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민주화운동의 경과
1964년에서 1965년에 걸쳐 전개된 6·3 학셍운동은 5·16 군사정권의 굴욕적 한일회담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저항하여 3·1운동의 민족주의적맥락과 4·19혁명의 민주주의적 맥락을 계승하여 일어났다.
(1) 3·24데모 ~ 6·3 학생운동은 “나라 파는 한일회담 즉각 중단하라”, “평화선을 사수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굴욕외교에 반대한 3·24데모에서 시작되었다.
(2) 4·19전후 데모 ~ 굴욕회담 반대데모는 4·19기념일을 전후하여 “5·16은 4·19의 연장일 수 없다”는 새로운 구호로서 4·19민주주의 정신을 내세웠다.
(3) 5·20 데모 ~ 5월 20일 학생들은 5·16군사정권이 표방한 민족적 민주주의는 “반민족적 민주주의”라 규정하고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집행했다.
(4) 6·3데모 ~ 6월 3일 전국적으로 10만 여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빅정권 퇴진>과 굴욕외교 반대>를 외치며 데모에 나섰다. 이날 서울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학생 1,200여 명이 체포되었고, 데모 주동자 60여 명은 내란죄목으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3~4개월 동안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5) 65년 데모 ~ 비상계엄으로 막을 내린 학생운동은 1965년 4월의 한일협정 비준빈대투쟁으로 이어졌다. 학생운동은 <매국 국회 해산>을 주장하며 치열하게 전개 되었으나, 8월25일 정부의 위수령 발동으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6·3학생운동의 맥은 1967년의 6·8 부정선거 규탄 운동과 1968년으로 3선 개헌 반대운동, 1973년의 유신 반대운동,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으로 통하여 민주정부 창출의 기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