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학생운동사

제3부, 제 3 장 고려대학교 6·3운동

63동지회 2024. 2. 16. 15:10

·제 3 장 고려대학교 6·3운동

      1. 서설 - 전통과 기질,  학풍과 정서

 

      자유를 위하여 물결치는 가슴이여,  정의를 위하여 굳게 잡은 신념이여,  마음의 고향. 자유·정의 진리의 전당이 있다.  독립조국 새 고대의 새 교가는 안암동 고대인의 가슴에 갚이 스며 있다.  그러나 불의나 민족적 울분 앞에서는 구교가가 더 우렁차게 울려넘친다.  “젊은 가슴 숨은 생명 힘 넘쳐 뛰노라,  이 힘이여 이 생명을 펼 곳이 어디냐,  눌린 자를 쳐들기에 굽은 것 펴기에 쓰리로다, 부리로다,  이 힘과 이 생명 ”
      민족고대는 독립구국의 교육이념으로 이용익 선생이 학문을 여셨고 삼일독립 정신으로 손병희 선생이 이를 이었으며 왜정의 갖은 탄압 속에서 슬기롭게 민족교육을 지켜온 인촌 김성수 선생이 텃밭을 걸고 기름지게 가꿔왔다.
      신입생은 가슴으로 전해지는 고대 전통과 분위기에 젖어들면서 어느새 소명의식,  행동성,  민족의식이 기질화,  기품화하는 과정을 겪는다.  거칠고 막걸리를 즐긴다는 전설은 아마 왜놈 세상에서 나라 앓은 한을 술로 삭이던 시류적 학풍의 연장일 것이고 순박,  소탈,  우직성으로 평가되는 기질은 재간둥이보다는 공인적 사고와 단합형,  조직형,  끈기향 추진형 학풍에 대한 긍정적 평가일 것이다.
      항일투쟁의 기지로서 그리고 독립 후는 좌우익의 대립과 6 ·25를 겪으면서도 늘 서로 교우애로 감싸 사상·이념보다 우애가 앞자리하던 고대의 학생운동은 이런 전통과 기풍과 전설을 뿌리로 한 때문에 필연적으로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다.
      4,19의 전야제가 된 4,18의거를 일으켜  4,19혁명을 출발시켰고,  5,16쿠데타 후의 군정기간인  1962년  6월  6일 반복되는 미군 병사의 린치와 총격에 격노한 민족감정으로 교정을 떨치고 나선 한·미행정협정 촉구 시위는 고대인다운 민족정기를 내외에 표출했다.  1964년  6월  2일에는 굴욕적 매국외교에 반대하여  5,16쿠데타 후 처음으로 박정권 하야를 요구하는 시위에 나서  6·3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6월  3일 격렬한 시위에서는 중앙청,  청와대로 시위의 표적을 통일하는 방향타의 기능을 완수했다 이는 박정권과 일본,  미국에 대한 대내외적 양면적 구국투쟁이며 민족운동이었다.
      1960년 4,18의거를 주도한 고대는 4,19혁명 후에는 학문의 길로 정진했다. 그러나 1962년  6월  6일 고대생은 파주, 양주 등에서 빈발하는 미군의 한국인 린치와 총격에 분노하고 계엄하에 한·미행정협정 촉구 시위로 다시 거리로 나섰다.  1964년  3월  24일에는  2년여의 침묵을 깨고 일부 대학과 사전협의하에 한·일 매국회담을 반대하는 시위를 일으킨다.  이때부터 결성력,  조직력,  동원력에서 고대의 질기고 타협 없는 강력하고 흡인력 있는 시위는 다시 시작된다. 3·24 이후 총학생회는 뒷전으로 물러서고 단과대학 학생회장단 및 서클이 연합하여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다.  5·20,  5·25를 거치면서 운동을 주도하던 이들은  5월  31일 구국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완벽한 준비에 착수한다.  이 시기에 활동한 주요 서클은은 다음과 같은 두 단체이다.

 

      민족사상연구회

      민족사상연구회는 1963년 3월 발족되었으며 동양철학과 김경탁 교수를 지도교수로 하는 민족주의 연구이념 단체였다.  이 모임은 당초 일부 민통회원과 사조회를 주축으로 출발하였으나 사조회가 한·미행협 촉구 시위의 사상적인 배경으
로 집중 추궁당하자 발전적으로 해체된 후 결성되었다.
      사조회 1대 회장 윤성천,  2대 회장 최장집과  4,19세대인  손주환,  강경식,  양영식,  정재원 등과 김원국 및  3학년인 서진영,  신광옥,  김병길,  이태영,  박경구와 하급학년 김흥식,  정성현 등 다수가  3 ·24시위와 관련하여 활동하고 서진영은 민정희,  박정훈과 같이 불온  괴소포를 받아 소문에 휩쓸리기도 한다.  이 서클의 최장집,  박경규,  김병길,  김흥식,  정성헌 등은  6·3시위에서도 맹활약한다.  민족사상연구회는 그후 1965년 비준반대와  3선반대 교련반대에서 유신반대까지 한사회로 명칭을 바꿔 투쟁하다 많은 간부가 투옥되고  1972년 강제 해산당한다.

 

      민정회

      민정회는 정외과 학생으로 구성되었으며 주로 의회민주주의 제도와 사상을 연구하는 모임이다. 김영두 교수(정치사상씨를 지도교수로 결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  박정훈과 김덕규,  손옥백 등이 리더였으며 4 대 회장은 조홍규였다. 조홍규는 나중에 1965년 비준반대투쟁과 관련해 퇴교당한다. 회 원으로는 4,19세대의 김한식,  이규정,  정무열,  박철현 등의 활동이 활발했으며,  3·24 이후 시위에는 조직력과 동원력 및 지휘력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2.  3 ·24시위

      고려대학교의 민족사상연구회와 민정회 일부 회원은 1963년 11월 11일 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구회와 같이 각 대학 신문사 주최로 삼일당에서 정치·경제 방향에 대한 학술토론 대회를 열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보부의 방해로R 장소 사용이 불허되어 무산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2년  6월  6일 한·미행협시위의 주동자인 민사회의 최장집,  민정회의 서진영,  법대생 신광옥,  이태영,  김병길,  경제과 김흥식 등은 한·일협정 반대를 위한 시위를 모색하였다.
      1964년  3월 개학과 동시에 정경대 학생회장이며 역시  6.6행협시위 주도자인 민정회 박정훈과 민사회의 리더 최장집은 자연스럽게 연합하여 역시 행협시위의 주동자였던 민정회의 리더인 김덕규와 민정회원이며 응원단장인 손옥백,  단과대학 학생회장인 이경우,  이명박과 총학생회회장 구자신등과 합세하였다.

1964년 3월 26 일 고려대 데모학생들이 한 · 일굴욕회담 반대를 외치며 경잘의 저지선을 뚫고 동대문 을톰파하끄 있다

 

      서진영과 최장집은 이론적 리더로서 이미 한·일회담에 대한 공동대응에 합의한 상태였다  그러나 서진영은 1962년  6월  6일 행협시위의 주모급으로 집중감시당해 뒷선으로 빠지고 정외과의 최장집이 전변에 나섰다.
      고대는 애초에 1964년  3월  13일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계획했으나 사전에 경찰 당국에 정보가 새어나가 연기하던 이전부터 상호연락 관계를 가졌던 최장집이 서울대 김중태로부터 3·24일 공동시위 제안을 받았다.  최장집은 이를 학생회에 알려 고대에서는 단독시위를 포기하기로 하고 공동투쟁을 하기로 결정했다.
      3월  24일 아침 10시경 총학생회의 옆방 국제 상경학회 회의실에서 10여 명의 주최측인 민사회 및 민정회 회원과 10명의 총학생회 및 단과대학 학생희장 등 간부진이 연석회의를 갖고 거사를 숙의한 끝에  11시  30분부터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전교생의 집결상황 및 준비 사정과 이를 말리는 학교 당국의 저지로 오후 2시 30분부터 시위에 돌입했다.  정경대 학생회장 박정훈의 연설과 법학과 심광옥의 호소문 낭독과 이어 상대 학생회장 이명박이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낭독했다.  이어서 결의문과 대정부 경고문을 전교생의 이름으로 채택했다.


      선언문

      우리는 오늘 공화당 정부와 일본이 진행하고 있는 굴욕적 한·일협상을 좌시할 수 없어 여기 또다시 섰다.  4,19의 혈흔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6·6의 봄기가 결실조차 못 본 오늘 상아탑의 학도들은 또다시 거리의 투쟁을 벌여야 하는 현실을 저주한다.  일제의 악랄한 수탈과 착취가 이 강토를 폐허와 초토로 유린했건만 현금 또다시 일제의 망령이 우리의 심장을 파열시킨다.  공화당정부가 내걸었던 민주주의는 어디로 사라져 가버리고 우리의 우방 미국이 덮어씌운 면사포가 정부를현혹한다.  우리는 정부에게 묻는다.  단군 조선 개국 이래 최악의 빈곤의 구렁텅이에서 기아의 사선을 방황하는 민족을 구할  자신이 그다지도 없는가,  이것이 비밀회담이 타결될 당위인가,  이것이 민족이 생존할 유일한 활로인가,  일본 제국주의의 악랄한 독점자본가들이 이 국가를 경제적 식민주의의 질곡과 철쇄를 덮어씌우려 한다.  평화선에 둘러싸인 우리의 푸른 바다를,  반만년을 가꿔온 우리의 금수강산을 일제에 매도하려 한다. 우리는 자부한다.  일제의 족쇄에서 해방한 어엿한 독립국가인 조국을 갖고 있음을.  그러나 여기에 상응한 주권국가로서의 외교가 그 꼴이어야만 하는가.  우리는 구한말의 쓰라린 역사를 또 다시 반추해야 된단 말인가 우리는 절규한다.  우리의 피 어린 노력으로 우리끼리 살아보자고.  중국·일본 ·미국은 차례로 우리의 종주국이었다.  우리는 종주국 없이 한 번 살아보자.  이것이 우리의 피맺힌 절규이 다. 일제의 망령을 박멸할 때까지 우리는 영원한 투쟁의 대열에 참여할 것을 여기서 엄숙히 선언한다.


      이명박의 선언문 낭독에 이어 학생들은 ‘왜 일본을 신임하는가 저자세 굴욕 한·일회담 즉각 중지,  국민여론 존중하라 평회선 사수하라’ 등 플래카드를 펼쳐들고 교문 밖으로 스크럼을 짜고 나갔다.  시위는 운동부가 앞장서고 안암동로터리에서,  종로 , 을지로 등지에서 최루탄,  곤봉과 맨주먹의 육박전이 벌어졌으며 저지선을 뚫고 의사당까지 진출하였다.  이날의 시위로  5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40여 명은 성북·동대문·중부서에 연행되었다.  그날 최초로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대정부 건의문과 결의문을 채택했으며,  4년 전  4,18 당시의 코스를 밟아 을지로 4가를 거쳐 천일극장 앞에서 4,18 당시 자유당 깡패에게 테러를 당하여 100여 명이 쓰러진 장소에서 묵념과 만세,  교가, 교호를 부르고  해산하였는데  이날의 결의문과 대정부 경고문은 다음과 같다.

 

      결의문

      조국은 바야흐로 일인의 농간에 의하여 쓰러져가는 위기에 직변했다.  겨레의  양심이 살아 있고 민족혼이 불멸하는 우리 항일본산의 후예들은 이제 한·일굴욕외교의 전적 책임을 정부에 묻는다.  만약 한치의 애국심이라도 있다면 조국의 앞날을 위해 민족정기 앞에 할복하라.


      대정부경고문

      우리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임을 알라.
      조국과 민족이 너희 일당의 것이 아님을 알라.
      한·일굴욕회담만이 현 정부의 유일한 탈출로가 아님을 알라.
      우리의 자유의사를 무력행사로 짓밟지 말라.


      3. 황소식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3·24시위 후  학생회는 점차 시위에 소극적으로 되어갔다.  이에 최장집 등 민사회 회원은 서울대 김중태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연합시위에 대비하였다. 그리하여 서울시내 각 대학연합체가 황소식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과 성토대회를 개최할 때 고대는 민사회를 주축으로 일부 민정회 회원이 침여하였다.

      이 대회에 민사회의 박경구{문리대)가 민생고를 성토하여,  4,19정신은 살아있다는 등의 플래카드를 성토장에 걸어놓고 민사회 최장집,  김병길,  민정회의 박철헌 등이 각 대학연합회 대표로 참가하였다.   5·20성토대회는 주최측에서 약 2만을 호언했지만 예상이 벗어나 실제로 약 2천 명 정도만 참가하고 산발적 시위로 끝났다.  이러한  5·20성토대회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고려대는 총학생회와 단과대학의  이경우,  이명박,  박정훈과 민사회의 최장집,  김병길,  민정회의 김덕규, 손옥백 등이 접촉하여 한학련의  5·25 난국타개 전국대학생총궐기대회를 준비해갔다.
      3·24 이후 침묵을 지켜왔던 고대생들은 5월  25일  1천여 명이 대운동장에 모여 극심한 민생고 문제와 매판재벌의 타도  5·21 무장 공수부대군인들의 사법부 침입과 학원 내의 침투 등을 규탄하는 난국타개 궐기대회를 전개했다.  궐기대회는 정오부터 시작하여 정경대 학생회장 박정훈의 선언문 낭독에 이어 법대 학생회장 이경우의 비상구국 총궐기 기조 선언문 낭독이 있었다.  이어서 상대 학생회장 이명박의 난국타개궐기대회 행동강령 낭독과 국민에게 보내는 김중석의 호소문이 있었다.
      한편 5·25궐기대회에 앞서 5월 22 일 고대 법대생들 500명은 정오에 운동장에 모여  5월  21일 새벽의 일부 군인의 사법부 난입을 규탄하는 성토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궐기대회를 주도한 한학련은 시위의 뒷감당을 하지 못해 급기야 고대에서는 전국 최초로 단과대 학생회장의 이탈이 발생했고 그후 고대에서 는 서클의 연합하에  6·2,  6·3의거로 치닫게 되었다.  단과대 학생회장들과 서클은 구국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박정권  하야와 대미비판으로  6월  2일 거리에 나섰으며 우중에도 국회의사당 앞을 일시 점거농성하였다.   6월 3일에도 고대생은  4,300명이 넘는 엄청난 동원력으로 국회의사당을 선점하고 청와대를 향해 각 대학과 같이 달려갔으며 박정권 타도와 하야로 구호가 통일되는 결과를 만들어내었다.
      특히 법대 학생회장 이경우는 김병길과 같이  6·3 당일 도피하지 않고 총지휘자로  6·3시위를 이끌어내었고 그 결과 옥고를 가장 많이 치렀다.  또한 이명박은 상과대 학생회장으로 이경우와 같이  3·24,  6·2를 치르고  6·3 당일 의거를 선두에서 총지휘하며 겁 없는 지휘능력으로 용명을 떨쳤다.
      박정훈은 정외과 2년 재학시 정외과의 서진영,  최장집,  김덕규,  조홍규,  손옥백과 같이  6·2,  6·6 한 미행정협정시위를 주도하다.  구속된 전력이 있는데  6·3 당시에는 정경대 학생회장으로서  3·.24부터  6·3까지 늘 선두에서 지휘했다.


      4.   6·3투쟁

      5·25 궐기대회가 별 성과 없이 끝난 후  5월  31일 오후  5시경 평소 자주 모이던  박정훈,  최장집,  김덕규,  김병길,  손옥백,  김광현 등이 서관에 모여 총학생회를 비판하고 더 강력한 투쟁을 위해 투쟁위원회와 조직을 결성한 뒤 필요한 인원을 더 모아 행동하기로 하고 오후 7시에 이경우 법대 학생회장실에 집결하였다.  이 모임에는 교양학부 학생회장 정성현과 김남홍,  법학과 4년생 이기명과 김재하도 침여하였다.  이날 모임참가자들은 박정희정권에 대한 토론결과 다음과 같은결론에 도달했다.
        ①  4,19의거 후  1년도 안되는 합헌 민간정부를 붕괴시키고 시급한 민생고를 해결함이 혁명공약상의 거사이유였으나 더욱 악화하였으며,
       ② 공화당정부는 선거라는 위장된 군정연장에 불과한 군사정권으로서  3년 간의 군정기간에 부정부패와 통치능력이 없다는 점이 충분히 입증이 되었으며,  그들의 굴욕적인 한·일회담은 정권 연장에 불과할 뿐 아니라 일본이 새로운 경제·정치의 종주국으로 부상하여 민족의 자주주체성이 말살된다는 점과, 
      ③ 일본의 한반도 진출은 남북 긴장이 극에  달하여 민족 역량이 손상된다는 우려와 심지어 밀 가루 무상 살포로  13만표 차로 선승한  사실상 패배 정권이며,  4·19정신인 민주·민족·자주의 이념에 배치되는 파쇼정권으로 한·일회담이 늦더라도 청구권과 평화선의 실리를 찾고 차관에서 경제개발의 모델을 찾아야 한다는것이다.
      이와 같이 박정희정권에 대한 비판 논의가 계속되던 중 이기명이 박정희 대통령의 하야 권고안을 제기하였다.  이때 모인 참석자들은 쿠데타 정부의 속성상하야할 정권도 아니며 퇴진까지 가지 않아도 하야하라는 새로운 충격적인 구호가 3·24 이후 국민적인 주장을 관철하고 굴욕외교를 저지할 수 있다는 이유로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5월 31일 밤 회합의 참가자들은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퇴진 요구까지 확대하고 투쟁의 강력한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김병길의 제의와 이명박의 제안으로 구국투쟁위원회를 결성할 것을 합의하였다. 그 리하여 법대  4학년 김재하를 위원장으로  하고 단과대학 학생회장 이경우,  이명박,  박정훈 등을 부위원장으로 정외과 최장집을 기획책, 김덕규를 선전책,응원단장인 손옥백을 집행책,  민사회의 김병길,  김흥식과 역도부의 김광현,  김남홍,  이기명과  1학년 교양학 부학생회장
정성헌 등을 책임부원으로 하여  6·2 시위를 준비하기로 하였다.  한편 선언문 기초위원으로 이경우,  이기명,  김흥식을 선임하고 구국투위의 이름으로 채택하며 이명박이 준비한 격문,  결의문과 함께 인쇄하고 플래카드를 준비히여  6월  2일의 시위에 완벽하게 대비하였다.
      6월 2 일 등교가 시작되자 강의실 등에 준비된 격문이 뿌려지고 학생들은 배구장으로 집결했다.  이날 응원단장인 손옥백의 사회로 단과대학생 회장단이 전면에 나서며 요소 요소에 부원들의 선동이 시작되었고 이어서 김재하가 우리는 박정희을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해 타도할 것을 전국민과 아울러 결의한다는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선언문

      우리는 조국의 부름에 의하여 여기 결의와 행동으로써 이 정권의 타도를 선언하는 바이다.  우리는 민족의 임종을 고하는 호곡을 듣고 있다.  우리는 현 정권의  단말마적 횡포와 처절한 집권욕을 좌시할 수 없으며 쿠데타로 민주헌정 질서를 파괴하고 권력욕에 광분하는 현 집권자들의 계속적인 통치를 묵시하기에는 너무나 비참한 조국의 아픔과 배고픔을 참 수 없다.  전대미문의 가공할 부정부패,  악덕재벌 매판자본과의 유착,  간악한 정보정치의 농간과 퇴폐로 권력을 빨아먹고 이제 또 허기져 조국의 대들보를 왜(倭)에 입도선매하려 한다.  이는 이 무도한  정권이 타도되어야 하는 충분하고도 완전한 조건이다. 박정권은 권력에 미쳐 기지사경에 처한 이 갈가리 찢긴 민족을 끌고 어디로 가려느냐 차라리 민족의 대광장에 나와 참회의 눈물로 고별사를 불러라 ...... 중략 ...... 이제 우리는 유린된 폐허의 초토 위에 진정한 민주주의를 재생시킬 정권을기대한다.  파쇼를 향한 군부가 쿠데타로 교체되는 정체를 우리는 절대로 수용할 수 없다.  또한 우리는 주체성을 상실한 채 외세에 의존하는 임시 변통의 반민족적 통치집단을 배격한다.  합헌적인 민주주의와 주체성을 음지하여 현실적으로 민족을 아사의 경지에서 구출하는 위대한 비전을 갖는 정부를 갈망한다 ...... 중략 ...... 현해탄 건너 독사의 헛바닥이 날름댄다. 35년의 원한을 잊지 말고 왜(懷)를 타도하자.  오늘 우리는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일본상사 앞전의 명석에서 깡총대는 깨고락지 정권을 우리 힘 모두어 타도할 것을 민족의 이름으로 선언한다.

1965년 6월 한·일협정 반대를 외치며, 태극기와 플래카드를 들고 안암동 거리에서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는 고려 대학생들

 


      선언문 낭독 후,  ‘주관적인 애국충정이 객관적인 밍국임을 직시하고 박정권은 하야하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미국은 가면을 벗고 진정한 우호국임을 보여달라’,  ‘배고파 못살겠다’,  ‘악덕재벌 잡아먹자,  ‘민족분열 일삼는 독재정권 물러가라',   ‘YfP 색출’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2천여 명이 교문을 나섰다.  이날 시위는 경찰의 강력한 저지로 안암동로터리에서 저지당하고 이 과정에서  30여 명이 연행되었다.  데모대의 전위가 경찰과 대치하는 동안 우위의 주력은 신설동로터리로 모였다.  이중 교양학 부학생회장 정성헌과 유광언이  1학년생을 끌고 나오며 신설동로터리에서 공방전을 벌이다 많은 시위학생들이 연행되고 곤봉에 맞아 피를 흘렸다.  이 과정에서 경영과  1년 김영요 신정일 군 등 다수가 부상을 당했다.  경찰저지선을 돌파하거나 청계천,  종로 등에 나타나 우회작전으로 길을 바꾼 시위대  500여 명은 오후 2시쯤 국회의사당에 모여 박정권 하야 구호를 외치다 약 400여 명이 경찰에 포위되어  200여 명이 경찰버스에 연행되었다.
      이날 고대생은 206명이 연행되었으며 이중 시위를 앞장서서 주도한 손옥백,  정성헌,  이을성,  임수광,  김정일,  김두한,  유해근,  조두연,  이규봉,  이대식에게 영장이 신청되었고 이중 일부는 내란죄로 구속되었다/
      6월  2일 고려대에서 박정권 하야를 요구한 것은 군사정부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이에 박정희정권은  6월  2일 밤  9시 정일권 국무총리 주재하에 양 내무,  김 국방,  윤 문교,  이 법무,  노 공보차관 등을 불러 약  1시간 동안 긴급회의를 가졌다.   6·2시위를 주도한 구국투쟁위원회 동지들은 체포령으로 거의 대부분 도피와 은신으로 들어갔으나 이경우는 학교 뒷산에서 자고 아침  7시경 김병길과 만나 사전 준비와 계획도 없이 돌발적으로 시위를 준비했다.  이경우는 시위학생의 동원과 지휘부의 사령탑으로 책임을 맡고 김병길은 플래카드와 선언문,  결의문 준비 등 참모로서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역도부원이며 총학생회 부총무인 농대  3년 김남홍도 교내에서 시위 저지세력과 불순세력 제거 등의 임무를 맡고 시위대의 인솔 책임을 졌고,  고대신문사 기자 문리대 오충수도 참여했다.  9시쯤에는 산을 타고 넘어온 상대 학생회장 이명박이 지휘부에 가세하였다.  오전  10시경 배구장에서  4천여 명이 넘는 학생들로 꽉 갔다.  이경우와 이명박은 오전  10시가 지나 뒤늦게 김병길로부터 선언문과 결의문을 받아 현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는 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하고 시위로 돌입하였다.

 

      선언문

      우리는 지성과 행동으로써 국민과 함께 민족정기를 무기로 박정권 타도의 구국투쟁에 나선다.  우리는 대일굴욕외교가 국민합의의 바탕이 없음은 물론 민족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경제적이지도 못한 채 꼭  5 ,16 해치우듯 날뛰는 현 집권세력을 불신한다.  그들은 평화선을 가장 몫이 좋은 대한의 영토를 정권의 판공비로 몇 닢 받고 왜 (倭)에게 팔려 한다.  그 탐욕스럽고 저주스러운 왜(倭)에게  ...... 중략 ......  5,16쿠데타는 4, 9정신의 반동이며 이 땅에 태어나서는 절대로 안 될 친일 반민족세력이었다.  공화당정권은 외세의존의 매판종속경제로 민족주의 체성과 지존을 말살뼈 나라를 송두리째 들어먹으려 가다.  일본은 동북아의 지주로서의 탐욕으로 다시 군국주의 망상을 되살리고 이 나라의 친일세력은 그 앞잡이의 깃발을 흔들며 우리를 꼬드긴다 .
     ....... 중략 ......
      우리는 박정권에 호소한다.  그대들은 민족적 민주주의에 현혹된 순박한 애국시민들의 진정한 마음을 아는가.  제발 우리 젊고 간절한 자존과 자주성을 사취하여 사악하게 정권을 틀어쥔 그 간교한 술수를 다시 써먹지 말라. 묻노니 권력
의 용전(用錢)이 궁하여 민족을 배신하는 것이 민족적 민주주의인가. 파쇼화,  매국매족,  반민주적 정권연명이 구걸외교, 영토매도의 몇 남으로 가능한가 매국적이고 자존과 주체성을 파는 그대들의 패도에 처절한 분노로 우리의 순수한 가슴은끓는다.  그대들의 집권능력은 군정 3년을 통해 완벽하게 노출되었다.  이제 총과 최루탄과 영토 팔아 챙긴 돈으로 그 권력을 지탱하려 한다면 무능한 쿠데타정권의 종말이 어떤가를 훨씬 빨리 알게 될 것이다.  국민은 그대들의 비전 없음을 잘 알고 있으며 역사는 정의와 국민의 편이다.  박정권은 국민 앞에 정중히고별인사를 하라.  미국은 일본을 축으로 하는 극동정책을 완전히 중단하라 .
      ...,,.중략 ..... .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우리의 국토,  우리의 삶은 우리가 지킨다. 

      우리는 이 땅에 자유와 민주의 꽃이 활짝 피고 번영의 행운이 올 것임을 믿는다. 

      민족분열과 혼란이 비참한 민중의 삶이 지천으로 깔린 현장에서 이를 탈피하려는 국민적 열망과 우리의 투쟁은 이제 시작하노라.

 

      결의문

      l.  4,19정신과 민족적 이익에 매국 매역하는 박정권은 하야하라.
      l. 평화선은 백만 어민의 생명선 매국정부가 흥정할 수 없다.
      l. 구속된 애국학생과 시민을 즉각 석방하라
      l. 한·일회담은 제 2 을사보호조약이다. 미국은 감독을 자처하지 말라.
      l. 박정권은 학생의 정당한 요구를 총칼로 탄압하지 말라.
      l. 각계각층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은 한 · 일회담을 즉시 중지하라.
      l. 일본은 군국주의 망상을 버리고 과거를 정당한 값으로 청산하라.


      시위대는 이명박,  이경우,  김남홍의 인솔로  ‘썩고 무능한 박정권 타도’의 플래카드를 들고  “평화선 사수”,  “구속자 석방하라”,  “못살겠다 박정권 물러가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나섰다.  시위대는 안암동로터리에서 강력한 경찰기동대의 저지선과 부딪쳐 일대 공방전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다수의 고대생이 부상을 입었다.  이에 구경하던 시민 1천 명이 투석으로 시위대에 합세하고 최루탄을 공급하던 경찰 차량이 파괴되고 바람이 경찰 쪽으로 불자 경찰이 후퇴하고 시위대는 신설동 방면으로 전진했다.  곧이어 대광고등학교에서 신설동로터리에 걸쳐 공방전이 벌어지고 대광고등학교 담이 무너지면서 14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날 신설동에서 동대문 사이에서 공방전이 벌어지고 많은 학생이 피를 흘리는 광경을 목격한 수천 명의 시민이 합세하여 시위는 점차 대규모화되어갔다. 1시  40분경 고려대 선발대  1 ,200명은 최초로 국회의사당 앞을 점거하였는데,  뒤
이어  서울의대,  성균관대,  동국대,  서울상대,  숭실대 등이 합세하고 고대생  1천 여 명이 뒤에 또 가세하였다.  이날 데모 대학은  18개 대학이며  1만  5천 명 정도이나 연변의 시민합세로 3 만 명 가량이 시위에 침여한 것으로 추산되었다.
      국회의사당에 모인 각 대학 연합데모대는 청와대로 밀려가다가 제 1경찰 저지선인 시민회관과 유솜건물 앞에서 주춤했으나 끝내 돌파하고 제2저지선(경기도 청),  제3저지선(중앙청 앞)까지,  공수부대가 지키는 제4저지선(해무청 앞)에서 총검을 한 공수부대의 트럭과 널뻔지 저지선에서 대치하였다.  그러나 이날 밤  9시 40분 8시로 소급하여 계염이 선포됨으로써  6·3시위는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시위대 앞에서 지휘하던 이융(농대 3),  이을성(이공대 3),  서오석(이공대),  정해님t정외교2),  이충님t정치과3),  이주열(문리대 3)이 현장에서 연행되어 내란죄로 구속되었고 계엄 후 도피은신중이던 이경우,  이명박,  김병길,  김광현, 이기명, 김홍신도 구속되었다.


      5.  6·3투쟁 이후의 상황

      5월까지의 시위는 대부분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 이었다. 그러나  6월  2일을 기하여 투쟁방호t은 박정권 해태 미국에대한 비판으로 전환되었고,  6·3은 박정권 타도와 대미비판이 더욱 강화되었다.
      6월  2일 밤 정일권 국무총리 주재하의 비 상무회의에서 고대생의 박정권 하야와 미국을 비판한 구호를 트집잡은 정부는 계엄여부에 대한 논의를 위해  6월  3일 국가안전보장회의를 개최할 것을 결의하였다.
      6월  3일 오전 국가안전보장회의를 끝낸 정부는 계엄령 선포문제는 논의된 바 없다고 발표하였으나,  6월  3일 오후 4시 반 사무엘버거 미 대사와 하우즈 유엔군 사령관이 청와대에 헬리좁터로 날아가  6시 반까지 회담을 열더니 곧이어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령 선포 후 정부는 6월  3일 밤부터 각 대학의 주모자 검거에 들어갔다. 고대는 이미 구속된 학생 외에  6월 15일 이경우가 충주비료의 선배 히숙집에서 검거되고, 이명박도 검거되어 이미 구속된 정해남,  이융,  이을성,  서오석,  이충남, 김흥식,  김광현,  손옥백,  김명길,  김남홍과 뒤에 잡힌 이기명 등  13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이들은 계엄해제 후 서대문으로 이첩되어  2회에 걸쳐 공소기각 조처로 다수가 석방되었으나,  이경우,  이명박은 동국대 김실,  한양대 이정재,  건국대 박원규와 함께 내란죄목으로  5년 구형이나,  3년 징역,  5년 간 집행유예 언도를 받았고 이 형량은 고등법원에서 확정되었다.


      6. 1965년 4월투쟁

      1965년 고려대 학생운동은 64년  6·3주역들의 대거 졸업 또는 군입대로 여러 세력이 합종연횡한 가운데 전개됐다.  우선 구자신에 이어 유유길이 총학생회장의 배턴을 이어받았다.  그는 한국학생총연합 상임위원장으로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을 대표하고 있었다.
      6·3 주동자 가운데 가장 늦게 출감한 이경우{당시 법대 학생회장)는 졸업 후 군입대했고,  법대 지휘봉은 신임 회장 맹건영으로 넘어갔다.  6·3사태 때 맹활약한 박정훈{당시 정경대 학생회장)도 졸업 후 역시 군입대하여 정외과  4년 박철현·서안정 등이 그 역할을 대신했고 정경대 학생회는 김성한이 이끌게 됐다.
      이러한 가운데 교양학부  1기생으로  65년 본교에 합류한  2학생들이 단결력과 행동력이 뛰어난 새로운 학생운동세력으로 부상했다.  이 가운데 교양학부 학생회장을 지낸 정성헌(정외 2)과 유광언(정외 2),  김극기(법2) 등 신조회 그룹들이 막강한 파워를 형성하여 선배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64년 군복무를 하고 학교에 나온 조홍슈(정외과 휴학중)의 후견을 받으면서 의식과 완력을 구비한 고대 특유의 학생운동세력으로 자리를 잡았다.
      4월  3일 한·일협정이 가조인되자 고려대 운동권 각 계피들은 시내 각 대학과 연계하여 활발하게 시위를 모의해나갔다. 이 과정에서  4월 11일 김의철(상4), 김성한(정 4),  이영대(농4),  최덕현(사2),  박철현(정4),  최선홍{사4),  최영직(행3),  손
승귀(법 4),  김중훤(경4) 등  9명이 예비검속에 걸려 연행됐다가 13 일 훈방되기도 했다.
      고려대 첫 시위가 벌어진  4월 13일  2천여 명이 배구장에 집결했다.  유유길 총학생회장의 선언문 낭독과 “굴욕과 저자세로 일관된 치욕적인 한일문제 일괄타결이란 민족사활의 기로에서 민족적 양심과 역사적 소명에 자유·정의·진리의 기수가 되어 총궐기할 것”을 선언하는 서안정(정4)의 궐기문 낭독 순으로 성토대회가 벌어졌다.
      고대 데모대는  11시  30분경 안암동로터리에 진출,  경찰의 최루탄에 투석전으로 맞서며  1시간 3 0분 간 대치하는 등 경찰대와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이날 400여 명이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했으나 유유길 등 280여 명이 연행되고 문학진(화4) 이  구속( 5월  21일 보석출감)됐으며 10여 명이 불구속입건됐다.  연행된 유유길 총학생회장은  15일 구속됐다가 검찰의 재심에 의해 구속해제되어 17일 석방됐다.
     ‘민족의 생명선 피로 사수’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데모에 들어간  4월 15일에도 안암교,  동대문,  을지로 6가 등지에서 경찰과 격렬한 시가전을 벌였다.  이날  데모로 박철현(정4),  서안정이 구속기소됐고(5월 4 일 보석출감),  이영대(농4),  한
영대(경 3) 등은 영장이 기각돼 풀려났다.
      연일 계속된 시위로 많은 연행자와 부상자를 낸 고대생들은 4월 17일 교내 배구장에서 경찰봉 장례식 집회를 열어  “무자비한 경찰봉에 생명을 빼앗긴 동국대 김중배 군의 영전에 명복을 빈다”는 조사와 함께 경찰봉과 최루탄에 대한 조사를 낭독하고  “매국적인 한 · 일회담 반대투쟁을 계속할 것”을 결의했다.


      7.  6월투쟁

      전교생이 합심해 한·일협정 가조인에 반대하는 가두시위를 별였던 고대생들은  6월 정조인을 앞두고서도 적극적인 반대투쟁에 나섰다.  6월 11일 ‘굴욕적인  한·일회담 즉각 철폐’를 주장하는 성토대회에 이어  6월 18일부터는 연속적인 대규모시위를펼쳤다.
      6월 18  정오 배구장에 모인 800여 명은 성토대회 후 격렬한 가두시위를 전개하여 정조인을 앞둔 대학가 여론에 불을 당겼다.  맹건영 법대 학생회장의 선언문,  각 단과대 학생회장들의 대일 도전장,  존슨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  전국 학도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만장의 박수로 채택한 고대생들은 곧바로 스크럼을 짜고 교문을 나섰다.
    종암동회 앞에서 완강한 경찰저지에 부딪힌 데모대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오후 3시 일제히 귀교하여 단식투쟁을 결의했다. 잠 시 소강상태였던 대학가 데 모에 다시 불을 붙인 이날 시위로 배후 주모자 조홍규와 선언문을 읽은 맹건영(행4)이 구속됐다.
      6·18 고려대 데모를 신호로 대학가가 시위의 격랑에 휘말리자 당국은  6월 22일부터 ‘정치방학’으로 지탄받은 조기방학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고대생들은  6월  21일부터  7월 초까지 끈질긴 성토,  가두데요 단식투쟁을 펼치면서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6월  21일 운동장에 모인 800여 명의 교양학부생들은 “조인결사반대”를 부르짖고 신설동로터리까지 진출,  경찰과 공방전을 벌이다 교내로 퇴각했다.  이날  배구장에 모인  2천여 명의 본교생들도 성토대회 후 안암동로터리까지 진출하여
투석전을 벌이다 오후  3시경 신설동까지 진출했다가 교내로 돌아와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고대생들은  6월  22일에도 배구장에 모여 “생명선인 평화선을 사수하기 위하여 결사투쟁할 것을 선포한다”는 요지의 선언문을 채택하고 유진오 총장의 훈화를 들은 후 정오를 기해 교문을 박차고 시위에 돌입했다.  이날 유 총장은 “타대학과 달리 최방학 조치를 취하지 않으려 했으나 제군들의 시위로 결국 조기방학이 취해졌다”며 유감을 표시했다/
      이날 데모대는 대광고등학교 앞까지 진출했다가 무장군인의 출동으로 잠시 교내로 퇴각했다.  오후  2시경 신설동에서 재집결했다.  여기서 경찰의 진압작전으로  50여 명이 연행됐으나 재차 동대문에 집결하여 산발적인 시가전을 계속하면서일부는 종로 5가와 국회의사당 앞까지 진출했다.
      연일 시위를 벌이던 고대생들은  6월 26일 108명이 정조인에 항의하는  48시간 기한부 단식투쟁에 들어가 비장한 각오를 혈서로 표시하기도 했다.  6월 29일 오전  10시부터는  4천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 메국매족자 타도’,  ‘쪽바리 싫소,  짚
신 족하오’,  ‘Yangkee Keep Silent'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가두시위에 나서 숭인동, 동대문 등에서 경찰과 충돌했다.

1965 년 8월 25일 고려대 앞 데모를 저지하기 위해 출동한 무장군인들

 

      오후 1시경 경 찰 저지선을 피해 국립극장 앞에 집결한  300여 명의 데모대는  3 ·1 절 노래,  교가,  애국가 등을 부르며 명동 입구,  조선호텔,  중앙우체국  반도 호텔까지 행 진하여 기동경찰의 포위 속에 만세삼창을 부르고 해산했다.


      8. 무장군인 난입사건

      6월 29일 조기방학에 들어간 고려대의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은 김의철 총학생회 총무부장이  ‘한·일협정비준반대 각 대학연합체’ 대표로 파견돼 연대활동을 지속하다  2학기 개학을 맞았다.  그러나  8월  25 일 고려대는 사상 유례없는 무장군인의 군횟발에 짓밟히는 수모를 당했다.
      고려대는 8월  21일  개학하자마자  비상학생총회를 가진 데 이어  23일 다시 집회를 개최,  24일부터 실시되는 학시말 시험을 거부하고 행동투쟁에 돌입하기로 결의했다.  24일  2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집회를 마친 고대생들은  ‘한·일협정은
완전무효’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숭인동파출소 앞까지 일사천리로 내달았다. 이때 신설동 쪽에서 급거 출동한 경찰기동대에 포위당한 데모대 중 150여 명은시내로 나가 명동파출소에 재집결해 미대사관 앞까지 가두시위를 벌였다.
      전 국민을 전율케 한 학원유린 사건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8월  25일 이른 아침부터  2, 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벌어진 성토대회에서 고대생들은  “매국조약 무효화와 일당국회 해산을 주장한다”는 요지의 선언문과 「교수에게 보내는 호소문」,  「전국 대학생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채택하고  “한국은 일본경제 공황의 탈출구로 신제국주의의 시장이될 수 없다”는 등 7개 항목을 결의한 뒤  10시  50분경 데모에 들어갔다.
      집회를 마친 고대생들은 ‘한 · 일협정은 무효다’라는 플래차드를 앞세우고 3·1 절 노래와 교가를 부르며 교문을 나서 오전  11시경 안암동로터리에 진출했다. 이때 군 트럭에 분승대기하고 있던  300여 명의 무장군인과 격렬한 투석전과 최루탄, 연막탄 공방이  20여 분 간 벌어졌다.  데모대는 시험을 치르고 나온 교양학부 학생들과 합류,  군의 이동을 따라 일진일퇴를 계속하며 투석전과 연좌데모를 벌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데모대로 돌진하는 군용 지프에 김득길(당시 철학과2)이 치어 중상을 입고 수도의대병원으로 급송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학생들은 학교에서 나온   300여 명과 합류,  연좌데모에 들어갔다.  이들 역시다시 출동한 무장군인들의 최루탄과 곤봉세례에 밀려 해산했다.
      이날 오후 1시  30분  20여 대의 군 트럭에 분승한 무장병력이 안암동과 신설동 사이를 이동하고 있었다.  이때 군인들은 일부 학생들이 투석한 것을 빌미로 고려대 정문으로 진격,   3대로 나누어 캠퍼스를 샅샅이 뒤지며  30여 분 동안 총대와 곡팽이 자루를 무차별 휘두르는 난동을 저질렀다.
      이들은 도서관 정문의 유리를 깨뜨리고 자유열람실에 최루탄을 투입했으며 금란실 근처에도 세 발의 최루탄을 쏘았다.   이학부 실험실에 난입,  실험기구까지 파괴했다.  군횟발이 강의실 도서관, 식당,  인촌묘소 등지를 짓밟는 동안 시험 보던  학생,  식사중인  학생,  조교까지 포함한  50여 명이 연행됐다.

1965 년 8월 26일 무장한 헌병들이 안암동 교차로에서 한·일협정 비준무효를 외치며 시위하던 학생 을 연행하려 하자 한 주부가 이를 막으려 하고 있다

 


이날 연행된  고광철(철 1),  김재일(화공2),  이기낙(행4),  송경섭(건1 ),  박명환(농3),  최윤호(화공2), 전병태(법 2),  전재진(섬1 ) 등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돼 이중 고광철은구속수감됐다.
      군인들이 퇴각한 오후  4시 교정에 모인  1천여 명의 학생들은 성토대회를 열었교 교수들은 긴급회의를 열어  “해방 후 20년 간은 물론 악랄한 일제하에도 관헌이 학원에 대하여 이같은 잔악한 폭거를 감행한 것을 우리는 견문하지 못했다”는 항의문을 발표했다.   고대 교수회는 이날 발표한 대정부 항의문에서  ‘연행학생 즉각 석방,   ‘국방부장관 및 관계 장관 인책’,  ‘난동난입 군인 색출처단’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1965 년 8월 26일 오전 10시 50분경 고려 대 캠퍼스에서 이종우 부총장 등 교수 50여 영과 학생 2천 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학원자유를 보장하라’ , ‘난동 주모자를 엄단 처형하라’ , ‘신을사조약을 폐기하라’ 등의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무장군인 난입난동사건에 대한 규탄대회를 열고 있다

 

 

      9. 학원방위투쟁

      8월  25일 저녁부터 6관 강당에서 교수단·동문 등과 함께 철야농성에 들어간 고대생들은 위수령이 발동된 2 6일 등교한  학생들과 합세하여  2천여 명이 대운동장에 모인 가운데 성토대회를 열었다.  ‘백색테러 타도하자’는 플래카드를 내건
이날 대회에는 이종우 부총장(유진오 총장은 에티오피아 여행중)을 비롯한 교수단도 참석했는데 학생들은  “무장군인의  학원난입,  난동사건을 백만 학도의 이름으로 규탄하며 이를 정당시하는 정부측의 무책임한 언동을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한다”는 등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오후  2시  30분 거리로 뛰쳐나간 학생들은 즉각 대치한 군인들과 충돌했고,   오후  3시경 학내에 재난입한 군인들은 20여 명의 학생들을 연행해갔다.  이튿날  8월  27일 정오에는 두 차례에 걸친 무장군인 난입을 규탄하는 ‘학원방위학생총궐기대회’가 시내 각 대학 대표들을 포함한  1,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대회에서는 “국가의 장래를 위해 학원의 침략적 행위와 같은 반민족적이고 반민주적인 독단에 대항하기 위해 공동투쟁의 광장을 펼쳐야 한다”는 비상궐기문이 채택되고 30일까지 기한부 농성이 결의됐다.  이날 교문에는  8월  31일까지 휴교한다는 게시가 나붙었다.
      정부 당국은 고대 무장군인 난입을 신호로 대대적인 학원탄압을 시작했다. 고려대에서도  9월  1일 맹건영·손희광(정 3)이  구속(10월  9일 보석출감)되고 김수길이 검거됐으며   2일에는 김성한·최효팬상4)이 구속  9월  25 일 기소유예로 석방)됐다.
      9월  6일 박정희정부는 대학사장 유례없는 또 하나의 폭거로  ‘민족 고대’를 짓밟았다.  일제폭압 때도 없었던 사립학원에 대한 무기휴업령이었다.  문교부가 내건 이유는 ‘데모주동 학생과 정치교수 징계에 학교 당국이 협조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교육계는 물론 사회에도 큰 파문을 던진 박정희정부의 이같은 강경책은  9월  9일 김성식·김경탁·이항녕 등 교수 3명과 조홍규 등 학생  6명의 자퇴로 수습돼  9월 20일 해제됐다.  ‘정치교수’,  ‘정치학생’이라는 해괴한 이름으로 축출자 명단에 오른 교수·학생 중에는 조지훈·조동필 교수도 있었으나 구제됐다.
      휴업령이 내린  9월  6일  1천여 명의 학생들은 오전  11시  30분부터 강당에 모여 학원방위궐기대회를 열었다.  ‘민주수호 교권확립’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건 이날 대회에서 학생들은 “학문의 자유와 학원의 권리를 수호하고 국가 장래를 위해 총칼만능의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했다.
      개교 이래 가장 극심한 진통을 겪었던 고려대 한·일협정 비준반대투쟁은 많은 구속자를 낸 것은 물론 휴업령과 총장 경질,  교수 퇴진 등 커다란 상처를 남긴 채 마무리됐다.  위수령을 발동한 정부 딩국은 그 책임을 전적으로 학생들에게 전가했다.  서울대에서는 민비연 사건,  고려대에서는 학원방위군 사건이라는 조작사건(연루된 학생 전원이 후일 무죄판결)으로 내란죄를 적용하려 했다.  이 때문에  조홍규는 장기 도피행각에 들어갔고 김덕규는 학원방위군 사건에 연루돼 구속기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