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경희대학교 6·3운동
사자의 기상으후 웅대한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씨여 있고 바위틈과 우거진 숲 사이로 샘물이 흐르고 철마다 찾아드는 산새들의 지저귀는 소리, 뛰노는 다람쥐들이 어우러져 있는 고황산 기슭,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에 천혜의 명당, 학문
의 전당인 경희대학교는 위치하고 있다.
조영식 총장님을 비롯해 우병구, 심태식, 전원배, 김주수, 김찬규, 서정범, 조병화 교수님 등 훌륭한 교수들의 헌신적인 지도와 학교재단의 적극적인 교육열의로 면학분위기를 조성해온 경희대는 전국고교생을 대상으로 학력경시대회를
통하여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장학생으로 선발하여 인재 양성에 적극 노력해왔다
학생회의 활동이나 학회 및 서클활동도 각 서클별로 지도교수를 모시고 학생회관이나 일반교실 또는 노천극장, 잔디밭, 숲속에 모여 앉아 민주교육의 필요성과 시국토론을 적극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1. 6·3운동의 실상
4,19혁명에 침여하였던 교수들과 우리 학생들이 5,16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박정희군사정권을 탐탁하게 생각할 리가 없으므로 이에 대한 불만은 시 간이 지날수록 점점 증폭되어갔다. 그러던 중 1964년 3월 초부터 한 · 일굴욕외
교 반대투쟁을 위한 조직이 비밀리에 결성되어가고 있었다.
당시 한학련(한국대학생연합) 회장 이건환(경희대 총학생회장)의 주도로 1964년 3월 23일 오후 8시경 학교 부근 랑랑옥 막걸리집에 김갑중{정 4), 이재원정4), 최병도l법 4), 곽영상(법 4), 송웅달t정 4), 서재군(체4) 등이 모여 3·24데모를 결행할 것을 결의하고 고대(손옥백)와 사전 연락하여 안암동로터리에서 합류하기로 약속하였다. 이틀 후인 3월 25일 본교 교시탑 앞에 약 2천 명이 운집한 가운데 “한·일굴욕외교를 반대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낭독한 후 같은 내용의 구호를 외치며 체육대학 학생회장 서재군을 비롯한 체대생들을 선봉으로 본교 정문을 출발하여 청와대 옆 진명여고 부근까지 진출히여 서울대, 고대, 동국대생들과 함께 우렁찬 함성으로 목이 터지도록 선언문, 구호 등을 절규하였다.
3월 26일에도 이건환, 서재군, 김갑중, 이재우, 곽영상, 송웅달, 권기헨(법4), 전 권오병 문교장(당시 법무차관)의 장남 등 2천 명의 경희대학생들은 외국어대·서울대·고대·연대 등과 함께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데모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1964년 3월 25 일 저녁 중앙청에서 서울시내 대학생대표들과 정부측 대표간의 연석회의가 있었고 1964년 3월 30일에는 한학련 소속 학생대표들이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한 후 학원 복귀성명을 발표하였다.
그후 교내집회는 있었으나 시위는 소강상태를 지속하게 되었고 이에 이건환이 이끄는 공조직은 각 대학 학회 등이 이끄는 사조직으로부터 시위 주동에 적극성이 없거나 정부와 야합했다는 불신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던 중중1964년 4월 11일에는 당시 민주공화당 당의장 김종필이 학생들을 설득하였고 서울대·고대에 이어 세번째로 경희대학교를 방문하여 체육관 대강당에서 한·일회담 문제에 대해 강연을 했다.
그러나 강연 도중 학생들이 야유와 함성을 보내 강연이 중단되기도 하였으며 강연이 끝난 후에도 이재우와 김갑중 등은 “김종필 자신에게 묻는다. 그대는 제2의 매국노 이완용이가 아닌가?”라고 외치면서 “청구권문제·평화선·전관수역 내에 들어오는 어장수와 공동관리수역에 해당되는 어장수를 밝혀달라”고 질문했다. 이에 김종필 당의장은 전전긍긍하다가 참모의 귓속말을 들은 후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참 좋은 질문을 했는데 외국인과 약속시간이 박두하여 답을 못하니 양해하여주면 대학 학보사에 편지를 보내 답할 테니 추후에 읽어보라”며 강연을 끝냈다.
당시 대강당 밖에도 고성능 스피커를 장치하여 많은 학생들을 설득하려 하였으나 약 3천 명의 학생들이 운집하여 “매국노 이완용은 물러가라”, “굴욕적인 한·일외교를 중단하라”는 등의 구호를 체대학생회장 서재군과 정외과 2년 유천도 군의 선창으로 성난 사자와 같이 우렁차게 외쳐 고황산의 지축을 흔들었다. 그러나 조영식 총장과 교수들의 만류로 김종필 당의장이 학교를 떠난 후 데모대는해산되었다.
그후 공조직과 사조직 간의 불신과 학원 내 중앙정보부 및 경찰정보원의 침투로 학생들의 시위는 겨우 200 ~ 300명씩 교내에 모여 성토하는 소강상태에 머물렀다.
그러나 1964년 4월 17일부터 각 대학 사조직들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4월 17일,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는데 당시 지도부는 다음과 같다.
법과대학 : 최봉도(법4), 곽영상(법4), 헌영두{법4), 최영진( 3), 김금태(법3), 이원우{법3), 정운택(법1), 송창달(법 2), 이병대(법2), 최재규(정2), 권기한(법4)
정경대학 : 김갑중(정4), 이재우{정4), 송웅달(정4), 강동호(정3)
문리대학 : 이무웅(국4), 김경남t중2), 한정재(지2)
국방학과 : 홍창룡{국방3), 서이죄(국방2)
이들 외에도 다수의 군소조직들이 이합집산하면서 교내집회를 함과 동시에 청량리로터리 등지에서 경찰과 대치하다가 해산하였다.
4월 19일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4,19기념식에 경희대생 약 1천 명은 연대·동국대·중대생들과 함께 기념식을 거행한 후 가두행진에 들어갔다가 광회문 네거리에서 경찰과 대치하였다. 이날 시위 도중 경찰의 곤봉에 맞아 이종관 외 수명이 머리에 피를 흘리는 등 부상을 당하였다.
그후 5월 중순까지 중앙정보부와 경찰정보과의 치밀한 감시로 이건환, 이재우, 김갑중, 곽영상, 송웅달 등이 함께 또는 혼자 연행되기도 하고 집회 및 시위에 대한 정보누설로 데모는 다시 소강상태에 머무랙1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4월 말부터 5월 중순까지는 최영진(법3), 김금태(법3), 한정재(지2), 서이조(국방2), 정운택(법1), 김경님t중2), 송창달(법2), 이종관(정2), 이병대(법2), 최재규(정2) 등을 중심으로 집회 및 시위가 이루어졌다.
5월 20일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및 성토대회에는 이재우, 김갑중, 최병도, 곽영상, 이종관 등 약 350명이 참가하였는데 이재우는 이날 5,16 성토문을 낭독하였다. 이재우는 특유의 군중을 사로잡는 연설조로 “여러분 오노에게 부고장을 냈는데 참석하지 않아 유감입니다”라고 하여 환호를 끌어냈다. 식이 끝나고 장례행렬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이재우가 관 앞에서 요령을 잡고 “이제 가변 언제 오나" 등 만가를 옮었다.
국장을 방불케 히는 장례식이었다. 이날 이종관은 곽영상, 최병도 등과 동행하다가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어 2일 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5월 하순으로 접어들면서 소속의 총학생회와 법률학회·정경대학회 간부들의 주도로 4월 말부터 5월 중순까지 산발적으로 이어지던 데모를 좀 더 적극적이교 체계적으로 전개하자는 분위기가 2학년 한정재·김경남·송창달·이종관·이병대, 1 학년 정운택·이양자 등을 중심으로 고조되었다. 또한 전국대학생들이 1964년 6월 1일 함께 궐기하여 거국적으로 집회 및 시위를 하기로 비밀조직망을 통하여 밀약된 터라 경희대학교도 이에 시간을 맞추어 행동하기 위하여 준비에 들어갔다.
5월 25 일 곽영상과 총학생회장 이건환은 협의하여 같은날 11시 30분 여학생 회관에서 대의원총회를 열어 11인 구국투쟁위원을 자천·타천으로 뽑았는데, 11인 투위는 김갑중(정4), 이재우(정4), 송웅달(정4), 최병도(법4), 양승장, 임건웅, 서이조(국방2), 한정재(지리 2), 김경남(중2), 이종관, 백광기 등으로 구성되었고 11인 투위 위원장으로는 언변이 뛰어나고 배짱이 두둑해 일찍이 총학생 위원장감으로 꼽혔던 김갑중을 선출하였다. 이재우와 송창달은 기획력이 탁월하여 타대학교 사조직과 긴밀히 연락하는 연락책의 중책을 맡았고 조직은 최병도와 한정재, 김경남, 서이조, 임건웅, 양승장, 이종관, 백광기 등이 맡는 등 철두철미하고 백절불굴의 투지로 빈틈없는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그러나 6월 1일의 집회 및 시위는 정보누설로 중앙정보부와 경찰의 방해를 받아 약 200명 정도가 중앙청 앞에서 타교생들과 함께 데모에 참석하는 데 머물렀다. 6월 1일 시위가 끝난 후 서울문리대학에서 서울시내 대학생 35명이 단식농성을 시작했는데 6월 2일에는 120명, 6월 3일에는 300명으로 단식농성 학생들이 늘어났다. 이에 자극받은 경희대학 11 인 구국투쟁위원회는 6월 2일 오후 4시경 경희대학교 체육관 옥상에 모여 앞으로의 투쟁목표를 정권타도에 두고 그 방법으로 성토대회 후 데모를 감행하여 대정부 실력행사를 하기로 하고 현 난국의 책임은 박정권이 져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하여 6월 3일 데모를 거국적으로하기로결의하였다.
산회한 직후 위원회 대표인 김갑중과 위원인 이재우는 법률학과 4학년생으로 법률학회 학술부장인 곽영상에게 6월 3일에 있을 실력행사의 취지를 설명하고 협조를 구하자 곽영상은 그 취지에 적극 찬동하여 이에 협력하기로 하였다. 곽영상은 그와 같은 취지를 총학생위원장 이건환과 법률학회 학회장 최병도, 1학년생 정운택에게 설명하여 상호 호응키로 함으로써 현 난국의 모든 책임이 정부에 있고, 이 난국을 수습하지 못하는 현 정부는 물러나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였다(공소장 내용 중의 일부).
그리하여 1964년 6월 3일 11시경 교내 교시탑 앞에 약 2천 명의 학생들이 운집한 가운데 이건환과 김갑중이 결의문 및 선언문을 낭독하고 노도와 같이 교문을 박차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시위대는 유천도, 김경남의 선창으후 “박정권 물러가라”, “송철원 린치사건의 진상을 규명하라” 등의 구호를 절규하며 경찰의 최루탄과 곤봉을 맞으며, 청량리 4거리를 거쳐 광화문까지 진출하여 격렬한 시위를 하였다.
1964년 6월 3일 오후 8시경 김갑중, 한정재, 송웅달, 양승장, 임건웅 등은 약속지점인 경희대학교 정문 앞에 당도하여 6월 4일의 성토대회와 시위에 대비하여 송웅달은 “현 정국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박정권은 하야하라”는 요지의
결의문을 초안하고 결의문과 같은 내용의 결의사항, 구호 및 플래카드 내용을 검토 결정할 즈음, 계엄선포 뉴스를 듣고 일단 산회하였다.
그런데 이재, 곽영상, 최병도, 김경남, 정운택 등은 교통혼잡으로 약속지점인 경희대학교 교문 앞에 약속시간인 밤 8시 5분 전보다 늦게 도착하여 김갑중, 송웅달 등의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고 각처로 김갑중을 찾았다. 그러던 중 밤 10시경 계엄선포 뉴스를 듣고 가일층 적극 투쟁할 심산으로 6월 4일 0시 10분경 경희대학교 앞에 있는 곽영상의 자취방에 모여 6월 4일에 있을 성토대회와 시위에 대한 준비 를 하였다. 이 자리에서 정운택에게 “박정권 하야하라”, “계엄령 즉시 해제하라”는 내용의 결의문과 구호를 작성하게 하고 그 실행의 준비로서 최병도와 김경남은 플래카드를 제작한 후 검문검색을피하기 위하여 곽영상의 앞집에 자취하는 국민대 원강희, 숙명여대 2년 허경숙과 외국어대학 이희경의 도움으로 계엄군의 포위망을 뚫고 학교의 교시탑까지 운반하였다.
6월 4일 10시경 이재우, 김경남, 최병도, 김갑중, 서이조, 송웅달 등은 학생 200명이 모인 가운데 교내 교시탑 앞에서 정부 성토대회를 개최하였다. 정운택이 학원사찰, 민생고, 송철원 군 린치사건을 규탄함과 동시에 난국의 책임을 지고 “박정권은 하야하라”는 요지의 결의문을 낭독했으며 임정평(당시 법4)은 정부를 성토하는 연설을 하여 집회한 학생들을 시위로 이끌었다. 그러나 때마침 출동한 계엄군 병력에 의하여 약 70명이 서대문교도소로 연행되었다. 당시 국민대·원강희도 함께 연행·구속되었다{공소장 내용의 일부).
2. 6·3운동 후 주동자 처별
이날 11인 구국투쟁위원 중 10명이 구속되고 이재우와 곽영상은 수배되었는데 이재우는 6월 7일 안성에서 곽영상은 자취방에서 검거 체포되어 구속되었, 같이 연행되었던 나머지 60명은 훈계방면되었다.
그후 11인 투위위원 중 한정재·임건웅은 기소유예로 풀려났고 2차로 정운택, 이종관, 3차로 김경남, 서이조, 마지막으로 송웅달, 이재우, 김갑중, 곽영상 등이 내란죄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던 중 보석 결정으로 당시 1인당 1만 원의 보석금을 내고(학교에서 보석금을 부담했음) 1964년 9월 13 일 석방되었다.
이들은 몇 개월이 지난 후 서울지방 검찰청이 공소를 취하함으로써 공탁하였던 보석금을 찾았고 1964년 10월 20일경 학교에 복학하게 되었다.
당시 변호인단은 신태학, 박한상, 김은호 서차수 변호사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의 열성 어린 무료 자선 변론은 6·3운동에 대한 사회적 지원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3.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
1965년 봄이 오자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학교의 분위기는 다시금 고조되기 시작했다. 4월 12일 오전 교시탑 앞에서 있었던 대일굴욕외교 반대 성토대회에 이어 13일 오전에 또다시 3천여 명이 교시탑 앞에 모여 성토대회를 가진 후 대일굴욕 외교 반대를 외치며 데모를 하였다. 이날 경희대 개교 이래 전교생이 합세한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데모대를 형성하였는데 이는 ‘11 인 투위’ 출신들의 조직적 연계에 의한 치밀한 준비에 의한 것이었다.
서울시내 대학 중 유독 경희대만이 전교생이 본관 앞 한자리에 모이는 조회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때는 음대생들이 전원 동원되어 음대 교수의 지휘하에 가곡 등을 연주하고 특별초청 손님이 특강을 하는 순서가 있었다. 학생들은 이 행사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랑스럽게 생각했는데, 조영식 총장이 조회를 하기 위하여 본관 앞 계단을 내려올 때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교수들의 적극적인 지원과 조직적인 데모대의 주도로 무산되고 전교생이 동참하는 데모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날 시위는 송창달(법3), 윤소년(정3), 신광섭(정3), 김경남(중3) 등이 주동이 되어 이끌었고 김갑중, 곽영상, 송웅달 등은 배후에서 지원하였다.
학교측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강행된 성토대회는 먼저 “과거를 뉘우치지 못하는 무리들이 존엄한 조국의 영토인 평회션을 침략함에도 오늘날 우리는 안보와 화친을 운운해야 되는가”, “일제 36년 간의 착취와 탄압과 멸시가 소소한 금전수수로 보장될 수 있겠는가?”, “정부는 대일협상으로 평회선을 양보해서 아니된다”는 요지의 선언문을 낭독한 후, “자유민주주의와 진리의 깃발 아래서 우리의 의사가 관철될 때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한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날의 시위는 서울시내 대학들이 동대문운동장으로 집합하는 연행시위로 전개되었는데 경희대는 고대와 신설동에서 합류하기 위해 홍릉 → 제기동 → 청량리 → 신설동 동대문의 경로를 통해 집결하였다. 여기에는 후에 경희대 운동을 2 ~ 3년 간 주도하게 되는 청맥회 멤버들도 적극 참여하였는데 송대일(정3), 한명님t정3), 정치학회장 정강용{정4), 대의원 의장 박동덕(행4), 허열(행3), 한정채(지3), 염홍철(정3), 법대의 이영조(법3), 이구준(법3), 배종용{법3), 박원일(법3), 송창달t법3), 권오정(법3), 김배한, 김병묵, 임무성 등이 그들이었다.
이 당시에는 홍창용(총학생회장), 강동호(정경대회장), 김금태(총무부장) 등이 총학생회 회장단을 구성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이날 시위에 동조하였다.
이 시위로 인하여 정경대학 양승장(정4), 윤소년(정2) 등이 구속되었다가 5월 19일 조언 판사의 직권으로 보석 판결되어 풀려났다. 또 이날 시위중에 경찰봉에 맞아 쓰러진 동료를 도와준 것이 발각돼 데모주동학생으로 알려진 ROTC 후보생 유영호(경제4) 군도 제적당했다.
이때 주모자인 송창달, 신광업, 윤소년, 최제규, 오재국은 결국 권오병 문교장관이 정치학생으로 몰아서 모두 1965년 8월 제적시켰다. 이어서 4월 15일 기습 소집된 대의원 총회(의장 박동덕 행4)의 결의에 따라 ‘구속학생 석방 및 시국비
판 성토대회’가 예정대로 4월 17일 교시탑 아래에서 개최되었다. 이날의 성토대회는 남녀 학생 1천여 명이 참가하여 오전 11시 30분부터 총학생회 변론부장 김금태(법 4) 군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이날 성토대회는 총학생회장 홍창윈국방
4) 군의 시국선언문 낭독, 법대 학생회장 최영진(법 4) 군의 대통령 및 여야 정당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채택, 그리고 정경대 강동호 회장의 결의문 순으로 진행되었고 학생들을 “현재 구속중인 학생들을 즉시 석방할 것”과 더불어 “여야 정치인들은 순수한 학생들의 애국적인 행동을 정략적으로 이용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경희대데모의 특징은 체육대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했다는 것이다 데모대의 선봉과 지도를 맡은 일심회는 체육대 학생들이 주축이었으며, 유일규(1대), 이정복{2대), 서영중(3대), 정학모로 이어지는 모임이었다. 일심회는 지금도 우애
를 돈독히 하면서 모임을 갖고 있으며 김갑중(정), 곽영상과 청맥회의 백완기와 서로 협력하여 6·3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헌신적으로 투쟁하였다.
몸이 재산인 체육과 학생들이었지만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정·법대 학생들과 많이 어울리는 모양새를 갖추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은 무엇보다도 의리를 첫째로 내세우는 모범적인 학생들이었다.
한편, 1965년 6월 22일 조인된 한 · 일협정 비준에 반대하는 교수성명이 발표되었다. 17개 대학 교수 354명은 7월 12일 오전 10시 서울대학교의 구내 교수회관 앞에 모여 선언서를 채택하고 ‘한·일협정비준반대재경교수단’을 조직하였던
것이다. 이 선언서에 침여한 본교의 서명교수는 조병하, 주여섭, 황승원, 김봉식, 조동규, 서정범, 김봉걸, 임진섭, 박기한, 김기웅, 윤세원, 방곤, 이성삼, 박노춘, 윤연 교수등이었다.
이는 교수들이 학문 외적인 표현의 자유를 표명한 것이었으며, 4,19혁명 지지데모 후 두번째 일로서 교육사와 민주주의 역사에 찬연히 빛나게 되었다. 결국 1965년 7월 방학 전 거행된 교수들의 서명 등으로 시국이 혼란을 거듭하게 되자, 정부는 강경책으로 65년 8월 위수령을 선포하였고, 문교부는 이른바 정치교수와 정치학생 50여 명을 제적시켰다. 경희대에서는 송창달, 신광업, 윤소년, 최재규(정치학회장), 오재국 등 5명이 제적되었고 문리대의 김경남은 1965년 9월에 제적되었다.
1965년 8월 2학기 학원의 문이 열리자마자, 8월 20일부터 한·일협정 비준무효화를 위한 데모가 연속적으로 이어졌고 데모를 주도한 총학생회장 홍창용{국방4), 정경대 회장 강동호(정4) 등도 구속되어 홍창용 군은 9월 9일에, 강동호 정경대 회장은 34일 만인 9월 23일에 풀려났다.
이때 경동고 출신으로 6.3 때부터 꾸준히 시위를 뒤에서 주도하던 김경남(중3) 군도 결국 9월 11일 청량리경찰서에 자진 출두하여 불구속입건 처리되었다.
한편 1965년 8월 19일 발생한 창가학회 기습사건은 외세문화 척결단체인 10개 대학연합체(경희대, 서울대, 고대, 연대, 건국대, 동국대, 한양대, 외대, 경기대, 성대)가 주축을 이룬 무궁화애호전국대학생연맹이 주도한 사건인데 서울법
대 김우기의 집과 서울극장 옥상에서 계획하였다. 창가학회를 기습공격하는 행동대장은 경희대 송창달(법 3)이 맡고 30명의 행동대원 중 윤소년, 오재국 등 18명이 경희대 출신이었으며, 서울대 진치남· 이영희·이대 진민자 신춘재후에 신인령으로 개명) . 차명희 등이 참가하였다.
6·3 운동 후 결성된 힐t봉회는 정치학과 중심으로 송창달과 이호열, 조문자, 정석규 등이 운영해 현재까지 지속되어온 고향을 위한 봉사단체후 지금도 활발히 농촌 봉사활동 등을 실시하고 있다.
정외과 주도의 센추리 서클 활동은 64학번 신정현과 박준홍, 그리고 66학번 조정원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1966년도에 경희대 대의원의장을 지낸 행정학과 공창덕도 여기에 적극 동참하였다.
6·3 운동으로 인하여 구속되었다가 석방 후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도 사회생활의 출발은 순탄치 못하여 세상을 떠난 동지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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