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학생민주화운동, 굴욕적한일협정반대운동

63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

63동지회 2024. 1. 5. 16:21

굴욕적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1964년엔 단순 학생운동에서 시작되어 1965년 범사회적으로 확산되었다. 첫째, 1964년 정국의 주도권은 학생·투위·야당 등 반대운동 세력 측에서 주도하였다. 그러나 1965년엔 박정희 정권이 자신의 프로그램에 따라 가조인→조인→비준을 급속히 진행시켰으며, 회담 반대운동 세력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경지를 지나 자신의 정권에 반대하는 모든 부분을 격파해 나갔다. 둘째 1964년의 반대운동은 범사회적으로 확산되어가는 양태를 보인다. 언론은 학생운동과 투위·야당 등 다른 세력과의 연대투쟁이 가능하도록 도왔다. 투위와 야당은 학셍시위가 가두로 진출함과 더불어 적극적인 정치권 내외 투쟁을 벌임으로써 범사회작인 전선형성을 가능케 했다. 학생운동 여타 세력에 의한 분위기 고양은 6월의 학생시위 격화때 개인적인 형태에서나마 시민들의 적극 참여를 가능케 했다. 이에 반해 1965년 반대운동은 학생운동만이 고립된 채 진행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1965년 학생시위에 대해 초동진압으로 일관했다. 정권의 대응방식에 학생측은 제한 된 공간 내에서 조직적인 방법을 모색하지 못하고 가조인→조인→비준 일정에 밀리면서 발전 없는 반복을 되풀이 했다.

6·3학생운동은 박정희 정권의 욕망에 의해 좌절되었는데 이는 미국의 아시아 정책이 일본중심으로 전환되고, 베트남전쟁에 한국의 참전을 요구한 점과 마지막으로 경제개발을 빌미로 한 박정의 권력욕과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실패요인으로는 학생들이 한일회담의 반대에 대해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기까지 무려 2개월이나 걸려 분위기 고양, 박정희정권의 허약성이 노출되는 4월 혁명을 전후한 시기를 놓쳤다는 것이다. 또한 1964 5 20일 이후 5월말에 이르는 시기에 학생운동은 최소한의 조직마저 부재했고 5.20 장례식은 참여인원이 작았고 박정희정권의 원천봉쇄에 막혀 일부가 과격해 짐으로써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는 학생운동이 궐기대회라는 소극적 수준에 머무르게 했다. 마지막으로 학생운동은 여러사회 문제를 한꺼번에 제기함으로써 굴욕적 한일회담반대라는 시위 본래의 목적을 희석시켰다는 점이다. 이 점이 데모의 한계점이다.

그러나 이로서 촉발된 사회분위기는 오늘날 한국에 민주주의를 가능케 했고, 독재에 반대하고 외세에 반대할 수 있는 시민의식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