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학생운동사

제3부, 제 8 장 명지대학교 6·3운동

63동지회 2024. 2. 21. 18:39

제 8 장 명지대학교 6·3운동

      “한·일회담굴욕타결반대”를 부르짖는 전국 대학,  중고등학생들의 데모에 호응하여 1964년  3월  26일 본 대학  1천여 명의 학생들도 데모에 침여하였다. 이날 정오 별관 4층에서 ‘대일굴욕외교 반대 성토대회’를 벌인 학생들은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한 후 만세삼창으로 대회를 마치고 곧바로 태극기와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데모에 들어갔다
      “현 정부는 국민의 의사를 한·일회담에 반영하라”,  “평화션을 사수하고  일본의 간계에 속지 마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거쳐 국회의사당 앞에 온 학생들은 먼저 애국가‘를 봉창하고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결의문 낭독과 만세삼창을 한 후  다시 광화문 거리를 지나서 중앙청 앞까지 밀고 갔으나,  경찰의 제지로 양정고등학생 등 약  5천 명의 학생과 같이 한 시간의 연좌데모를 한 후 학교에 돌아와 해산하였다.

 

      결의문
       1. 우리의 사상과 행동과 결의는 현 정부를 불신임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2. 현 정부는 우리들의 애국적인 분노의 표현을 강력적인 수법으로 억압하지 말라.
      3. 정부는 우리의 정당한 의사를 한·일회담에 반영하라.
      4. 평화선은 우리의 생명선인 동시에 국방선이다.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어선을 정 부는 해군력을 동원히여 일절 격침하라.
      5. 정부는 일본에서 들어온 독점자본자의 앞잡이들을 즉시 축출하라.
      6. 일본은 36년 간의 한국에 대한 죄악을 반성하라.


      1964년 4월 19일 오후 2시 명지대학교 학생회장 강정 웅과 간부 등 학생 300여 명은 교내 강당에 모여 4년 전 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다 가고 만  4월의 넋을 추모하는 행사를 가졌다.  비가 그치지 않는 가운데 학생들은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성토하고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데모를 하기까지의 진실을 알리는 애국적 절규를 외치는 토론회를 가졌다.
      이날 성토대회에서는 김형주 변론회장이 지난  3월  26일에 채택한 결의문을 다시 낭독하고 우리 명지학생은 계속 투쟁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후 수차에 걸쳐 한·일굴욕외교 반대데모를 전개했다.
      1965년  4월 1 일 명지대학교 학생회 간부와 자생단체 회장 등 학생  500여 명은 한·일굴욕외교 반대데모를 시작하여  ‘평화선을 사수하라’는 플래카드와  ‘굴욕적인 회담을 중지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
      4월 17, 18일에도 투쟁에 나섰는데,  투쟁에 나선 학생들의 인식은 다음과 같았다/  일제의 식민지로서 온갖 압제를 받아온 한민족 선열들의 희생적 구국운동과 부단히 누적된 광복운동의 결과로 독립을 쟁취하여 해방된 지 벌써 20년이 되었다.  “일제가 한국 민족에게 행한 죄악성을 분명히 재확인하고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한·일회담에 임하는 정부의 기본자세에 대뼈 민족적인 반성을 할 필요가 있다”,  “정부에서 조속타결얘이라는  대원칙을 내세워  5월 중으로 가조인하겠다는 방침을 우리는 결코 묵과할 수 없다".   이날의 투쟁으로 인해 정부의 압력을 받아 본교는  4월  20일부터  4월 24일까지 휴교에 들어갔다.
      1965년  6월  3일 명지대학교 학생1,540여 명은 모든 공부를 중단하고 6·3 시위에 나섰다.  연일 계속되는 한·일회담 반대데모로 학교는 마비상태에 빠졌다.
      6월  22일 한·일 국교정상화 정식조인의 날을 기해 시위는 더 한층 격화되었다.  이날 학생회간부와 자생단체회장 특히 기독교학생회 변론회 회원들이 앞장서  1천여 명이  9시  30분경 본교 남대문 교정에 모여 ‘한·일협정 반대 성토대회’를 개최하였다.  성토대회를 마친 학생들은 국가와 민족의 위기를 구출하기 위해 교문을 박차고 나갔다.  학교신축공사장 자갈을 리어카에 싣고 중앙청 앞에서 행진하던 중 그랜드호텔 앞에 대기중인 경찰관 약  300여 명과 투석전을 벌이고 계속 중앙청으로 질주하다  500여 명의 경찰관에게 제지를 당하여 일단 후퇴하였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학교에 재집결한 학생들은  “한·일협정 조인반 대” 구호를 부르짖고  3·1 절 노래,  6,25 노래 등 민족적 울분이 담긴 노래를 부르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이날 시위 도중 학생간부 등 125명이 연행되었다가 훈방되었는데, 김시식 회장은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으나 구속적부심사를 받고 풀려나왔다.
      이 사태를 전후하여 본 대학은  6월  28일부터 종강하였으나  29일 오전 10시 40분부터 또 다시 데모와 단식에 들어감으로써 부득이 하계방학을 앞당겨 실시하게 되었다.
      1965년  8월  23일 명지대학교는 개학과 동시에 학기말 시험을 강행하려는 당국의 지시를 거부하고 일단 국회에서 통과시킨  ‘한·일협정 비준’을 반대하는 데모를 벌였다.
      다음날인  8월  24일 오전 11시  1,500여 명의 학생은 학생회 주최로  “한·일협정 비준을 백지화하라”는 내용의 성토대회를 열고 김형주 변론회장이 낭독한 선언문을 채택한 후 “날치기 비준무효화하라”는 김창준 회원의 구호를 시작으로시위에 들어갔다.
    데모대는 3차에 걸쳐 리어카에 돌을 실어 시청 앞까지 진출했으나 출동한 경관과 충돌하여 투석전을 벌인 끝에 최루탄과 곤봉의 세례를 받으며 강력한 제지를 당하여 학교로 후퇴했다.  그러나 경찰들은 대학캠퍼스에까지 난입하여 기물을 파괴하고 교직원과 학생을 구타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학생들이 부상당하였고,  막대한 피해를 입었는데 학생지도위원 정길봉 선생은 경찰의 곤봉에 맞아 전치 10일의 부상을 입고 남대문병원에 입원했다.  학교측의 피해액은  15만원으로추산되었다.
      25일과 26일에도 학생들은 각각 성토대회를 열고 데모에 들어갔는데 지난  25일 박정희 대통령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데모가 근절되지 않는다면 학원을 폐쇄하거나 반영구적으로 교문을 닫고서라도 데모만능의 풍조들을 뿌리 뽑겠다” 고 말하고 학생들의 데모는 밍택적인 행위라고 강변함으로써 각계의 비난을 사고 있었다.
      8월 30일 현재 본교생들은 100명의 학생이 연행되었고,  10명이 구속되고  2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지난  8월  26일 본교생들의 두번째 데모가 있은 후 학교 당국에서는 l 부대학의 학부,  1학년을  9월  6일까지, 2학년은  8월  30일까지 임시휴교조치를내렸다.
      또한 본교 개교기념일인  9월  7일은 휴강하고 예정대로 못 치른 1학기 말 시험은  9월  8, 9일 양일에 실시하기로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시험을 거부하고 계속 데모에 들어갔으며, 이 과정에서 김형주 변론회장이 제적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