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6.3학생운동의 원인과 배경
식민지 잔재와 전쟁의 폐허 위에서 1950년대 한국사회를 통치한 이승만 자유당정권은 권위주의적 일원통제와 파행적 정치과정을 되풀이하였다. 자유당정권은 일찍이 전쟁중인 1952년 장기집권을 위해 부산정치파동을 저지르고 군을 정치에 동원하려 하였으며, 사사오입개헌, 발춰1 개헌 등을 통해 헌정사를 유린하였다. 이러한 자유당정권의 폭거는 1960년 3.15 부정선거에서 절정에 달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총궐기히여 자유당정권을 붕괴시켰다. 4.19혁명은 3.15부정선거를 규탄하였을 뿐만 아니라 정권이 행한 모든 파행적 정치과정을 불식하였으며, 자유당정권의 외세의존성과 반민주성을 극복하려 하였다.
3.15부정선거에 대한 규탄시위는 고 김주열 군의 시체가 발견된 후 급격히 고양되면서 전국적 차원으로 전개되었다. 1960년 4월 18 일 고려대생 시위로부터 시작해 100여 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4월 25 일 교수시위로까지 이어진 4.19학
명의 제 1기는 시위와 발포 그리고 증폭된 시위와 독재정권의 몰락이라는 국민항쟁의 전개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주었다.
자유당정권은 4월 26일 붕괴되었지만, 4.19혁명은 멈추지 않았다.4.19혁명은 5.16쿠데타로 저지될 때까지 시민, 학생에 의해 계속적으로 성장, 발전해가고 있었다. 자유당정권이 붕괴한 후 4 . 19혁명은 건전한 국민경제의 확립과 민주적인 통일국가의 건설이라는 목표를 향해 전진하였다. 과도적인 민주당정권에 의해 시도되었던 한.미경협에 대한 반대와 반공법, 데모방지법 등에 대한 반대투쟁 및 통일운동은 4.19혁명의 확대 ·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들이다.
1961년 5월 20일로 예정된 남북학생회담을 4일 앞둔 시점에서 발발한 5.16쿠데타는 겉으로는 사회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구국의 일념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점차 확산 발전되어가고 있던 혁명을 중단시키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쿠데타 발생 4일 만에 4천여 명 이상을 구속한 정치군부는 자신들의 지배구조 구축을 위해 군사혁명위원회 산하에 과도내각을 구성하는 한편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민주공화당을 비밀리에 조직하였다. 또한 기업인들을 동원하여 전국경제인연합회를 결성시켜 이들을 경제개발계획에 대거 참여시켰으며 굴욕적인 한 · 일회담을 강행하였다.
경제개발과 반공만이 유일한 가치의 척도였던 제3 공화국 정치권력을 청와대와 중앙정보부로 과도하게 집중시켰다. 경제성장 또한 정권의 힘에 의존하는 수출 드라이브정책과 저임금노동력의 동원을 통해 추진되었다.
이 시기 민주주의세력은 굴욕적인 한 · 일회담 강행을 계기로 군부독재에 대한 최초의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6.3 운동과 그후의 베트남 파병반대운동 등은 제3 공화국의 강력한 물리적 공세와 민주주의세력의 취약성으로 인해 정세
를 역전시키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하였다.
국민대중의 불만은 1971 년 대통령선거에서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 94만여 표라는 근소한 차이로 재집권에 간신히 성공한 박정희정권은 안정적이고 장기적인 집권을 위해 보다 강력한 정치적 조치가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것은 10월유신으로 나타났다.
대통령간선제와 국회의원 3분의 1 의 대통령 추천권 등을 내용으로 하여 성립된 유신체제는 1979년 10 .26시건으로 붕괴될 때까지 국민 위에 군림하였다. 유신체제 아래에서 국민들은 모든 기본권을 부정 당했다. 7년 동안 무려 아흡 차례에 걸쳐 긴급조치가 남발되었으며, 거의 일상적으로 경찰이 동원되었다.
1960년대의 학생운동은 70년대로 접어들어 한층 견고하게 조직되었고.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대량창출된 노동자들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YH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과 김영삼 신민당총재의 제명 그리고 뒤이은 부산 · 마산 항쟁으로 이어진 반유신독재 민주화운동은 10 .26사건을 계기로 일단 진정되었다. 그러나 유신 권력의 핵심은 사라졌으나, 유신체제 자체는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국민들은 정치적 구심점을 형성하고 있지 못했으며 10 .26사건으로 인해 준비 없이 정치재개의 기회를 맞은 야권은 분열의 소용돌이에 휩싸여버렸다.
‘서울의 봄’은 신군부에 의해 다시 한 번 부정되었다 신군부는 12.12, 5.17 두 차례의 정변을 통해 신속하게 권력을 장악했다. 신군부는 ‘서울의 봄’을 질식시켰고, 광주항쟁을 폭력적으로 진압함으로써 1970년대까지의 민주주의운동 전체를 역사적으로 부정하였다. 신군부는 자신들의 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하여 제 5공화국을 창출해냈다.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신군부의 권력장악을 위한 모든 법적 · 제도적 정비를 신속하게 끝마쳤으며, 정치규제 등을 통해 제 5공화국의 등장을 위한 모든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내었다.
민정당과 ‘우당’적 관계에 있는 다수의 군소야당들로 구성된 제 5공화국의 제도정치권은 민추협과 신민당이 돌풍을 일으킨 2 . 12총선으로 일대 전기를 맞았다. 제도정치권은 다시 전통적 보수양당제로 복원되었고 공무원 숙정과 언론인 해직, 언론사 통 · 폐합, 삼청교육의 강행 등 고통으로 얼룩진 1980년대 전반기의 위축된 정치도 점차 활성화되었다. 그리하여 87년 정권교체기는 결국 4.13과 6 .29라는 상반된 선택을 통하여 제6공화국의 등장에까지 이르는 일련의 격렬한 정치변동으로 이어졌다.
1987년 6월항쟁은 한국의 정치상황을 일변시켰다. 정치적 자유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여소야대 정국으로 정치는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활성화된 정치는 1992년 선거를 통해 문민정부를 출범시킴으로써 자유화와 민주화를 제도화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지난 30여 년 간 한국사회에 군림해온 군부권위주의정권을 대체할 만한 민간 민주정부를 발전시키기 위해 제도적 근거들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개괄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지난 50여 년의 현대사를 돌아보면서 우리는 역사가 쉽 없이 발전해왔음을 확인한다. 이 역사발전의 힘은 바로 국민으로부터 나왔다. 국민은 어느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한다. 비록 어느 한순간 멈추거나 후퇴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다음의 보다 큰 전진과 비약을 위한 웅크림에 불과하다.
분명 역사발전의 과정에는 일시적인 지체와 후퇴, 커다란 실패와 오류, 그로 인한 심대한 타격과 훼손이 있어왔다. 그러나 또한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그 지체와 후퇴, 실패와 오류, 타격과 훼손은 국민의 힘에 의해 극복되어왔다. 지체와 실패와 타격은 높은 단계로의 발전을 위한 역사적 안티테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한국현대사는 바로 그러한 역사발전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식민지로의 전락과 외부로부터 주어진 해방,그로 인한 분단과 전쟁, 50년대 이래의 민주주의 정착의 실패와 거듭된 독재정권의 등장과 몰락 및 재등장 등 2000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지난 50여 년의 역사가 보여주는 실패와 패배, 한계와 좌절이 점철된 현대사는 동시에 굽히지 않고 성쟁R 온 국민의 정치역량을 확인 해주고 있다. 수많은 좌절과 패배를 역사의 종식으로 끝내지 않고 새로운 역사의 출발로 전환시킨 국민의 위대한 승리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독재권력의 물리적 억압과 반역사적 횡포가 정점에 이를 때마다 분출했던 국민의 정치역량은 4.19혁명과 6.3학생운동, 부산 · 마산항쟁, 광주항쟁, 그리고 6월항쟁에 이력까지 역사의 전진을 7벼케 한 유일한 추동력이었다. 물론 4.19혁명과 6.3 학생운동으로 대표되는 1960년대 민주주의운동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비록 4.19혁명이 민족적 자주의 영역으로까지 그 정치지향을 확대했고 6.3 학생운동이 그것을 더욱 선명하게 표현하는 발전의 모습을 보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산발적인 문제제기와 선도적 정치실천의 영역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그것조차도 5.16쿠데타, 6.3계엄령과 8.26위수령으로 인해 원천적으로 봉쇄된 채 유신체제로 접어든 것이 우리의 역사적 현실이었다.
이렇듯 1960년대 민주주의운동은 실패와 좌절로 끝났지만 그것은 부산 · 마산 항쟁과 광주항쟁, 그리고 6월항쟁을 거치면서 다시 살아났으며, 문민정부의 출범을 계기로 민족적 자주와 민주주의의 법적 · 제도적 정착으로 확대되고 있다. 50여 년의 현대사를 정리하면서 우리가 미래를 낙관적으로 전망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실패와 좌절의 과정에서 역사발전의 궤적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들에게 남겨진 과제는 이 역사발전의 낙관적 전망을 현실 속에서 구체화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