 들어와 투석한 학생 수십 명을 연행했다. 이러한 군인의 학원침입에 분개한 고대생 1천여 명은 27일 오전 ‘학원방위 학생총궐기대회’를 열어 이를 규탄하교 ‘학원방위단’을 결성하여 “학원을 분쇄한 군은 즉시 사과하고 본연의 임무로 복귀하라”고 성토하였다.
8월 29일 서울대생 400여 명도 교정에서 ‘전서울대학학원방위단’을 결성하였다. 학생들은 “정부가 나치나 파시스트 정권하에서도 감히 하지 못하던 학원강간을 다반사로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휴교조치엔 구국등교후 괴뢰총장 임명에 불승인으로 맞설 것임을 고한다”고 선언했다 . 이어 학생들은 “학원을 분쇄한 군은 즉시 사과하고 본연의 임무로 복귀하라”는 등 6개 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한편 27일 무장군인 난동사건에 대해 김흥일 등 예비역 장성 11 명은 ‘국군장병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호소문에서 “조국 수호의 간성인 군은 지금의 비상한 현실을 직시하고 정치에서 중립하여야 할 것이다”고 호소했다. 이날 호소문에 서명한 예비역 장성들은 김흥일, 최경록, 박병권, 송요찬, 손원일, 장덕찬, 김재춘, 백선진, 이후 조홍만, 박원빈 등이 있다. 또한 이대생 4천 여 명. 성대생 1천여 명과 연대생 2천여 명도 각각 교내에서 성토대회를 열어 무장군 군인 난입과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담화를 규탄했다.
이에 대해 정부는 27일 오전 서울시내 시위 주동학생 12명을 제적하고, 28명을 무기정학에, 4명을 근신 처분에 처했다. 이로써 데모주동 혐의로 징계 처분된 학생은 60여 명에 달했고, 구속학생은 71명이었으며, 제적학생은 32명이었다.
8월 31 일 서울중부서는 동국대 데모를 주동한 혐의로 권석충(정외 3)을 반공 및 집시법 위반혐의로 구속하였는데, 데모학생 중 반공법 위반혐의로 정식 구속되기는 권석충이 처음이었다.
2) 문교부의 ‘정치교수’ 징계지시와 연대 · 고대의 휴업렁
8월 27일 오전 정부는 서울대 신태환 총장을 면직하였다. 이에 서울대 각 단과 대학장들도 총사임했다. 신태환 총장은 이날 “대학의 자율성을 침해하지 말라”는 사퇴성명을 냈다. 신태환 총장 후임에는 학생들을 탄압히는 데 앞장섰던 법대 유기천 학장이 임명됐다. 이어 이날 오후 정부는 대학가 데모사태의 책임을 물어 윤천주 문교부장관을 해임하고 후임에 권오병 법무부차관을 기용했다. 새 장관의 부임과 더불어 문교부는 각 대학에 데모학생 엄중처벌과 데모선동교수의 명단제출 및 징계 등의 지시를 내렸다.
각 대학의 데모학생과 ‘정치교수’에 대한 징계문제로 진통을 겪는 가운데 서울대 11개 단과대학 대표들은 27일 모임을 갖고, ‘총장과 학장의 사임거부’와 유기천 총장의 취임거부를 결의하교 아울러 유 총장 취임문제와 학생처벌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전교생이 자퇴하겠다고 결의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진행되자 서울대는 11개 단과대 학생회장 전원을 무기정학 처분했다.
8월 28 일, 서울지검은 학생시위의 주동자와 배후 조종자 92명의 명단을 작성하고 이중 이미 구속된 12명을 제외한 80명 전원을 체포하도록 경찰에 지시했다. 한편 김홍일, 박병권, 박원빈 등 조국수호협의회 회원 3명도 박정희 대통령
을 이적행위자라고 비방했다는 혐의로 29일 전격 구속됐다.
군을 동원해 학생시위를 진입한 정부는 반정부운동의 진원지인 대학의 구조적 개편을 위해 학원에 대한 강압적 숙정작업에 착수했다. 31일 오후 3시 정일권 국무총리는 학생시위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담회를 뒷받침하는 구체적 시정 방침을 밝혔는데, 7개항의 정부 방침은 다음의 내용으로 학원에 대한 강경대응책을 체계화한 것이었다.
• 어떠한 불법적인 데모 행위도 이를 일체 용인치 않을 것이며, 데모 만능의 망국풍조를 철저하게 뿌리뽑겠다.
• 데모의 주동지는 물론 선동자와 배후인물에 대해서는 끝까지 색출하여 법에 의해 처단한다
• 학생데모를 선동하는 정치교수나 데모주동학생들의 처벌을 기피하는 교직자에 대해서는 그 책임을 추궁하고 응분의 조치를 취한다.
• 끝까지 정부방침에 불응하고 이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학원에 대해서는 폐쇄조치까지 불사한다.
이렇듯 정부는 시위 주동학생에 대해 강력한 처벌지시를 계속 내렸지만 연대, 고대 등 일부 대학에서는 “우선 학원을 정상화한 후에 학생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징계조치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에 문교부는 9월 4일 “학생데모의 뿌리를 뽑겠다”는 강경책의 일환으로서 “데모주동학생과 이른바 정치교수 징계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 연대에 대해 6일부터 무기휴업령을 내렸다. 권오병 문교부장관은 “그동안 학교 당국이 학생데모에 주동역할을 한 학생과 선동교수들을 자율적으로 제거해주길 기다리고 있었으나 처리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데모의 요인이 남아 있는 한 휴업을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다.
한편 9월 6일, 8월 24일부터 맹휴에 들어간 서울법대생 500여 명은 학생총회를 열어 맹휴를 계속할 것을 결정하고, 유기천 총장의 사퇴와 학생회장 장명봉의 복적, 연세대와 고려대의 휴업령 철폐 등 8개항을 결의하고 해산하였다. 이날 맹휴 주동혐의로 동대문서는 4명을 연행하였고, 이들 중 3명은 학교 딩국에 의해 제적 처분을 받았다.
같은날 서울상대생 400여 명은 ‘한·일협정 비준무효화 및 학원방위궐기대회’를 열고 정부의 연·고대에 대한 휴업조치에 대해 “대학의 자유를 말살하고 학원을 정치도구화하려는 조처”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연대와 고대의 무기휴업에 동정하여 휴업령이 풀릴 때까지 무기한 동맹휴학을 결의했다. 학생들은 궐기대회에서 한·일협정 비준무효, 위수령의 즉각철회, 구속학생의 즉시 석방, 우국교수들에 대한 파면조치의 철회, 유기천 총장의 자진사퇴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교 최루탄·군화·경찰봉에 대한 화형식을 가졌다.
학생들에 대한 강압조치와 더불어 이른바 ‘정치교수’들도 강압정치의 희생물이 되었다. 9월 8일 오후 중앙교육공무원 특별징계위원회에서는 서울대법대의 황산덕 교수와 서울대 학생처장 김기선 교수를 파면조치했다. 학생데모를 선동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한 서울대의 양호민 교수, 연세대의 서석순, 이극찬교수와 고려대의 김성식, 김경, 이항녕 교수 등도 ‘정치교수’로 지목되어 결국 교직을 떠나게 되었다. 이들을 포함하여 문교부의 압력으로 사표를 제출한 교수는 전국적으로 9개 대학 18명이나 되었고, 파면당한 교수는 서울대의 두 교수와 대구대의 박삼세 교수 등 3명이었다{서울대의 황산덕 교수와 김기선 교수는 이후 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한다).
문교부는 정치교수로 특별히 지목한 고대의 김성식, 황경탁, 이항녕 교수와 연대의 서석순, 이극찬 교수가 각각 사임하자 9월 20일 연세대와 고려대의 휴업령을 해제하였다. 문교부는 “그간 양 대학이 정부가 지시한 데모요인 제거에 적극협력하여 현 상태로는 개교하여 정상수업을 할 수 있디는 확신을 얻었으므 휴업령을 해제키로 한 것”이라 밝히고, 징계대상교수 중 위의 5교수를 제외한 16명의 ‘정치교수’에 대해서는 “이번만은 그대로 방임하나 앞으로 새로운 데모의 요인이 된다면 다시 한 번 해직시키겠다”고 말했다.
9월 22일 법대생 200여 명은 학생총회를 열어 8월 24일부터 시작한 동맹휴학을 일단락지었다. 학생들은 학교 당국이 처벌학생 징계해제와 징계교수 구제 등에 대해 성의 있는 대책을 마련해주지 않을 때에는 정상적으로 등교하면서 이의 관철을 위한 투쟁은 계속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약 한 달 만에 맹휴를 푼 것이다.
8·20데모 이후 파란을 거듭했던 각 대학은 그간 도합 12명의 교수가 ‘정치교수’라는 낙인이 찍힌 채 정든 교단을 물러서야 했고, 22명의 학생들이 제적되었고 10명이 자퇴했다. 검찰 집계에 의하면 9월 28일 현재 구속된 대학생은 모두 96명이고 그 중 74명이 구속기소되었다.
3) 내란음모 · 선동 등 혐의로 수난
64년 3·24, 4·17, 5·20데모의 주동혐의로 내란죄라는 죄목하에 계엄군재에 회부되었던 민비연 1차사건에 이어 65년 9월 다시 민비연 소속회원들은 고난을 겪는다. 이른바 민비연 2차사건이 그것이다.
9월 25 일 중앙정보부는 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구회원 11명을 반공법 위반 및 내란음모 내란선동 등 혐의로 구속송치하고, 이들에게 자금을 대준 혐의로 김한림(한국기독교장로회 여전도회 서울연합회총무)을 불구속 송치하였으며, 김도현(문리대 4) 등 6명을 지명수배했다.
이들은 64년 3·24시위 이후 계속하여 한·일협정 및 동 비준무효화 데모를 조종, 선동하고 구국학생동맹을 조직하여 8월 29일 정부 전복을 기도하는 극한적인 데모를 모의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또한 중앙정보부는 이들이 코민테른을 골자로 한 선언서 등을 작성하는 한편 헝가리의거 때 사용한 소형폭탄 몰로토프 각테일을 제조, 사이다병에 폭약을 넣어 사용하기 위한 예비로 화학방정식까지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혐의로 이날 김중태(서울대 정치 4), 최혜성(서울대 정치 4), 박재일(서울대 지리4), 이수윈서울문리대), 송철원(서울문리대), 정준성(연대대학원 법1 ), 박영님t연대 철학2), 이원범(동대 행정 4), 박영호(서울대대학원 외교1 ), 우학령(서울대 지리과), 장장쉰동대대학원 법 1) 등이 검찰에 송치되었다.
민비연은 9월 16일 정부가 학교 딩국에 “정치활동을 하는 학원 내 서클을 해제시키라”는 지시를 내려 이미 해체되었다. 이때 벌써 김중태, 김도현 등 5명의 학생들은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때의 혐의 내용은 ‘한·일협정 비준을 계기로 4,19와 같은 사태를 빚어내어 정부를 전복할 음모를 꾸미는 등 학생데모를 선동’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1966년 7월 12일 서울고등법원형사부{재판장 백낙민, 배석 김진우, 박충순 판사)에 의해 전원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것은 당시 사법부가 당국의 영향을 받지 않고 의연한 자세로 판결했음을보여주는 좋은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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