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제 2장 한 · 일 굴욕회담의 경위(2)
제 2장 한 · 일 굴욕회담의 경위
2. 3차 회담의 파국과 4차 회담의 재개
2차회담이 결렬된 지 100여 일 만인 1953년 10월 6일부터 3차회담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종용에 의해 마지못해 회담재개에 합의한 한국측에게 회담을 중지시킬 수 있는 좋은 구실이 생겼다. 1953년 10월 15일 제2차 청구권 소위원회에서 양국 대표간에 오고간 발언이 그것이었다. 이른바 구보다 망언이 터진 것이다. 이날 구보다는 회의석상에서 다음과 깉은 요지의 발언을 했다. ①연합국이 일본국민을 한국 본토로부터 송환시킨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②대일강화 조약체결 전에 한국이 독립국가를 수립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③일본인의 구재한(舊在韓) 재산을 미군정령 33호를 적용시켜 처리한 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④ 36년 간 일본이 한국을 점령한 것은 한국민에게 유리했다 . ⑤한국민족의 노예화 운운의 차이로선언은 연합국의 전시 히스테리로부터 나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한국측은 즉각 망언의 취소를 요구했으나 일본측이 이를 거부하자 그대로 퇴장해버리고 말았다.
3차회담이 구보다 망언으로 결렬된 후 1958년 4차회담까지 한 · 일간에는 공식적인 접촉이 없었다. 그러나 억류자 상호석방과 4차회담 재개를 위한 준비접촉은 꾸준히 계속되었다.
1956년으로 접어들면서 일본측의 태도에 구체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3월 일본 수상 하토야마는 을사보호조약 무효선언과 특시를 한국에 파견할 용의가 있음을 언명했고, 시게미쓰 외상도 구보다 망언을 취소하고 재산청구권문제를 타협하자는 뜻을 밝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56년 4월 2일 시게미쓰 일본외상과 김용식 공사 사이에 회담이 이루어져 다음 사항이 합의되었다.
① 한국정부는 억류 일본인 중에서 형기 종료자를 송환한다.
② 한국정부는 전후 일본에 밀입국한 한국인을 인수한다.
③일본정부는 오무라수용소에 수용중인 한국인으로서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자는 해외로 추방하지 않고 국내에 석방한다.
그러나 이러한 진전에도 불구하고 막상 위와 같은 방침하에서 1956년 4월 20일 억류자 상호석방을 위한 회담이 개최되자, 한국정부는 구보다 망언 철회와 청구권문제를 즉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워 회담은 다시 결렬되었다.
4차회담은 1958년 4월 15일부터 1960년 4월 15일까지 계속되었다. 이 4차회담은 주요의제와 관련해 아래와 같은 3시기로 구분된다.
제 1 기 1958년 4월 15 일 ~ 12월 19 일
제 2 기 1959년 8월 12일 ~ ll 월
제 3 기 1960년 4월 15 일
1957년 2월 25 일 수상이 된 기시는 이른바 만주인맥의 거두로서 일본정계에서 지한파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는데, 그는 퇴임 후에도 박정희정권과 매우 밀착해 한국정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기시는 이시바시내각의 외상으로 있을 때부터 한국측이 제안한 구보다 망언 철회 및 일본의 청구권 폐기문제를 결말짓고 억류자 상호석방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취임과 동시에 “필요하다면 김용식 주일공사와 회담도 하겠고, 정치적 결단도 내리겠다”는 적극적인 견해를 표명했다.
그러나 4년 6개월 동안 중지되었던 회담에 한국측이 태도를 바꾼 데에는 미국의 영향력도 작용되었다. 이는 1960년 3월 26일 이승만의 85회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경무대를 찾은 한 · 일회담 관계자에게 한 이승만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알 수있다.
“저쪽 생각도 대강 알았으니 더 기다려봐야 뭐 큰 것이 나오겠나? 그리고 미국 친구들이 한 · 일문제의 미해결로 극동정책을 못 세운다고 야단이니 그런 입장도 무시할 수만은 없어"
4월 15 일 재개된 4차회담에 즈음하여 기시 수상은 ‘初心不可忘’(초심불가망)이란 휘호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는 한편, 사죄사절로서 개인 특사자격으로 일본 우파의 거물인 야쓰기를 경무대로 보내 이대통령에게 90도 절을 하게 하는 등 보기드문 공손한 자세를 보임으로써 부산에 억류된 일본 어부를 석방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 이어 3차 , 4차 송환도 5월 28일 완료되었고, 그 답례로 한국 문화재 106점이 일본정부로부터 반환되기도 했다.
4차회담은 한 · 일 양국이 서로 X댄의 권리를 주장했던 재산청구권위원회를 한국측이 주장한 한국청구권위원회로 변경했고, 어업위원회도 한국측이 주장한 어업 및 평화선위원회로 변경해 일본측 주장이 일보 후퇴된 채 끝났다.
그러나 교포북송문제 때문에 한 · 일 양국은 다시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8월 12일 허정과 사와다를 양측 수석대표로 하여 개최된 회담에서 한국은 북송문제와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문제에 초점을 맞췄으나 14일 북송희망자 제 1진 975명이 청진을 향해 떠나자 회담은 곧 결렬되었다.
잠시 중단된 4차회담은 유태하와 사와다를 양측 수석대표로 하여 4월 15일에 재개되었으나, 한국의 4,19혁명으로 이승만정권이 붕괴됨으로써 등쁨 만에 중단되었다.
1960년 윤보선이 대통령에 취임하고 장면내각이 발족된 하루 후인 8월 24일 정일형 외무부장관은 신외교방침을 발표하여 대일외교개선을 표명했다. 일본측 또한 적극적이어서 고사카 외상이 전후 최초의 공식 친선사절로 방한했으며, 10일 히순부터 5차회담의 예비회담을 열기로 하고, 일본이 총선거를 치르는 11월 후에 본회담을 열기로 합의했다.
5차회담은 한국측이 유진오 고려대 총장을 수석대표로 하고 일본은 사와다를 수석대표로 하여 동경에서 열렸다. 5차회담에서 한국측은 청구권문제에 중점을 둔 데 비해 일본은 어업문제에 비중을 두었다. 유진오와 사와다의 다음과 같은 대화에서도 당시의 상황은 잘 나타나고 있다.
유진오 청구권문제는 결국 일본정부의 정치적 결정으로 해결될 것이니 속히 해결해달라. 평화선문제는 한국의 여론과 국민감정문제가 있으며, 또 평화선내 수산자원이 한도에 달했으니 해결하기 극히 힘들게 되어 있다. 기본방침만을 정하고 뒤로미루자.
사와다 솔직히 말해서 모든 문제는 일본이 양보해야 할 성질의 것인데, 한국이 양보해야 할 것은 평화선뿐이므로 적어도 청구권과 평화선을 한꺼번에 해결해야 한다. 청구권만을 먼저 하고 평화선을 뒤로 한다는 것은 절대 반대한다.
5차회담에서 일본은 청구권문제에 대해 일정 금액의 경제원조 방법을 제시하면서, 이때까지의 수천만 달러 선상에서 청구권조로 6억 달러의 경제협력안을 제시하였다. 이 6억 달러 금액에 대해선 미국과 일본이 사전 합의를 보았다는 소문이 이전부터 외교가에 퍼져 있었으며, 이는 후일 김종필·오히라 메모의 6억 달러 경제협력 액수의 윤곽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1961 년 3월로 접어들면서 종래 원칙상 대립했던 문제들 중 특히 재일한국인의 법적 지위문제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진전을 보았다. 또한 일본 자민당은 기시 전 수상과 이시이를 중심으로 한 · 일관계의 조속한 정상화를 목표로 하는 한국문제간담회를 설치하고 방한의원단을 서울에 보냈으며, 이세키 아시아국장도 김용식 외무차관과 회담하여 당시 진행중이던 예비회담을 5월로 끝내고 6, 7, 8월의 정치적 절충을 거쳐 9월에 본회담을 개최해 가을까지 조인할 것에 합의했다. 그러나 재차 무르익은 한 · 일회담은 결국 5 .16쿠데타에 의해 군사정부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