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제 4 장 국민대학교 6·3운동
제 4 장 국민대학교 6·3운동
1. 민주화 투쟁의 싹이 트다
국민대학교는 1946년 해공 신익희 선생의 ‘위교이가 사필귀정’(薦校以家 事必歸正)이라는 교훈 아래 종로구 창성동에 창학된 해방 후 최초의 사립대학이다.
1964년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 소리가 전국적으로 메아리치며 전국의 대학생들이 민주화 요구와 독재 타도를 요구하는 시점에서 국민대학은 청와대와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조건으로 인하여 학생회 간부들과 주요 학생들이 미행 및 회유로 인하여 늘 감시를 딩하고 있었다.
특히 재단 이사장(김성곤)이 공화당 재정위원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많은 제재속에서 활동하기가 힘이 들었다 또한 국민대학 유아교육학과 부설유치원에서 박지만(박대통령의 아들)이 취학하고 있었으므로 경호실 경호원, 종로경찰서 경찰,
중앙정보부 직원까지 학교에 진을 치고 있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도 1964년 7월 국민대학 내에 학생회 소모임인 ‘청맥회’가 조직되었는데, 회장 최원규, 총무 신준식, 홍보 원강희, 언론 여구만, 탁승기, 윤 광, 윤성호, 김인규, 마능욱, 정헌영, 이성남, 고찬구 등이 중심이 되어 창성동 아지트에서 매주 월요일 저녁에 모임을 갖고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와 제3공화국 저항운동에 앞장서고자 하였다.
이 청맥회에서는 지하 신문을 발간하여 밤에 재학생들에게 배포하고, 한 일회담 반대를 위한 토론 및 청맥회 진로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었다. 이와 같은활동을 시작한 지 2개월 후 최원규 군이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48시간 조사 후 강제로 청맥회를 해산한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났으나, 내면적으로는 더욱더 민주화 투쟁을 외치는 저항의식이 강하게 싹택 시작하였다.
2. 제 1차 단식투쟁에 들어가다
1965년 6월 5일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최원규(행정 3) 군이 학생회장으로 당선되면서 한·일회담 반대시위와 민주화 투쟁의 요구는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6월 21일 밤 10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하여 당시 회장 신석웅, 신임회장 최원규, 총무 신준식, 대의원 대표 송재일 등은 미행히는 경찰들을 따돌리고 학교에서 먼 거리인 정릉 청수장으로 집결하였다.
이때 신석웅 회장은 졸업 및 취업관계로 모든 행사에서 빠지기로 하고, 앞으로 최원규 신임회장이 투쟁에 총괄하도록협의하고 1차 투쟁방법은 단식투쟁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6월 22일 오전 9시 30분 학생회 사무실에서는 모든 사람들의출입을 금지시키고, 단대회장, 각 학회장 대의원들이 모여서 7일 간의 단식투쟁을 결의하교 정오를 기하여 선언문 낭독 후 70여 명의 학생들이 단식투쟁에 들어갔으며 여러 학생들이 삭발하는 등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교문 밖에는 경찰과 수도경비사 군인들이 착컴상태에서 진을 치고 대기상태에 있었으며 학교 출입을 원천 봉쇄하였다.단식 3일 후 탈진으로 학우들이 쓰러지기 시작하였으며 교수들과 교직원들이 앞장서서 한 사람씩 끌어내어 병원으로 후송시켰다. 학생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단식 4일 만에 차후 다시 투쟁할 것을 결의하고 단식농성을 해제하였다.
3. 제 1 차 가두데모
8월 22일 분노에 찬 학생들은 우리의 의사를 더욱 강력하게 표현하기 위하여 가두데모를 준비하였다. 특히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학생들의 요구와 야간부 학생들이 더욱 강력한 투쟁을 요구하였다.
4학년의 김병팔, 김승웅, 3학년의 신준식, 탁승기, 2학년의 송재일, 변정구, 1학년의 윤병훈 등이 주축이 되어 학생들이 운동장에 집결하였으며 선준식의 개회사와 최원규 총학생회장의 제 2의 이완용 처단과 민주화 요구,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취소하라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청와대로 진출하기로 하여 총학생회장 선두하에 질서정연하게 행진하기로 하였으나, 수도경비새 경찰, 완전무장 군부대가 교문을 봉쇄하고 최루탄을 쏘았다.
이에 대항하여 학생들의 투석전이 전개되었으며, 일부는 학교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 스피커를 청와대의 대통령 집무실 쪽을 향하여 우리의 요구사항을 계속 요구하며 독재정권 타도를 외쳤다. 얼마 후 청와대의 지시로 국민대학은 단전되
었으며 학생들은 육성으로 계속 구호를 외쳤다. 이날 많은 학우들이 중경상으로 병원에 실려갔으며, 데모가 조용해지자 지역 주민들이 음료수와 김밥을 가지고 나와 격려하여 주었다.
4. 제2차 데모
8월 23 일 굴욕적인 한 · 일회담 반대 2차 데모를 위하여 학생회 주요 간부들을 소집하고 데모방법을 변경하여 일부는 적선동 교문 밖에 대기하고, 일부는 학교 정문에서 동시에 데모를 하기로 하였다.
학생회장을 선두로 학생들은 오전 11시 한 일협정 비준무효선언식을 갖고 강력한 저항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학생회장 최원규는 국회의 날치기 통과는 민주주의와 의회제도를 말살한 것이므로 야당의원들에게 국회의원직 전원사퇴를 요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700여 명의 학생들이 청와대 쪽으로 진출하려 하였으나, 군경합동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어서 부득이 태평로 국회의사당 쪽으로 질서정연하게 플래가드를 앞세우고 구호를 외치면서 행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경복궁 서문에서 수도방위사령부 중대병력이 완전무장을 하고 경찰과 함께 저지선을 만들어서 최루탄을 쏘았다. 이때 경찰과 학생들 간의 투석전이 약 2시간 정도 지속되는 대치상태에서 100여 명의 학생들이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다. 조사를 받는 중에서도 한 ·일 협정 조인철폐 구호를 부르짖으면서 저항하였고, 나머지 대다수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와서 제2의 매국노의 화형식을 갖고 해산하면서 다음 일정을 기다렸다.
5. 위수령 발동과 구속사태
1965년 8월 26일 위수령 발동으로 전국의 대학교는 교문이 굳게 닫히고, 국민대학에서는 데모 주모자로 학생회장 최원규, 총무 신준식, 대의원 송재일, 대의원 변정구, 대의원 윤병훈이 구속되었으며, 최원규 군은 학교에서 제적까지 되
었다.
한편, 학생회를 비롯한 학생들은 힘든 형무소 생활을 하는 학우들을 석방하기 위히여 석방서명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정보당국과 경찰의 압력으로 서명운동은 무산되었으며, 데모를 저지하기 위하여 정보부 직원이 최원규 학생회
장에게 권총을 머리에 대는 것을 계기로 더욱 더 많은 학우들이 흥분하여 데모가 더 강렬한 분위기로 가열되었다. 이때 정부 딩국의 군경들은 순수한 애국정신에 입각한 학생운동을 야당 정치인들과 결부시키기 위히여 야당 정치인들과의 친분을조사하고 데모 자금을 정치인들에게 받아쓴 것으로 몰아가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때 구속된 학생들은 잠을 잘 수 없게 하는 정신적·육체적인 고문을 받았다. 당시 국민대학이 놓여 있는 현실 여건에서는 한마디로 애국정신의 발로에서 행동한 최대의 저항운동이었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