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제 5 장 단국대학교 6·3운동
제 5 장 단국대학교 6·3운동
이 땅에 민주주의를 꽃피우고자 불의와 독재에 항거하여 이룩한 4 ,19혁명이 혁명의 꽃을 채 피우기도 전에 이 땅의 못난 정치인과 무능한 위정자들의 실정으로 결국은 5,16군사쿠데타의 빌미를 제공하여 역사의 수레바퀴를 한없이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였다.
그러나 4,19혁명 정신을 계승한 6·3 학생운동은 군사독재에 항거하여 꾸준히 투쟁하여온 학생들이 한·일외교에 있어서 굴욕적인 저자세를 보인 군사정권에 항거하여 다시는 외세로부터의 치욕적인 역사의 아폼을 맛보지 않기 위해 분연히일어선 투쟁이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 최초로 설립된 사학인 단국대학은 당시 총학생회장 최윤관(상4)과 총학생회부회장 송준강(경제4)이 주축이 되어 서울대(송철원), 연세대(안성혁), 고려대(구자신), 동국대(김실) 등 서울시내 32개 대학의 총학생회장
및 간부들과 난국타개를 위한 대책을 모색하던 중 학생들 전체의 힘을 결집하기 위해서는 전국학생총연합회를 결성하는 것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여 이의 결성에 이르게 되었다. 전국학생총연합 회장에는 동국대학교 김실 군이, 부회장에는 본교 총학생회장 최윤관 군이 피선되어 6·3 학생운동의 크고 작은 투쟁들을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1964년 정부의 굴욕적인 한·일 외교정책은 군사독재정권에 불만을 갖고 있던 학생들과 국민들의 분노를 터뜨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6·3 학생운동은 처음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학생들의 순수한 마음으로 정부에 대해 일본과의 굴욕적인 외교단계에서 탈피하여 주권국가로서 대등한 외교역량을 발휘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김종필·오히라 메모의 이면약속이 불씨가 되어 급기야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하야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6·3 학생운동은 1964년 6월 3일 건국 이래 열한번째의 계엄상황으로 이어지는 매우 역사적 의의가 큰 투쟁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1964년 3월 24일 본교 및 서울대학교 등 일부 대학에서의 시위를 시발로 하여 6월 3일 계엄상황으로 이어지기까지 본교 학생운동의 상황들을 돌이켜보면, 총학생회장 최윤관(상4)과 총학생회 부회장 송준강t경제4), 1 부 학생회장 서정우
(정외 4), 2부 학생회 부회장 심웅택(정외4), 대의원회 의장 최승재(화학4), 대의원회 부의장 노수길(국문4) 등 학생회 간부 전원이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제대군인들로 구성된 복학생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적 경험이나 정치적 감각이 타 대학 간부들이나 학생들보다는 월등히 뛰어난 바 있었으며 그러한 사회적 경험은 결국 단국대학이 6·3의거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추적 역할을 떠안게 되는결과를가져왔다.
본교에서는 처음부터 최윤관(상4)과 송준강(경제 4)이 전국학생총연합에 갚숙이 관여하여 1964년 3월 24일 시청 앞의 가두시위를 비롯하여 교내외에서의 대소집회를 주도하였다. 5월 25 에는 전국학생총연합회 주도로 전국적인 시위를
갖기로 하여 본교에서도 5월 25일 오전 11시를 기해 타 대학과 보조를 맞춰 난국타개학생궐기대회를 갖기로 하였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전국학생총연합회에서 인쇄된 결의문 및 대국민호소문을 각 대학으로 배부하던 동국대생이 정보기관에 연행된 것이다. 이로 인해 일부 대학에서는 계획대로 집회가 열렸지만, 본교를 비롯한 일부 대학에서는 집회가 무산되고 말았다. 본교는 결국 집회를 5월 26일로 연기하고 25일 밤 총학생회부회장 송준강을 전국학생총연합회의 아지트로 급파하여 결의문 등 유인물을 직접 받아오기로 하였다. 송준강은 전국학생총연합회 회장인 동국대학교 총학생회 회장 김실로부터 인쇄물을 직접 받아 버스와 택시를 번갈아타며 미행자의 추격을 따돌렸고 26일 전교생이 모인 가운데 25일 무산됐던 궐기대회를갖게 되었다.
그러나 어렵게 가진 궐기대회였는데, 11시 정각에 도착하기로 한 총학생회장 최윤관이 많은 학생들이 초조하게 기다리는데도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아 대회 개최 여부가 불투명해지는 등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총학생회 간부들
은 긴급간부회의를 열어 총학생회장의 신변에 문제가 발생되었다고 판단하고 궐기대회를 시작하였다.
노수길의 개회사와 취지문 낭독이 있은 후 총학생회장을 대신하여 대회주관자인 총학생회부회장 송준강이 “정권쟁취의 아귀다툼하는 광장에 우리 학생들은 다시 섰다. 난국의 선봉지를 즉각 처단하라”는 요지의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어 2부 부회장 심웅택이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낭독하였고 노수길이 「구국비상결의선언」을 낭독하여 대회를 무사히 치렀다. 대회가 끝난 후 모습을 나타낸 총학생회장 최윤관은 시경 김모 경감팀의 미행을 따돌리느라 대회에 불
참하였음을 알려 많은 학생들의 흥분을 자아냈다.
학생들은 이날 “오늘의 학생궐기대회는 무질서한 행동이 아님을 확신한다. 헌정수호를 하는 자유민주주의 행동은 전국 공동의 의사이며 공동행동의 표시임을 선언한다”라는 행동 강령을 발표하였다. 또한 이날 궐기대회의 목적이 관철되지않을 때는 일주일 후에 다시 전체 학생들의 행동통일이 결정될 것이라고 결의를 다졌다. 그리고 이 결의는 결국 6·3의거로 이어졌다.
6·3의거 당일 본교에서는 총학생회장 최윤관의 주도로 전교생이 한남동 본교에서 광화문 중앙청까지 구보로 행진하였으며, 학교이름이 적힌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서울대 등 타 대학에 앞서 중앙청 철제 담장을 넘어 중앙청으로 돌진하였다.
상황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박정희 대통령은 긴급비상 국무회의를 소집,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즉시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뿐만 아니라 비상대책회의석상에서 공개된 시위장면 녹화테이프를 보고 박정희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기전 “선두에서 중앙청 철책을 넘어온 단국대 학생회 간부들을 전원 체포하라”는 특명을내렸다.
이에 따라 6월 3일 계엄령이 선포된 직후인 새벽 02시 30분 본교 총학생회 부회장 송준강이 행당동 집에서, 03시 30분경에는 총학생회장 최윤관이 장충동 집에서, 그리고 심지어는 여학생부장인 김구자(수학4)마저 신설동 집에서 용산경
찰서 형사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이중 최윤관과 송준강은 6·3 계엄선포 후 최초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으며 이 두 명의 구속은 단국대 개교 이후 학생운동사상 첫 구속사건으로 기록되어 학생운동의 험난한 앞길을 예고하였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각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단국대 학생들의 시위사건은 서울지방법원에서 육군 6관구 계엄사령부 보통군법회의로 이첩되어 수사가 확대되었으며 수사의 확대에 따라 1부 학생회장 서정우(정외4), 2부 학생회
부회장 심웅택(정외 4), 대의원회 부의장 노수길(국문4), 사학과 1년인 임창남, 국문과 1년생인 박부길 등 수십 명의 본교 학생들이 추가로 구속되었다.
당시 서울시내 각 대학의 학생수에 비례해보았을 때 이 사건으로 구속된 학생은 본교생들이 가장 많았으며, 이중 최윤관 등 일부 학생은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담화로 학생들을 풀어줄 때가지 3개월 이상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러한 학생들의 가열찬 투쟁에도 불구하고 굴욕적인 한·일협정은 1965년 6월 22일 정식 조인되고 군사독재는 30여 년 간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나 4,19혁명에서 6·3의거에 이르기 까지 민주주의와 자유를 갈망한 학생들의 투쟁과 희생정신은 오늘에도 살아 이 땅의 민주주의를 열어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