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제 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2)
제 2 장 1965년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
2. 김중배의 사망과 5월투쟁 : 한·일협정반대와 학원자유화투쟁
4월 12일 시위는 더욱 확산·격화되어, 경희대 300명과 연세대 2천 명, 동국대 2부학생 200여 명이 성토대회를 열었고. 초급대학연맹회도 한·일회담 반대 결의문을 발표하고 구속학생석방 등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12일 밤에는 고려대, 경희대, 숭실대, 중앙대, 동국대, 한양대 등 6개 대학 학생이 데모 모의를 하다 연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3 일에는 범대학적으로 한·일회담 반대 성토대회가 열렸다.
13일 낮 고대생 1천여 명은 제 2을사보호조약 철회와 구속학생의 석방을 요구하며 성토대회를 벌였다. 총학생회장이 평화선 사수의 의지를 천명하는 선언문을 낭독한 후 시위에 돌입한 1천여 명의 시위대는 3 차례에 걸쳐 안암동로터리까지 시위행진을 감행했다. 13일 낮 12시 50분에는 연세대생 약 450여 명이 ‘매국외교 피로서 막아내자’, ‘승일, 승공, 자립’, ‘구속학생 즉시 석방하라’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에 돌입했다. 데모대는 이대 입구에서 대기중이던 기동경찰관 400여 명과 충돌하여 이 과정에서 2명이 부상을 입었고 26명의 학생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한편 경희대, 중앙대, 숭실대, 고려대, 국힉대, 성균관대, 전남대, 동국대 등도 각각 시위를 벌였는데, 이날 시위 도중 부상당한 동국대생 김중배는 이틀 후 사망했다.
경찰은 13일 시위에 4,500여 명이 가담했다고 밝히고, 이중 528명을 연행하여 (고려대 203명, 경희대 53명, 동국대 81명, 성균관대 21명, 연세대 48명, 민간인 15 명 등),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및 특수 공무집행 빙해혐의로 12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11명을 구속하교 34명은 불구속 입건했다.
14일 낮 12시 25분에는 중앙대생 약 1 천 명이 “민족의 생명선인 평화선을 사수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나와 데모에 돌입하여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는데, 경찰은 최루탄 10발을 터뜨려 수라장을 만들고 9명을 연행했다. 오후 1시 쯤에는 성균관대에서도 500여 명의 학생이 ‘애국학생 석방하라’, ‘평화선 너 어디 갔느냐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300여 명이 교문 밖으후 나와 500여 명의 경찰기동대와 대치했다. 학생들은 완전포위된 채 연좌시위를 벌이다 204명이 연행되고 이중 1명이 구속되었다{14일 데모 연행자 217명).
15일에는 경기고생 1천여 명이 시위를 전개하고 오후 1 시부터 단식농성에 돌입하였으며 (34명 연행), 고려대생 1,200명이 다시 시위를 전개해 185명이 연행되었고 이중 2명이 구속되었다. 또한 외대생 400여 명도 정오경 성토대회 후 “조인철회” 등 6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고(1 7명 연행), 제주대생 300여 명은 오전 10시 30분부터 평화선 사수 성토대회를 열고 굴욕외교를 철폐할 때까지 투쟁을 계속할 것을 선언한 후 전원이 교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또한 대구의 한국사회
사업대학에서도 200여 명이 시위를 하다가 23명이 연행되었다{15 일 데모 연행자242명).
4월 12일 학생총회를 열어 4·10시위의 정당성을 재확인하고 구속학우들과의 공동운명을 약속하는 자퇴서명날인을 벌였던 서울법대생들은 15일 다시 학생총회를 열어 한·일회담 반대를 성토한 후 5 일 간의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서울법대성토대회에서는 “정부는 왜 한 · 일회담을 서두르고 있나”라는 제하의 결의문도채택하였다.
한편 시위가 계속 확산되자 14일 오후부터 수도경비사령부 예하 대대가 서울 중심부로 이동을 시작했다. 국방부 당국자는 이 부대이동을 앞으로의 시위사태에 대비키 위한 것이라 밝혔다. 이 한 가지만 보더라도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는가를 알 수 있다.
앞서 기술한 대로 4·13시위에 참가했다 부상당한 동국대 김중배는 외부에서 가해진 타박상으로 인한 두개골 골절상으로 사망했다. 이에 16일 동국대생들은 김중배 군 위령제를 지낸 후 2천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내에는 수경사 병력2개 대대가 투입되어 시위를 진압하였다. 한편 광주에서도 전남대생 400여 명이 대학 본관 현관 앞에 연좌하여 “제적학생 즉시 복학 안 시켜주면 총학장은 사퇴하라”는 요구조건을 내걸고 농성에 돌입했으며, 건대생 2천여 명도 회담 반대시위를전개했다.
16일 오전 11시 서울상대생 100여 명은 교정에서 성토대회를 가진 후 선언문, 결의문을 채택하고 50여 명이 단식농성에 돌입했고, 11 시 반경에는 연세대 정법 대학생 400여 명이 강의실에서 임시 학생총회를 열고 8개 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또한 경희대생 1천여 명도 같은 시간 교시탑에 모여 대일굴욕외교 성토대회를 가지고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통해 구속학생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경희대생들은 또 정당인에게 보내는 메시지와 “정부는 정당한 여론을 경청하고 한·일 가조인을 철회하라”는 등 6개 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건국대 500여 명도 법정대 강당에서 성토대회를 개최했다(16일 데모 연행자 466명, 4명 구속).
가조인 반대투쟁이 점점 확산되어가고 동국대생 김중배 사망사건으로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는 양상을 보이자, 문교부는 16일 오후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정상수업이 어려운 서울시내 고교 이상의 학교는 4월 말까지 학교 책임자의 재량으로 임시휴교토록 하라”고 각 대학과 서울시 교육위에 긴급 지시했다. 이에 따라 4월 15 일 이후 단식농성에 돌입한 서울법대가 16일 휴강한 데 이어, 서울시내 대부분의 대학들이 임시휴교에 들어갔다. 임시휴교에 들어간 학교는 동국대(16~ 30), 서울사대(17~22), 서울법대(16~22), 연세대(19일 하루) 등이었고, 서울시내 65개 고등학교도 휴교에 들어갔다.
이러한 기운데 17일 서울대에서는 15일부터 단식농성에 들어간 학생 39명이 유기천 법대학장의 요청에 의해 동대문서에 연행된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단식농성 학생 중 주동자로 알려진 12명은 4월 24일자로 무더기 무기정학 처분되었다. 한·일협정 반대투쟁은 스승이 제자를 경찰에 인계하는 사태로까지 비화되어 학생들은 정부와 문교부, 경찰과 학교 딩국의 압박을 이중삼중으로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임시휴교령과 데모학생들에 대한 탄압이 끊임없이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반대투쟁은 계속 고조되었다. 4월 17일에는 ‘대일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 위원회’가 주최한 굴욕외교반대 시민궐기대회가 4만여 시민이 참가한 가운데 효창운동장에서 열렸다. 대회 후 시민들과 학생들은 경찰과 충돌했는데 이날 경찰은 페퍼포그와 최루탄으로 진압하다 결국 1 개 중대의 군대와 2대의 헬기까지 동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날 시위로 민정당 김영삼·고흥문·양희수, 민주당의 김대중·한건수 의원 등이 화상 또는 파편상을 입었고, 14명이 구속되었다.
또한 17일에는 서울시내 3개 고교생 3천여 명이 시위를 벌였다. 오전 8시쯤 배재고교생 700여 명은 ‘평화선 사수하자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구속학생 석방을 외치며 서소문, 시청 앞을 지나 중앙청 앞까지 데모했다. 중앙청 앞에 출동한 700여 명의 기동경찰관과 대치한 이들은 약 3분 간 연좌데모를 벌이다가 경찰의 제지로 학생 일부는 숙명여고 쪽으로 빠지고 약 300여 명은 시청 앞으로 밀려오다 경찰에 의해 오전 8시 40분쯤 해산당했다. 보성중고교생 700여 명도 “구속학생 석방하라”는 성토대회를 열고 9시 교문을 나서 ‘사쿠라 향기에 무궁화 시든다’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혜화초등학교 입구까지 나와 경찰과 대치, 30분 간 연좌데모를 하다 최루탄을 쏘는 경찰에 밀려 9시 30분에 해산했다.
정부는 4·17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19일 오전 공화당 이병희 의원 외 30인의 이름으로 ‘4·17 폭동사태에 관한 대정부 질문’을 하기로 했다. 뒤이어 19일 오전 군 당국자는 “앞으로 전국 각처에서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심해질 경우, 만약경찰력으로 시위를 막기 어려울 때 경찰의 요청이 있으면 수도경비사 병력 외에도 군에서 지원해주도록 결정했으며, 이는 위수령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라고 초강경 진압을 예고했다.
한편 정부가 ‘대일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를 불법단체로 규정한 데 반발하여 투쟁위원회 대변인은 “시민의 평화적시위를 난동으로 모는 것은 국민탄압을 위한 소위 비상사태의 조작적 행동으로밖에 볼 수 없다”라는 요지의 반박성명을 냈고, 민정당도 “애국학생 김중배 군을 타살한 경찰은 백만 학도와 국민의 분노는 아랑곳없이 단말마적 행동을 계속하고 있다”며 정부를 성토했다. 민주당도, “4·17사태는 데모저지가 아니라 가공할 살인적 보복조치였다. 현 정국을 6·3사태로 몰아 투위의 평화적 시위를 폭도시하고 투위를 불법단체화하려는 저의에서 꾸며진 연극과 같다”라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19일 오전 11시 서울문리대생 300여 명은 교정에 있는 4·19기념탑 앞에서 추도식을 가진 후 12시부터 유족 5명을 앞세우고 묵념데모를 하다 이화동 입구에서 대기중이던 경찰과 대치했다 . 제주에서도 300여 명이 시위를 벌이다 15명이 연행되었다. 20일 정오에는 서울대생 150여 명이 문리대 4월혁명기념탑 앞에서 ‘한·일회담을 백지화하라’, ‘강압적 휴교로 학원을 유린 말라’는 등의 플래카드를 내걸고 성토대회를 개최히여 선언서와 6개 항목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오후 1시 30분경 일장기를 태우고 해산했다. 이날 서강대생 500여 명도 성토대회를 개최했으며, 전북대생 300여 명도 성토대회를 개최했다.
4월 21 일 오전 9시 50분쯤에는 부산수산대생 약 200여 명이 한·일회담 반대성토대회를 개최한 후 ‘펴 없는 어장에 어업근대화 필요 없다’는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10시 50분경 교문을 나와 데모를 시작했다. 경찰은 이들 중 15명을 구속했다. 4월 22일 오전 10시경에는 경북대문리대 학생 200여 명이 ‘구속학생 석방하라’, ‘휴교조치를 철폐하라’는 등 플래카드를 들고 구호를 외치며 데모에 들어가 경찰저지선과 부딪쳐 세 차례에 걸쳐 충돌했다. 4월 26일에는 대구 계성고교생 1,500여 명이 데모를 하다 70명이 연행되었고, 이날 외대생 300여 명과 신학대학생도 데모를 하였다.
이와 같이 임시휴교조치에도 아랑곳없이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가던 때에 정부는 시위학생에 대해 현역 징집영장을 발부했다. 관인과 발행번호, 발행 날짜까지 없는 징집영장은 명백한 학원탄압이었다.
이렇듯 1965년 4월은 64년의 한 · 일회담 반대투쟁의 열기가 다시 한 번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시기였다. 지방에서의 전남대 3월 31일 투쟁과 서울에서 의 서울법대 4·10데모를 계기로 본격화된 학생들의 한·일협정 반대투쟁은 서울시 각 대학 및 지방대학뿐만 아니라, 초급대학과 서울과 지방의 각 고등학교까지도 침여하며 전국적인 양상으로 발전되어갔던 것이다.
65년 5월은 그 어느 때보다 학원의 자율성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된 때였다. 서울대를 비롯한 각 대학과 고등학교까지 시위관련 학생의 처리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대개 주동학생에 대한 엄혹한 처별로 이어졌다. 4월에 본격화되기 시작한 한·일협정 반대투쟁은 5월의 학원탄압을 경과하고 6월에 접어들면서 더욱 고조되었다. 특히 6월 22일의 한 ·일협정 정조인을 앞두고 진행된 서울법대의 200시간 단식농성은 65년 한·일협정투쟁의 절정이라 아니할 수없다.
5월 들어 첫번째 대규모 시위는 4일 오후 1만여 시민이 침여한 가운데 개최된 부산시민궐기대회였다. 부산시민궐기대회에서 한·일회담 즉시 중지, 김·오히라 메모의 백지화, 한·일회담 반대시민에 대한 탄압 중지, 매국외교가 중지될 때까지의 투쟁전개 등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문을 채택한 시민들은 대회가 끝난 후 데모를 벌여 약 200여 미터 진행되었으나 경찰의 제지를 받아 해산되고 말았다.
이어 5월 6일 오전 10시 20분에는 광주고교학생 1천여 명이 중간교사 첫 시간을 마친 뒤 교정에 모여 한·일회담 반대 성토대회를 열었다. 성토대회를 마친 학생들은 교문을 나서 데모에 들어가 경찰과 맞서 투석전을 벌였으나 11명이 연행되면서(이중 2명 구속) 해산되었다. 7일 오전 8시 20분경에는 광주 숭일고교생 2천여 명이 한·일회담 반대데모에 들어가 애국가를 부르며 시내로 나와 8시 40분 도청 앞까지 이르렀으나 경찰기동대의 제지로 220여 명이 연행 (2명 구속)된 뒤 해산되었다.
8일에는 광주시민궐기대회가 완전무장한 군인과 경찰의 경계태세로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약 3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광주공원에서 열렸다. 1시 반경 강연이 끝나고 데모를 벌이려던 일부 군중이 광주공원 앞 광주교에서 이를 저지하려는기동경찰대와 대치하여 한때 투석과 최루탄 발사로 긴장된 사태를 이루었다. 5월 12일 오전 8시쯤에는 목포고교생 1천여 명이 한·일굴욕외교 반대구호를 외치며 약 30분 간 데모를 했다. 경찰은 데모학생 700여 명을 연행하였다.
5월 18 일 서울대법대, 사대, 문리대에서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있었다. 이에 학교측이 20일 하루 휴강조치를 취하자 법대생들은 한·일회담 문제를 떠나 학원자유 수호와 경찰의 학원사찰 즉각 중지 및 4월 24일의 학생징계에 대한 부당성을 문제삼아 학생총회를 열었다 . 이날 학생총회는 ‘학원자유수호 궐기대회’의 이름으로 대정부 경고문을 채택하고 맹휴결의와 함께 정부 및 학교 당국에 5개 항목의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학생들이 맹휴를 결의함에 따라 20일과 21일 학교측의 긴급 교수회의를 열어 학칙 42조에 의거하여 맹휴 주동학생 2명을 무기정학, 20명을 유기정학, 13 명을 근신 처분하는 등 모두 35명을 처벌했다.
서울대만이 아니라 서울시내 각 대학 당국도 연발하는 학생시위 관련학생 처리문제를 놓고 부심하였다. 이에 문교부는 6·3 계엄령 선포 이후 학원 내 정치활동, 수업빙해 등을 징계사유로 학칙에 삽입 개정하도록 각 대학에 지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