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제 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4)
제 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
4. 각 대학 휴교조치와 한·일협정 정조인 무효화투쟁
한·일협정 반대투쟁은 휴교조치가 취해지고 협정안이 정조인된 후에도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6월 23일 이대, 숙대 등 여자대학과 성균관대, 서강대, 서라벌예대, 가톨릭의대, 경북대생들이 한·일협정 조인무효화와 협정 비준을 반대하는 성토대회와 시위를 벌였다. 이날 숙대생들은 갈월동 굴다리 앞에서 경찰에 의해 저지되자 노상 연좌시위를 하였다. 이대생 1,500여 명은 학교 당국의 돌연한 1일 휴교조처에 반발하여 낮 12시 15분경 ‘국회는 한 · 일협정 비준을 거부하라' 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데모를 벌였다. 이날 경찰의 강력한 저지에 의해 50여 명이 부상당하고 10여 명이 최루탄에 숨이 막혀 졸도하는 사태까지 낳았다.
성대생 500여 명도 성토대회 후 데모를 했으며, 서강대 또한 500여 명이 성토대회 후 22일 오후 7시부터 단식투쟁에 들어간 120명의 학생과 함께 전교생 단식 투쟁을 결의했다. 23일 데모로 경북대생 141명 등 183명이 연행되었고 이중 2명이 구속되었다.
24일에도 데모는 계속되었다. 숙대생 1,500여 명은 오전 10시 교정에 모여 ‘한·일회담을 백지로 돌리라는 등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를 했는데, 이중 800여 명이 만리동까지 나갔다가 경찰에 저지되어 낮 2시에 해산했다. 성대생 200여 명도 교정에서 성토대회 후 교문에서 경찰과 충돌했으, 이대생들은 총학생회장 등 120여 명이 학생관에서 ‘비준반대’와 ‘정부의 교육포기정책 반대’를 내걸고 단식중이었다. 연대생 67명이 닷새째 단식중이었고, 그중 10여 명이 졸도했으며, 서강대생 200여 명과 경희대생 28명도 이날 도서관 앞에서 계속 단식중이었다.
25일도 연세대, 이화여대, 성균관대, 경희대 등 4개 대학에서 140여 명이 한·일협정 비준반대를 외치며 단식을 계속하였고 총 41명이 졸도했다. 26일에도 연세대, 이화여대, 수도여사대, 경기대 등 서울시내 4개 대학 160여 명의 학생들이 한·일협정 비준반대를 외치며 단식을 계속해 이중 50여 명이 졸도했고, 남고교생 400여 명과 숭의여고생 500여 명도 성토대회를 개최했다.
6월 28일 낮에는 연세대, 외국어대, 경기공전생 등이 한·일협정 비준을 반대하면서 각각 성토대회를 열었고, 연대생 2천여 명은 캠퍼스를 벗어나 아현동 가두에서 데모를 전개했다. 한 고려대생들도 오후 3시 성토대회를 벌였다. 한편 24일부터 28일 오전까지 단식투쟁을 전개한 이대생 45명은 28일 오전 단식투쟁을 끝내면서 성명서와 일본 대학생 및 세계 언론인에게 보내는 메시지, 『워싱턴 데일리 뉴스』지 편집국장에게 보내는 글을 각각 채택했다.
6월 29일에는 학기말 시험을 위해 등교한 고대생 3천여 명의 시위가 있었다. 21일 이후 가장 끈질기게 전개된 이날 시위는 4시간에 걸친 크고 작은 규모로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이들은 “Yankee Keep Silent"를 외쳤으며 경찰의 진압은 매우 난폭하였다. 같은날 연대에서도 시위가 있었으며, 연대 의대생들은 성토대회 후, ‘일제 상품 보이콧’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하자는 의견을 제창했다 . 이후 건대, 연대, 이대, 이화여고, 상병여고 등이 일본상품 안 사기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일제상품 보이콧은 한 · 일협정이 정식 조인되는 등 6·3운동이 막바지로 접어든 긴박한 국면적 상황과는 다소 동떨어진 운동방식으로서 크게 확산되지는못했다.
7월 1일 서울에서는 연대, 고대, 건대, 감리교신학대생 등이 일단 단식을 끝냈으나 동덕여대, 가톨릭의대생 일부는 단식을 계속하였다. 연세대 단식학생 230여 명은 1일 낮 12시 반 연대 의대부속병원 앞에서 일본의 경제침략을 분쇄하는
뜻으로 일장기와 일본상품 소각식을 가졌다. 가톨릭의대 130여 명도 한·일협정 비준 저지를 목표로 무기한 단식에 들어갔으며, 동덕여대는 단식 3 일째인 이날 60여 명이 계속 단식하였으며, 2명이 졸도하였다. 단식 2일째에 들어간 서울여데80여 명도 계속 단식중이었다 . 한편 시청각교육실에서 ‘구국기도회’를 열고 7일째 단식기도중이던 감리교신학대 학생 20여 명은 1일 낮 12시 단식 종결식을가졌다.
같은날 오전 9시 10분에는 상명여고생 500여 명이 첫 시간 수업을 마치고 “한·일협정 비준반대”, “일제품은 아편이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내로 행진하다 경찰과 대치하여 연좌데모를 벌였다.
7월 3 일 오전에는 서울의대생과 성북, 동북 두 고교생들이 한 · 일협정 비준반대 성토대회를 열고 한때 데모를 벌였고, 이화여고생들은 교내에서 각성회를 열었다. 서울의대생 200여 명도 한·일협정 비준반대 성토대회를 마친 뒤 가운을 입고 150여 명이 데모하다 원남동로터리 쪽에서 경찰기동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7월 7일에는 대구대생 300여 명이 빗속에서 데모를 강행했으며, 이대생들은 한·일협정 비준반대를 위한 가두서명 결과 약 3만 명의 서명을 얻어 12일 오후 정성태 민중당 원내총무의 소개로 국회에 청원을 냈다.
7월 14일 밤 8시 40분, 마침내 공화당은 한 · 일협정 비준동의안을 기습적으로 발의하였다. 이에 따라 ‘정치방학기간인 7월의 정국은 더욱 긴박하게 전개되었다. 대학가가 ‘정치방학’으로 급박한 정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을 때, ‘한 ·일협정 비준반대 각 대학연합체’가 조직된다. 각 대학연합체는 7, 8월의 비준국회 시기에 대학가에서는 유일하게 투쟁을 계속하였으며, 개학과 동시에 대대적으로 한·일협정 비준무효화투쟁을 재개시킬 준비를 하였다( ‘한 · 일협정 비
준반대 각 대학연합체’의 조직과 활동은 제3부 제22장에서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