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학생운동사

제1부, 제 2장 한 · 일 굴욕회담의 경위(3)

63동지회 2024. 1. 25. 18:53

제 2장 한 · 일 굴욕회담의 경위

      3. 김종필 · 오히라 메모와 한 · 일회담의 급진전


     5 .16쿠데타 직후인 1961년 7월 19일 박정희 의장은 기자회견에서 “한·일관계가 지금까지 부자연한 상태로 계속되어온 것은 두 나라에게 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혁명정부는 한 · 일회담을 연내에 일괄 해결할 방침으로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군사정권의 이런 입장은 이미 쿠데타 발발 6일 후인 5월 22일 김홍일 외무부 장관이 공식 기자회견을 통히여 “일본은 우리나라와 여러 가지로 관계가 있는 국가이므로 정상적인 국교수립을 위한 우리의 생각과 노력은 변함이 없다”라고 한·일교섭에 대한 입장을 최초로 표명함으로써 나타나기 시작했다.
     군사정권은 이 뜻을 주일대표부를 통해 일본측에 전달하고 일본측의 이해를 얻기 위해 7월 5 일 군사정권의 대외 친선사절단을 일본에 제일 먼저 파견했다.그러나 이때까지 일본은 미국측 반응을 살피며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다.
     회담재개를 위한 양국간의 접촉이 이루어지던 8월 15일 군사정권은 경제개발계획을 입안하고 외자도입을 교업하기 위해 교섭단을 구미로 파견했다 . 이와 동시에 8월 30일에는 김유택 경제기획원장관을 일본에 보내어 이케다 수상을 고사카 외상 및 자민당간부, 재계인시들과 접촉하여 회담의 주요안건인 청구권문제와 어업문제에 관해 일본측의 의향을 타진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회담에 임하는 한 · 일 양국의 입장은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박정희정권은 경제개발계획의 자금원을 확보하기 위해 회담에 매우 적극적이었고 그만큼 조급하게 서둘렀던 반면,  일본은 지금까지와는 달리 여유 있는 입장에서 회담에 임하게 되었던것이다.
     이러한 양측의 회담 태도는 9월 20 열린 예비회담에서 단적으로 나타났다. 군사정권의 ‘열의’에 비해 소극적인 모습을 보인 일본의 태도로 인해 거물급 대표를 통한 정치교섭으로 현안을 일괄 타결하려던 군사정권의 의도가 실패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실상 실무급 회담으로 격하되어버린 상태에서 1961년 10월 20일 배의환과 스기를 수석대표로 하여 회담이 열렸다.
     회담이 열린 지 4일 후인 10월  24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양국 원수의 직접회담을 통해서 현안을 일괄 타결할 속셈으로, 박정회 의장의 방일초청을 주선하기 위해 일본에 들렀다. 김종필의 제의를 수락한 이케다 수상은 11 월 2 일 스기 대표를 방한시켜 박정희 의장을 일본에 초청했고,  1961년 11월 11일 박정희 의장은 도미길에 일본을 들러 이케다와 회담하기에 이르렀다.  이 회담 후 일본의 고사카 외상은,  ① 한·일문제,  아시아문제,   세계 정세 전반에 대해 의견을 교환히여 대부분의 점에서 합치를 보았으며,  ② 진행중인 한·일회담 타결을 위해 계속 쌍방이 최대한 성의를 갖고 추진 노력하기로 일치를 보고,  ③ 현재의 현안 외에 한·일간의 장래문제에 대해서도 금후 격의 없는 의견을 나누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청구권문제에 대해서는 법적 근거가 있는 것에 한 해 지불한디는 제한적 입장을 밝혔다.
    박정희 의장 역시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한국측으로서는 대일청구권은 전쟁배상의 성격을 갖는다는 생각이 아니라 확실한 법적 근거에 의거해 요구하고 있다. 청구권문제에 대해 일본측이 어느 정도 성의를 보이는가가 한·일회담 타결의 주요 변수이나 이 문제에 대해서도 탄력적인 자세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힘으로써 한·일회담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실무급 회담에서는 여전히 청구권 액수,  평화선문제,  독도문제 등으로 교착상태를 면치 못했다. 그리하여 교착상태를 뚫기 위해 무언가 정치적 조치가 필요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1962년 9월 15일 박정희 의장은 “긴박한 여러 정세를 고려하여,  한·일문제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양국의 정치가는 어느 정도 국민으로부터 비난을 각오하고서라도 강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이례적으로 매우 강력한 입장을 표명했다. 박정희의 입장표명이 있은 직후인 10월 20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은 박 의장의 친서를 갖고 세번째로 일본을 방문했다. 그는 이케다에게 박정희의 친서를 전달한 다음,  오히라 외상을 방문하여  2시간 동안 비밀회담을 가졌다. 워싱턴에서 러스크 국무장관, 해리먼 국무차관보,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 맥스웰 테일러 합참의장,  메콘 CIA장관,  국방성 정보관계자 및 FBI 당국자와 만난 김종필은 다시 11월 11일 저녁 동경에 도착하여 오쿠라호텔에서 재일교포가 주최하는 만찬회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지금처럼 성숙한 한·일회담 추진의 기회를 다시 놓칠 수 없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비난하더라도 꿋꿋이 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유익하다면 이 기회에 한·일회담을 결단코 성공시키겠습니다.  한·일회담은 아무리 좋은 방향으로 추진해도 국민이 비난하리라는 점을 각오해야 합니다. 정권이란 4년마다 달라질 수도 있고, 또 일본도 이케다정권이 언제까지나 계속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양국의 국교정상화는 누구의 정권에도 관계없이 해나가야 합니다. 나의 이런 신념은 미국에 다녀와서 더 한층 강해졌습니다"
     12일 김종필은 외무성 의장실에서 2차 김· 히라 회담에 참석했는데,  회담의 핵심은 청구권 액수였다. 이 자리에서 두 사람은 각자 생각했던 액수와 조건을 써서 교환했는데,  이것이 바로 ‘김·오히라 메모’였다.


김종필의 메모
     1. 청구권은 3 억 달러(무상공여 포함)로 하되 6년 분할 지불한다.
     2. 장기저리 차관도 3 억 달러로 한다.
     3. 한국의 대일무역 청산계정 4천6백만 달러는 청구권 3 억 달러에 포함하지 않는다.


오히라의 메모
     1. 청구권은 3억 달러까지 양보하되 지불기한은 12년으로 한다.
     2. 무역계정 4천6백만 달러는 3 억 달러 속에 포함한다.
    3. 차관은 청구권과 별도로 추진한다.


메모는 즉석에서 조정되어 다음과 같이 합의되었다.
     1. 무상공여로 3 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간은 단축시킬 수 있다. 내용은 용역과 물품 한·일 청산계정에 대일부채로 남은 4천 5백 73만 달러는 3 억 달러 중에서 상쇄한다.
     2. 해외경제협력기금 차관으로 2 억 달러를 10년에 나누어 제공하되, 그 기간은 단축시킬 수 있다. 7년 거치 20년 분할 상환, 연리 3분  5리(정부차관).
     3. 수출입은행 조건차관으로 1억 달러 이상을 제공한다.  조건은 케이스에 따라 달리한다. 이것은 국교정상화 전이라도 실시할 수 있다{민간차관).


     회담 후 김종필은 “평화션을 만고불변의 생명선처럼 생각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의미하며,  어민의 이익문제를 놓고 볼 때 그다지 손해될 것은 없다. 평화선에 대한 국민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은 조국의 근대화라는 대의에 입각해 역적이라는 욕을 먹더라도 불식시키겠다”고 말함으로써 평화선을 양보할 생각임을 시사했다. 그러나 막상 실무 토의에 들어가자 역시 어업문제가 난관으로 나타났다. 1962년 12월 어업규제에 관한 입장을 상호 제시했으나 해결되지 못하고,  1963년에 들어서면서 민정이양을 위한 한국 내의 정치적 상황으로 회담은 일단유보되었다.
     민정이양에 성공한 박정희는 1964년 1월 6일 정부·여당수뇌회의를 소집하여 한·일 본회담에 특명 전권위원 자격의 대표단을 보내어 한·일협상 일괄 타결 계획을세웠다.
     한편 드골 프랑스정부가 중국을 승인한 이틀 후 봉쇄정책 강화의 필요성을 긴박하게 느낀 미국은 국무장관 러스크를 한국에 보내 다음과 같은 요지의 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 한 · 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은 한 · 일 양국뿐만 아니라 전 자유세계의 이익에 공헌할 것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는 한편, 한 · 일관계의 정상화로 군사및 경제원조에 영향을 받지 않고,
     2. 한국방위에 충분하고도 강력한 한국군 및 미군을 유지하고,
     3. 한국경제가 가일층 발전하기 위해서는 경제원조가 계속 요청될 것이다.


     러스크 방한 후 한·일교섭은 더욱 활발히 진행되었고,  일본측도 태도를 변화하였다. 이케다는 내각의 운명을 걸고라도 한 · 일 국교정상화를 꼭 실현시키겠다고 언명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3월 초에는 한국측에서도 제3공화국의 흥망을 걸고라도 회담을 타결시키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이리하여 마지막까지 난항을 겪은 어업협정문제에 단안을 내릴 수 있는 실권자의 결정이 필요하게 되어 김종필은 3월 20일 밤,  일본 국내에서 반대시위가 진행되는 가운데 일본으로 건너갔다
     23일 김종필은 오히라 외상과 회담하여 4월 초 외상회담 개최,  4월 20~25일 사이에 한·일관계 협정초안을 마무리하고 5월 초에 조인한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타결 직전 제3공화국의 대일회담 자세를 비판적으로 보던 한국민의 분노가 폭발하자 회담은 일시 중단되었다.  3월  6일 민정당·민주당·자유민주당·국민의 당 등 전 야당이 연합하여 ‘대일저자세 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어업 평화선 사수,  40마일 전관수역 규정,  재산청구권 15억 달러와 배상금조 12억 달러 합 27억 달러 제시,  청구권액 중 피해보상액 12억 달러는 일본이 10년 간 15억 달러치의 한국상품을 수입해간다면 제하겠다고 주장했다.
     투쟁위원회의 유세와 더불어 3월 24일 학생들이 대일굴욕외교 반대시위를 시작했다. 이들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연좌시위를 하면서 일본의 경제침략과 이에 부응한 매판자본가들을 규탄하는 한편, ‘매국정상배인 김종필의 귀국’을 요구하고,고김·오히라 메모의 공개를 요구하였다. 시위는 서울과 지방의 각 대학 및 고등학교까지 번져 반정부적 색채를 띠면서 정국을 위기 속으로 몰아넣었다.
    이에 정부는 김종필을 소환했으나 정국은 계속 혼란스러웠다.  일본 역시 같은 문제로 중의원에서 질의가 있었고,  김·오히라 메모가 안건으로 부상하는 등 한·일 양국 정부는 상당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국회에서는 김준연 의원이, “박·김종필 라인이 일본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고 폭로히여 김종필, 김준연 양자가 서로 외환죄, 무고죄로 고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며,  학원가에서는 소위 불온소포 사건이 터져 정국은 계속 뒤숭숭하였다.
     1964년의 6.3 데모로 인하여 6월 3일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정부는 결국 회담을 통한 정식교류를 일단 뒤로 미루고,  시급한 경제문제의 해결을 위해 경제협력을 선행시킴으로써 정상화 분위기를 조성하자는 ‘선교류 후체결’ 방향으로 선회했다.  이에 일본도 호응하여 2천만 달러 상당의 원자재와 보수 기계를 연불방식으로 한국에 제공하겠다고 수락했다.
     한편 베트남과 라오스의 분쟁이 격화되고 중공이 핵실험에 성공하자 초조감을 느낀 미국은 윌리엄 번디 차관보를 일본과 한국에 보내 한·일회담의 조속한 타결을 거듭 촉구하였다.  9월 29일 번디는 시이나 외상,  오우다 차관 등 외무성 수뇌들과 회담하고 한·일 국교정상화에 미국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10월 2일 정일권 국무총리, 박정희 대통령 등과 회담한 후 다음과 같은 요지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1. 미국은 한 · 일 국교정상화 후에도 대한국 경제원조를 계속하고,
       2. 한국의 자립경제와 재정안정을 위하여 두 나라가 계속 협조하며,
       3. 대한국군 원조에 있어 미국은 미국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다.


     한편 신임 사토 수상은 11월 10일 기자회견에서,  한·일문제 해결과 대중공 정책의 수립이 사토 정권의 2대 과제라고 밝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한·일 양국은 12월 3일 7차회담을 열 것에 합의했다.


     7차회담의 현안문제는 다음과 같다.
      ① 기본관계는 그 형식을 공동선언과 조약 중 어느 것으로 하느냐와 내용에 있어 영토규정을 독도 북한까지 포함하느냐의 여부, 
     ②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로 영주권 부여기준을 국교정상화 조약 발효시로 하느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시로 하느냐, 그리고 강제퇴거 사유를 어느 정도로 압축하느냐와 교육·사회보장을 어느 정도로 하느냐의 여부,
     ③ 어업 및 평화선은 제주도를 포함하는 직선기선 방식을 택하느냐,  또는 제주도를 본토와 분리해서 기선을 긋느냐,냐제주도 서북방과 동북방의 고등어장을 한국의 전관수역으로 하느냐 또는 한 · 일공동 규제수역으로 하느냐와,  일본어선의
출어척 수를 계산함에 있어 현재를 기준으로 삼느냐 또는 1958년을 기준으로 하느냐,  그리고 강목,  어선톤수,  광력,  어구 등의 제한문제와 어업 협력자금의 액수 문제 등.


     7차회담은 1964년 12월 3일 김동석 주일대사와 다카스키를 수석대표로 하여 열렸고,  1965년 새해가 되면서 야당,  학생 국민들의 반대가 심화되는 가운데 급진전했다.
     2월 17일 시이나 외상이 방한하고 다음날 1 차 한 · 일 외상회담이 개최되어 기본관계는 곧 가조인되고, 무역통상관계 협의를 위해 3월 초 무역각료급 회담을 열고,  어업협상은 농상회담을 통해 해결한다는 원칙을 합의했다.
     19일의 2차회담에서는 기본관계, 어업문제, 경제협력관계, 무역회담문제, 재일교포의 법적 지위문제, 선박· 화재 반환문제 등 전반적 현안에 대해 의견교환을 나누었고,  그 다음날인 2월 20일 다음과 같은 한 · 일 기본조약이 가조인되었다.


      제 1 조 양 체약당사국 간에 외교 및 영사관계를 수립한다. 양 계약당사국은 대사급 외교관계를 지체없이 교환한다. 양 체약당사국은 또한 양국정부에 의히여 합의되는 장소에 영사관을 설치한다.
     제 2 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제 3 조 대한민국정부가 국제연합총회의 결의 제 195(III)호에 명시된 바와 같이 한반도에 있어서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확인한다.


      2월 20일 임시국무회의는 한·일 기본관계 가조인안을 승인했다.  3월 3일부터는 평화선과 어업문제해결을 위한 양국 농상회담이 열렸는데 여기서는 다음의대강이 확정되었다.
      1. 규제수역 안에서의 일본측 연간 어획량을 15만 톤 플러스 10퍼센트로 확정한다.
      2. 원 아카기 시안보다 조금 나은 선에서 제주도 주변의 일본어선 금어수역을 설정한다.
      3. 한국 전관수역 밖에서의 단속은 기국주의로 한다.
      4. 규제수역에서의 일본어선 입어척 수는 실적을 인정한다.


     3월 24일 어업회담이 타결을 보자 3월 말 한·일 외상회담에서 일괄 가조인을 할 수 있도록 마지막 손질이 이루어졌다. 가조인이 이루어지자 격렬한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청구권자금 사용문제, 기국주의, 독도 영유권문제 등에 대해 마지막으로 정리가 있은 후,  6월 22일 마침내 조약이 정조인되었다.
     한 · 일협정 조인은 일본 수상관저에서 한국정부 수석 전권대표 이동원 외무 장관과 일본정부 수석대표 시이나 외상 및 수행대표들이 30여 개의 협정안 및 부속문서에 서명함으로써 끝났다.  조인 후 박정희는 조인 지지 성명을 발표했고 8월 14일 오후 임시국회에서 민주공화당 소속 의원만이 참석한 가운데 재적 111 명 중 찬성 110, 기권 1로 회담 개시 14년 만에 비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