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학생운동사

제1부, 제 3장 한 · 일회담의 내용과 쟁점(1)

63동지회 2024. 1. 26. 14:32

제 3장 한 · 일회담의 내용과 쟁점

      한 · 일회담은 과거의 청산과 앞으로 있을 양국관계의 근본 테두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일본측은 관할권과 관련해서 ‘휴전선 이북까지 통치권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입각해서’ 한·일회담에 임했다.  반면에 한국정부는 “반공유대를 강화한다”는 명분 아래 한 · 일회담을 진행했다.
      기본관계에 대한 한 · 일 양국간의 근본적 견해차는 국가적 이해관계의 설정을 서로 다른 차원에서 보는 데 연유한 것이었다.  한국으로서는 국체 성립의 토대요 생명선 격이며 ‘국시’로 삼아온 반공을 강조한 데 대해 일본은 이를 한낱 외교 흥정의 대상으로 취급했던 것이다.

      1. 기본관계

      논의의 초점은 첫째,  양국간의 과거관계를 청산하는 문제,  둘째,  한반도에 있어서의 대한민국의 관할권의 문제,  셋째, 기본관계를 조약의 형식으로 할 것인가 공동선언의 형식으로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과거관계 청산문제 

      한국측은 과거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일본의 사과와 침략과정에서 강제로 체결되었던 모든 조약과 협정의 무효를 명문화하자고 주장했다. 일본측에서는 구조약 및 협정들01 이미 그 법적 효력이 없어졌으므로 구태여 따질 필요가 없으며,  과거의 교훈으로 양국의 상호번영을 위해 협력하는 것이 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대한민국의 관할권문제


      이러한 상반된 입장은 재일교포 북송문제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나는데,  일본은 북한과 교포북송 협정을 체결하여 1967년까지 약 88,000명의 조총련계 재일동포를 북송했다.

   기본관계의 표현형식

      일본은 이 문제에 대해 구태여 조약의 형식을 취할 필요는 없고 공동 선언으로 하자고 주장했다.  이같은 주장의 저의는 일본 국회의 비준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곧 일본 민족 1억의 의사로 구조약을 무효화하고 대한민국을 승인하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반면 한국측은 국회의 비준을 받아야 하는 조약의 형식을 주장했다.  한 ·일회담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거한 것이므로 당연히 준평화조약의 성격을 지녀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위의 세 가지 문제 가운데 형식상의 문제는 기본조약으로 이루어짐으로써 한국의 입장이 관철되었으나 나머지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똑같은 조문을 놓고 한·일 양국이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과거관계 청산문제에서 협약은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양국 국민관계의 역사적 배경과 선린관계와 주권상호존중의 원칙에 입각한 양국관계의 정상화에 대한 상호 희망을 고려하여(중략) 1910년 8일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과거의 제국주의 통치관계를 영원히 청산한다는 의미의 구절이 전문에 단 한마디도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특히 제2조에서는 ‘이미’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이 사용되었는데,  한국정부는 이 제2조에 의히여 1910년 8월 22일 체결된 한·일합방조약과 그 이전에 체결된 모든 구조약과 협정 등이 각각 그 서명일로부터 무효라고 표현한 것이고, 이를 일본이 과거에 대한 사과를 표명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반면 일본정부는 한·일합방조약은 1948년 8월 15 일의 정부 수립과 더불어 무효로 되는 것이며, 결코 소급하여 무효로 할 수 없다고 해석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 통치기간 중 일본이 행한 것은 합법적 행위이므로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관할권에 관한 문제에서도 양국정부는 해석상의 견해차이를 드러냈다. “제 3조 대한민국정부가 국제연합총회의 결의 제 195(ill)호에 명시된 바와 같이 한반도에 있어서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확인한다”는 조항에 대해 한국정부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헌법 제 3조에 명시되어 있는 것같이 한반도 전역과 또 이에 속하는 도서이며, 이것이 일본과 관계를 맺는 데 있어서 한 일간의 기본관계조약에 의하여 제약되지 않을 것이며, 또 될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현재 이북에 괴뢰집단이 불법적으로 점거하고 있음은 하나의 사실상의 상태에 지나지 않으며, 이것은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라고 하여, 대한민국의 관할권이 한반도 전역에 미친다는 것을 충분히 확인하였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이를 확인한 이상 북한의 불법성을 일본이 시인한 것이며,  이에 따라 북한과는 어떠한 공식관계도 수립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반면 일본정부는 이 조항이 한국의 관할권이 한반도 전체에 미친다는 것을 일본이 인정한 것이 아니며,  일본은 국제연합의 회원국가로서 국제연합 총회의 결의에서 표명한 한반도에서의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것만을 인정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북한과의 외교관계도 국제연합의 결의사항에 의거,  이에 어긋니는 관계는 수립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시이나 외상은 일본 중의원에서 “적어도 일본은 38선 혹은 휴전선 이북에 사실상의 정권이 있다고 하는 점은 의식하고 있음을 차제에 표명합니다”라고 발언하여 대한민국의 관할권이 휴전선 이남에 한한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여,  북한과도 정치·경제적 교류를 계속하겠다는 것을 암시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한·일협정의 근본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인 기본관계에 관한 논의는 7차회담에 와서야 합의를 보았다.다시 말해 가장 중요한 기본관계가 다른 문제들이 모두 타결을 본 후에 형식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7차회담은 한·일굴욕회담에 대한 반대투쟁이 전국민적으로 확대되어 한 차례 회담이 중단된 후인 1964년 10월에 재개되었는데,  이는 곧 당시 한·일 양국의 국민들이 주장하던 양국의 올바른 관계의 수립이라는 요망이 어떠한 형태로든 명문화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한 압력이 7차회담에 작용한 결과라고 해석된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애매하게 처리되기는 했지만 기본관계 조항이 이 정도나마 이루어진 것은 한·일굴욕회담을 반대한  6 ·3 학생운동의 압력의 결과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