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동지회 2024. 1. 5. 16:20

1964년에서 1965년에 걸쳐 전개된 6·3 학셍운동은 5·16 군사정권의 굴욕적 한일회담의 권주의적 통치에 저항하여 3·1운동의 민족주의적맥락과 4·19혁명의 민주주의적 맥락을 계승하여 일어났다.

(1) 3·24데모 ~ 6·3 학생운동은 “나라 파는 한일회담 즉각 중단하라”, “평화선을 사수하자”는 구호를 치며 굴욕외교에 반대한 3·24데모에서 시작되었다.

(2) 4·19전후 데모 ~ 굴욕회담 반대데모는 4·19기념일을 전후하여 “5·16 4·19의 연장일 수 없다”는 새로운 구호로서 4·19민주주의 정신을 내세웠다.

(3) 5·20 데모 ~ 5 20일 학생들은 5·16군사정권이 표방한 민족적 민주주의는 “반민족적 민주주의”라 규정하고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집행했다.

(4) 6·3데모 ~ 6 3일 전국적으로 10만 여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빅정권 퇴진>과 굴욕외교 반대>를 외치며 데모에 나섰다. 이날 서울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학생 1,200여 명이 체포되었고, 데모 주동자 60여 명은 내란죄목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3~4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5) 65년 데모 ~ 비상계엄으로 막을 내린 학생운동은 1965 4월의 한일협정 비준빈대투쟁으로 이어졌다. 학생운동은 <매국 국회 해산>을 주장하며 치열하게 전개 되었으나, 825일 정부의 위수령 발동으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6·3학생운동의 맥은 1967년의 6·8 부정선거 규탄 운동과 1968년으로 3 개헌 반대운동, 1973년의 유신 반대운동,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으로 통하여 민주정부 창출의 기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